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시대 이달의 문화시선 | 플라톤, 현실국가를 캐묻다 1
- 강의노트/책담화冊談話 2021-25
- 2023. 6. 12.
국악방송 라디오 문화시대에서 제공하는 '이달의 문화시선 : <플라톤, 현실국가를 캐묻다>'를 듣고 정리한다. 2023.03.07부터 2023.03.28까지 4주간 방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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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07 문화시대 이달의 문화시선 | 플라톤, 현실국가를 캐묻다 1
《국가》는 2500년 전에 쓰여진 책이고 플라톤의 대화편이 굉장히 많은 양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에서도 《법률》이라는 대화편 다음으로 분량이 많다. 《국가》는 원래의 제목이 Politeia라고 하는 대화편인데 희랍어로 정치 체제라는 뜻이다. 한 가지 주의해야 될 점은 이 플라톤의 텍스트들은 대화편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드라마란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읽기가 정말 힘들다. 그리고 무슨 얘기를 하다가 샛길로 새기도 하고 갔다가 다시 오는 것 같은데 어느 지점에서 오고 있는지를 우리가 알아내기가 어려우니까 그 전환점들 그리고 등장 인물들이 나오고 그 다음에 우리가 짐짓 화난 척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대화편의 주인공인 소크라테스가 누구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아니면 누구를 칭찬하기도 하는데 이게 맥이는 건인지 아니면 진짜로 칭찬하는 건지 이런 것을 알아내기가 좀 어렵다.
《국가》는 대화편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 얘기를 따라가기가 좀 어렵다고 했는데 일단 이 《국가》의 배경이 되는 건 아테네이다. 흔히 알기로는 고대 그리스 중에는 제일 소위 잘 나갔던 도시 국가라는 것이 맞는지.
딱 거기까지 대개 알고 있는데 여기에 하나 덧붙이자면 민주주의의 요람이다 라는 얘기를 한다. 또 올림픽의 발상지라고 하는 것도 되게 얘기한다. 그런데 올림픽이 꼭 거기서 발상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교과서적 이해가 딱 거기까지 와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흔히 알고 있는 페리클레스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아테네 민주정의 절정기였다. 딱 그때 끝났다. 그러니까 절정기에 이르기까지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서 민주정을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을 했고, 그러니까 실제로는 민주주의의 요람이다 라고 말하지만 민주주의가 전성기를 이루고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그런 민주정이 활짝 피어난 것은 몇 년 되지 않는다. 민주정의라는 게 그런 거 같다. 이룩하는데 한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이제 민주정에 이르기까지의 거의 모든 종류의 정치체제를 다 거쳐서 거기까지 간다. 원래 왕정이었고 그 다음에 참주들이, 폭군들이 정치를 좀 하기도 하고, 귀족정도 좀 있었고 그러다가 이제 페리클래스 시대의 절정기를 맞이하고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펠로폰데소스 전쟁, 그 시기를 거친 다음에는 희랍의 폴리스들이 다 자기네들끼리 싸우다가 쇠락해진 틈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식민지가 되어버렸다. 그 다음에 한 가지만 더 얘기를 해보자면 이 사람들은 식량을 자급자족하거나 그런 데는 아니다. 발칸반도 지역이라고 하는 곳이 농업을 지어서 자급자족해서 먹고 살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상업 중심의 폴리스이고 특히 아테나이는 그렇다는 것, 상인들의 도시였다. 상인들의 도시라고 하면 이제 영토를 넓히려는 그런 것보다도 바다에서 세력을 넓히려는 오늘날로 치면 영국 같은 나라였다고 생각하면 쉽다.
배경이 아테네인데 이런 아테네에서 있었던 철학이다 정도로 배경으로 알고 시작하면 좋을 것 같고, 각 장마다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간단하게 맛보기로 먼저 좀 설명을 해준다면.
