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원과 책담화冊談話(https://booklistalk.podbean.com)에서 제공하는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통해 살펴보는 개인과 사회-2」를 듣고 정리한다. 2023.05.26 북수원도서관에서 진행된 강의이다.
2023.05.26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통해 살펴보는 개인과 사회 - 2
강의 안내
수원시비정규직노동자복지센터(http://swbjk.kr/community/board_view.asp?idx=2442)
고전으로 알아보는 우리사회
우리에게 생각을 할 기회를 선사하는 '고전'
○교육일정: 2023.05.12.(금)~06.09.(금) 매주 금요일, 오전10시~12시
○신청방법: 북수원도서관 홈페이지 또는 수원시도서관 모바일 앱(통합예약신청-독서문화프로그램)
○교육방법: 대면교육
○교육장소: 북수원도서관 강당
그러면 이제 소크라테스가 이런 상황에 처해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얘기했는데 강의 자료를 한번 보자. 강의 자료를 보면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실제로 있었던 재판을 근거로 해서 플라톤이 각색해서 일종의 드라마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법정 드라마 같은 것이다. 드라마 같은 것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니까 시작과 끝이 있는데, 이런 것들을 그 당시 희랍 사람들 특히 이제 아테네에서도 드라마를 만드는 그런 일반적인 규칙인 일종의 드라마 작법이 있다.
오늘날의 드라마는 작가들마다 정하는 작법들이 있다. 그래서 드라마의 작가의 개성이 드러난다고 말한다. 그 개성을 personality라고 한다. individuality과 personality를 보자. person은 persona라는 라틴어에서 나왔다. 가면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personality라고 하면 개성이라고 하는 것은 맞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individuality가 아니라 사회적 영역에서 그의 것이라고 식별되는 특성을 personality라고 부른다. 특성이라고 번역하는 게 정확하다. 그 무슨 작가의 personality라고 하면, 드라마 작가들이라고 하는 집단이 있고 그 드라마 작가들의 집단에서 그 사람의 것으로 우리가 식별할 수 있는 특성 그것을 personality 라고 한다. 항상 personality라는 개념은 상대적이고, 타고난 게 아니다. 가령 제가 강의하는 personality가 있다. 저의 individuality와는 상관없다. 도서관에서 강의하는 사람, 그 강사들 중에서 강유원이라는 강사는 이렇게 강의를 하더라. 그게 personality이고 저의 individuality와는 관계없다. 저의 individuality는 저만 알고 있다.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그것은 이제 정체성이라고 그러는데 identity라고 하는 것은 사실 자기 혼자만 알고 있는 것이다.
여기 플라톤의 personality라고 할 것이 없고, 이 당시 그리스의 드라마들은 대화편이라고 부르는 건데, 사람과 사람이 대화하는 거니까. 그리스의 드라마들은 모두 다 동일한 작법에 따라서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personality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라고 하는 것은 《메데이아》에서 에우리피데스쯤 왔을 때 personality가 생긴다. 그래서 《메데이아》를 현대적이다 이렇게 말한다. 즉 personality를 식별해서 볼 수 있으면 현대인 것이다.
classical, classical music은 고전 음악이라고 그런다. 그러면 이것은 classical이라고 하는 게 고전적이라고 번역이 되는데 이 고전적이라고 번역이 되는 것은 시기를 따지는 게 아니라 규범을 따지는 것이다. classical music은 규범적 음악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고전 음악이라고 번역을 하는 것보다 규범적이다. 왜냐하면 고전이라는 게 古가 들어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뭔가를 만들어도 classical 한 경우가 있다. 가령 강유원은 글을 쓸 때 classical 하게 글을 쓰더라 그러면 21세기 사람인데 classical 하게 쓰더라. 그러면 오래도록 글쓰기에서 정해진 규칙을 따라 쓰더라 그러면 classical 한 것이다. 고전 음악이 있다. 라흐마니노프는 classical music이다. 그러니까 classical music에서는 조성진, 임유찬 연주하는 건 똑같다. 연주하는 건 똑같은데 왜 그게 계속해서 똑같은 것만 하는가, 규범이 있다. 그 분야에서는 고전 음악 연주 분야에서는 얼마나 열정적으로 연주하느냐 얼마나 차분하게 연주하느냐 이런 걸 따진다. 새롭게 창작된 것을 보지는 않는다. 새로운 건 없다. 연주하는 사람이 새로울 뿐이다. 그런 classical music이 뭐냐 해서 반항에서 나온 게 이제 Rock 음악이다. 각각의 individuality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드라마도 현대 드라마가 좋다. 플라톤 같은 경우에는 거기 보면 저는 알지 못합니다 라고 시작해서 신을 빼고는 모두에게 불명하다. 신을 빼고는 모두 다 모릅니다 라는 얘기다. 이런 것을 시작과 끝을 일치시킨다 해서 ring composition 작법이라고 한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도 그렇고 플라톤의 대화편도 그렇고 ring composition이라고 한다. 시작과 끝이 똑같아서 어디에서 시작하고 어디에서 끝났는지 알 수 없는 그런 것이다 해서 수미일관하다 라는 말로 쓴다.
