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시대 이달의 문화시선 | 플라톤, 현실국가를 캐묻다 2
- 강의노트/책담화冊談話 2021-25
- 2023. 6. 13.
국악방송 라디오 문화시대에서 제공하는 '이달의 문화시선 : <플라톤, 현실국가를 캐묻다>'를 듣고 정리한다. 2023.03.07부터 2023.03.28까지 4주간 방송되었다.
podbbang 주소: https://www.podbbang.com/channels/1786347/episodes/24649665
2023.03.14 문화시대 이달의 문화시선 | 플라톤, 현실국가를 캐묻다 2
지난주에 제1부 공동체의 구성과 올바름에 대해서 일부분을 함께 읽어봤는데 올바름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여러 가지 인물들의 대화를 보면서 또 정치적인 공동체를 상상해 보는 그런 대목까지 갔다. 복습도 할 겸 또 지난주에 못 들으신 분들을 위해서 제1부의 내용을 간략하게 좀 소개를 해준다면.
플라톤의 이 책 《국가》라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책에 부제로 흔히 하는 게 “올바름에 대하여”라고 얘기했다. 그런데 올바르다고 하는 것은 절대적인 기준이 없다. 그러니까 플라톤이 살던 당시에 그리고 그의 스승이라고 알려진 소크라테스 시대에 올바름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의견을 가지고 있지 않았겠는가. 그런 것들을 한번 쭉 검토를 해보는 게 플라톤의 《국가》 제1부의 내용이다. 대표적인 게 나이가 많으면 올바르다 라고 하는 것, 그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으로 이제 등장하는 사람이 케파로스. 그런데 나이가 많으면서 동시에 경건한 사람이고 그리고 남들에게 정직하게 신세를 지지 않고 살다 죽으면 되지 않겠는가. 그게 올바른 삶이 아닌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것에 대해서 소크라테스가 문제 제기를 한다. 그게 다 재산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그러니까 케팔로스는 그리고 방패 장사를 해가지고 돈을 좀 많이 번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약간은 비꼬아서 당신이 말하는 올바름이라는 게 신에게 재물도 바치고 이웃 사람들한테 빚도 갚고 죽고 그 다음에 경건하게 사는 것 이런 것들이 다 재산이 있어야 가능한 게 아닌가 라고 하니까 이 사람이 약간 궁지에 몰리게 된다. 궁지에 몰리게 되면서 그의 아들 폴레마르코스에게 논의를 인계하고 떠난다. 그런데 폴레마르코스는 우리가 가장 널리 통용되는 올바름의 기준을 사용한다. 우리 편에게 잘해주고 상대편에게는 잘못해준다. 그러면 이제 그 밑바탕에는 친구와 적의 구별이 반드시 확고하게 정해져 있어야한다. 그게 바로 심리학에서 흔히 말하는 내집단편향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가장 흔하게 하는 게 이게 바로 올바름의 기준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면 이제 소크라테스는 그렇다면 친구와 적이라고 하는 게, 친구와 적이 영원한가, 정말 진정으로 친구인 것 진정으로 적인 것 이런 것들에 대해서 생각을 해봐야한다. 잘해준다고 하는 것 그런 것도 진정으로 친구인 것과 진정으로 적인 것이 불변의 것이 아니라면 올바른 것이 아닐 것이고, 그 다음에 남들에게 잘해준다라고 하는 게 과연 언제 어디서나 잘해줄 수 있는가 이런 것을 문제로 삼는다. 소크라테스가 그런 식으로까지 말을 좀 몰아붙인다. 결국 폴레마르코스나 케팔로스 모두에게 문제 제기하는 것은 절대적인 기준이 없는 상태에서 그저 남들이 옳다고 하는 것을 받아들여서 살아가다 보면 진정으로 올바른 사람이 되기는 어렵다, 겉으로 보기에만 올바른 사람이다, 그렇게만 얘기한다. 여기서 중요한 구별이 하나 나오는데 겉보기에 그러한 것과 진정으로 그러한 것. 희랍어로 dokein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그 겉보기에 그런 것이고, 진정으로 그러한 것은 einai라는 말을 쓰는데 진짜로 그런 것, 그것의 구별이 살짝 나온다.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트라쉬마코스가 등장하는데 이 사람은 그냥 거두절미하고 강한 사람이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올바름이다. 굉장히 경멸적인 의미에서 즐거운 올바름의 규정이다.
