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원의 북리스트 | 몽유병자들(마지막)

 

2023.02.13 몽유병자들(마지막)

오늘은 《몽유병자들》 마지막 시간이다. 자기가 읽고 듣고 한 것들은 어딘가에 축적이 된다. 그리고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을, 원전 텍스트를 다시 읽어보면, 꾸준히 어려운 책을 계속 읽으면 안보이던 것이 보고 글의 이치를 느끼게 된다. 오늘은 543페이지 발칸 개시 시나리오, 남성성의 위기, 미래는 얼마나 열려 있었나, 이 부분은 얼마 안되는 분량인데 카드로 만들어 놓아야 하는 부분이 많다.


발칸 개시 시나리오에서 중요한 핵심은 무엇인가. 《몽유병자들》 전체의 내용이 사실 '20세기 읽기'에서 읽고 있는 《나폴레옹 세계사》의 연장선 상에서 만들어진 사건들이다. 제1차세계대전이라고 하는 것이 갑자기 황태자 한 명이 총 맞아서 사망함으로써 벌어진 사건이 아니라 차곡차곡 1789년 이후 즉 1800년부터 1914년까지 100년 간에 걸쳐서 유럽의 세력 균형이, 정말 정신없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 동맹이 되고 오늘날보다 훨씬 더 복잡다단한 세계가 되었다. 그러다보니 100년 간에 누적된 세력 균형들이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있다가 그것이 갑자기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힘이 되었을 때 그래서 사람들은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 이런 분쟁들, 또는 세계대전이 생겨나지 않게 하는 아주 압도적인 힘이 하나 있어서 그 힘이 무력으로 세계를 다스리는게 어떨까 하는 것을 선호하게 되는 것 같다. 《몽유병자들》과 《나폴레옹 세계사》을 연결시켜보면 그렇게 된다. 어찌하다보니 책과 함께 출판사에서 나온 책들을 읽게 되는데, 나오는 책들이 여러 사람과 함께 읽고 싶다는 생각을 불러 일으킨다. 다시말해서 《몽유병자들》을 봐도 그렇고 《나폴레옹 세계사》을 봐도 그렇고 계속해서 동맹과 적국이 바뀐다. 그런 것들을 하나 하나 따라가기 보다는 어떻게 바뀌는가 궁극적으로 그 나라가 1800년 대 이후에 어떤 국가들이 궁극적으로는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가, 결국은 세력이다. 세력을 얻기 위해서 온갖 나쁜 짓을 다 하는게 국가이다. 그것을 마키아벨리는 국가이성이라고 했는데 국가이성이라는 것이 국가가 도덕적인 목적을 추구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 온갖 잔머리를 굴린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듯하다. 1800년 이후 지금까지 200년 동안의 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목표는 이것이다. 그리고 이제 한가지 더 생각해본다면 결국 국가이득을 위해서는 제국이 되려고 한다. 프랑스도 혁명을 일으켰지만 그 대의는, 멋진 이상은 얼마 안가서 사라지고 프랑스 제국을 만들려고 했고, 그것을 표상하고 있는 사람이 나폴레옹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 국민들도 혁명을 일으켰던 사람들은 나폴레옹에 열광하고 지금도 프랑스에서 가장 존경받는 위인이 나폴레옹이 아닐까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철없는 사람들이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더라도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으면 늘 말하지만 우리는 지금 한글을 쓰고 있지 않을 것이다.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워서 중국 대륙을 지배했지만 결국 만주어는 사라졌다. 그런 것처럼 제국이라고 하는 것을 만들려고 하면 제국의 틈바구니에서 부서지는 나라들이 생기는데 결국 1800년 대 이후로 세계 국제관계론을 규정하는 용어가 얼마나 국가 이익이 되는가 그리고 거기에 파생되어 나오는 것으로 empire and nation 또는 nationstate 국민국가라고 하기도 그렇고 민족국가라고 하는 것도 더 안 어울리고 그런데 민족으로  묶으려고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nationalism이라고 그러니까 아예 일본 학자들은 번역어를 민족주의, 국가주의, 국민주의가 아닌 번역어를 하지 않고 내셔널리즘이라고 쓴다. empire 와 nationstate의 그 구도. nationstate를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 nationstate라는 의식을 만들어 내는 것이 어려운데 일찌감치 제국을 경험해 본 나라들은 nationstate의 형성이 수월하다. 그런 점에서는 한반도에 있는 여러 나라들이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에 중국 제국과 붙어있으면서도 중국이 쉽사리 정복하기는 어려운 그런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nationstate의 의식이, 간단히 말해서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내셔널리즘은 굉장히 오래된 연원을 가지고 있고 뿌리고 깊고 그에 따라서 굉장히 강력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에 대해서는 이번주 북리스트 시간에 그것을 가늠해 볼만한 책을 소개해보려고 한다.