여기서 지금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저는 알지 못합니다 라는 말로 시작해서 신을 빼고는 모두 다 모르고 있습니다 라고 끝냈으니까 이 대화편의 표면적으로는 플라톤은 뭘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데 저는 알지 못합니다 해서 신을 빼고는 모두에게 불명한 일입니다 이 사이에 들어 있는 것은 소크라테스를 빼고는 모두 다 무식하다. 이 대화편의 표면으로는 소크라테스가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라고 말을 하는데 시작과 끝에서, 중간에 그 얘기가 나온다. 중간에 아테네 사람들 중에 자기 혼자 유식한 것 같다는 얘기를 한다. 그러면 어떤 말이 진실인가. 플라톤이 지금 여기다 써놓기를, 이게 되게 중요하다. 고전 텍스트를 읽을 때는 내용도 중요한데 형식을 잘 봐야 한다. 이 형식을 잘 보면 이 텍스트 이해의 30%는 된다. 플라톤이 지금 소크라테스는 저는 모릅니다. 나는 모릅니다. 신을 빼고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럼 신을 빼고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면 소크라테스도 모르고 아테네 시민들도 모른다는 얘기다. 일단 표면적으로는. 그런데 중간에 보면 내용이 소크라테스가 델포이에서 이렇게 얘기를 들어보니까 나 혼자 유식한 것 같아, 진짜 아테네 사람들 다 무식하고 나 혼자 유식한 것 같아 라는 얘기를 한다. 그러면 중간에는 자기가 유식하다는 얘기 한 마디하고 시작과 끝은 무식하다는 얘기를 한다. 무식하다기보다는 무지하다고 얘기를 한다. 무지라는 게 앎이 없다 라는 말이다. 그러면 소크라테스는 무지한 사람일까 아니면 중간에 있는 것처럼 아테네 시민 중에 소크라테스만이 앎을 가진 사람일까. 지금 독자들로 하여금 플라톤이 고통을 주고 있다. 아는 사람인가 무지한 사람인가.
플라톤이 이렇게 써 놓은 것은 무엇인가. 소크라테스가 뭔가를 아는 사람이냐, 소피아 즉 지혜를 가진 사람이야 아니면 모르는 사람이야의 소크라테스의 아이덴티티 정체가 불분명하다. 그게 바로 플라톤이 노리고 있는 것이다. 우선 바로 그것을 아이러니라고 한다. 이렇게 작품을 만드는 걸 아이러니 작법이라고 한다. 일단 기본적으로 플라톤의 대화편은 구조적으로는 수미일관인데 내용은 아이러니 작법을 사용하고 있다. 모순은 양립 불가능한 거고 아이러니는 시치미 떼기이다. 아이러니의 뜻은 뭐냐하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 같다. 의미가 굉장히 복잡하다. 그런데 아이러니의 1번 뜻은 뭐냐하면 시치미 때기이다. 즉 플라톤은 우리에게 소크라테스는 이 안에서 나는 모릅니다 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안다고 얘기를 한다. 그러면 이게 사실은 처음에 모른 척하고 있는 것이다. 이게 시치미 떼기이다. 그니까 언제든지 발을 뺄 수 있는 상황이다. 그 다음에 두 번째로 소크라테스가 이 안에서 시치미를 떼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소크라테스가 sophos인지 아니면 무지한 자인지를 알아내기가 어렵다. 다시 말해서 소크라테스는 앎을 가진 자일 수도 있고 앎을 가지지 않은 자일 수도 있다고 우리가 추론할 수 있다. 즉 시치미 떼기의 효과는 독자들로 하여금 소크라테스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든다. 그래서 계속해서 읽을 때마다 소크라테스가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이번에 읽어보니까 이 사람이 아는 사람 맞네, 그런데 다음에 아니야 역시 무지한 사람이야, 이렇게 계속 왔다 갔다 하게 만든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말 그대로 중간자라고 한다. 그러면 소크라테스는 가운데 있는 사람이다. 가운데 있는 사람은 무엇인가. 비겁한 사람인가. 가운데 있는 사람, 구경꾼, 구경하는 사람이다. 그 상황에다 발을 안 담근 사람이다. 우리가 이론이라는 단어를 쓸 때 theory이라는 말을 쓴다. 희랍어 theoria에서 나온 말인데 theoria는 이론이 아니라 구경이라는 뜻이다. 남 일처럼 보는 것이다. 사실은 상황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당하는 사람이 아니다. 두 사람이 싸울 때 훈수 두는 사람이 제일 잘 안다. 즉 당사자 두 명 사이에서 구경하고 있는 사람이 상황을 가장 잘 안다. 그러면 지금 이 《소크라테스의 변론》이라고 하는 텍스트는 플라톤이 우리에게 전해주는데, 소크라테스의 재판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고 드라마화 되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재판을 구경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구경꾼이다. 