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시대 이달의 문화시선 | 플라톤, 현실국가를 캐묻다 3

 

2023.03.21 문화시대 이달의 문화시선 | 플라톤, 현실국가를 캐묻다 3

지난 시간에 내가 똑바로 산다 하더라도 그것을 사회와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는 나한테는 편할지언정 내가 살고 있는 공동체를 망칠 수도 있다 라는 얘기를 해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 라고 했는데 이제 그 이야기에 이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플라톤의 《국가》를 열심히 공부를 해보겠다. 서론과 제1부에서는 올바름이라는 게 무엇인가에 대해서 대체로 얘기를 했던 것 같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를 얘기했다면 제2부에서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제1부에서 말했던 바람직한 공동체, 그 바람직한 공동체를 만들려면 일종의 기준이 있어야 한다. 무엇이 바람직하고 뭐가 좋은지. 그런데 사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살고 있던 당시에 아테나이는 민주정이기 때문에 민주정의 정치가들은 옳은 것에 근거해서 뭔가를 하지 않고 표가 되는 것에 근거해서 뭘 하지 않았겠는가.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할 것이다. 물론 대중의 지지를 얻지 않을 것도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사람은 민주적인 국가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아테나이에서는 무엇보다도 그 중간을 거르는 의회라든가 이런 장치가 없으니까 대중들과 직접 만나서 정치적인 것을 해야 했다. 그런 까닭에 그 사람들은 올바른 것을 하기보다는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하기 마련이다. 그들이라 하면 유권자들이 좋아하는 것을 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유권자들이 좋아하는 것을 하려다 보면 끝없이 좋아함을 따라가다 보면 나중에는 그것이 어떤 정말로 좋음이었는지를, 그들이 좋아하는 것과 진짜로 좋은 것과의 거리를 극복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 된다. 그러면 그 공동체는 정말로 좋은 것과 사람들이 좋아하고 있는 것과 그 균형을 맞출 수 있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플라톤이 생각하기에는 당대의 정치가들은 진짜로 좋은 것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고 시민들이 좋아하는 것만 하는 사람들인 것 같다. 그러니까 이들을 뭔가 훈육을 시키고 교화를 시키고 해야 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그게 이제 말하자면 플라톤의 철인 국가론, 철인 통치자, 철학적 정치가 그런 얘기이다. 


그 논리가 사실 민주주의라는 제도 자체를 공격하는 데도 쓰이지 않는지. 민주주의가 항상 올바른 사람을 선택하는 건 아니다 뭐 이런 식으로 공격하는 데도 쓰이고, 민주주의라는 제도의 허점을 지적할 때도 쓰이는 논리이긴 한데 그것을 가장 민주적인 고대 사회 중에 하나였던 아테네에서 이런 얘기가 나왔다는 것도 참 재미있는 부분이다.

사실 저는 고전학을 전공하는 철학 연구자이긴 한데 이렇게 열심히 읽어봐서, '이런 걸 지금 오늘날 21세기 한국에서 읽어서 뭐 하나' 이런 생각이 들게 하는 건 인생에 많이 안 남았기 때문에 안 읽는다. 그런데 이 책은 아무리 여러 번 읽어봐도 또 여러 번 가르쳐봐도 쓸모가 있는 책인 것 같다. 바로 그 점에서 방금 얘기한 것처럼. 아테나이에서 한 번 해본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런 것은 특정한 상황을 만들어서 자연 실험을 해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해본 것들을 가지고 이렇게 기록을 해놓은 것이니까 아무리 드라마라 해도, 그냥 좀 열심히 읽으면 좀 괜찮지 않겠나 한다.


사실 그렇게 특정한 집단을 상정해서 연구를 하고 실험을 해볼 수 없다는 것이 사회학 연구에서 가장 힘든 점이긴 한데 이제 그 점을 또 지적을 해주셨다. 어쨌든 이제 이러한 것을 통해서 플라톤이 주장하는 것은 철학적 정치가이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철학자와 정치가는 정반대의 사람이지 않나 라는 생각이 좀 든다.

그렇다. 제가 '철학적 정치가'라고 이렇게 표현을 했는데 사실 이게 이런 식으로 표현을 잘 하지는 않는다. 플라톤 연구자들이나 일반적으로는 '철인왕'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니까 철학적인 소양을 갖춘 왕 이렇게 해버리면 좀 느낌이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왕 그러면 어찌 해볼 수 없는 존재처럼 여겨진다. 희랍어로 basileus인데 왕이라고 번역이 흔히 되긴 하지만 서양에서는 왕도 얼마든지 갈아치울 수 있다. 그러니까 저는 '철학적 정치가'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당하다 라고 생각을 한다.

그리고 철학자가 대개 냉소적이고 정치가는 열정적이다. 서로가 서로를 부담스러운데 여기에 이제 철학적 소양도 갖추고 정치적인 자질도 탁월한, 서로 어긋나고 하는 것을 동시에 갖춘다고 하는 게 플라톤이 말하는 철학적 정치가의 아주 기본적인 특징이다. 


정치가의 자질이 있는 사람이 철학을 공부하든가 아니면 철학자의 자질이 있는 사람이 정치를 공부하든가 둘 중에 하나를 해야 되는 것 같다. 

 

동서고금을 보면 딱히 떠오르는 사람은 없는데 그래도 세종대왕이 가까운 것 같다. 정조는 약간은 모략가에 가깝다. 《정조의 비밀 편지》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에서 정조가 남긴 편지들이 있다. 그것을 부하에게 보낸 것이 받는 즉시 태워라 그랬는데 안 태우고 남겨둔 게 지금 남아서 한글로 쓴 편지가 있다. 그런데 그것을 보면 모략가에 가깝다.