소크라테스는 거기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를 한다. 그것이 강한 자의 이익이다. 강한 자의 이익이라고 하는 게 올바르다고 하면 그 강한 자라고 하는 것이 누구냐. 이제 이걸 캐물어 들어가서 그러니까 트라쉬마코스가 통치자가 강한 자다. 그럼 통치자한테 이익이 되는 게 뭐겠냐, 자기한테 이익이 되는 건 결국 통치받는 사람들한테 잘해줘야 이익이 되지 않겠느냐. 그렇게 해서 트라쉬마코스를 몰아간다. 몰아간다기보다는 궁지에 빠뜨리게 되고 그렇게 하면서 처음에 이 대화를 시작할 때는 폴레마르코스가 소크라테스를 자기 집에 끄집어다가 놓고 대화가 시작이 되었는데 소크라테스 일행 중에 플라톤의 형제였던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가 있었다. 그래서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가 말이 나온 김에 우리 한번 올바름에 대해서 끝까지 한번 얘기를 해봅시다 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이제 제1부가 끝나고 소크라테스가 이게 보아하니 글라우콘하고 아데이만토스하고는 얘기하면 자기가 좀 이렇게 곤란할 것 같지만 어쨌든 가는 데까지 가보자 해서 얘기를 한다.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해야 될 점은 플라톤의 대화편을 읽을 때 소크라테스가 끝까지 얘기를 한다고 해서 꼭 정답이 나오는 건 아니다.
그래서 사실 어떻게 보면 소크라테스의 얘기도 약간은 괴변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그렇다. 사실은 소크라테스가 이제 철학 정신의 아버지다 그런 얘기도 하고 그러는데 이게 대다수가 궤변인 것 같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어떻게 보면 지금 가끔 내가 정말 현실 세계를 살고 있는 것인가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책을 읽다 보면, 그러니까 소크라테스가 하는 말은 굉장히 현실 세계에서의 살아가는 사람들의 얘기보다는 정말 어디서 뚝 떨어져 내려온 사람의 절대적 기준을 자꾸 얘기하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가 방송국이지만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방송에 지금 지구상에 있는 모든 물건이 두 배로 커졌다는 뉴스가 나온다고 할 때 그 말의 참과 거짓을 판별하려면 커지지 않은 게 하나는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어쩌면 커지지 않는 하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살고 있기는 모든 것이 두 배로 커진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커지지 않은 하나는 좀 거짓 같기도 하고 궤변 같기도 하고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저는 또 이 얘기를 들으면서 트라쉬마코스에 대한 어떤 나쁜 생각, 안 좋은 생각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췄지만 저는 사실 케팔로스라는 사람의 생각도 본인은 그렇게 생각 안했겠지만 사회적으로는 굉장히 잔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주변 사람한테 비치지 않고 누구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고 평화롭게 살다가는 게 올바름 아니냐 라고 말하면 나쁜 의미에서 못된 짓을 하기 위해서 남한테 해를 끼치고 손해를 끼치고 돈을 안 갚고 그렇게 사는 사람도 있겠지만 못 갚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못 갚았다는 그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건 전혀 아니고 상황이 안 돼서 못 갚은 것을 올바름이 아니다 라고 말하기엔 좀 잔인한 게 아닌가 한다.
그렇다. 게다가 케팔로스는 우리가 요즘 흔히 사용하고 있는 말로 해보면 깔끔하게 살다 죽는 게 소원인 사람이다. 그런데 깔끔하게 산다고 하는 게 이건 올바름의 문제가 아니라 잘 사는 거냐로 가보면 상처받지 않고 상처 주지 않고 깔끔하게 파토스와 겪음과 스크래치도 없는 삶을 사는 것이 그 사람의 말하자면 바람일 수도 있다.
