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세계사 분권 특별판 - 전3권 - 알렉산더 미카베리즈 지음, 최파일 옮김/책과함께 |
서문
감사의 말
1장 혁명적 서곡
2장 18세기 국제 질서
3장 1차 대불동맹전쟁, 1792-1797
4장 라 그랑 나시옹의 형성, 1797-1802
5장 2차 대불동맹전쟁과 그레이트 게임의 기원들
6장 평화의 의례들, 1801-1802
7장 전쟁으로 가는 길, 1802-1803
8장 파열, 1803
9장 코끼리 대 고래 : 프랑스 대 영국의 전쟁1,8 03-1804
10장 황제의 정복, 1805-1807
11장 다른 수단에 의한 전쟁 : 유럽과 대륙 봉쇄 체제
12장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쟁탈전, 1807-1812
13장 대제국, 1807-1812
14장 황제의 마지막 승리
15장 북방문제, 1807-1811
16장 사면초가의 제국 : 오스만 제국과 나폴레옹 전쟁
17장 카자르 커넥션 : 이란과 유럽 열강1, 804-1814
18장 영국의 해외 원정, 1805-1810
19장 영국의 동방 제국, 1800-1815
20장 서방문제? : 아메리카 대륙 쟁탈전, 1808-1815
21장 전환점, 1812
22장 프랑스 제국의 몰락
23장 전쟁과 평화, 1814-1815
24장 대전쟁의 여파
옮긴이의 말
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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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나폴레옹 전쟁이 프랑스 혁명전쟁과 합쳐서 23년간 이어진 단일한 갈등을 이룬다는 해석이 받아들여진 지는 오래다. 이 갈등 속에서 프랑스는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유럽 열강의 여러 동맹들에 맞섰고, 유럽 대륙 대부분에 잠시나마 헤게모니를 수립했다. 1792년과 1815년 사이에 유럽은 전환과 격랑에 빠져들었다. 프랑스 혁명으로 정치적 · 사회적 · 문화적 · 군사적 변화의 봇물이 터져 나왔다. 나폴레옹은 그 변화들을 프랑스 국경 너머로 확대했다. 뒤 이은 투쟁의 규모와 강도는 어마어마했다. 유럽 국가들이 민간과 군사 자원을 이 시기만큼 총력적으로 동원한 적도 없었다. 더구나 이것은 강대국들 사이에 벌어진 진정한 지구적 규모의 힘겨루기였다. 나폴레옹 전쟁이 전 지구에 걸친 최초의 분쟁은 아니다. 그러한 영예는 윈스턴 처칠이 유명하게 최초의 '세계대전'이라고 이름 붙인 7년 전쟁에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나폴레옹 전쟁은 그 규모와 충격에서 다른 모든 유럽 분쟁을 압도한 전쟁이고, 19 세기 당대인들에게는 '대전쟁Great War'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유럽 내부의 경쟁관계로 촉발되긴 했지만 나폴레옹전쟁은 식민지와 무역을 차지하기 위한 전 세계적 투쟁으로 이어졌고, 규모와 범위, 강도면에서 역사상 최대의 분쟁 중 하나를 대표한다. 프랑스의 헤게모니를 달성하고자 노력하는 와중에 나폴레옹은 간접적으로 남아메리카 독립의 원인 제공자가 되었고, 중동 지역을 재편했으며, 영국의 제국적 야심을 강화하고, 미국세력의 부상에 기여했다.
