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연구회: 시민의 한국사 1 - 전근대편
- 책 밑줄긋기/책 2023-25
- 2023. 3. 8.
시민의 한국사 1 - 한국역사연구회 지음/돌베개 |
책을 펴내며
제1편 선사
제2편 고대
제3편 통일신라·발해
제4편 고려
제5편 조선
시각자료 소장처 및 출처
왕위 계보도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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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선사
문자 기록이 없는 선사시대인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를 다룬다.
인류의 기원은 대략 700~600만 년 전으로 소급된다. 현생 인류의 조상인 호모사피엔스는 약 2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7만 년 전 무렵 아프리카에서 유럽 · 아시아· 아메리카 등으로 퍼져나갔다.
두 발로 엉거주춤 설 수 있었던 고인류는 아득히 오랜 기간 생물학적 진화를 거듭하며 오늘날의 인간과 닮아갔다. 두 발로 걷기 시작하면서 손이 자유로워졌고,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점차 정교해진 손가락 움직임은 두뇌 발달에도 영향을 미쳤다. 손으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과 불을 사용하는 것은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 짓는 특징으로 자리잡았다.
사냥과 채집은 집단으로 이뤄졌고, 일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소통하는 과정에서 언어가 발달했다. 인간은 석기로 동물을 사냥해 고기를 먹고 가죽을 이용했으며, 견과류를 부수거나 동물 뼈를 깨어 골수를 꺼내 먹기도 했다. 도구를 사용하면서 먹거리의 종류가 늘었고, 영양섭취도 골고루 할 수 있게 됐다.
농경은 획기적 변화를 가져왔다. 인간이 오랜 기간 한 곳에 머물러 살 수 있고, 식량을 확보할 수 있게 되면서 인구가 늘고 마을이 생겼다. 토 기는 식량의 보관과 저장, 조리를 가능하게 했다. 음식물을 익혀 먹으며 인간은 소화력이 높아졌고 영양소를 더 잘 흡수했다.
그러나 거친 자연환경 속에서 인간 개인은 여전히 나약한 존재였다. 무리 지어 이동생활을 하던 단계나, 정착해 농사짓는 단계에도 삶을 이어가려면 집단을 이뤄야 했다. 노동과 분배가 공동으로 이뤄졌고, 개인이 무언가를 소유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선사시대는 계급이 분화하지 않은 평등한 사회였다. 다만 그 평등은 목가적 이상이 아니라 굶주림과 결핍에 늘 노출되어 있는 불안정한 것이었다.
제2편 고대
고조선이 성립하는 청동기시대부터 고구려·백제·신라 등이 자웅을 겨루는 삼국시대까지를 다룬다.
만주와 한반도 지역은 기원전 15~12세기에 청동기시대로 진입했다. 금속기의 사용으로 농경이 발달하면서 인구가 늘어났고, 각지에 스스로 '하늘의 자손'이라 일컫는 정치 세력이 등장했다. 씨족을 중심으로 하는 원시사회가 무너지고, 계급관계에 바탕을 둔 고대사회가 시작된 것이다.
고조선은 이러한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성립해 요동-서북한 지역을 아우르며 중국의 전국시대 연나라와 대결할 정도로 성장했다. 기원전 3세기 초에 연의 공격을 받아 서방 영토를 크게 잃었다가 위만이 정권을 잡은 다음 세력을 회복했지만, 기원전 108년에 한나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고조선 옛 땅은 한의 군현으로 편입되고, 그 외곽에서 부여 · 고구려 · 옥저 · 동예 · 삼한 등이 성장했다. 이 가운데 부여 · 고구려는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고대 국가로 발돋움했지만, 옥저 · 동예는 한의 군현이나 고구려에 예속됐고, 삼한은 3세기 중반까지도 수십 개의 소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4세기 이후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급변하는 가운데 만주와 한반도 정세도 바뀌었다. 고구려가 낙랑군 · 대방군을 점령하는 등 영역을 크게 확장했고, 마한 백제국과 진한 사로국이 주변 소국을 병합하면서 백제와 신라로 각각 성장했다. 고구려 · 백제 · 신라가 국경을 맞대며 자웅을 겨루는 삼국시대가 열린 것이다.
