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원의 북리스트 | 사회사상의 역사 - 마키아벨리(2)

 

 

2023.04.04 사회사상의 역사 - 마키아벨리(2)

마키아벨리(1469-1527) 사상의 배경

- “근대 초 세계 전역에서 정신혁명이 일어난 이유는 전에 없던 광대한 소통의 공간 또는 무대에서 (적어도 일정한 수준에서는) 상호 이해의 얼개와 번역 규약이 출현했기 때문이다.”(⟪옥스퍼드 세계사⟫, p. 406)

- 이탈리아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사상의 배경이라는 설명은 당시 유럽의 르네상스가 지역마다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는 것, 마키아벨리가 로마의 수사학 등과 같은 당대 피렌체 지식인들의 필수 교양을 습득하고 있었다해도 그것이 반드시 르네상스적인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적절하지 않다.

- 부르크하르트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는 더이상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관한 적절한 참조서의 역할을 할 수 없으므로 그가 제시한 기본 요소들에 근거하여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검토하는 것은 무효하다.

 

《사회사상의 역사》 마키아벨리 2번째이다. 2번째 섹션이 '사상'의 문맥: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인문주의라고 되어있다. 일단 여기에서 저자가 제시하는 바를 있는 그대로 읽어보고 이 설명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검토해보기로 하겠다. 여러차례 말했듯이 이 책 《사회사상의 역사》를 읽는 것은 이 책이 교과서처럼 쓰여져 있어서 여기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읽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이 가지고 있는 한계점이 무엇인가 그리고 이 책에서 취할 수 있는 점은 무엇인가를 비판적으로 검토해가면서 읽기 위해서 읽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전에 회페의 정치철학사 토론을 했었다. 토론을 하면서 근대 부분을 읽었는데 그때 읽은 것을 보완하면서 그것을 하나의 전거로 삼아서 이 책을 비판적으로 읽는 것이다. 그때 회페의 정치철학사를 읽으면서 우리가 기존에 거의 도식적으로 알고 있었던 정치사상에 관한 얘기들을 일단 정리를 해서 이것을 하나의 준거틀로 삼을 수 있겠다 하는 것을 정립하였다. 그러면 그것을 가지고 바탕으로 해서 다른 책들을 읽어 나가면 다른 책들을 읽을 때 그 책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이 눈에 보인다. 그런 것들을 봐가면서 읽는다. 그게 독서의 진전을 가져오는 방법이다. 오늘 읽는 것이 '사상'의 문맥: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이고, 세번째는 마키아벨리의 '문제'로 되어있다. 마키아벨리의 '문제'라고 하는게 바로 마키아벨리의 문제의식, 직접적 문제의식인데 오늘 읽을 사상의 문맥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마키아벨리의 사상적인 배경이다 라는 것을 주장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우선 저자는 "마키아벨리가 살던 시대의 이탈리아는 르네상스의 전성기였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르네상스'라는 말은 스위스의 역사가 야코프 부르크하르트의 명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1860)에 의해 보급된 용어다. " 그리고 마키아벨리가 이탈리아는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사상적 배경으로 가지고 있고 그러니까 마키아벨리의 사상적 배경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부르크하르트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를 참조할 수 있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지금 그렇게 하려면 두 가지 논점이 제시되어야 한다. 확증되어야 한다. 첫째는 과연 마키아벨리의 사상적 배경이 이탈리아 르네상스 인문주의인가가 정리되어야 한다. 전통적인 해석은 대체로 그런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과연 그러한가. 저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마키아벨리의 사상적 문맥이라고 얘기한다. 이 테제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두번째로는 그것에 곁들여지는 문제인데 우리가 이탈리아 르네상스 인문주의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자 한다면 야코프 부르크하르트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를 참조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르네상스의 문화를 구성한 기본적 요소는 네 가지로, 즉 ① '예술작품으로서의 국가'의 출현, ② '개인'의 발전, ③ '고대'의 부활, ④ '세계와 인간'의 발견"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르네상스에 대한 전형적인 해석을 할 때 부르크하르트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에 나오는 기본적인 요소를 거론한다. Kunstwerk으로서의 국가의 출현, 개인의 발전, 고대의 부활, 세계와 인간의 발견 이 네 가지를 이야기한다. 그러면 이것이 두번째 명제 이탈리아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알고자 한다면 부르크하르트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를 참조하면 된다. 그리고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에서 부르크하르트가 제시한 네 가지 기본적인 요소, 그것이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의 특징이다. 일단 그 두가지 명제를 저자는 이야기한다. 그것이 우리가 검토해봐야 할 명제이다. 그 다음 41페이지를 보면 "부르크하르트가 '고대의 부활'이라 부른 것은 '르네상스'라는 말의 본래 의미인 '재생'을 의미하며, " 곧바로 "중세에는 신학을 중심으로 한 학문의 계승은 오랫동안 수도원의 역할"이었는데, 신학에 반대되는 또는 신학에 대립되는 학문들이 점차로 "새로운 학문 · 교육 기관으로서 볼로냐, 파리, 옥스퍼드 등 유럽 각지에서 '대학'이 생겨났다." 대학이 대항하는 지식권력으로서 또는 지식기관으로서 등장하게 되었다는 얘기도 르네상스의 발생을 얘기할 때 흔히 거론된다. 그리고 그때 "전문 학부에 공통된 기초 교육으로서의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을 기본으로 하는 인문주의 교양교육(liberal arts)이 시행되었다." 그리고 "높은 수준의 지식을 가진 전문가를 필요로 한다는 새로운 사회적 요청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이슬람 세계의 고전학자들에 의해 최고 수준에서 보존 · 연구된 그리스 · 로마의 문헌 다수가 유럽 세계에 역수입되어 대학 학자들이 그것을 급속히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나오고 "유럽에서 거의 잊힌 상태였던 키케로의 정치사상이나 수사학의 원전이 인문주의자 페트라르카에 의해 재발견된 것을 계기로 이탈리아 도시국가를 지도할 실무가를 양성하는 지적 영양원이 되어 있었다." 거기까지 얘기한 다음에 "파리대학이나 볼로냐 대학을 중심으로 성장한 정치사상의 큰 흐름은 현대 정치사상가인 포콕이나 스키너의 말을 빌리자면 '시민적 인문주의(Civic Humanism)' 혹은 '고전적 공화주의(Classical Republicanism)'라 불린다. 근대적 사회질서의 선구적 형태로서 르네상스 시기의 도시국가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출현했을 때 거기서 나고 자란 정치가, 관료, 법률가, 사상가들은 자신들이 참여해 수립하려고 하는 국가(공화국)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에 대해 그 모범을 파리나 볼료냐에서 수학한, 아리스토텔레스나 키케로의 학문 · 사상에서 찾았다."  