사실 제가 이 책에 대해서 뭔가 떠들만큼 많이 알고 있다고 말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전문적인 연구자들이 굉장히 많이 논의를 해왔는데 이 책의 목차를 저는 크게 서론 또는 문제 제기 그것을 한 부분으로 하고, 그다음에 제1부부터 제4부까지를 나누었다. 이렇게 나누는 것 자체가 플라톤이 정한 것이 아니다. 플라톤은 그냥 처음부터 쭉 이 얘기를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드라마를 이렇게 볼 때도 네 드라마는 12회니 16회니 회가 나뉘는데 그것도 없이 그냥 12회 분량을 한꺼번에 떠드는 것이다. 이제 후대의 연구자들이 어떤 부분으로 나눠야 되느냐 이것을 이 책을 어떻게 이 대화편을 어떻게 읽느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있을 때 그것을 나누는 방법을 궁리를 하는 것이다. 저는 크게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이 도입부라고 생각을 하고, 그 다음에 제1부를 "공동체의 구성과 올바름"이라고 하는 제목을 붙여서 나눴는데, 여기에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정치적 공동체의 기본적인 형태들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그 다음에 일반적으로 정치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그 다음에 두 번째로는 정치가는 정치가인데 플라톤이 생각한 정치가는 철학적 소양을 가진 정치가이다. 그래서 철학적 정치가가 다스리는 나라는 어떠한가, 그것을 다루는 이제 "공동체의 궁극적 근거와 철학적 정치가"로 이렇게 나누었다. 제3부는 "나쁜 상태의 네 가지 정체와 시민들" 이렇게 제목을 달았는데, 플라톤의 대화편이 아닌 저의 책을 읽으실 때는 이 부분부터 읽어나가는 것이 적당치 않겠나 한다. 플라톤이 당시 자기가 살고 있던 아테나이가 이 모양이니까, 우리가 대개 이야기를 할 때는 이거부터 한다. "너 이게 나빠" 그것을 지적을 하고, 그 다음에 "이런 이런 것을 하면 좋지 않을까"라고 말을 하지 않나. 그런데 플라톤에서 그 얘기는 세 번째에다 이야기한다. 좋은 것들에 대해서 먼저 얘기하고 이것에 비추어 볼 때 지금 이런 게 나쁘지 않나라고 하는 것을 세 번째 얘기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쓰여진 순서는 이렇게 되지만 읽을 때는 "나쁜 상태의 네 가지 정체와 시민들"부터 읽으면 적당하다.
그리고 이 책 제목이 《플라톤, 현실국가를 캐묻다》이다. 플라톤의 대화편인 《국가》는 대게 이상국가론이라고 여겨져 왔는데 이 안에 보면 지금 제3부라고 한 부분을 보면 현실적으로 우리가 정치적인 상황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런 모습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상국가론이라기보다는 이 부분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는 "참된 올바름과 궁극적 보답" 이 부분은 거의 종교적인 신념을 담고 있는 부분이다. 살아서 착하게 살면 죽어서 복 받는다, 뭐 그런 종류의 얘기가 있는데 아주 오래된 이야기이긴 하지만 대개 우리가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은 죽은 다음에 일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제 플라톤이 여기에서는 이제 참된 올바름을 궁극적으로 보상받는 것에 관한 얘기, 그러니까 이 부분은 사실 후대에 종교라든가 이런 신학자들이라든가 이런 사람들에게 굉장히 많은 영향을 끼친 부분이기도 하다.
제3부의 현재의 나쁜 상태들에 대해서 먼저 읽어본 다음에 이제 제1부로 넘어가서 플라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공동체로 봐야 되는데, 이 순서로 보고 제4부인 참된 올바름 이쪽은 마지막에 보고 이렇게 가야 이해가 오히려 편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약간 제4부는 다른 내용하고 어우러진다기보다는 독립적이라는 느낌이 좀 든다.