고조선에서 삼국시대에 이르는 한국 고대사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한반도뿐 아니라 유라시아 대륙과 맞닿은 만주를 무대로 역사를 전개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고대 국가들은 중원 지역과 일본 열도뿐 아니라 멀리 몽골초원이나 중앙아시아 나라와도 교섭하며 국제적인 문화를 꽃피웠다.
한국 고대사의 또 다른 특징은 각국의 정치적 발전 시기가 동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고대 정치체제는 연맹체나 부체제에서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로 전개됐다. 고구려와 백제는 4~5세기에 중앙집권체제를 정비했지만, 신라는 부체제 단계에 머물다가 6세기 이후 비로소 중앙집권체제를 갖췄다.
제3편 통일신라·발해
신라의 삼국통일과 통일신라시대, 발해의 건국과 멸망까지를 다룬다.
7세기에 들어서면서 삼국 사이의 대결이 총력전으로 치닫는 한편, 고구려는 중국을 통일한 수 · 당 제국과 여러 차례 큰 전쟁을 치렀다. 위기를 벗어나려던 신라가 당과 연합해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켰다. 그러나 당이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 들자, 신라는 7년간 전쟁을 치른 끝에 당군을 몰아내고 대동강이남을 차지했다.
통일 이후 무열왕의 직계 자손이 왕위를 계승한 1세기 남짓한 기간에는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이 이어졌다. 석굴암 · 불국사로 대표되는 높은 수준의 문화와 예술도 꽃피웠다. 그러나 8세기 말 이후 진골 귀족 사이에서 왕위 다툼이 잦아지며 신라의 지배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9세기 들면서 자연재해가 거듭되자 농민의 생활이 악화됐고, 중앙정부의 관리 · 통제 능력에 한계가 드러났다.
신라사회를 서서히 무너뜨린 구조적 모순도 있었다. 골품제 사회에서 진골이 정치권력과 경제적 특권을 독점하면서 두품 신분과 뚜렷이 구분됐다. 6두품 이하는 관직 승진에 신분별 상한이 있었고 사회생활에도 제약이 따랐다. 또 지방인의 관직 진출이 막혀 있었으므로 왕경인과 지방인의 반목은 깊어졌다.
지방인의 불만이 쌓여가던 상황에서 9세기 말에 일어난 농민 봉기는 전국을 약탈로 인한 혼란과 전란으로 이끌었다. 각지에서 등장한 호족들이 중앙정부로부터 이탈해 자립했고, 이들을 아우르며 힘을 키운 견훤 · 궁예가 새왕조를 선언하면서 후삼국 시대가 열렸다.
한편 7세기 말에는 만주 지역에서 고구려 유민이 발해를 세웠다. 발해 왕은 스스로를 '고려국왕'이라 일컬으며 계승의식을 드러냈고, 당 · 일본과 활발히 교류하며 2세기 가량 번성했다. 발해와 신라의 공식관계는 우호적이지 않아서 때로는 경쟁하기도 했지만, 동해안 육로로 교역과 왕래가 이어졌다.
신라가 쇠퇴해 후삼국으로 분열된 시기에 중국도 당이 멸망하고 5대 10국이 교대하는 격동을 겪었다. 이 무렵에 북방에서 일어난 거란족의 공격을 받아 발해는 멸망했다. 그 이전부터 발해인의 고려 망명이 이어졌는데, 멸망 이후에 더 많은 유민이 고려로 집단으로 이주했다.
제4편 고려
10세기 초 고려 건국부터 14세기 말 조선 건국 전까지를 다룬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통합성과 공공성을 높이기 위한 정책을 폈다. 지방 세력을 포섭하는 한편 과거제도를 도입해 능력 중심으로 관인을 선발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높아진 민의 위상과 확대된 사회적 분업 상황을 고려해 수취제도와 신분·계층질서를 마련했다. 또한 초기에는 태봉의 제도를 보완해 쓰다가, 건국한지 약 60년이 지난 후부터는 중앙의 3성 6부제도와 지방의 주현-속현제도 등 지배체제의 전형을 갖춰 나갔다. 유교 정치이념에 따라 관료제를 강화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전시과제도도 시행했다.