제1장 40 마키아벨리가 살던 시대의 이탈리아는 르네상스의 전성기였다.

제1장 40 '르네상스'라는 말은 스위스의 역사가 야코프 부르크하르트의 명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1860)에 의해 보급된 용어다. 부르크하르트는 당시 사라져가던 유럽 문화의 원점을 탐구한 결과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에 도달했으며, 유럽 근대의 여러 가치가 거기서 유래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에 따르면 르네상스의 문화를 구성한 기본적 요소는 네 가지로, 즉 ① '예술작품으로서의 국가'의 출현, ② '개인'의 발전, ③ '고대'의 부활, ④ '세계와 인간'의 발견이었다. 

제1장 41 부르크하르트가 '고대의 부활'이라 부른 것은 '르네상스'라는 말의 본래 의미인 '재생'을 의미하며, 르네상스 학문의 기초가 된 '인문주의(휴머니즘)'의 출현을 의미한다. 중세에는 신학을 중심으로 한 학문의 계승은 오랫동안 수도원의 역할이었다.

제1장 41 로마교황의 권위와 권력이 절정에 달한 12세기 무렵부터 교회나 수도원을 대신하는 새로운 학문 · 교육 기관으로서 볼로냐, 파리, 옥스퍼드 등 유럽 각지에서 '대학'이 생겨났다.

제1장 42 십자군 원전의 부산물로서 이슬람 세계의 고전학자들에 의해 최고 수준에서 보존 · 연구된 그리스 · 로마의 문헌 다수가 유럽 세계에 역수입되어 대학 학자들이 그것을 급속히 연구하기 시작했다.

제1장 43 파리대학이나 볼로냐 대학을 중심으로 성장한 정치사상의 큰 흐름은 현대 정치사상가인 포콕이나 스키너의 말을 빌리자면 '시민적 인문주의(Civic Humanism)' 혹은 '고전적 공화주의(Classical Republicanism)'라 불린다. 근대적 사회질서의 선구적 형태로서 르네상스 시기의 도시국가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출현했을 때 거기서 나고 자란 정치가, 관료, 법률가, 사상가들은 자신들이 참여해 수립하려고 하는 국가(공화국)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에 대해 그 모범을 파리나 볼료냐에서 수학한, 아리스토텔레스나 키케로의 학문 · 사상에서 찾았다.