그렇다. 그렇지만 이 부분을 읽고 들어가는 게 우리가 보통 그러는데 "저 사람은 도대체 뭘 믿고 저렇게 나쁜 짓을 하는 거야." 그런데 예전에는 "저러다 천벌 받지" 이런 말이 통했다. 근데 지금은 그게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플라톤은 지금부터 2500년 전 사람이기 때문에 그걸 감안한다면 플라톤이 여기다 이것을 배치한 것은 좀 궁극적인 삶의 바탕을 이렇게 영원한 것에 빗대어서 찰나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성찰해 보라는 뜻으로 있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공동체가 가야 할 길이나 공동체의 생김새에 관해 한참 얘기했지만 사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우리 개개인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에 대한 거다 라는 얘기이다.
자칫 잘못하면 공동체 신경 쓰지 말고 "너나 똑바로 해라" 이런 말이 될 수 있겠지만 그 말이 공동체에 관한 논의가 없이 그 얘기만 있어버리면 굉장히 하찮은 이야기일 수 있다. "나라가 어찌 되든 나만 똑바로 살면 돼" 이런 생각을 하기 쉬운데 사실 그건 아니다. 나만 잘 산다고 해서 뭔가 되지는 않는다. 균형 있게 내 자신의 삶에 대해서 내가 지금 이렇게 제대로 살고 있나 똑바로 살고 있나 영원한 것에 비추어 봤을 때 지금 내가 잘 살고 있나를 성찰하는 사람일수록 내가 살고 있는 공간이 엉망이라는 것에 대해서 시선을 돌릴 가능성도 있다. 그 두 개를 잘 잘 교직시켜보아야 한다 라는 게 플라톤의 생각이겠다.
제가 한 10년 전에 처음으로 깨달음 비슷한 깨달음을 얻고 나서 생각한 저의 좌우명이 "나나 잘하자"이다. 남들은 다 알아서 잘 살고 있으니까 남들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말고 나나 똑바로 잘 살자. 이거였는데 거기서 한 10걸음 정도 더 나아간 생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살고 있는 정치적 공간, 사회적 공간, 문화적 공간 이것을 늘 살펴보자. 이것을 덧붙이면 플라톤이 원래 의도한 바하고 가까워진다. 저는 남에게 이렇게 하라는 말을 잘 안 한다. 알아서 하겠지. 그런데 그러다 보면 살고 있는 공동체를 외면하기가 쉽다. 그러면 우리가 궁극적으로 잘못하면 공동체라든가 영원한 삶에 대한 생각 없이 나나 잘하지만 계속 고집을 하면 우리가 그런 사람을 말종이라고 그런다. 그러니까 그걸 덧붙여야 한다.
이렇게 각 장의 내용을 요약해 보니까 우리가 지금 이 시대에 왜 국가를 읽어야 하는지 왜 우리 저 PD님이 이 책을 3월의 책으로 가져오셨는지도 조금 좀 이해가 된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좀 뭐랄까 인간 사회에 대해서 아쉽다는 생각이 드는 게 2500년 전에도 이렇게 생각했었는데 아직도 똑같은 고민을 하고 아직도 똑같은 걸 가지고 이렇게 서로 싸우고 뭐 오해하고 해야 되는 건가 이런 생각도 좀 든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한 발 물러서서 냉정하게 평가해 보는 것 그런 것들을 잘 안 하고, 그 다음에 눈앞의 이익에 굉장히 몰두하고 그러니까 빨리 빨리 뭘 해야 된다라고 생각하고, 그런데 플라톤이 살았던 당시에 아테나이가 그랬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아테나이 사람들하고, 우리가 요즘에도 그런 말하는데, 그리스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 이런 거 보면 한국 사람들하고 똑같다는 얘기들 많이 한다. 《국가》를 읽으면서 플라톤이 당대의 사람들에 대해서 묘사를 하고 있는 걸 보면 굉장히 기시감이 든다. 그런 것이 하나가 있고 두 번째로는 우리가 어떤 책을 읽을 때는 효능감이라는 게 있는데 플라톤의 《국가》 이상의 효능감을 주는 책은 없다. 그러니까 적어도 제가 지금, 제 책에는 《국가》의 내용을 요약한 부분들이 있는데, 박종현 교수가 번역한 《국가》를 읽지 않아도 그 요약이 있으니까 요약만이라도 좀 충실하게 읽으면 어디 가서 《국가》 읽어봤어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다.