 


제6장에서 549페이지를 보면 "신들의 행동은 전적으로 방어적인 것이고 적에게만 공격적인 의도가 있다고 생각했던 까닭에, 핵심 정책수립자들은 자신들의 결정이 베를린의 선택지를 줄일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이는 국제관계 이론가들이 '안보 딜레마'라고 부르는 상황", 이른바 투키디데스의 트랩에 걸렸다고 할 때 많이 쓰는 말이다. 그래서 《몽유병자들》에서 우리가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멘탈맵이고, 그 다음에 여기서 《몽유병자들》에서도 결국 투키디데스의 트랩, 즉 안보 딜레마라고 불리는 상황이 있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강조해두고 싶다. 투키디데스에서 기인한 용어인데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에 나온다. 투키디데스의 서술에 따르면 전쟁은 라케다이몬이 프로파시스로서의 공포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아테나이는 불가피하게 전쟁에 말려들어갔고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서 지연전술과 방어로 라케다이몬을 지치게 하는 전술을 택했으나 의도되지 않았고 그러니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 따라서 이 전쟁에서는 어느 쪽에 귀책을 돌릴 것인가가 무의미한 문제 설정이 되어 버린다. 우리는 이상하게도 투키디데스의 텍스트를 읽을 때 아테나이를 편드는 경향이 있는데 그래서는 안된다. 이 제1차세계대전도 마찬가지이다. "한 국가가 자국의 안보를 강화하기 위해 취하는 조치가 다른 국가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몰아가는 상황, 이것을 투키디데스의 트랩에 걸렸다고 말한다. 이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데 그게 국제관계에서 신뢰가 없는 경우에는 결정적으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다.

제6장 549 자신들의 행동은 전적으로 방어적인 것이고 적에게만 공격적인 의도가 있다고 생각했던 까닭에, 핵심 정책수립자들은 자신들의 결정이 베를린의 선택지를 줄일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이는 국제관계 이론가들이 '안보 딜레마'라고 부르는 상황, 즉 한 국가가 자국의 안보를 강화하기 위해 취하는 조치가 "다른 국가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몰아가는" 상황을 뚜렷하게 보여준 사례였다.

 


그 다음에 남성성의 위기인데 세기말적 남자다움에 호소하는 표현이 이 무렵에 굉장히 난무했고,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의지, 강직한 성격이라고 하는데 "젠더를 연구하는 역사가들은 19세기 말 수십 년과 20세기 첫 10년 동안 욕구충족(음식, 섹스, 상품)에 집중하던 비교적 폭넓은 형태의 가부장적 정체성이 더 좁고 냉정하고 금욕적인 정체성으로 대체되었다고 지적한다. 그와 동시에 종속되고 주변화된 남성성들과의 경쟁에 직면한 엘리트층 내에서 '진정한 남성성'의 표현이 강조되었다."고 한다. "용감한 사람" 되려는 강박적 욕구도 나타났는데 "교활함보다 꿋꿋한 기개를 선호한 행동규범이 분쟁의 가능성을 높였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사실 《몽유병자들》을 읽을면서 가장 놀랐던 부분이 이 부분이다. 이전 세대의 정치인들 즉 비스마르크와 같은 사람들은 유연함과 전술적 융통성, 교활함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1914년 전쟁에서는 꿋꿋한 기개를 선호한 행동규범이 분쟁의 가능성을 높였다는 것이 이럴 수도 있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것을 과연 정쟁의 원인 중 하나로 생각하는 것을 상상해보지 못했는데 그럴 수도 있겠다는 전반적인 심성구조라기보다는,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어떤 감정상태라고 생각이 된다. 

제6장 559 세기말적 남자다움에 호소하는 표현이 이 무렵의 서신과 메모에서 워낙 광범위하게 나타나므로 그 영향이 특정 지역에 국한되었고 보기 어렵다. 

제6장 559 젠더를 연구하는 역사가들은 19세기 말 수십 년과 20세기 첫 10년 동안 욕구충족(음식, 섹스, 상품)에 집중하던 비교적 폭넓은 형태의 가부장적 정체성이 더 좁고 냉정하고 금욕적인 정체성으로 대체되었다고 지적한다. 그와 동시에 종속되고 주변화된 남성성들과의 경쟁에 직면한 엘리트층 내에서 '진정한 남성성'의 표현이 강조되었다.

