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레드 다이아몬드,제임스 A. 로빈슨: 역사학, 사회과학을 품다

 

역사학, 사회과학을 품다 - 10점
제러드 다이아몬드.제임스 A. 로빈슨 엮음, 박진희 옮김/에코리브르

서문(제러드 다이아몬드·제임스 A. 로빈슨)

1 제어된 비교와 폴리네시아의 문화적 진화(패트릭 V. 키르치)
2 폭발하는 서부: 19세기 정착민 사회의 호황과 파산(제임스 벨리치)
3 정치와 금융 그리고 경제 발전: 신대륙 경제의 증거(스티븐 하버)
4 섬 내부와 섬들 사이의 비교(제러드 다이아몬드)
5 과거의 족쇄: 아프리카 노예무역의 원인과 결과(네이선 넌)
6 인도의 식민지 토지보유제와 선거 경쟁 그리고 공공재(아브히지트 바네르지·락슈미 아이에르)
7 앙시앵 레짐에서 자본주의까지: 자연 실험으로서 프랑스 혁명의 확산(대런 아세모글루·데이비드 칸토니·사이먼 존슨·제임스 A. 로빈슨)

후기: 인간 역사 연구에서 비교 방법의 활용(제러드 다이아몬드·제임스 A. 로빈슨)

 


7 앙시앵 레짐에서 자본주의까지: 자연 실험으로서 프랑스 혁명의 확산

275 앙시앵 레짐의 붕괴와 자본주의 부상사이의 연관을 검토하는 데는 '역의 인과성'과 '생략 변수 편향'이라는 가능성 모두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연과학에서는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하나의 실험 수행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유사한 국가들━말하자면 모두 상대적으로 퇴보하는 제도 경관을 지닌 국가들━을 이상적으로 선택해 이들 국가에서 임의로 선택한 부분집합 국가들('실험군')에서 앙시앵 레짐 제도를 제거하고 나머지 국가들('대조군')의 제도는 변화를 주지 않은 채로 남겨두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우리는 이들 두 그룹의 상대적 번영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관찰할 수 있다. 물론, 실제로 우리는 이와 같은 실험을 수행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학자와 사회과학자는 역사가 때로 제공해주는 '자연 실험'을 이용할 수 있다.

자연 실험이란 몇몇 역사적 사건 혹은 사고로 인해 어떤 지역에서는 경제적·정치적·사회적 요인이 변화하고 다른 비교 지역에서는 변하지 않은 채로 남게 되는 상황을 의미한다. 실제로 서로 다른 변화를 경험하는 상이한 지역을 비교할 수 있으면 우리는 변화가 일어난 그룹을 실험군으로 다른 그룹을 이에 상응하는 대조군으로 생각할 수 있다.

앙시앵 레짐의 쇠퇴라는 맥락에서, 1789년 프랑스 혁명에 이은 대부분의 유럽 지역에 대한 프랑스 군대의 침입이 자연 실험으로 이용할 수 있는 제도 변이의 원천을 제공한다. 프랑스 군대는 봉건적 유산, 의무, 특권을 포함한 앙시앵 레짐의 핵심 제도를 폐지했고 길드에 종말을 가져왔으며 법 앞의 평등을 도입했다. 여기에는 유대인에 대한 자유 부여와 교회 토지의 재분배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경제 성장에 대한 몇몇 주요한 앙시앵 레짐 제도의 영향을 추정하는데 이러한 경험을 이용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프랑스 군대의 침입을 통해 제도 개혁을 경험한 유럽 지역을 '실험군'으로, 침입을 당하지 않은 지역을 '대조군'으로 삼았다. 이렇게 함으로써 실험군이 제도를 개혁하기 전후 시기에 이들 두 그룹의 경제적 성과를 비교할 수 있고, 아울러 개혁 그룹이 상대적으로 더 부유해졌는지 조사할 수 있다. 이런 조사를 진행하면, 이로부터 제도 개혁이 상대적 번영을 촉진하는 데 기여했다는 증거를 얻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 실험에 기초한 추론이 유효하려면, 프랑스 군대 침입의 영향을 받은 지역이 침입 이전에 다른 비교지역과 유사한 성장 궤도에 있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무엇보다 프랑스는 미래 성장 잠재력을 근거로 침입 대상을 선택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라인란트는 1789년 이전보다 1815년 이후에 상대적으로 더 빠르게 성장했다는 점을 발견하고 라인란트의 성장이 그곳에서 실행한 프랑스개혁의 결과 때문이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더라도 프랑스가 잠재적 경제 성장성 때문에 라인란트를 병합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 우리는 이 글에서 독일에 초점을 두었다. 독일은 침입 지역과 침입을 당하지 않은 지역 모두를 포함하며 다른 모든 유럽 국가보다 상대적으로 동질적이다. 프랑스의 독일 침공만을 조사함으로써 우리는 역사 및 문화와 제도를 상당 부분 공유하고 있는 한 지역에서 일어난 제도 개혁의 변이를 고려한다. 폴란드와 포르투갈을 비교하는 것보다 바덴과 베르크를 비교하는 것이 훨씬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론 우리의 접근 방법이 갖는 유효성은 독일의 여러 지역이 완벽하게 동질적이라는 데 있지 않다. 절대 그렇지 않다. 핵심 이슈는 무엇이 프랑스 침입과 개혁의 패턴을 추동했는가이다.
  