혁명 프랑스는 1792년 봄부터 전쟁에 휘말려 들었다. 처음에 프랑스인들은 혁명이 이룩한 것을 수호하고자 했는데 전쟁이 이어지면서 그들의 군대는 혁명의 결과들을 이웃 나라들로 퍼뜨렸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이 권좌에 부상하면서 프랑스의 전쟁 목표는 부르봉 왕조 치하에서 목격했던 영토팽창과 유럽 대륙에서의 헤게모니라는 더 전통적인 정책들로 회귀했다. 코르시키섬의 빈한한 이탈리아계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보나파르트는 프랑스 군사학교에서 공부한 뒤 1785년에 프랑스 포병대의 중위로 임관했다. 귀족적 뿌리에도 불구하고 그는 혁명을 환영했으니, 혁명은 외딴 변경 출신의 젊은 대위가 전에는 상상하지 못했을 출세의 전망을 눈앞에 펼쳐 보였다. 새로운 혁명 군대에서 고속 진급한 그는 1796년에 이탈리아를 침공하는 프랑스 군대의 통솔권을 부여받아 북이탈리아를 확보했을 뿐 아니라, 국경 너머로 프랑스의 팽창을 저지하려는 최초의 시도였던 1차 대불동맹전쟁의 종식에도 일조한 빛나는 승리를 연달아 거두었다. 이집트에서 보나파르트의 다음 전역은 목표 달성에 실패했고, 궁극적으로 이집트에서 프랑스 세력의 철수를 초래한 군사적 대실패였다. 하지만 이집트 원정은 결단력 있는 지도자로서 보나파르트의 명성을 높였고, 이는 1799년 11월 그가 프랑스 정부를 전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 시점에 이르자 10년간의 혁명적 격변과 불확실성을 겪은 프랑스인들로서는 확고한 통치와 그것이 약속하는 질서와 안정이 급진적 혁명가들의 이상보다 더 솔깃하게 들렸다.
비록 젊었지만(그는 1799년에 서른 살이 되었다) 재능을 타고난 보나파르트 장군은 권위주의적인 인물임이 드러났다.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뒤 그는 공화국의 제1통령이라는 직함을 취했고, 프랑스를 안정화하는 야심찬 국내 정책을 추구했다. 1800~1804년의 개혁 조치들과 더불어 그 유명한 나폴레옹 법전이 혁명의 근본적 원칙들을 재천명하면서 혁명의 성과들을 공고히 했다. 바로 법 앞에서 모든 시민의 평등, 그리고 재부와 사적 소유의 안전한 보장이었다. 혁명가도 권력에 굶주린 미치광이도 아니었던 보나파르트는 프랑스에 일종의 '민주적 이상들'이라는 외관에 가려진 계몽전제정을 선사했다. 주권은 인민이 아니라 오로지 통치자에게 있었다. 비록 일부 학자들은 그를 '혁명의 자식'으로 묘사하지만 그를 '계몽주의의 자식'이라 부르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보나파르트는 혁명이 흔히 가져오는 혼돈과 혼란, 급진적인 사회경제적 변화에 인내심이 별로 없었다. 그는 프랑스 혁명의 경로를 좌지우지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군중에 대한 멸시를 여러 차례 공공연히 드러냈다. 혁명 대신 보나파르트는 관용과 법 앞에서의 평등, 합리주의와 강력한 정치적 권위를 강조하는 전통 안에서 더 편안함을 느꼈다. 계몽 전제정의 신조에 충실하게, 그는 지신이 믿기에 인민이 필요로 하는 것을 줌으로써 강한 프랑스 국가를 건설하고자 애썼지만 민주공화정을 끌어안거나 주권을 인민의 의지에 넘긴다는 전망은 결코 제시하지 않았다.
1804년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으로 선언된 보나파르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사령관으로 널리 인식되지만, 전쟁 이론에 독창적인 공헌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의 천재성은 앞선 시기의 혁신들과 아이디어들을 종합해 효과적이고 일관된 방식으로 실행하는 능력에 있었다. 1805년과 1810년 사이에 유럽 열강의 세 차례 동맹을 분쇄한 뒤 나폴레옹의 프랑스는 에스파냐의 대서양 연안선에서부터 완만하게 오르내리는 폴란드 평원까지 뻗은 대륙의 지배 세력으로 떠올랐다. 그 과정에서 프랑스 군대는 유럽에 중요한 변화들을 촉진했다. 이런 점에서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 정치가 클레멘스 벤첼 폰 메테르니히가 언젠가 묘사한 대로 "혁명의 체현"으로 인식될 수도 있겠지만 그 호칭은 이데올로기적 관점보다는 실제적인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집권한 뒤에 나폴레옹은 그의 이전 시절을 특징 지은 급진적인 이데올로기적 열의를 잃었다. 하지만 프랑스를 무찌르기 위해 유럽 군주정들은 어쩔 수 없이 개혁 노선을 취하고, 더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제, 군사 개혁, 국왕의 신민에서 시민으로의 전환, 국민의 권리 의식을 고취하면서 한편으로 그들의 애국적 에너지와 열정을 외적 격퇴라는 방향으로 돌리는 것과 같은 프랑스의 혁명적 유산에서 나온 요소들을 취사선택해야 했다.
