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머시 빌: 계시록과 만나다 ━ 천상과 지상을 비추는 괴물

계시록과 만나다 - 10점
티머시 빌 지음, 강성윤 옮김/비아

들어가며

1. 서론
2. 창백한 기사- 모호한 기원
3. 지금은 종말이 아니다 - 아우구스티누스의 두 도시 이야기
4. 외치고 적으라- 힐데가르트의 종말론
5. 정신의 눈 - 역사의 숲에 선 조아키노
6. 9월 성서 - 루터의 성서 대 크라나흐의 계시록
7. 신들과 괴물들의 새로운 세계 - 다른 종교를 타자화하기
8. 차고 안의 천국 - 제임스 햄튼의 보좌의 방
9. 남겨졌다, 또다시- 복음주의 휴거 공포 문화의 흥망
10. 우리의 일부가 된 계시록

감사의 말
읽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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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서론

23 신약성서 맨 마지막에 자리한 계시록은 요한이라는 남자가 (지금은 터키에 해당하는) 소아시아 서쪽 해안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섬 파트모스에 머물 때 하느님이 자신에게 계시했다고 주장하는 극적이고 종말론적인 환상을 담고 있다. 이 책을 썼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는 요한이라는 사람은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로 끝난 유대로마 전쟁 시작 무렵과 1세기 말 사이에 자신의 글을 가까운 본토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냈다. 그는 폭력이 난무하는 환난과 임박한 하느님의 심판을 묘사하며 이는 현 세상이 절멸함으로써 끝날 것이라고, 인내심을 가지고 하느님에게 충실하게 순종하라고 신자들에게 권고한다. 요한에 따르면 세상이 절멸한 자리에 하느님은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을 세울 것이다. 하느님과 그리스도는 그곳을 모든 천사, 성도와함께 영원히 통치할 것이다. '요한의 묵시록' The Apocalypse of John('감추어진 것으로부터' 또는 덮인 것으로부터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단어 '아포칼립시스'에서 나왔다)이라고도 불리는 계시록은, 하나뿐인 세계의 멸망에 관한 환상 혹은 예측을 담은 책이라기 보다는 두 세계 사이의 경계를 들추어내는 책이다. 이는 한 세상의 끝이자 또 다른 세상의 시작이며, 압도하는 폭력으로 이루어지는 온 세상의 종말인 동시에 압도하는 영광으로 가득한, 죽음도 고통도 더는 없는 새로운 세상의 출발이기도 하다. 사악한 괴물인 붉은 용과 그의 짐승들뿐 아니라 하느님, 그리스도, 그리고 그의 천사들도 이 모든 사태를, 이 모든 충격과 공포를 일으키는 주역이다. 끔찍하고도 희망찬, 꿈꾸는 듯하면서도 역겨운 계시록은 성서 전승에서 까다로운 축에 드는 책이다. 이 책을 빈틈없이 파악하기도 어렵지만, 그렇다고 손에서 놓아 버리기는 더 어렵다. 

성서에서(더 나아가 모든 종교 경전 중에서도) 계시록만큼 많은 사람이 숭배한 동시에 매도한 책은 없다. 많은 사람은 계시록이 예언으로 가득한 전망과 상상의 정점이고 성서 정경의 주춧돌이며 제대로만 읽는다면 창조주, 세계의 과거, 현재, 미래를 알게 해주는 열쇠라고 칭송한다. 그 못지않게 많은 사람은 계시록이 몹시 불안정한 정신을 소유한 개인의 작품이며, 잔혹하고 여성을 혐오하며 폭력을 추앙하는 불안정한 꿈이 담긴 이 문헌은 결코 성서로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했다고 비난한다. 

실제로 사람들은 이 종말론적 문헌을 오랜 시간 읽었을 뿐만 아니라 이 문헌이 경전의 위상을 지니고 있는지, 어떠한 가치가 있는지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기원후 3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디오니시우스는 많은 그리스도교인이 계시록을 "이 책은 무의미하고 터무니없으며 … 모호함이라는 촘촘하고 두꺼운 장막으로 덮여 있다고 단언"하며 거부한다고 보고했다. 『교회사(325년)에서 카이사리아 주교 에우세비우스는 계시록이 양립 불가능한 두 범주에 동시에 속한다고, 어떤 이들은 계시록을 '논쟁의 여지가 없는 책'(의심할 바 없이 그리스도교 정경에 속하는 책)으로 보는 반면 어떤 이들은 계시록을 '논쟁의 여지가 있는 책'으로 본다고 말했다. 367년에 신약 정경 목록을 작성할 때 알렉산드리아 주교 아타나시우스는 계시록을 포함했지만, 동시대인인 예루살렘 주교 키릴루스는 목록에서 제외했다.

천 년이 흐르고 종교개혁 시기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계시록의 지위를 의문시했다. 이를테면 1522년판 신약성서에서 마르틴 루터는 계시록이 영감을 받아 기록되었다는 증거를 전혀 찾을 수 없고 그 내용을 누구도 이해할 수 없으며 "우리에게는 훨씬 좋은 책이 많이 있다"고 적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루카스 크라나흐가 제작한 창의력 넘치는 목판 삽화 덕분에 계시록은 루터 성서 중 가장 있기 있는 책이 되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학자들은 계시록의 사회적, 신학적 가치에 대해 논쟁했고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어떤 여성주의 성서학지들은 계시록이 이성애 중심의 규범에서 벗어난 이들과 여성의 해방, 사회 정의에 기여할 가능성이 없다고 날카롭게 비판한다. 반면 어떤 학자들, 이를테면 엘리자베스 쉬슬러 피오렌자는 당시 사회,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여 계시록의 남성 중심적 언어가 "관습적이고 일반적인" 수사법임을 받아들인다면, 계시록의 서사는 젠더, 성 정체성과 무관하게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해방에 기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티나 피핀, 카롤린 판더 스티홀러와 같은 학자들은 남성적 언어로 성적 폭력을 표현하는 계시록은 당대 가부장적 규범과 여성혐오적 여성 묘사를 반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강화하기에 결코 구제할 수 없는 문헌이라고 주장한다. 

경전으로서 계시록의 지위와 가치에 관한 논쟁은 이후 좀 더 살펴볼 것이다. 지금은 일단 수많은 비판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계시록이 살아남았다는 점,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계시록을 읽었다는 점을 기억해 두자. 계시록 본문을 읽어 본 적이 있든 없든, 많은 사람에게 계시록의 여러 장면, 등장인물 심상은 그리 낯설지 않다. 일곱 개의 봉인, 네 명의 기사, 붉은 용, 태양을 둘러 걸친 여자, 대천사 미카엘, 분노의 포도, 짐승의 낙인, 창녀 바빌론, 재림, 천 년의 통치, 죽은 이들의 부활, 최후의 심판, 생명책, 새 예루살렘 같은 것들 말이다. 좋든 나쁘든 계시록의 도발적인 묘사들은 역사를 통틀어 수많은 예술가, 작가, 지도자, 사회 운동의 종말론적 상상력에 불을 지폈다. 서구인들의 경우 계시록에 의지하지 않고 세계, 혹은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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