그러면 첫번째 문단에서 제시되었던 명제, 명제가 두 개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사상적 배경으로 가진다. 두번째 이탈리아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텍스트는 부르크하르트의 명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이다. 그것은 검토를 해봐야 하는 것이고, 세번째는 로마교황의 권위와 권력이 절정에 달한 12세기 무렵부터 교회나 수도원을 대신하는 새로운 학문 · 교육 기관으로서 볼로냐, 파리, 옥스퍼드 등 유럽 각지에서 '대학'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니까 그것에 대해서는 따로 문제를 삼을 필요가 없는 주장인 것 같다. 그리고 대학에 뭔가를 하는 것이 교육기관을 대신한 것은 사실이지만 과연 그 대학에서 교육한 것이 신학과는 아주 무관한 철저하게 근대적 이른바 '근대적' 교양 교육만 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많이 있다. 인문주의 교양 교육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을 기본으로 하는가. 이런 것들은 지금 여기서 제시되고 있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단순한 스케치는 사실상 지금은 거의 통용되고 있지 않는 논의이다. 이때 12세기 중세전성기 High Middle Age 에 등장했던 여러 학문들이 신학에 대립되는 것이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지금은 이제 그렇게 심각하게 얘기되고 있지 않다. 그리고 "그리스 · 로마 고전은 로마가톨릭교회가 지배하는 중세 세계에서는 부적합한 문헌으로 금압되었다." 이것 또한 온전히 그렇게 금압된 것은 아니다. 사실상 고대 그리스 · 로마 고전을 보존한 것은 십자군 원전의 부산물로서 이슬람 세계의 고전학자들에 의해서 전해졌다 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단선적인 설명이 그런 설명이 이제 더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은 마키아벨리가 과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고 그런 것들을 르네상스의 맥락 속에서 습득했는가 라는 것에는 조금 무관한 얘기다. 사실은 사상이 전해져 들어오는 과정에 관한 얘기들이기 때문에 그래서 마키아벨리와 직접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것부터 얘기한다. 그리고 "이러한 학문을 대표하는 것이 스콜라 철학"이라고 했는데 논의 자체가 서로 어긋나는 지점이 있다. 그리스 · 로마 고전은 로마가톨릭교회가 지배하는 중세 세계에서는 부적합한 문헌으로 금압되었는데, 그런데  이슬람 세계의 고전학자들에 의해 최고 수준에서 보존 · 연구된 그리스 · 로마의 문헌 다수가 유럽 세계에 역수입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 스콜라 철학이다. 그런데 스콜라 철학은 중세 전성기에 등장한 신학이다. 그러니까 스콜라 철학이라고 하는 것, 토마스 아퀴나스 이런 사람들의 신학 또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정치사상 이런 것들에 대한 검토가 없는 상태에서 이것을 얘기해버리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거의 13세기이다. 13세기를 거의 전부 다 살아낸 사람인데 그 당시 스콜라 학문과 르네상스라는 것을 같은 맥락 속에 두고서 이렇게 논의하는 것은 굉장히 역사적인 선후관계가 어긋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책 42페이지에 있는 얘기는 "중세 유럽의 정신세계는 로마교회가 지배했기 때문에" 라고 되어 있는 문단과 그 다음 문단이 "이러한 학문을 대표하는 것이 스콜라 철학이며" 이것은 논리적으로 연결관계가 되지 않고 역사적으로도 선후가 어긋나 있는 부분이다. 사실 중세 유럽의 정신세계를 로마교회가 지배했다는 것은 맞지만 로마교회가 그리스 · 로마 고전을 금압했다는 것은 정확한 것은 아니다.  

제1장 42 그리스 · 로마 고전은 로마가톨릭교회가 지배하는 중세 세계에서는 부적합한 문헌으로 금압되었다.

 