제6장 561 이전 세대 정치인들(비스마르크, 카보우르, 솔즈베리)이 예증했던 유연성, 전술적 융통성, 교활함보다 꿋꿋한 기개를 선호한 행동규범이 분쟁의 가능성을 높였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 다음 마지막 섹션이 “미래는 얼마나 열려 있었나”이다. 이 부분은 정말 여러 번 읽어서 전쟁에 대한 분석뿐 아니라 자기가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도 이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오스트리아 공법학자 게오르크 예리네크는 1892년에 출간한 《주관적 공법체계》에서 '사실적인 것의 규범적 힘'을 분석했다." '사실적인 것의 규범적 힘'은 굉장히 무서운 말이다. 공법체계는 사법은 민사법, 상법, 소유권이나 재산권이나 이런 것에 관련된 것이고, 공법은 헌법, 헌법도 공법으로 넣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공법을 실질법학이라고 한다면 헌법은 이념 덩어리기 때문에 사실 도이치계의 법학자들은 헌법을 잘 안 다룬다. 우리나라에서 칼 슈미트가 어마어마한 사람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독일 공법학계에서는 그리 대단한 사람은 아니다.  공법체계라는 것은 말그대로 공적인 것이니까 객관적인 팩트에 근거해서 뭔 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어느 정도로 인간의 주관적인, 주관적이라는 것은 arbitrary하다는 것이다. 주관적인 사람은 나쁘게 말하면 고집이 센 사람, 남들과 잘 타협하지 않는 사람들을 주관이 뚜렷하다고 말한다. 설득보다는 협박하려고 하는 사람. 그런데 '사실적인 것의 규범적 힘'은 굉장히 무서운 말이다. 그냥 지나가면 안되는, 사실이라는 것은 눈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눈 앞에 책이 놓여있다, 이것은 사실적인 것이다. 이미 놓여있다는 것이 그 자체로 뭔가를 규율하는 힘을 가지게 되어버리면 규범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마땅히 있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실적인 것의 규범적인 힘이다. 인간에게는 그런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기정사실화된 것들을 수긍하고 그것을 규준으로 삼아버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현존하는 상황에 규범적 권위를 부여하는 사람들의 경향", 일단 상황이 만들어지면 그 상황에 영향을 받으면서 인식이 형성되고, 바로 그것은 해석학적 순환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일단 그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버리고 그것을 정상적으로 간주하고 그것으로부터 윤리적 필연성을 구현하고 있다고 까지 생각하는 추정이 나타난다. 그것이 바로 사실적인 것의 규범적인 힘이다.  이러니까 미래가 얼마나 열려 있었나라는 섹션 제목과 연결해보면 이 당시의 사람들이 국가 행위자, 개별 행위자의 의지와 관계없이 '전쟁이 벌어졌는데 어떻게 그냥 싸워야지, 전쟁을 이기는 수밖에 없지', 거기서부터는 황태자 하나 죽은 것으로 전쟁을 막아야 하지로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황태자의 죽음을 계기로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와 전쟁을 해야 한다는 것으로 간다는 것이다.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사실적인 것의 규범적 힘을 분석해보고 현존하는 상황에 규범적 권위를 부여하는 사람들의 경향을 분석해보니 결국 그냥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고 끝낼 수 있는 것들이 나중에는 불가피성으로 도약을 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전쟁을 불러일으킨 아주 치명적인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중층결정의 문제를 미결정의 문제로, 즉 원인 없는 전쟁의 문제로 대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러가지가 겹쳐서 overdetermination 생겨난 문제를 그냥 알 수 없는 것들이 나와서 그런 것이다 그런 식으로 판단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미래는 얼마나 열려 있었나 이 부분을 잘 봐야 한다. 각각의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그렇다. 적당한 예인지는 모르겠으나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는 것이다. 자잘한 뭔가가 있을 때 그런 자잘한 것들이 뭉쳐서 불가피하게 뭔가가 될 것이다 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그것은 개연성에 불과하니까 미연에 그것이 불가피하게 나아가는 싹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리라 여기면서 역설적으로 전쟁을 쉽게 일으키게 된 것이고 어떤 행위가 실제로는 전쟁을 불러일으킬 만한 행위가 오히려 사소하게 보일 가능성이 있었다. 이런 것들을 《몽유병자들》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된다. 

제6장 562 오스트리아 공법학자 게오르크 예리네크는 1892년에 출간한 《주관적 공법체계》에서 '사실적인 것의 규범적 힘'을 분석했다. 이 표현으로 그가 의미한 것은 현존하는 상황에 규범적 권위를 부여하는 사람들의 경향이었다.

제6장 563 다른 무엇보다 그런 시도는 중층결정overdetermination의 문제를 미결정underdetermination의 문제로, 즉 원인 없는 전쟁의 문제로 대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 한가지 강조하고 싶은 점은 ‘사실적인 것의 규범적 힘', 이것은 편견이다. 이것에 매몰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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