《국가》에 관한 연구서들이 꾸준히 계속 나오고 있기 때문에 연구서가 나왔을 때 이 사람은, 독일이나 영국이나 미국이나 이런 데서 연구서가 나오는데, 이 사람은 이거는 굉장히 중요하지 않은 구절이라고 생각했더니 이게 중요하다고 또 이렇게 주장을 하네. 근데 연구서들은 우기는 게 아니라 근거를 마련해서 자기의 주장을 최대한 변론을 한다. 그러고 보면 화가 난다. 왜 나는 못 봤나. 그리고 화가 나니까 다시 또 발분해서 또 본다. 또 보고 그러다 보면 새로운 것이 발견되어서 이렇게 하게 된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국가》라고 하는 책을 읽고 나면 철학 고전에 관한 한은 일단은 아주 훌륭하고도 좋은 첫 걸음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그런 효능감이 있다.
일단 서론에 들어가겠다. 서론을 "올바름에 대한 의견들"이라고 했는데 이 올바름에 대한 의견이라는 게 저는 굉장히 포괄적이면서도 좀 냉철하다는 생각이 드는 게, 저는 그런 생각은 가끔 한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말로는 죄와 벌이라고 하면 유죄냐 무죄냐를 얘기하면 우리나라는 그냥 죄면 다 죄다. 그런데 그걸 영어로 얘기하면 sin이 있고 guilty가 있다. 사회적 규칙에 의한 죄가 있고 도덕적으로 정말 나쁜 짓이 있고 그렇다. 우리가 무슨 무단횡단을 했다고 해서 천벌 받을 짓은 아니다. 그런 차이가 있는 건데 여기서 말하는 올바름에 대한 의견들은 그런 부분일 것 같다는 생각이 좀 든다.
그렇다. 그런데 미묘한 경계선이 있다. 이 문제 제기를 정확하게 했는데 도덕적인 어떤 그런 올바름 그런 것들은 sin이라고 하고, 그런데 우리가 범죄를 저지르면 crime이다. 그런데 그 중간 지점이 하나 있다. crime이라고 하는 것도 형법상의 죄를 저지른 것일 수도 있지만, 왠지 이 상황에서 "저렇게 말하는 건 좀 올바르지 않잖아." 가령 우리가 일본 사람들하고 친하게 지내는 거 좋은데 그런 얘기는 3.1절에는 좀 안 하는 게 좋다. 그 사회 구성원이 정당하다고, 이럴 때는 올바름을 정당하다, 이 상황에서는 이게 정당한 거야 라고 말할 때 그 올바름이라는 게 있다. 그거는 형법상의 죄도 아니고 죄에 저촉되는 것도 아니고 또 그렇다고 해서 영원불변하게 지켜야 할 하나의 도덕적인 올바름도 아닌 중간 단계에 있다. 상황에 따라서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지켜야 되는 올바름이라는 게 있다. 그런 걸 우리가 이제 '객관적 올바름'이라고 한다. 그래서 개개인이 나는 세상이 뭐라 해도 나는 이건 지키고 싶어 하는 그런 개개인에게만 귀속되는 올바름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주관적 올바름이다. 그런데 절대적인 올바름이 있다. 절대적인 올바름이라는 건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라든가 우리가 흔히 황금률이라고 부르는 것들. 사실 우리 인간은 사회생활을 하기 때문에 수없이 많은 그런 객관적 올바름들에 대해서 판단을 해야 되는 상황에 있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잘 해야 되는 사람들이 공직에 있는 사람들이다. 자기 사적인 개인적인 신념과 공적인 영역, 이 두 가지가 얽혀 있는 것이 말하자면 정치적 공동체이다. 그러면 플라톤의 《국가》라고 하는 것이 정체인데 이 안에서 어떻게 해야 그런 올바름들을 해나갈 수 있겠는가.