나폴레옹 전쟁을 혁명적 투쟁들의 지속으로만 인식해서는 안된다. 그보다는 18세기 전쟁의 맥락 속에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1803년과 1815년 사이 유럽 열강은 거듭하여 전통적인 국가 목표를 추구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주요 상수가 있었다. 하나는 새로운 국제 질서를 창출하고, 그리하여 헤게모니적 권력을 수립하려는 프랑스의 결연한 의지였다 이 시각에서 볼 때 나폴레옹의 정책들과 그에 대한 유럽의 대응은 루이 14세의 치세와, 프랑스의 팽창주의를 억제하고 유럽 내 아슬아슬한 세력 균형을 보존하려는 대동맹 Grand Alliance(아우크스부르크 동맹이라고도 한다. 프랑스에 맞서 영국, 네덜란드, 오스트리아가 주축이 되어 결성했고, 1689년부터 1714년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의 종결 때까지 유지되었다)과 공명한다. 프랑스 혁명은 나폴레옹 전쟁에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제공했지만 이전의 경쟁관계들로부터 기인한 지정학적 쟁점들을 지우지는 못했다.
다른 상수는 장기간 지속된 프랑스-영국 경쟁관계로, 사태의 추이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는 공식적으로 영국과 20년 동안 (1793년에 개시되어 240개월) 전쟁 상태로 지냈으니, 오스트리아(1792년에 개시되어 108개월)나 프로이센(역시 1792년에 개시되어 58개월), 러시아(1798년에 개시되어 55개월)와의 전쟁보다 훨씬 더 오랜 기간이다. 더욱이 1792년과 1814년 사이에 영국은 국가 부채가 세 배 증가했고, 6500만 파운드라는 어마어마한 액수를 나폴레옹에 맞선 전쟁을 원조하는 데 쏟아부었다. 아닌 게 아니라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은 이따금 제2의 백년전쟁으로 묘사되어온 것, 즉 1689년과 1815년 사이 명예혁명과 그로 인해 쫓겨난 제임스 2세에 대한 프랑스의 지지로 시작되어 프랑스의 제국적 꿈과 함께 워털루에서 막을 내린, 영국과 프랑스가 치른 기나긴 전쟁의 새로운 국면이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전의 갈등들처럼(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에 덧붙여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과 7년 전쟁이 있었다) 두 열강은 유럽만이 아니라 남북아메리카 대륙과 아프리카, 오스만제국, 이란, 인도, 인도네시아, 필리핀제도, 지중해와 인도양에서 지배권을 두고 다투었다.
영국은 결연한 의지(와 능력)로, 프랑스에 맞서 단 하나의 맹방도 없이 여러 해 동안 혼자였을 때조차도 나폴레옹에 대한 한결같은 대립을 이어갔다. 그러나 영국은 전 유럽적인 제국을 건설하려는 프랑스 황제의 시도를 억지하고자 하는 폭넓은 동맹의 한가운데 있었다. 동맹 하나가 깨지기가 무섭게, 런던은 급속히 확대되는 무역 네트워크와 산업 성장에서 나오는 이윤 덕분에 재정적으로 뒷받침되는 새로운 동맹을 결성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영국과 프랑스 간의 대결은 사실상 제국 건설 과정에서 벌어진 두 사회 간의 투쟁이었다. 프랑스는 유럽 대륙에서 주변국의 정부들을 위협하고 어르고 윽박질렀고, 영국도 지구적인 상업 제국을 건설하고 보호하기 위해 자국의 경제력과 해군력을 이용해 똑같이 그렇게 했다. 1799년에 영국의 한 고위 관리가 단언한 대로였다. "우리의 주요 노력이 적의 식민지 속령들을 빼앗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은 우리 나라의 광범위한 전시 활동에 적용되는 공리로 정립되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적들의 힘을 약화하는 동시에 우리 해상력의 유일한 기반인 상업적 자원들을 증대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은 지난 200년 동안 역사가들을 바쁘게 만들었다.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에 관해서만 수천 권의 책이 쓰였으며, 그 책 더미에 나폴레옹의 전역, 정치, 외교는 물론 나폴레옹의 맹방과 적들에 관한 책들까지 추가하면 분명히 수십만 권에 달할 것이다. 지난 10년 사이에도 10여 권이 훌쩍 넘는 새로운 나폴레옹 전기를 비롯해 다수의 신간이 나왔다. 어지간한 도서관의 책장은 나폴레옹전쟁을 다룬 서적의 무게로 삐걱거릴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의 이야기는, 그 시기를 나폴레옹의 삶에 대한 배경이나 유럽 내에서 띄엄띄엄 전개된 동맹 전쟁들을 연구하는 수단으로 보는 전통적 접근에서 다루어진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는 것이 나의 확고한 신념이다. 