그러니까 플라톤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건 뭐하냐면 구경꾼의 입장에서 소크라테스의 재판을 볼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태도로 읽어야 하는가. 소크라테스를 편 들어서도 안 되고 소크라테스에게 사용 선고를 내린 사람을 편들어서도 안 되고 냉정하게 한 발 물러서서 이렇게 구경을 해야 된다 이것이다. 그렇게 읽어야 한다. 그러니까 이 책을 읽기 전에 소크라테스는 민주주의를 반대한 사람이라더라. 나쁜 놈이네 이렇게 하고 들어가면 안 된다 그 말이다. 지금 앞서 얘기한 것처럼 민주정이냐 아니냐는 안 중요한 문제이다. 소크라테스가 당시 사람들에게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고 하는 문제가 뭐냐가 중요하다.
우리에게 지금 소크라테스의 재판은 남의 일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얼마든지 이 텍스트를 구경꾼의 입장에서 읽을 수 있다. 벌써 플라톤은 이렇게 설정을 해가지고 독자들이 어느 입장에 서서 이 텍스트를 읽을 것인지를 우리에게 딱 정해준다. 무시무시한 사람이다. 이것이 아직까지도 읽히는 이유인 것이다. 이것을 읽고 나서 그래 소크라테스가 잘못했네, 아니야 당시 아테네 사람들이 죽인 게 나빴어 이런 것을 우리가 얘기하는 게 아니다. 이것을 계속해서 읽어야 하는 이유가 텍스트적으로도 구성이 탁월한 것이다. 강의자료를 보자. "아테네인 여러분. 저는 이곳의 말투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생소합니다. " 그런데 법정에서 아테네인 여러분 그러면 안된다. 제가 법정에 갔는데 재판관님 그렇게 하지 않고 서울 시민 여러분이 그런다든가 또는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이런다든가 그러면 안 된다. 안중근 의사가 재판장에서 이렇게 얘기를 한다. 우리나라 독립운동하던 양반들은 재판장 여러분 나는 이렇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사람 취급을 안 하니까 부르질 않는다. 아주 중요한 포인트이요. 그러니까 지금 아테네인 여러분 법정에서 이렇게 말하면 여기 앉아있는 재판관들 무시하는 것이다. 민감하게 호칭 하나가 그렇게 되어있다. "법정에 있는 일들을 재판관이라고 부르는 장면은 자신에게 무죄 표결한 이들을 부를 때뿐이다. " 그리고 재판관을 왜 재판관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이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것은, 출석을 했으니까 인정을 한다. 자기가 살고 있는 이 시스템 안에서는 인정을 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재판은 정치범 재판이다. 젊은이를 타락시켰다고 하는 것. 가령 제가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어디서 가르쳤는데 그것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제가 어디 잡혀가서 재판을 한다고 해보겠다. 그럼 그것은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이다.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이곳의 말투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생소합니다." 여기서 생소하다는 단어가 희랍어로 atekhnōs이다. 서툴다는 것이다. 왜 생소하겠는가. 재판을 처음 받아보니까 생소하고 일부러 자기가 여기에 낯선 사람이라고 하는 것처럼 지금 아이러니를, 계속 시치미를 떼고 있는 것이다. 손님이라고 하는 말이 있다. 플라톤의 대화편를 읽으면 손님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가끔 나온다. 이 손님이 누구인가. 우리가 손님이다. 지금 소크라테스의 재판을 다룬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는 손님이다. 손님은 누구인가. 이곳 관행에 익숙하지 않기도 하지만 현명한 외부의 관찰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아테나이 사람이지만 재판정에 딱 들어서면서부터 자기는 이곳을 생소한 사람이다 라고 말하면서 지금부터 내가 하고 있는 얘기는 여러분들에게 손님의 입장에서 얘기하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실제로 그렇게 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이것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소크라테스의 입장 속으로 이입하기 시작한다.