그 다음 "파리대학에서 유학한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엘리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나 정치학을 익혀 모국에 돌아가서는 정치나 행정의 수단으로 이를 활용했다."  이런 부분들은 그냥 표피적인 얘기에 불과한데 물론 마키아벨리나 그 당시 피렌체의 마키아벨리와 같은 류에 있는 여러 관리들은 고전인문학에 대한 교양이 풍부한 사람이었던 것은 틀림없다. 당장에 마키아벨리의 변호사인데 법률에 관한 책을 쓰기도 했고, 그 다음에 키케로의 변론가론, 의무가론을 열심히 읽었다. 마키아벨리가 직접 참조하기도 했던 리비우스의 역사, 로마사론고의 기반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리비우스의 역사라는 책이 로마사논고의 기반이기도 하지만 메리 비어드는 리비우스의 역사가 그렇게 탁월한 역사책은 아니다라고 문헌적으로 검토하고 있기도 한다. 지금 말한 것처럼 이 당시의 피렌체의 관리들이, 마키아벨리의 아버지를 비롯한, 이런 사람들이 고전 텍스트들에 대한 교양이 아주 풍부하게 있었고 수사학에 대한 교양이 없다면 그런 관리의 올라서기에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고 해서 파리대학에서 유학한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엘리트들이 정치나 행정의 수단으로 이를 활용하겠다는 어떤 이런 식의 인과관계가 지나치게 뚜렷해 보이는 것들 그런 관계에 놓여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포콕이나 스키너가 말하는 '시민적 인문주의(Civic Humanism)' 혹은 '고전적 공화주의(Classical Republicanism)'라고 하는 것이 과연 그러한 교양과 직접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가 그런 것은 조금 재고의 여지가 있다. 게다가 마키아벨리가 로마사논고의 저본으로 삼았다고 하는 리비우스의 역사 이것도 그런 인문주의적인 관심에서 읽었다기 보다는 그냥 실용주의적인, 내가 필요한 것들을 로마의 역사 속에서 사례를 취한다 하는 그런 관점에서 읽고 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를 가져온 것도 아니고 면밀하게 독해를 한 것도 아니며 자신의 상황에 필요한 것을 편리하게 변용시켜서 이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마키아벨리가 이탈리아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사상적 배경으로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물론 그것이 가져다주는 정신적인 태도는 굉장히 중요하지만 《옥스퍼드 세계사》를 참조해보면 "근대 초 세계 전역에서 정신혁명이 일어난 이유는 전에 없던 광대한 소통의 공간 또는 무대에서 상호 이해의 얼개와 번역 규약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그 공간 또는 무대에서 사람들은 관념과 제도를 배양하고 재생하고 활용할 수 있었다." 이게 제4부 9장인데 8장은 수렴하는 세계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8장을 읽어보면 이미 마키아벨리 시대에 굉장히 많은, 지중해 세계도 유럽만 보며 안되고 세계적인 교류를 보면, 마키아벨리 시대에 이미 지중해 세계가 전세계적인 전지구적인 교류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이야기할 때 《옥스퍼드 세계사》 406 페이지에 나온 것처럼 근대 초 세계 전역에서 정신혁명이 일어난 이유는 전에 없던 광대한 소통의 공간 또는 무대에서 상호 이해의 얼개와 번역 규약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실은 원인遠因 deep cause, 깊은 원인이라고 제시할 수 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라고 하는 것 자체가 그것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제1장 43 파리대학에서 유학한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엘리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나 정치학을 익혀 모국에 돌아가서는 정치나 행정의 수단으로 이를 활용했다.

《옥스퍼드 세계사》 제4부 9장 406 근대 초 세계 전역에서 정신혁명이 일어난 이유는 전에 없던 광대한 소통의 공간 또는 무대에서 (적어도 일정한 수준에서는) 상호 이해의 얼개와 번역 규약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그 공간 또는 무대에서 사람들은 관념과 제도를 배양하고 재생하고 활용할 수 있었다.

 