물론 나폴레옹 시대 군대들과 외교에 관한 방대한 연구━폴슈뢰더의 《유럽 정치의 전환》은 이 장르의 가장 훌륭한 사례 가운데 하나다━가 존재하지만 다루는 범위가 여전히 유럽에 국한되어 있다. 유럽 너머로 범위를 확대한 소수의 연구들은 전적으로 프랑스-영국의 경쟁관계라는 틀 안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외부의 사건들은 거의 고려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더 근래에는, 예를 들어 영국 역사가 찰스 이스데일이 "범유럽적 차원을 반영하며, 프랑스중심의 관점에 그치지 않는 나폴레옹 전쟁 역사서"인 《나폴레옹의 전쟁: 국제사, 1803,,..._,1815》를 썼다. 하지만 다시금 그의 초점은 확고하게 유럽에 맞춰져 있다.
나의 의도는 1792년과 1815년 사이에 유럽에서 벌어진 일들이 나머지 세계로부터 고립된 채 펼쳐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의 역사를 확대하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1789년에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퍼져 나간 진동은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이 진정으로 전 지구적인 반향을 낳았다는 사실을 가리는 경향이 있다. 아우스터리츠, 트라팔가르, 라이프치히, 워털루는 모두 나폴레옹 전쟁의 표준적인 역사서에서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하지만 그 장소들과 더불어 우리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뉴올리언스, 퀸스턴하이츠, 루세, 아슬란두즈, 아사예, 마카오, 오라바이넨, 알렉산드리아도 함께 논의해야 한다. 아르헨티나와 남아프리카로 파견된 영국 원정군과 이란과 인도양에서의 프랑스-영국의 외교적 책략, 오스만 제국에 대한 프랑스-러시아의 공작, 핀란드를 둘러싼 러시아-스웨덴의 힘겨루기를 다루지 않고는 이 시기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이 이야기들도 주변부에 머무르기보다는 그 의미의 핵심을 찌르기 때문이다.
나폴레옹 전쟁에 지구적 맥락을 제공한다는 것은 그 전쟁이 유럽 대륙 내부보다는 해외에 훨씬 더 장기적 영향을 주었음을 드러낸다. 결국 나폴레옹은 패배했으며, 그의 제국은 유럽의 지도에서 지워지지 않았던가? 하지만 같은 시기에 인도에서는 영국의 제국 세력이 공고해졌으니 이 같은 사태 전개에 힘입어 19세기에 영국은 지구적인 패권국가로 등장할 수 있었다. 이 제국 건설 과정은 인력과 자원의 막대한 투입을 요구했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에서 반도전쟁으로 죽은 영국인보다 더 많은 영국인이 서인도제도와 동인도제도에서 산발적으로 전개된 전역 기간 동안 죽었다. 영국의 팽창만이 이 시기에 지구적 관련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19세기 초에 러시아는 핀란드와 폴란드, 북동태평양에서 식민지적 계획을 추구했던 한편, 오스만제국과 이란을 희생시켜 발칸반도와 캅카스지역에서 팽창을 도모했다. 대서양 세계 한군데에서만 나폴레옹 전쟁은 이미 자리 잡은 세 유럽 제국과 신생 공화국 미국이 저마다 영토를 보전하고, 경쟁국을 희생시켜 자국 영토를 확대하려고 작정하면서 활발하게 경쟁하는 모습을 목도했다. 미국은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 영토를 구입하면서 국토가 두 배 이상 늘어났고, 1812년 전쟁으로 영국에 도전했다. 카리브해에서 프랑스 혁명은 대서양 연안에서 일어난 노예반란 가운데 가장 중대한 반란인 아이티 혁명을 불러왔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1808년 나폴레옹의 에스파냐 점령이 독립운동을 자극해 에스파냐 식민 제국을 종식시키고, 그 지역에 새로운 정치적 현실을 창출했다. 이슬람 세계에서도 중대한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었으니, 오스만 제국과 이란에서 발생한 정치적 경제적 · 사회적 격변은 "동방문제Eastern Question" 라는 고민거리의 토대를 놓았다. 이집트에서는 1798~1807년 영국과 프랑스의 침공으로 메메트 알리가 부상하고 19세기 나머지 기간 동안 중동 문제를 규정지을 강력한 이집트 국가가 궁극적으로 출현했다. 남아프리카, 일본, 중국, 인도네시아도 유럽의 세력 투쟁이 야기한 효과를 피해가지는 못했다.