그게 올바름인지 모르겠는데 그 사람 개인적으로 그런 삶을 원했다면 잘 사셨겠다 싶긴 하다. 올바름인지는 모르겠다.
잘 산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파란만장한 인생을 원하지 않고 가령 가급적 사람을 안 만나고 아는 사람도 최대한 줄이고 그냥 이렇게 뭔가 파토스가 없는 책만 읽고 그러니까 철학책이 굉장히 즐겁다. 감동이 없어서 즐겁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이제 케팔로스를 좀 극단화시키면, 그런데 이게 지금 왜 이걸 문제 제기를 하느냐면 우리가 잘 산다라고 하는 것은 eu zen, 잘 산다고 하는 것은 소크라테스는 올바로 살아야 잘 산다 라고 얘기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잘 산다는 것하고 올바르게 산다는 것은 좀 별개로 느껴진다. 그러니까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하고 그 다음에 삶이 윤택하고 행복하고 eudaimonia, 그거 두 개를 결합시키려는 게 이 사람의 시도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잘 산다고 그럴 때는 쾌락적인 삶을 생각한다. 그러면 이제 당시 아테나의 사람들은 "잘 산다고? 그냥 즐기면서 쾌락적으로 살면 잘 사는 거지". 그러니까 거기에다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이다. 그게 올바름과 합치되지 않으면 잘 사는 게 아닐텐데 라고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저희가 지난 주에 얘기를 했던 내용이었다. 이제 이번 주에 벌어질 얘기들을 좀 해봐야 될 텐데 그래서 이제 본격적으로 소크라테스에게 피하지 말고 올바름에 대해서 깊게 한번 얘기를 해보자 라고 한다. 그런데 사실 올바름이라는 걸 그렇게 한 두 문장으로 정의를 할 수가 있는 건지 이게 고대 그리스에서 조차 가능한지도 잘 모르겠지만 현대는 사회가 너무나 복잡해서 그게 더 안 되지 않나 싶기도 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올바름이라고 하는 것은 한두 마디로 규정이 안 된다. 그래서 이제 소크라테스가 이렇게 제안을 한다. 게다가 사람에게 있어서의 올바름이라는 게 그렇게 또 만만치 않다. 그러니까 좀 큰 규모에서의 올바름이 어떻게 실현되는가를 살펴보고 그 다음에 한 개인에게 있어서 한 사람에게 있어 올바름이 실현되는 방안을 공유해보자 해서 논의가 약간 범위를 넓혀보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한 국가에서의 올바름을 생각을 하다 보니까 이 책의 제목이 《국가》라는 것이 되었다. 그런데 국가에서 올바름이라고 하면, 아주 간단하게 얘기를 하면 어떤 나라에 사는지가 그 사람의, 올바른 나라에 살면 올바른 사람이 되기 쉽고 엉망인 나라에 살면은 엉망인 사람이 되기 쉽고 이게 아주 간단한 논변이다. 그러니까 이런 것을 학문적으로 얘기할 때는 구조주의적인 논변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저는 그렇게까지 거창한 얘기를 할 필요 없고 사람이 노는 물이 좋아야 사람이 좋아진다, 그 정도로 이해를 하면 괜찮을 것 같다. 그러다 보면 이런 종류의 나라, 이런 종류의 나라, 이런 종류의 나라 이런 걸 찾아보지 않는가. 그러면 이론적으로는 최소한도로 이러이러한 것은 있어야 나라가 성립하겠지. 그것만 가지고 나라가 되겠는가 그런 얘기까지 전개하면서 그들의 나라는 어떤 식으로 다스려야 하는가, 누가 다스려야 하는가, 어떤 미덕을 가진 사람이 다스려야 하는가 이런 것들을 논의하게 되는 것이다.
교육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하는지.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에는 지도자나 군사 체계나 이런 게 중요할 테고 또 그러다 보면 군사를 키우기 위한 교육도 중요할 테고 그거에 집중했던 나라가 바로 옆에 있는 스파르타였던 것 같다.