그러면 앞서서 얘기했던 두가지 명제를 한 번 검토해본다. 마키아벨리가 과연 이탈리아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았는가. 그것은 직접적으로 사상의 배경이 되었다고 말하기는 지금까지 말한 것의 근거에서 보면 어렵지 않겠는가 생각해볼 수 있다. 이것은 회페의 정치철학사 토론을 할 때 이런 얘기가 있었다. 회페는 마키아벨리가 대격변 시대의 사상가라고 하고, "알프스 이북은 종교개혁, 도시와 군주가 황제에 맞서고, 종교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피해, 기독교를 통해 지켜지던 유럽의 정신적・문화적・정치적 통일성의 파괴. 알프스 이남은 인문주의”, 그런데 르네상스를 이해하고자 할 때 아주 중요한 것은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이 반기독교도였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에라스뮈스라든가 토마스 모어 이런 사람들도 르네상스인들이다. 그런데 에라스뮈스나 토마스 모어는 굉장히 독실한 기독교도였다. 제가 보기에는 《옥스퍼드 세계사》에 나온 것처럼 전에 없던 광대한 소통의 공간이 열리고, 그 공간이 단순히 유럽적 차원이 아니라 지중해와 동방지역, 그리고 마키아벨리가 1469~15227년 사이에 살았는데, 그러면 이 사이에 뭐가 들어가는가. 1492년이라는 해가 들어가 있다. 즉 마키아벨리 시대에 이미 전지구적 항해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이 전에 없던 광대한 소통의 공간이 열렸고, 상호 이해의 얼개와 번역 규약이 출현했다고 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정신혁명이 일어난 이유가 된다. deep cause를 찾으려면 이탈리아 르네상스 인문주의라기 보다는 《옥스퍼드 세계사》에 나온 이것을 시대배경으로 찾는 것이 적당하다. 왜냐하면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좁은 범위에서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마키아벨리 사상에서 나오는 반기독교적인 특성 이런 것들을 얘기할 때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를 가져올 필요는 없다. 왜냐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는 그렇게 반기독교적이지 않다. 오히려 종교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피해가 알프스 이북에서는 있었고 그 다음에 기독교를 통해 지켜지던 유럽의 정신적・문화적・정치적 통일성이 파괴되고 있었다 하는 것이 일단 가까운 유럽 안에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가 아니라 유럽에서 당장 벌어지는 반기독교적 사건들이 있다. 그리고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는 반기독교적 성격이 그리 강하지 않다. 그것을 deep cause로 잡을 수 있겠다. 따라서 저자가 이탈리아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마키아벨리의 사상적 문맥응로 잡았다고 하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고 명백하게 반론할 수 있는 근거들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다음에 회페가 본 것 중에는 혹한 권력정치라는 것이 있는데 "인문주의 전통에서 성장하여 회의주의적 각성을 통해 실용주의적 사유와 정치적 기술을 중시하였으며, 이것을 후기 중세에 유행하던 인간에 대한 비관주의적 전망과 연결"시켰다. 중세에 유행하던 인간에 대한 비관주의적 전망 이런 것들이 마키아벨리에 영향을 미쳤다. 글쎄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꼭 냉혹한 권력정치를 주장하는 사람이 비관주의적 전망을 갖고 있는가, 그렇게 보기에는 어려운 지점들이 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에 관한 얘기를 하면서 거론하겠지만 포르투나fortuna 개념도 굉장히 기독교적인 측면이 있다.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에서 갱신된 문명개념에 대한 변화를 받아들이는 측면이 있다.  보에티우스는 성 saint 보에티우스이고 순교자이니까 그런 것이 있다. 그게 이제 마키아벨리가 가지고 있는 사상적 배경에는 그런 것들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그 다음에 직접적으로 직접적으로 마키아벨리가 가졌던 문제의식은 다음에 하기로 하고 그 다음에 우리가 따져봐야 하는 것이 과연 부르크하르트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이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대해서 우리가 잘 알 수 있는 근거인가. 이것에 대해서는 예전에 거론해 둔 것이 있다. 2020년 11월 11일에 「부르크하르트, 세계사적 고찰 읽기」를 읽어나가기 시작할 때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에 대해서 거론한 바가 있다. 그것을 참조해서 보자면 일단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를 편집한 콘라트 호프만이 말을 한다. 14세기에서 16세기까지의 이탈리아 문화를 탐구한 것은 근대 인간과 개인 의식의 기원을 찾겠다는 근본문제를 풀기 위해서인데, 부르크하르트가 찾아낸 네 가지 기본 요소의 논의가 여전히 유효한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오늘날에는 르네상스라는 개념 자체가 부르크하르트 고유의 것이 아닌 일종의 범유럽적 개념이었고, 콘라트 호프만에 따르면 '이 책의 탄생과 파급력을 결정짓고 동반했던 르네상스 숭배와 르네상스 비판은 요즈음 중요성을 상실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라고 하는 텍스트를 읽으면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유효한 성과는 부르크하르트가 제시한 문화사의 방법적인 모델이다. 다시 말해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라고 하는 텍스트가 이탈리아 르네상스 인문주의에 대한 적절한 참조서는 더 이상 아니다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가 마키아벨리 사상의 deep cause로서 제시하고 있는 이탈리아 인문주의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그리고 이탈리아 인문주의를 우리에게 가장 잘 제시하고 있는 텍스트로서의 부르크하르트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자체도 더 이상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대한 적절한 텍스트는 되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오히려 마키아벨리 사상의 깊은 배경으로는 근대 초 세계 전역에서 정신혁명이 일어났다고 하는 것 그리고 정신혁명이라고 하는 것은 글로벌한 차원에서의 교류를 바탕으로 상호 이해의 얼개와 번역 규약이 출현했다는 점들을 고려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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