그 다음에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이 사실로 해서 내가 더 현명한 것 같다고 말했다. 아테나의 사람들은 자기가, 소크라테스가 이렇게 아고라에 다니면서 물어본다. 계속 물어보니까 사람들이 이렇게 안다고 얘기를 하는데 소크라테스는 계속 거기다 계속 묻는다. 그러고 보니까 내가 모르는데 알고 있는 것처럼 느끼고 있었네 라고 대답을 듣는다. 그러면 소크라테스가 그거 봐 모르는데 아는 것처럼 생각을 했잖아, 그렇게 즉 뭐냐하면 네가 모르고 있는데 아는 것처럼 생각했잖아, 그런데 사실은 너는 네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안다.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아는 사람이라고 얘기했다. 자기는 적어도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모른다는 것"을 모른다. 소크라테스는 그래도 아는 사람이다.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무지의 무지"이고 소크라테스는 "무지의 지"이다. 그러다가 이제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은 굉장히 소극적이다. 내용이 아무것도 없다. 내가 무식하다는 걸 알았어 그러면 이제 그 다음에 진짜를 아는 것 여기까지 가면 이 사람들을 우리는 sophos라고 한다. 아는 자 즉 sophia, 지혜, 앎. 그러니까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사람들에게 얘기하는 것은 자기가 딱 한 가지 측면에서 현명한 것 같다고 얘기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다음에 놀라워하는 것 그 바로 아래에 보면 캐묻기exetasis라고 하는 말이 있다. 소크라테스가 사람들에게 너 무식하지 이것을 따져 묻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좋은 게 무엇인지를 물어보러 다녔다. 죽을 짓 했다. 사람들한테 물어본 것이다. 묻기만 하면 좋은데 이 사람이 가만히 보면 죽을 짓 했다.
희랍어로 epitumia, 탐욕이다. 물질적인 것에 대한 탐욕이다. 욕심이 아니다. 공부 욕심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당대 아테네 사람들이 epitumia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을 했다. 추상적으로 말하면 철학에서는 이것을 추상적으로 hedonē라고 한다. 영어로 hedonism은 쾌락주의이다. 쾌락이라고 하는 말은 정신적인 것도 있고 물질적인 것 육체적인 것도 있다. 이것을 쾌락이라고 그러는데 이거는 나쁜 의미로 쓸 수도 있고 좋은 의미로 쓸 수도 있다. 그런데 epitumia는 아주 명백하게 물욕이다. 사물에 대한 욕망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딱 부동산이다. 사회 구조가 달라지면 그 욕망은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소크라테스가 물어본 것이다. epitumia와 timē, timē는 명성, 남들에게 알려지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너무나도 원하는 것이다. 부를 쌓고 명성을 떨치는 것, 그것에 대해서 물었다. 그게 좋은 거라고 생각해라고 물었다. 그러니까 그게 기분 나쁘겠다. 그러니까 괘씸죄에 걸린 것이다. 너는 그것이 좋은 거라고 생각하냐고 진짜 좋은 것이 무엇이냐 라고 계속 캐묻고 다녔다. exetasis, 그게 바로 신념 체계와 삶의 방식을 전환할 것을 요구하는데 소크라테스는 마지막에 법정에서 이렇게 얘기를 한다. "그대는 가장 위대하고 지혜와 힘으로 가장 이름난 나라인 아테네의 시민이면서 재물은 최대한으로 많아지도록 마음 쓰면서 또한 명성과 명예에 대해서도 그러면서 슬기와 진리에 대해서는 그리고 자신의 혼이 최대한 훌륭해지도록 하는 데 대해서는 마음을 쓰지도 않고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까?" 거기 부끄러워라고 하는 말이 포인트이다. aiskhynē, 부끄러워하다. 그러니까 소크라테스가 한 거는 이것이다. 아테나이 사람들의 epitumia에 대해서 또 timē의 추구에 대해서 exetasis를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창피한 줄 알아, 진짜 좋은 것이 뭔지도 모르고. 죽을 짓을 했다. 화난 사람의 숫자가 아슬아슬 많았던 것이다.