그 당시에 아테나이 뿐만 아니라 지금 방금 거론한 스파르타 이런 나라들, 이때는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굉장히 평화로웠을 것 같지만 사실은 전쟁이 일상이었다. 고대사를 읽어보면 그냥 전쟁사라고 보고, 전쟁이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이 했던 유명한 말이 있다. 전쟁은 전쟁으로서 한다. 다음 전쟁은 지난번 전쟁을 가지고 한다. 그러니까 이번에 전쟁해서 이기면 그 점령한 나라에서 배상금을 뜯어다가 다음 전쟁을 하고 그래서 전쟁은 전쟁을 통해서 한다. 이게 이 당시 아테나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더군다나 첨단 무기가 발전해 있지 않으니까 사람들이 아주 현실적으로 타격감을 주는 전쟁터가 벌어져 있었다. 그러다 보면 이 나라를 지키는 사람들 즉 정치가라고 하는 사람의 제1덕목이 일단은 전사이다. 전쟁을 잘하는 사람 그래서 적에게 과감하게 용감하게 돌진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격정적인 사람, 이게 사실은 호메로스 서사시에 나오는 아킬레우스라든가 헥토르라든가 이런 장수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이상적인 인간형이고 영웅으로 칭송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을 먼저 길러놔야 나라의, 말하자면 안보 자체가 유지되고 그 다음에 지혜를 논의해본다든가 그런 얘기도 가능할 수 있겠다. 이 사람들 항상 전쟁 상태에 있었고 평균 수명이 30세에서 40세 정도였다. 18살이 된 아테나의 청년들 중에 아버지가 없는 사람이 거의 절반 가까이 되었다.
그러니까 소크라테스 같은 경우는 최소한 기록에 따르면 세 번 정도의 참전 경험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당시 사람들도 소크라테스를 그렇게 만만하게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전쟁 전투도 잘하고 지혜도 있고 어떻게 보면 이제 플라톤이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인간형이 소크라테스일 수도 있다.
그럼 플라톤이 말하는 지도자는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인지 이런 성향인 것인지.
그렇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아고라 즉 시장에 가서 사람들하고 대화를 했다. 사실 정치가는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런데 플라톤은 아테나의 시내의 외곽에 숲속에다가 아카데미아를 만들었다. 결정적으로 차이가 있다.
아는 사람만 보겠다. 아는 사람 정도가 아니다. 그냥 친한 애들하고, 거기까지 찾아올 수 있는 사람들, 그리고 형편도 좀 되고 그런 사람들. 그리고 그 당시에 아까 말씀하신 궤변을 일삼는 소피스트들은 돈을 받고 가르쳤는데 소크라테스는 그러지도 않았다. 적어도 내가 소피스트라고 불릴 수도 있겠지만 저 진짜 소피스트들하고 나하고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나는 돈을 받지 않고 가르친다는 것, 그런 점에서는 이제 플라톤이 생각하기에는 이상적인 정치가의 유형일 수도 있겠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얘기 또 플라톤이 바라보는 소크라테스 두 사람이 바라봤던 정치에 대한 얘기를 계속해서 하고 있다. 그 교육을 그러면 어떤 식으로 해야 된다고 말하는지. 그 군사 교육은 당연히 들어갈 것 같은데 군사 교육하고 다른 어떤 그 현명함이나 지혜에 대한 교육이나 이런 거에 대한 밸런스를 어떻게 얘기했는지.