이 자연 실험을 연구하기 위해 우리는 근대적 국민 계정(national accounts)이 만들어지거나 소득에 대한 정확한 측정이 이루어지기 전인 18세기와 19세기 독일의 여러 상이한 지역 내에서의 경제 발전을 어떤 방식으로든 계산할 필요가 있다. 관심을 끄는 전략은 5000명 혹은 그 이상의 사람이 거주하는 도시 지역 인구 비중으로 측정한 도시화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현대 세계에서 도시화는 1인당 소득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파울 바이로흐와 얀 드 브리스 같은 역사학자들은 농업 생산성이 높고 발달한 수송망을 가진 지역에서만 역사적으로 거대 도시 인구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도시화는 또한 소득의 역사적 수준을 추정하는 과정에서 대용물로 이용되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1759~1910년 동안 독일의 주를 표본으로 도시화 정도에 대한 데이터 베이스를 만들었다.

 

300 현대 역사가들은 여전히 유럽에서 프랑스와 나폴레옹 개혁이 남긴 경제적 유산에 대한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 유산에 관한 공통된 견해 중 하나가 유럽 차원에서 나폴레옹 통치의 중요성은 앙시앵 레짐에서 근대로의 전환 표식을 했다는 데 있다는 알렉산더 그라브의 결론이다. 그렇지만 그라브 자신도 나폴레옹이 야누스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사실, 즉 지역의 귀족 과두제 통치와 공모해 자신의 개혁을 손상시켜버렸다는 사실에 집중했다. 그라브는 이렇게 썼다. "역설적이게도 나폴레옹 자신은 때때로 자기 개혁 정책의 토대를 허물어버렸다. 많은 국가에서 보수적인 엘리트와 타협했으며, 그들이 자신의 최고 지위를 인정하는 한 특권을 보존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역사가들은 또한 이런 행위의 경제적 결과에 대해서도 의견의 일치를 보이지 않는다. 프랑스 내에서도 게오르게 르페브르 와 알프레드 소불 같은 마르크스주의 학지들의 혁명에 관한 독창적인 해석에 따르면, 혁명은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전환 표식이며 따라서 적어도 함축적으로는 더 빠른 경제 성장으로 인도하는 안내인이었다. 코번 조지 테일러, 프랑수아 퓌레는 이러한 해석을 거부하는데, 이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들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혁명이 경제적 함의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믿는다. 첫째, 혁명이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부르주아 혁명은 아니었다는 사실이 혁명에 의해 유발된 제도적 변화가 경제적 성과를 향상시키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둘째, 프랑스는 낮은 농업 생산력 및 실질 임금으로 18세기에 네덜란드나 영국에 비해 가난했다. 경제사학자들은 적어도 이러한 차이의 부분적 원인을 프랑스 앙시앵 레짐 제도 탓으로 돌린다.


304 이 글에서 우리는 앙시앵 레짐과 관련 있는 핵심 제도가 번영을 방해하는지 검증하기 위해 프랑스 혁명에 이은 프랑스 군대의 독일 침입을 이용했다. 그들이 침입한 곳에서 프랑스인은 야심찬 제도 개혁 프로그램을 실행했고 다수의 앙시앵 레짐 기본 토대와 봉건적 경제 제도의 잔재를 없애버렸다. 우리는 이러한 개혁을 실행한 곳이 도시화라는 관점에서 프랑스가 개혁하지 않았던 곳보다 훗날 더 나은 경제적 성과를 지니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물론 이 결과를 해석하는 데는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예를 들면 독일 서쪽 지역은 동쪽에 비해 이 기간 동안 도시화가 덜 진행되었을지라도 이는 우연히(혹은 그럴듯한 계획에 의해—비록 역사적 증거로 뒷받침할 수는 없을지라도) 일어난 것일 수도 있으며, 프랑스 침입을 받은 지역이 다른 이유로 인해 경제적으로 더 나아졌을 수도 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사건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주장한다. 자연 실험이 우리에게 역사 연구나 사회학 연구에서 전형적으로 그런 경우보다 인과 요인에 관해 훨씬 더 정확한 무언가를 말해줄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의 글은 이런 아이디어를 특정 맥락에 적용할 때 무엇이 필요한지 보여주고 실제 사회 현상을 자연 실험으로 간주하기 위해서는 어떤 고려를 해야만 하는지 명시한다. 역사는 이와 같은 잠재적인 실험으로 가득 차 있다. 다만 역사가들이 이런 개념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러한 실험을 체계적인 방식으로 활용하면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변화의 장기 과정을 추동해온 중요한 힘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우리가 프랑스 개혁이 긍정적인 경제 효과를 가져왔음을 주장한 첫 번째 사람은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 글을 시작하면서 인용한 엥겔스의 견해는 학술적 문헌에서 거의 아무런 합의도 보장하지 못한다. 우리가 발견한 것은 결정적이지는 않지만 엥겔스의 해석과 부합하며, 또한 프랑스 혁명의 제도적·정치적 유산에 대한 좀더 구조화한 양적 조사가 더 많은 연구를 요하는 중요한 영역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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