(박종현 번역) 29d. 그대는 가장 위대하고 지혜와 힘으로 가장 이름난 나라인 아테네의 시민이면서, 그대에게 재물은 최대한으로 많아지도록 마음 쓰면서, 또한 명성과 명예에 대해서도 그러면서, 슬기와 진리에 대해서는 그리고 자신의 혼이 최대한 훌륭해지도록 하는 데 대해서는 마음을 쓰지도 않고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법적으로 죄가 있는 것을 crime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crime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 liability이라고 그런다. 책임을 진다, 법적 책임이 있다 그럴 때. 그런데 도덕적으로 죄가 있다는 걸 sin이라고 하고 이것을 responsibility라고 한다. 그러니까 지금 사람들한테 우리는 그거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해서 사회 공동체가 굴러가지는 않는다는 걸 알다. responsibility가 작동하는 영역이 있다. responsibility가 없는 경우, responsibility마저도 작동을 안 시키면 사회가 깨지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근원적으로 생각한 것이다. 당시에 아테나이에서도 법이 있었다. 근데 사람들한테 crime을 문제 삼는 게 아니라 sin을 문제 삼은 것이다. 부끄러운 얘기가 나왔으면 도덕적인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좋음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합의가 되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것이다. 끝없이 epitumia와 timē, 명성을 추구하는 것도 epitumia겠다, epitumia와 epitumia가 결국 부딪히면 욕망이 센 자, 지배력이 강한 자, 그 다음에 무력이 강한 자가 이기게 되어있다. 그러니까 소크라테스가 이렇게 원리적인 얘기를 하고 플라톤의 《국가》를 읽어보면 어떤 나라가 좋은 나라인가, epitumia를 억제하고 진짜로 좋은 것을 아는 사람이 세상 물정을 좀 익힌 다음에 통치하는 나라가 좋은 나라다. 플라톤의 《국가》를 읽어보면 철인 통치자라고 그러는데, 철학적 정치가이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참다운 의미에서의 쾌락을 알고, 그 사람들은 epitumia가 없다. 이것을 완전히 제거한 상태에서 좋음이라고 하는 것을 실현하는 방책을 계속 궁리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다스린다고 해서 훌륭한 나라가 되는 건 아니다. 그것에 대해서 사회학적으로 정치학적으로 따져 묻는 게 아니라 이념적으로 얘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소크라테스는 그 당시에 아테네에서 그렇게 얘기를 했던 것이다. 거기 마지막 문장을 보자. "아테나아 사람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사회혁명과 정치혁명의 난관을 이겨내고 마침내 민주정체를 쟁취했는데", 민주정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민주정 국가에서 산다고 해서 올바른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니다. "시민들의 생활 양식이 올바름을 지향해야만 더 많은 이의 더 나은 삶이라고 하는 민주정체의 탁월함이 실현되는데 민주정체가 의사결정 방식이 아닌 만민의 평등과 행복이라는 민주주의 이념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평등도 필요하고 행복도 필요한데 그것을 모든 사람이 가능하면 골고루 누리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모든 이가 자기 욕망 실현을 위해서 싸움을 벌이면 안 된다는 게 여기 있는 것이다. 즉 도덕적인 responsibility, 이 responsibility와 aiskhynē를 아는 사람이 도덕적인 책임을 이렇게 지게 된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도덕적 책임을 지게 된다. 더군다나 오늘날처럼 개인주의가 딱 자리를 잡고 내가 원하는 것은 재산으로서 실현할 수 있다 라고 생각하면 어떤 특정한 직업 영역에서 통용되던 질서들이 깨진다. 직분이라고 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사회는 liability만 가지고 움직이지 않는다. responsibility, aiskhynē 이런 것들이 있어야 작동하는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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