11세기 초 거란의 침략을 막은 후로는 내외 정세가 안정된 가운데 성장했다. 경제가 번영하면서 문화와 예술도 발전했다. 특히 유교 · 불교 · 풍수지리설 등이 서로 배제하지 않고 공존했다. 문화의 다원성을 인정해 외부의 선진문화를 수용하는 데도 개방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고유 문화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자기 정체성을 지켜갔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의 이면에는 지배층이 기득권을 지키려고 힘쓰면서 문벌이 강화되는 양상도 나타났다. 12세기 초부터 사회모순이 드러났고, 여진이 강성해져서 국제 정세도 불안정해졌다. 민의 유망이 심해졌으며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등이 이어지다가 1170년 무신정변이 일어났다. 이후 약 100년간 무신정권이 이어지면서 민의 항쟁이 격렬하게 벌어졌고, 몽골의 침략이 일어나자 이에 맞서 강화도로 천도하고 오랫동안 항전했다.
13세기 중반부터 원의 간섭을 받은 이후로 외압도 더해졌다. 왕이 원 공주와 혼인하고 원 황제가 왕을 폐립했으며 정동행성이 설치됐다. 인사행정의 문란과 농장확대 등의 폐단도 왕의 측근세력과 부원 세력이 득세한 정치 상황과 맞물려 심화됐다. 폐단을 바로잡으려면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 정치를 혁신할 수 있어야 했다. 공민왕대부터는 원이 약화되고 명이 건국해 국제정세가 변하는 가운데 성리학을 공부한 신흥유신이 세력을 키워 개혁을 추진했다.
제5편 조선
조선기 건국된 14세기 말부터 근대 국가가 성립되기 전인 19세기 후반까지를 다룬다.
고려 말의 혼란을 수습한 신흥 세력은 조선왕조를 개창하고 국가체제 전반을 개편했다 중앙집권체제의 강화, 관료제적 지배의 확대, 성리학 질서의 확산이 그 방향이었다. 이를 통해 조선왕조는 장기간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집권 세력의 한 축으로 훈구와 갈등을 겪었던 사림은 16세기 이후 정계를 장악했다 사림 세력은 내부 분화와 붕당 대립을 거듭하면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두 차례의 큰 전쟁을 가까스로 수습했다. 격화된 붕당 대립은 18세기 왕권 강화와 탕평책으로 완화됐으나 19세기에 세도정권이 출현하면서 지배질서는 많은 폐단을 노정했다.
조선의 농업 경제는 고려의 수조권적 지배를 축소·폐지하면서 소유권에 기반을 둔 지주전호제로 전환됐다. 이앙법과 시비법이 발달하면서 농업 생산성이 늘어났으나 조선 후기 인구 증가와 개간의 제약 등으로 토지 소유 규모는 전반적으로 영세화했다. 관청에 예속된 상업과 수공업은 민간 영역이 발달하자 점차 활기를 띠었으며 일부는 국제무역과 연계되어 발전했다.
조선은 양반 중심의 관료제와 신분제를 구축하고 비양반층에 대한 지배를 강화했다. 하지만 양반 내부의 대립으로 관료제가 점차 서울과 노론 중심으로 축소 운영되어가면서 지방 양반 다수의 위상이 하락했다. 반면 경제적으로 성장한 비양반층은 양반과 격차를 줄여나갔다. 그 과정에서 중인들은 통청운동을 벌였고, 일부 평민은 유학으로 성장했으며, 노비제는 해체 국면에 접어들었다. 사상계에서는 다양한 학문적 논쟁을 통해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됐고, 주자가례와 종법이 보급되면서 확립된 부계 가족, 친족 질서는 하층민에게까지 영향을 줬다. 일부 지식인은 사회 개혁과 실학 연구에 관심을 가졌고, 정감록 · 미륵신앙 · 동학을 중심으로 민중사상이 전파되면서 민중들은 다양한 저항운동을 일으켰다. 조선왕조의 지배질서가 탄력을 잃어가는 가운데 새로운 사회 변화의 흐름이 곳곳에서 싹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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