더 개인적 차원에서 보자면, 20년 넘게 나폴레옹 시대 역사를 공부하고 가르치면서 나는 이 분야에 대한 국제적 시각이 시급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어떤 사건들은 종결된 지 한참이 지나서까지도 반향을 일으키는 결과를 낳는다는 가차 없는 진실을 역사는 가르쳐주는데, 우리가 논의할 이 시기가 분명하게 예시해주는 바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세계 여러 지역은 저마다의 발전 경로를 밟게 되었고, 전쟁이 없었다면 프랑스 혁명 자체는 대체로 유럽의 사안으로 남아서 외부세계에 제한된 영향만 미쳤을 수도 있다. 하지만 프랑스의 야심과 그 야심을 좌절시키려는 유럽의 시도들이 이어지면서 전쟁은 저 멀리 세계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가게 되었다. 어느 미국 역사가가 평가했듯이 "어느 정도는 의도적으로, 어느 정도는 본의 아니게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을 유럽과 세계 역사에서 결정적 사건으로 만들었다."
이 책의 내용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1789년 프랑스혁명의 시작부터 1799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의 집권까지의 혁명기를 개관한다. 이 부분은 추후 사건들에 대한 배경을 담고 있는데, 선행하는 10년간을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나폴레옹 전쟁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여러 사건들이 전 세계적으로 동시에 펼쳐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하여, 시간 순서대로 또 지리적으로 구성했다. 이 부분은 1801~1802년 동안 유럽의 일시적 평화로 시작하여, 혁명전쟁의 결과로 프랑스가 획득한 것을 공고히 하려는 나폴레옹의 시도들과 그에 대한 유럽의 대응을 살펴본다. 8장과 9장은 종국적으로는 나머지 유럽 대륙 전체를 집어삼키게 될 갈등으로 터져나오는 프랑스-영국의 긴장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이하의 장들에서는 서유럽과 중유럽에 맞춰진 전통적인 서사에서 초점을 옮겨 스칸디나비아와 발칸반도, 이집트, 이란, 중국, 일본, 남북아메리카 대륙과 같은 다른 분쟁 지역들을 살펴보고, 나폴레옹전쟁이 얼마나 멀리까지 도달했는지를 실증한다. 세 번째는 나폴레옹 제국의 몰락을 추적한다. 이 시점에 이르러 나폴레옹 전쟁은 아시아에서는 거의 해소되었으므로 서사의 초점은 유럽과 북아메리카로 이동하여, 나폴레옹의 패배와 빈 회의의 소집으로 막을 내린다. 결론에서는 전쟁 이후의 세계를 폭넓게 둘러본다.
이 과제를 떠맡는 과정에서 나는 불가피하게 대단히 선별적일 수밖에 없었으며, 이 책에 포함되지 않거나 길게 논의되지 않는 내용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선택들이 이 책의 메시지를 약화하지 않길 바라며, 나폴레옹전쟁과 거기서 싸웠던 사람들이 왜 그리고 어떻게 전 지구에 걸쳐 사태의 추이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드러내주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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