그런 게 이 《국가》에 있는 예로 들자면 어떤 대화들이 있는가.
예를 들면 처음에 제 서론에서 케팔로스, 폴레마르코스 이런 사람들하고 트라쉬마코스 이런 사람들하고 대화를 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그러면 "뭐가 올바른 것이냐"고 그러니까 케팔로스가 신들에게 재물을 잘 바치고 빚을 지지 않고 죽고 이런 것이 올바른 것이다. 이렇게 말을 한다. 그건 개인의 차원이다. 그리고 폴레마르코스가 케팔로스의 아들인데 폴레마르코스하고 논쟁을 벌이는데 친구한테 잘해주고 적한테는 잘못해주고 이런 것이 올바른 것이다. 얼핏 보면 그게 옳은 것 같다. 그런데 적도 적이 나한테 잘해주면 그 사람한테는 그럼 잘해줘야 한다. 그런데 잘해준다고 그러는 것은 나한테 이익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나한테 손해를 끼치는 사람은 무조건 잘못해줘야 하는가 그건 또 아니다. 살다 보면 개인 차원에서는 그럴 수 있는데 공동체에서는 또 그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이게 누구나 다 수긍할 수 있는 그런 올바름의 기준은 못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좀 더 보편화하고 어디서나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까지 생각을 해보자는 것이 플라톤의 일단 출발점이다. 올바름은 가령 케팔로스나 폴레마르코스나 이런 사람들이 평판을 잃지 않기 위해서 올바름을 지켜야 한다. 이게 남들의 시선이다. 그런데 그런 것들만 계속 생각을 하다 보면 결국 사적인 차원에서 자기가 지키고 있는 규준하고 객관적인 차원에서 지켜야 할 규준 사이에 어긋남이 생길 수 있고 사람은 결국 그러다 보면 나한테 이익이 되는 걸로 이렇게 뭉개고 들어갈 가능성이 아주 높다.
그런 것이 이제 하나가 있고 그 다음에 트라쉬마코스가 제기한 문제가 있다.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한테 이렇게 얘기를 한다. 트라쉬마코스는 이제 그 당시에 그 궤변론자라고 알려진 소피스트 중에 한 사람인데 그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올바름이라고 하는 것을 정신적으로 우리가 이념적으로 설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에서의 올바름이라고 하는 것은 힘센 자가 이익이 되는 것을 하는 게 올바름이다. 우리는 대개 이 한 목숨 부지하기 위해서 힘센 자가 자신이 정의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고 가야 되지 않겠어 그렇게 얘기를 한다.
트라쉬마코스가 이제 계속 그렇게 얘기를 하면서 당신이 힘센 자의 이득이 결국 올바름 아니냐 그렇게 말하니까 소크라테스가 그러면 통치자가 힘센 사람이냐 힘센 사람이 누구냐 이걸 물어본다. 그러니까 트라쉬마코스가 다스리는 사람이 힘세지, 그럼 다스리는 사람은 누구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여야, 자기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지, 계속 그렇게 말을 하다가 소크라테스가 그렇다 해도 올바르게 다스리는 자는 다스림 당하는 사람, 다스려지는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는 사람이 참으로 다스리는 자가 아니겠는가 라고 논박을 해 들어간다. 트라쉬마코스가 그러면 누구의 이익이 되느냐 하고 소크라테스가 물으니까 트라쉬마코스가 듣고 보니까 힘센 자가 통치자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 사람이 진정한 통치자이려면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을 이익을 위해서 움직여야 한다, 이렇게 가게 된다. 그렇게 돼서 결국 내가 좀 잘못 생각한 것 같다, 이렇게 말하지만 사실은 깔끔하게 논박이 되지는 못했다.
