알레산드라 프레골렌트: 루브르 박물관 ━ 마로니에북스 세계미술관 기행 6

 

루브르 박물관 - 10점
알레산드라 프레골렌트 지음, 임동현 옮김/마로니에북스

8 서문
11 파리 루브르 박물관
18 작품들
152 미술관 안내
156 화가 및 작품 색인

 


서문

여러 세기를 거쳐 오늘날에도 변함없는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이 장대한 건축물은 프랑수아 1세에서 나폴레옹, 미테랑의 시기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전설적인 쿠르 카레에서 미래를 선도하는 레오 밍 페이의 유리 피라미드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의 예술적 자산의 상징이자 운명과 결부된 건축물로 여겨져 왔다. 오늘날 사람들의 머릿속에 박물관으로 인식되고 있는 루브르는 본래 세 번째 십지군의 주역이었던 존엄왕 필립에서부터 기사 왕이었던 프랑수아 1세까지 프랑스의 왕이 거주하던 궁전이었다. 프랑수아 1세가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으로 성채를 재건축한 이래, 카트린 드 메디시스, 앙리 4세, 루이 8세, 그리고 루이 13세와 루이 14세에 이르기까지 루브르의 개축작업은 어지러울 정도로 계속되었다. 루이 13세와 루이 14세의 집권기간동안 건축가 클로드 페로가 루브르 개축 작업을 담당할 건축가로 선정되어 ━ 베르니니에게도 설계가 의뢰되었으나 최종적으로 클로드 페로에게 작업이 맡겨졌다 ━ 유명한 콜로네이드와 건물의 동쪽 전면을 건축하였다. 루이 14세는 루브르 궁을 '예술의 성전'이 되도록 만들었다. 그는 1678년 왕궁을 베르사유로 옮기기 위해 루브르의 모든 작업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루브르가 세계적인 대중 미술관으로 탄생한 것은 그로부터 한 세기가 더 지나서이다. 루이 15세의 왕궁 감독관으로 커다란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마리니 후작은 왕실에서 수집한 미술품들을 대중에게 공개하자는 안을 내놓아 일반인들의 커다란 공감을 이끌어냈다. 1750년 뤽상부르 궁전의 일부 홀이 전시실로 사용되어, 110점의 유화, 20점의 스케치와 더불어 마리 드 메디시스의 생애를 주제로 한 루벤스의 유화 연작이 일주일에 두 번, 세 시간 동안 대중 공개를 시작했다. 1755년 마리니의 뒤를 이은 앙기비예 공작 역시 1594년부터 1608년 사이 앙리 4세에 의해 건축된 루브르의 그랑 갈레리를 전시회장으로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미술관을 관통하는 (길이가 거의 500여 미터에 이르는)복도는 당대의 양식에 따라 자연광이 쏟아져 내리도록 궁륭이 개방된 새로운 구조로 탈바꿈했다. 로마 피오클레멘티노 미술관의 개장과 더불어 이 시기 유럽 전역으로 대중 미술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싹트기 시작했고, 이와 동시에 루브르를 대중 미술관으로 활용하려는 계획이 구체화되기 시작했지만, 그것이 실현된 것은 프랑스 혁명에 이르러서였다. 왕을 폐위시킨 프랑스 국민의회는 1792년 9월 27일 이전의 왕립 미술관을 대중 미술관으로 개조하기로 결정했고, 이를 프랑세즈 미술관이라는 애국주의적 이름으로 명명했다. 미술관의 이름은 1796년 중앙미술관으로 다시 바뀌게 된다. (루이 16세가 기요틴에서 목이 잘렸던 해인) 1793년 9월 9일 살롱 카레에 회화 작품들이 전시되기 시작했고, 이후 10년 동안 전 세계에서 방대한 양의 명작들이 입수됨에 따라, ━ 여기에는 돈 많은 미술애호가들이 소유하고 있던 대리석 조각과 나폴레옹의 약탈품, 그리고 '밀로의 비너스' 나 '사모트라키아의 니케'와 같은 고대 그리스의 작품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 1800년부터 그랑 갈레리에 새로운 전시 공간이 마련되었다. 토요일과 일요일 9시부터 오후 4시까지는 대중들이 무료로 입장할 수 있고, 그밖에 다른 날은 루브르의 작품을 본보기 삼아 자신의 예술을 위한 자극과 영감을 얻고자 했던 화가들과 1692년 루브르 궁에 설치된 왕립 회화 · 조각 아카데미를 드나들던 화가들을 위해 남겨졌다. 프랑스 혁명의 민주적 원칙들은 미술관의 조직에도 그대도 적용되어 작품 아래에 해설이 붙게 되었고, 고대 미술에 대한 강연회가 열렸으며, 가방에 휴대할 수 있는 카탈로그가 출판되었다. 나폴레옹의 군대로 전 유럽에서, 특히 이탈리아를 비롯한 남유럽 국가에서 약탈해 온 미술품들이 입수됨으로써 루브르는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컬렉션을 자랑하는 미술관으로 거듭났다. 미술관의 장식과 조직을 담당했던 이들은 모두 하나같이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미술관 내부를 아름다운 풍경화로 장식했던) 화가 위베르 로베르를 비롯해 고대에 관한 한 가장 권위 있는 연구자였던 엔니오 퀴리노 비스콘티, 그리고 또 한 명, 누구보다 루브르를 풍요롭게 만든 장본인으로 미술관 총감독이었던 비방 드농을 빼놓을 수 없다. 화가이자 방탕한 노인이었으며, 시칠리아를 그리고 1802년에는 나폴레옹을 따라 이집트를 여행한 모험적인 여행가이기도 했던 비방 드농은 근대의 미술관 관리위원장과 같은 역할을 담당하여 루브르가 커다란 인기를 얻도록 만들었다. 그리하여 언론들이 증언하듯 오늘날 루브르의 전시실에서는 '작품을 탐스런 눈빛으로 쳐다보며 설명을 요구하고, 깊은 통찰력으로 작품을 평가 혹은 비판하는 수많은 군중들'을 만날 수 있다.  

퍼르난도 마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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