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만: 파우스트 박사 2
- 책 밑줄긋기/책 2023-25
- 2023. 2. 14.
파우스트 박사 2 - 토마스 만 지음, 임홍배.박병덕 옮김/민음사 |
1권
파우스트 박사
2권
파우스트 박사
에필로그
저자의 말
작품 해설
작가 연보
480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제가 계약을 승낙하고 이행하기까지 길을 잃고 외롭게 방황했다거나 악령의 무리들을 많이 끌어들이거나 조악하게 주문이나 외는 짓거리를 했다고 생각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사실 일찍이 성 토마스도 말씀하시길, 악마를 불러내는 주문 따위가 없어도 얼마든지 타락할 수 있으며 악마한테 표나게 충성 서약을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타락한 행동을 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저 한 마리의 나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화려한 색깔의 나비였지요. 나비 이름은 해태라 에스메랄다였습니다. 그 나비가 저한테 접촉해 와서 제 마음을 사로잡았지요. 그 마녀가 말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투명한 나체로 곧잘 찾아가는 어둠침침한 숲 속 그늘로 그녀를 따라갔습니다. 저는 마치 바람에 실려 온 꽃잎 같은 그녀를 낚아채어 애무했습니다. 그녀가 경고했음에도 말입니다. 일은 그렇게 터졌던 것입니다. 그녀는 저를 매혹해서 사랑의 황홀경을 맛보게 해 주었습니다. 그때 저는 악마한테 바쳐졌고 계약이 성립되었던 것입니다."
482 "경애하는 친구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지켜보고 있는 이 사람은 신에게 버림받고 절망에 빠져 있다는 걸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의 주검은 경건하게 죽은 기독교인이 묻히는 거룩한 장소에 묻히지 못하고 짐승들의 시체가 묻혀 있는 들판에 버려질 것입니다. 미리 말씀드리면, 여러분은 그의 주검이 언제나 바닥에 엎어진 자세로 관에 누워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설사 다섯 번 돌려 누이더라도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제가 그 독이 있는 나비한테서 쾌감을 맛보기 오래 전부터 이미 저의 영혼은 교만함과 자만심에서 사탄에게 다가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젊은 시절 사탄의 환심을 사려고 애썼던 것이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만 익히 아시는 바와 같이, 인간은 천당을 갈지 지옥을 갈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미 지옥에 떨어지도록 정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우쭐거리며 할레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습니다만, 그것은 하느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자를 위해서였습니다. 말하자면 나의 신학 공부는 이미 은밀한 유대의 시작이었으며, 하느님에게로 향하는 위장 순례가 아니라 커다란 화를 몰고 올 마귀를 향해 나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사탄을 막을 도리는 없었고, 사탄에게로 가고자 하는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신학을 공부하다가 금방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겨 음악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형식이나 개성, 이른바 주술이나 마법 따위로 불려도 좋을 그런 것들에만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요컨대 저는 절망한 나머지 허튼 짓을 했습니다. 사실 저는 천상에서 선사한 명석한 머리와 재능을 가졌으며, 마음만 먹으면 경건한 마음으로 그 재능을 겸손하게 이용할 수도 있었지요. 그러나 지금 세상에서는 경건하고 고지식한 방법으로는, 정당한 수단으로는 어떤 것도 만들어 낼 수 없으며, 아궁이에서 활활 타오르는 지옥의 불꽃이 없으면, 마귀의 도움이 없으면 예술이 불가능한 시대라는 걷 깨달았단 말입니다······ 친애하는 동료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술은 정체되고 난관에 부닥쳤습니다. 예술은 스스로를 비웃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이 너무나 어려워졌으며, 가련한 인간은 곤경에 처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었습니다. 시대를 잘못 타고난 탓입니다. 그렇지만 만일 누군가가 이런 난관을 극복하고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악마를 손님으로 초대한다면, 그런 자는 자기 영혼을 책망하고 시대의 죄를 자기 목에 건 채 저주받게 되는 것입니다. '깨어 있으라!'라는 말씀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는 깨어 있지 못합니다. 이 지상의 삶이 나아지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영리하게 생각해 내고, 예술 작품이 다시금 삶의 기반과 참된 조화를 획득할 수 있도록 인간들 사이에 질서를 정립하고자 신경을 쓰는 대신에, 오히려 말씀을 어기고 저주받은 열중에 탐닉합니다. 그 대가로 자기 영혼을 내주고 버림받게 되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그런 길을 감수했습니다. 악마를 이용하는 마술과 주문, 독과 마법,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게 될 그런 것들을 일삼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조만간 그자와 대면할 기회가 왔습니다. 무례한 깡패같이 생긴 녀석이었지요. 남유럽 지방의 어느 집에서였지요. 그녀석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지옥의 속성이나 근본, 실상에 관해 많은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리고 그자는 저에게 시간을 팔아먹기로 했답니다. 이십사 년이라는 무시 못 할 시간 말입니다. 이 기한 동안에는 제 시중을 들겠다고 약속을 하더군요. 대단한 성과를 올려 주겠다고 약속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작품을 창조할 능력을 갖추도록 아궁이에 불을 왕창 지피겠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창작의 능력이 그렇게 간단히 생겨날 리 없다는 것쯤은 알았기 때문에 그런 제안에 코웃음을 쳤지요. 어떻든 저한테 그런 능력이 생기는 대신 심한 두통만 참으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어린 인어 아가씨가 사람의 다리를 얻기 위해 그랬듯이 말입니다. 그녀는 저의 누이요, 달콤한 신부였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히피알타였습니다. 그 작자가 그녀를 나의 침대로 데려왔기에 잠자리를 함께 했습니다. 그녀가 물고기의 꼬리를 하고 오든 아니면 사람 다리를 하고 오든 그녀는 점점 더 내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물고기의 꼬리를 하고 올 때가 더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람 다리를 하고 있을 때의 고통이 잠자리의 쾌락보다 훨씬 컸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녀의 부드러운 몸매가 비늘이 돋은 꼬리 부분에서 얼마나 사랑스럽게 흘러내리는지 잘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순수하게 인간의 형체로 나타날 때가 황홀감은 더했습니다. 처로서는 그녀가 사람의 다리로 저와 어울려 줄 때 더 큰 쾌락을 맛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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