지금 밸런스라고 말씀하신 게 굉장히 중요하다. 우리는 지금 밸런스라는 말을 쓰는데 플라톤은 조화라는 말을 쓴다. harmonia, 그러니까 밸런스라고 하는 것이 정말 상식적인 얘기인데 거기에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가게 되면 플라톤의 얘기가 된다. 가장 중요한 게 플라톤을 읽을 때 항상 이것은 거의 기본적으로 플라톤이 전제하고 들어가는 것이 뭐냐하면 인간은 정신으로서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 존재다 라고 얘기를 한다. 가령 플라톤이 시가를 교육해야 된다, 그리고 체육 교육을 해야 된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그런다고 할 때도 시가 교육은 당연히 정신의 순화를 목적으로 하고, 그 다음에 문학 교육이 아니라 정신을 아름답게 만드는 그런 교육이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져 온 아킬레우스라든가 이런 영웅들을 찬양하는 시가를 가지고 공부를 하면 안 되고 올바름에 대한 어떤 시가를 만들어서, 전통적으로 내려온 것 중에 그 부분만 발췌해서 그러니까 싸움질하는 부분은, 이게 검열인데, 일종의 싸움질하는 부분은 들려주지 않고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도 착한 얘기가 나와 있는 부분, 그런 부분만 들려주는 것 그게 이제 시가 교육이다.
그 다음이 체육 교육이다. 그런데 주의해야 되는 거는 앞서 말한 것처럼 플라톤은 모든 교육이 그리고 모든 생각이 인간은 정신으로서 인간 전체를 통제한다. 따라서 체육교육이라고 하는 것도 신체를 단련하는 게 아니라 체육교육을 하면서 굳센 정신을 기르는 데 목표가 있다. 그 당시에 그리스 사람들은 레슬링 했다. 그것을 하기는 하는데 그것을 하면서도 여기에는 플라톤이 정신과 육체의 관계에 관한 플라톤의 일종의 편견이라면 편견이고 하나의 독자적인 생각이 여기에 들어 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육체적인 훈련을 하면서도 정신이 단련된다. 그것을 이제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플라톤을 읽을 때 '아 이 사람은 증명을 안 하고 깔고 들어가는 게 있네'라고 하는 부분들이 몇 가지 있는데, 바로 그것이 정신이 육체를 온전히 지배한다라든가 그 다음에 신체 단련을 해도 그것은 정신을 위한 것이라든가 이런 것들. 물질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해도 현대 심리학이라든가 이런 데서 완전히 논박이 되는 얘기들이 이 사람은 밑바탕에 깔고 있다.
이런 얘기가 '아니 정신이 당연히 신체를 지배하지 몰랐어? 당연한 거야'라고 우기는 것처럼 들린다.
그런데 하나의 세트가 있다. 한 세트. 그러니까 플라톤이 전제하고 있는 논변의 그 밑바탕을 전제로 해서 그 세트 안으로 들어가면 거기서 완결된다. 하나의 계라고 할 수 있죠. 서로 영역을 넘나들지 않는 물리적 계. 그런 것처럼 플라톤의 계가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서로 통약불가능하다고 한다. 그 계의 제일 밑바탕에 놓여 있는 제1전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논변 자체가 서로 안 되는 거 있지 않은가. 그런 것처럼 플라톤은 그 것 몇 가지를 가지고 있다. 궤변이라고 말하는 것도 굉장히 설득력이 있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 내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이 현실 세계가 모든 게 어이없는 차원에 있는 것일 수도 있어 라는 그런 것을 가정한 영화들 있다. 그것을 한번 생각을 해보면 된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도저히 서로 화해할 수 없는 계들이 있다. 현실 세계에도 그러니까 이런 거는 궤변이라고 생각하면서 한 번 더 읽어보면 이거는 사유 실험이 될 수도 있다.
궤변까진 아니지만 뭔가 증명이 안 되는 기본적인 근거 몇 개를 그 전제라고 설정을 해놓은 것 같다. 자 이건 내가 말하는 옳은 거야. 그러니까 이건 깨지 말고 여기서부터 생각하자. 뭐 이런 느낌이다.
모든 철학은 그렇게 시작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도 다 그렇게 시작한다. 일단 우리가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는 부끄러운 일을 수치스러운 일을 자기가 생각하게 당했다고 하면 자살을 했다. 그리고 그게 영웅적인 행위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게 중세에 들어서면서 자살은 절대로 안 되는 것이었다. 자살한 사람은 시신을 수습해주지도 않았다. 그것은 아예 서로 타협되지 않는 계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계는 '아니 이 좋은 세상 몸 건강하게 잘 보살펴서 오래 살아야지' 이게 계이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가 정말로 올바르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한 번 생각해 보면, 플라톤이 몇 가지를 놓고 이것은 타협할 수 없어 라고 말하는 건 누구하고 타협이 안 되는 거냐 하면 당시 아테나의 사람들하고 타협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이 우리가 보기에는 별거 아닌 몇 가지 가정들인데 그 가정들이 당시 사람들의 가슴 속에 굉장히 심하게 파고들었다.