트라쉬마코스는 그러면 강한 자의 이익 혹은 강한 자가 생각하는 바, 강한 자가 결정하는 바가 무조건 옳다라고 주장을 한 것이고, 그것에 대해서 소크라테스는 반박을 한 것인지.
그렇다. 그런데 이 트라쉬마코스의 이런 논변들은 언제든지 다시 등장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깔끔하게 논박을 해내지도 못했기 때문에 여기서 이제 그런 걸 읽어낼 수가 있다. 소크라테스가 이 트라쉬마코스의 논변을 깔끔하게 해결을 못했다라는 게 뭘 의미할까. 그거는 이건 말로 안 된다라는 것을 뜻 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이 플라톤의 대화편을 읽을 때 그런 지점들이 놓치기가 쉽다. 플라톤이 왜 이것을 해결이 안 되는 것으로 남겨둔 채 그 다음 이야기로 지나갔을까. 사실은 이것은 해결이 되지 않은 채로 항상 되짚어서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그리고 우리도 약강강약이라고 하는 걸 쓴다. 말로 차분하게 설명하는 사람에게 억지를 부리기 쉽고, 닥치고 뭐 이렇게 해나가는 사람에게는 약해지기 쉽고 그런 것 같은.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건 아무리 그런 사람이라 할지라도 여기서는 대화를 통해서 뭔가를 해결하려고 하는 그런 것들이 바탕이 있다. 이제 중요한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소크라테스가 사람들이 얘기하는 올바름에 대해서, 사람들이 나는 이런 게 올바름이라고 생각해라고 하는 거를 반박만 한 것인데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올바름이라는 무엇인지에 대한 것도 나오는지.
그렇다. 그런데 이제 그것은 뭐냐 하면 왜 그것을 하는지부터 생각을 해보면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서 그냥 case by case로 해나가다 보면 결국 우리가 애초에 뭘 생각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일상적인 대화를 하면서도 "그 사람이 왜 그래" 이렇게 말할 때 그 말 안에는 사람은 이러이러해야 마땅하다 라는 것을 자기가 전제하고 "사람이 왜 그래"라는 말을 한다. 그런 것들을 누구나 다 수긍할 수 있을 만큼 규정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초반에는 이런저런 논쟁을 하다가 그 다음에 올바름에 대해서 공동체에서나 각각의 개인에서나 통용될 수 있는 올바름에 대해서 생각을 해야만 각자 개인의 삶도 또 공동체에서의 생활이라고 하는 것도 올바르게 또는 제대로 최소한 어긋나지 않게 진행될 수 있다 라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런 부분들로 들어가는 게 서론을 지나서, 이제 서론에서는 올바름이 없으니까 참 심란하구나 하는 정도로 했다면 그것을 지나서 제1부에 들어가면 "공동체의 구성과 올바름" 그렇게 돼 있다.
그러니까 이게 이렇게 이어질 수밖에 없겠다. 대화로 가니까 문제점 제기보다는 올바름에 대해서 먼저 얘기를 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우리는 내 몸 깔끔하게 산다고 해서 잘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라고 하는 것에서부터 이제 공동체의 올바름에 관한 얘기부터 하는 것이 그 지점인 것이다. 이제 소크라테스가 이제 서론을 지나서 "공동체의 구성과 올바름"으로 가는 것은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게 이제 플라톤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생각이다. 지금 현재 2023년 한국에서의 우리 공동체가 요구하는 객관적으로 올바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끊임없이 궁리를 해야 하고 그런 것을 가지고 사태를 판별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되는 게 의무다 라고 하는 것이 이제 제1부까지 들어가는 얘기들의 그런 것이겠다.
공동체라는 말을 계속하고 있는데 근데 책 제목은 《국가》이다. 공동체하고 국가를 그렇다면 이렇게 1대1로 매칭을 하는 거는 좀 아닌 것 같고 제가 느끼기에는 공동체가 좀 더 범위가 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국가도 공동체의 하나고 제가 속해 이 국악 방송이라는 이 조직도 공동체의 하나가 될 수 있는 거고 작게는 이 문화시대 제작진도 공동체의 하나고 이렇게 생각이 되는데 제 생각이 맞는지.