결국 그래서 제일 중요한 건 시가, 정신, 지혜 이런 걸 교육하는 것이고 신체 단련, 체력 단련 역시도 정신을 교육하기 위한 일환이고 이렇게 본 거 같다. 일대일 대응은 안 될 것 같지만 조선시대로 얘기하면 문관, 무관 이렇게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조선시대는 무관들이 많이 천시 당했다. 그런데 이 시대에는 무관들이 천시 받을 만한 상황은 아니지 않았나. 간단히 말하면 무관들이 존중받았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반대로 얘기를 하고 있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 시가 교육과 체육 교육을 맨 먼저 거론한 것이 그 당시 사람들이 가장 널리 하던 게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오전에는 호메로스 서사시 외우고 오후에는 김나지움에 가서 체력 단련하고 이 두 가지 했다. 이렇게 살았다. 그게 정신을 위한 게 아니라 그저 신체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고 그런 신체의 즐거움을 향유하는 데 필요한 모든 그런 자원들이 있는데 그런 자원들을 정치 체제를 통해서 공급을 받았다. 그게 민주정치가 기여한 바다. 그러니까 일단 사람들이 가장 기본적으로 하는 게 아침에 서사시 듣고 오후에 운동하는 것, 그게 너의 신체의 즐거움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럼 그 부분을 찔러서 그게 사실은 정신의 조화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라고 시작을 해 들어가는 것이다.
목적을 살짝 다르게 주는 것인가.
그렇다. 그 사람들도 올바름이 목적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사실 따지고 보면 쾌락이 목적이고 이익이 목적인 것이고 나는 진정한 올바름이 목적이다 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같은 것을 해도 목적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다른 것으로 그것이 의미가 부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단 생각할 부분이 상당히 많은데 그 당시에 아테네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을 것 같다.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 같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이제, 사람들이 이제 언짢아 하는데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읽어보면 재판정에서 언잖아 하는 사람들에게 더 언짢아 하라고 일갈을 한다. 흔히 하는 말로 죽을 짓을 한다. 아주 아슬아슬하게 사형이 통과가 됐었다. 그런 점들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사실 현대에 발전된 사회에서는 어떠한 올바름이라는 기준을 법으로 많이 설정을 해놓는다. 그래서 이것을 어기지 말고 이 틀 안에서 살면 그래도 최소한의 올바름 정도는 가질 수 있다는 게 되는 건데 어떻게 보면 소크라테스트는 올바름이 사람마다 좀 다를 수도 있고 국가마다 다를 수도 있고 약간은 추상적인 면이 있었다면 많은 발전된 국가들이 이것을 완전히 명문화해서 살고 있다. 객관적인 기준을 제시를 한 셈인데 이렇게 법치가 완벽하지 않은 그 시대에서는 어떻게 보면 지도자의 성향이나 지도자의 의지나 이런 걸로만 컨트롤을 다 해야 한다. 그게 굉장히 어려웠을 것 같고 어떤 경우에는 코에도 걸었다가 귀에도 걸었다가 했을 것 같다.