맞다. 공동체는 굉장히 넓은 범위다. 국가라고 하는 것은 플라톤이 생각하기에는 그 자그마한 범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결국 가장 넓은 의미에서는 정치적인 의사결정과 그런 구조와 제도들이, 제도들로 이루어지는 그런 공동체에 속할 수밖에 없다 라고 생각하니까 언제 어디서나 그걸 의식한다는 건 굉장히 피곤한 일이겠지만 그래도 최소한 이 정도의 생각까지는 해줘야 된다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국가와 공동체라는 말이 1대1로 대응되지는 않지만 결국 모든 사람들이 여러 종류의 여러 차원의 공동체에 소속해서 살고 있는데 그 사람들을 또는 그런 공동체들을 최종적으로 포괄하는 그런 공동체가 바로 국가 공동체다 이렇게 생각하면 쉽겠다.
국악 방송도 하나의 공동체이고 국가도 공동체이고 공동체 안에서의 모습 또 공동체 전체가 가져야 할 올바름 또 공동체 안에서 구성원으로서 가져야 할 올바름 이런 것들을 얘기를 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공동체랑 올바름을 한꺼번에 한 문장 안에서 언급을 하고 있다. 그러면 이게 다를 수 없다는 뜻인지.
이제 그 다음부터는 계속 그 얘기한다. 제1부에서는 공동체의 구성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그 다음에 각각의 개인과, 방금 굉장히 중요한 부분을 질문했는데, 나만 올바로 살면 나만 올바르고 사는 사람들이 다 모이면 국가도 또는 정치 공동체도 올바른 게 될까 이것도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이고, 그리고 나라가 전반적으로 괜찮으면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 아무리 좀 엉망이었던 사람도 좀 올바른 사람이 되지 않을까 그런 거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개인의 차원에서의 제기되는 문제하고 객관적인 사회 또는 국가 차원에서 제기되는 문제 이것 사이의 그 거리감, 그런 조화 문제 이런 것들이 이제 제2부, 제3부 이런 데까지 계속 이어지는 얘기들이다.
그럼 이 부분에서 일단 정리를 한번 하자면 플라톤의 《국가》의 앞부분에서는 케팔로스, 폴레마르코스, 폴레마르코스는 케팔로스의 아들이고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나오고 그 다음에 궤변론자인 트라쉬마코스가 나오고 이렇게 네 사람의 대화가 줄을 이루는군요. 그런데 제가 듣기로는 케팔로스하고 폴레마르코스는 약간은 그 공동체까지는 생각이 발전하지 않은 분들인 것 같고, 개인의 삶에 대해서만 그러니까 착한데 철이 없는 사람이고, 트라쉬마코스는 센자에게 정당성을 부여해 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해야 될까. 공동체하고 올바름을 함께 언급하는 건 결국은 올바름이라는 가치가 공동체하고 한꺼번에 실현돼야 한다 이런 뜻인지.
그렇다. 플라톤은 그쪽으로 훨씬 기울어져 있죠.
그런 대사가 나오는지.
플라톤은 그렇게 얘기한다. 그 나쁜 상태의 네 가지 정체 있다. 거기서 그 정체가 올바르지 않으면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올바를 수 없다. 그런 얘기를 한다. 우리가 스웨덴 사람들은 법질서를 잘 지킨다. 그런데 스웨덴에서 연쇄 살인범은 안 나오는 건 아니다. 그 사람들도 그 나라만 떠나면 나쁜 짓 한다. 우리가 사례들을 현실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공동체가 객관적인 어떤 질서를 남에게 압박적으로 강요는 아닌데 지키도록 이렇게 쭉 은근히 압력을 넣는 그런 사회를 만들면 그게 올바른 사회 속에서 올바른 인간들이 성장해 나갈 수 있는 그런 바탕이 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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