그렇다. 당시에 아테나이 같은 경우는 어느 정도 법에 의해서 객관적인 공정성 이런 것이 확보가 돼 있는 상태다. 그러면 우리가 그런 것을 산술적 평등이라고 흔히 부른다. 플라톤도 그건 알고 있다. 산술적 평등 가지고는 올바름이 실현되지 않는다. 즉 개개인의 차원에서는 나는 이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해 그러면 그냥 자기 방 구석에서 올바르면 된다. 그런데 객관적인 상황 속에서 정치질서나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데 올바름이라고 하는 것은 많은 사람이 민주정체에서는 자기의 주의주장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올바름의 기준은 결국 산술적 평등이라는 방법밖에 없다. 그런데 산술적 평등으로 하다 보면 처음에 예를 든 것처럼 못 갚고 죽는 사람,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배려를 해야 한다. 그래서 사실은 플라톤이 말하는 수호자의 성향, 그것은 그런 것들까지도 다 고려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진 사람이 일단 있어야 된다고 생각을 한다. 그리고 이게 《국가》에서는 그게 나오질 않았는데 플라톤이 쓴 대화편 중에 《정치가》라는 대화편이 있는데 그 《정치가》라는 대화편에 보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치가는 입법가이면서 장군이면서 사람들을 잘 설득하는 연설의 대가이어야 한다. 이 세 가지의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를 한다. 그렇다면 입법가인데 그것은 객관적인 기준을 세워서 산술적인 평등으로 사람들에게 제시를 하고, 못 갚고 죽는 사람들의 억울함이 없어야 하니까 그런 억울함에 대해서도 뭔가를 고려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이제 정치가가 돼야 된다는 것이다. 사실 법치국가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썩 만족스러운 상태는 아니다. 누구나 다 평등하다는 것도 그렇게 만족스럽지 않고, 그러다 보면 객관적인 기준만 강조하다 보면 이제 우리 한국 사회에서 가장 널리 통용되는 기준 중에 하나인 시험 점수가 사실은 서방 선진국에 가면 시험 점수 가지고 뭐든지 다 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지금 공정성이라고 하는 것, 그게 과연 못 갚고 죽는 사람들은 돈 없어서 못 갚고 죽었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공정하다, 어쨌든 그 사람의 인생이고 그 사람의 운명이고 그 사람의 팔자다 라고 말하는 게 과연 공정할 수는 있는데 올바른 것이냐 거기까지 생각해야 된다.
뭔가 기계적 평등에 대한 거에 대한 지적인 것 같다. 기계적 평등이라는 게 일반적으로는 옳을 수 있지만 그게 일반적이지 않은 경우까지 적용하기에는 잔인할 수 있다, 올바르지 않을 수 있다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이게 간단히 얘기할 수 없는 부분이긴 하다. 그렇다고 해서 객관적 기준을 아예 없애고, 그러나 객관적 기준보다 나은 기준을 찾는 게 쉽지 않은 일인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 그러니까 신분제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노예여도 그렇다. 온 사회가 다 그렇게 돼 있으니까 그 어떤 노예도 반항하지 않으니까 또 있는 사람들끼리도 딱 지분이 정해져 있다. 그런데 민주적 국가가 되면 사실 이게 굉장히 심각한 문제가 된다. 억울한 자가 생기고 공정함이 문제가 되고 노력하면 뭔가 될 것 같은데 왜 나도 노력을 했는데 왜 나한테는 그것에 합당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가 이런 문제들이 아테나에서 사실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중세나 또는 마키아벨리나 이런 정치 사상가들은 사실은 아주 편리했다. 자기의 그 생각을 펼치기에 힘센 군주에 대해서만 얘기하면 되니까.
그러니까 지금 제가 생각하기에 전 세계에서 가장 극한적으로 고통스러운 정치 사상을 논한 사람들이 조선시대 선비들이다. 한국 사람들이 민원의 왕이다. 역사를 읽어보면 전 세계적으로 그런 민원이 있었던 때가 별로 없다. 농민 반란이라든가 이런 것. 역사적으로도 없다. 중국은 황제 절대 권력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게 없다.
서양 정치학자들 중에 우리나라의 그런 역사들을 보고 너네 나라의 왕은 참 민주적이었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민주적이라고 보다는 그게 플라톤이 살던 당시의 아테나이와 지금 한국의 그런 전통적인 모습과 굉장히 유사한 점이 있다. 그러기 때문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한이 맺혔다 라는 말을 세 글자로 말하면 억울함인데, 이게 사실 플라톤이 집중적으로 논의하고 있는 문제가 못 갚고 죽은 사람의,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의 억울함 그 문제이다. 이게 기계적 평등만 가지고는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플라톤이 말하는 올바름이라고 하는 건 그런 모든 것을 다 고려할 수 있고 어떤 때는 좀 강압적인 수단을 쓸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유화적인 수단을 쓸 수도 있다. 플라톤이 생각하기에 정치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 중에 하나는 올바른 때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것까지 고려하는 능력, 그것이 플라톤이 현실 국가를 구상할 때 그런 점들을 생각해 봤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가 현실 세계에서, 가령 제가 오늘 빨간색의 셔츠를 입고 왔는데 이 셔츠가 원래 아주 빨간색이었다. 그래서 오랜 세월 동안 입고 세탁을 하다 보니까 색이 옅은 핑크색으로 변질이 되었다. 그러니까 이것을 빨간색을 유지하려면 빨간색을 더 하든지 해야 된다. 그러니까 올바름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현실 세계 속에서 살다 보면 마모되기가 쉽다. 그러니까 그거를 극복하는 방법은 계속 올바름을 주입하거나 즉 운동을 해야 된다. 재생산 운동. 그렇게 하는데 이게 필요하다.
어떤 이상적인 것이, 우리가 '그건 이상이야' 이런 얘기를 한다. 그런데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에 대해서 왜 우리가 논의를 해봐야 하느냐 하면 우리의 현실을 항상 비루하다. 사람이 태어났을 때는 심장이 그렇게 빨리 뛰지 않는다. 조금만 뛰어도 몸의 신체에 피를 돌리기에 어려움이 없기 대문에 그런데 많이 살다 보면 심장도 계속 일을 하다 보니까 계속 많이 뛰어야 되는 경우가 된다. 그만큼 많은 운동을 해야 한다. 유지를 하려면 심장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이것에 타협하고 저것에 타협하고 얘는 좀 봐주고 쟤는 억울하다니까 더 봐주고 하다 보면 나중에 아무런 기준도 없이 모든 이에게 잘해주다 보면 그냥 아무 기준도 없이 무너지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너는 내 편이니까 봐주고 쟤는 적이지만 좀 그래도 좀 짠해 보이니까 봐주고 그래서 이게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이런 것들이 어느 정도 기준이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모든 사람이 우리 사회가 가장 멋있었을 때를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자 하고 제안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부족해지고 현실하고 타협하면서 색이 바랬을 때 다시 올바름을 채워 넣는 그런 게 필요하다는 말씀이었는데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 되는 것 같기도 하다.
플라톤은 빨간색 염색 공장 공장장이거나 아니면 빨간 셔츠를 만드는 빨간 셔츠 전문 옷가게 사장님이시거나 그런 거라고 할 수 있다. 색이 바래면 빨간 셔츠 갈아입으실 때 되었네요 라고 말해 주는. 그런데 이제 어떤 사람은 그런다. 이게 오래 있고 그래서 몸에 익숙하고 그러니까 그만 귀찮게 굴어. 뭔가 팔아먹으려고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아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사실은 그게 철학자들이 흔히 받는 오해이지만 그래도 제가 보기에는 플라톤만큼은 그런 오해는 안 받은 정도이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해본다. 현실과 이상이라고 하는 이분법이 있다. 현실을 따르자니 이상이 마음 아프고 이상을 따르자니 현실이 쓸쓸하고 뭐 이런 얘기한다. 그것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셔츠가 좀 빛이 바랬구나. 빨간 물감 좀 칠해야겠네 할 때 이런 책을 읽는 것이다.
이상적이기도 하고 비현실적이기도 한 공동체의 올바름을 또 오늘 나눈 얘기를 요즘 국가에 적용한다면 어떻게 될지.
민주정 국가에 사는 사람의 덕목은 누구나 다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부를 해야 된다. 그게 사실은 굉장히 중요하다. 이분법으로 적과 아군을 나눠서 하면 굉장히 편한데 그건 나에게나 편하다. 그러다 보면 내가 살고 있는 공동체가 엉망이 되고 결국 내 후손들이 엉망인 공동체에서 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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