어쨌든 원하는 목표를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의 수를 다 마다하지 않았던 저는 좋게 말하고 싶다. 내 손 안에 있는 모든 카드를 활용해서 해야 될 일을 하는 분 이렇게 말을 하고 싶다. 어쨌든 철학적 정치가라면 이제 플라톤이 말한 것은 정치가가 철학을 공부한다고 보다는 철학자가 정치를 공부해야 한다에 가깝다고 얘기했다.

그렇다. 철학자가 정치를 공부하는 것에 가깝다.  이 책 전체를 읽어보면 어쨌든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이 생각하기에는 소크라테스가 머릿속에 있는 롤 모델이다. 그러니까 철학자가 정치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하는 것이 이 사람이, 말하자면 사유 실험 속에서 그러니까 철학자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누구나 다 알다시피 철학자라고 하는 건 올바름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것의 본질을 알려고 하고 그리고 본질을 아는 기술을 탐구하고 그 다음에 지적 호기심이 굉장히 많고 이런 사람들. 그러니까 변함없이 있는 것 그 다음에 언제나 배움을 사랑하고 그런 배움을 사랑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하는 사람들이 철학자인데 그 사람들이 이제 이상적인 존재이기는 하지만 정치가가 될 수 있는 방법을 플라톤 여기서 궁리를 해보는 것이다.

어쨌든 플라톤은 그것을 해봐야 된다. 플라톤도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자기도 불가능했었는데 어쨌든 얘기는 해봐야겠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철학자가 정치가가 되기 어려운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저의 지극히 사적인 생각이지만 철학자는 이른바 많은 사람들 그러니까 희랍어로 hoi polloi(多衆), many people을 못 견디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을. 제가 지금 이렇게 겪어보니까 철학 연구자로서 이렇게 해보니까 일단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이렇게 있다고 하면 그들 중에는 어떤 종류의 사람이 있는지를 알아낼 수가 없다. 일단 부딪혀 봐야 되지 한다. 일단 부딪혀 봐야 되는데 그 중에 누군가가 '너 뭐야 철학 한답시고 빈둥거리고 있는 거 아니야' 뭐 이런 식의 얘기를 하면 그걸 못 견디는 것 같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설득하기보다는 그냥 저절로 알아주기를 원하고 그러니까 철학자들은 정치가가 될 수가 없는 것 같다. 흔히 하는 말로 수모스러운 상황이 있을 때 그것을 못 견디는 것. 

그래서 간단하게 말하면 철학자이기만 해서는 정치가가 될 수 없다. 그 대중을 견뎌내는 힘 그리고 앞서서 말한 것처럼 철학자에게 요구되는 자질과 정치가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굉장히 다르다. 굉장히 다른 종류가 있다. 그러니까 다정하면서도 단호해야 하고, 용감하면서도 사려 깊어야 하고 이런 것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모순이 되는 것들, 모순이 되는 것들이 동시에 발휘될 수 있는 능력을 갖춘다고 하는 것은 그게 철학적 정치가가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이고 특징이다. 그래서 플라톤이 생각하기에는 그것은 웬만한 훈련을 통해서는 얻을 수 없다. 그리고 저는 그것을 모순을 견디는 힘이다 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게 이제 플라톤이 말하는 이성적인 능력이겠다. 

경우의 수를 다 헤아리면서 뭔가를 하려면 양극단에 있는 단호함과 다정함, 두 가지가 동시에 있는 그런 사람이 돼야 되는데 그게 바로 플라톤이 생각하기에는 철학적 정치가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다중과의 접촉에서 쌓아올려야만 하는데 우선은 먼저 이제 좋음의 이데아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다.  그게 첫 번째이겠다. 그걸 먼저 안 다음에 그 다음에 해야 되겠다. 일단 머릿속으로 좋음의 이데아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고 그 다음에 좋음의 이데아를 몸에다 습득해야 하고 그렇게 된 사람이 대중을 만나서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것까지 궁리해봐야 된다고 얘기를 하는 것이다.


플라톤이 철학적 정치가가 정치하는 사회가 이상적일 것이다 라고 얘기를 했으니 뭔가 누군가가 그렇게 될 수 있는 과정에 대한 설명도 했을 것 같다.

그렇다. 그러니까 일단은 제일 첫 번째라고 하는 건 좋음의 이데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플라톤이 여기 책에서 신이라고 하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 그 신이 천주교 신자들이 믿는 신 그런 것은 아니고 그냥 하늘의 이치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인격신이 아니다. 우리는 어쨌든 그런 초월적이고도 완전한 존재가 아니니까 좋음의 본래의 모습을 완전히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것 비슷한 것이라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얘기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제 플라톤이 좋음의 이데아를 설명하기 위해서 유명한 비유가 세가지 있다.  태양의 비유, 선분의 비유, 동굴의 비유. 사실 이 세 가지 비유를 알면 철학적 정치가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알 수가 있는데 문제는 뭐냐하면 태양의 비유, 선분의 비유, 동굴의 비유 이런 것들은, 보통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좀 모자라는 사람들에게 이해를 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비유를 쓰는데, 그런데 이 비유가 제일 어려운 것 같다. 그런 다음에 이제 구체적인 철학적 정치 교과 과정을 마련한다.


그전에 제가 하나 얘기를 건너뛴 것 같은데 이걸 좀 명확히 다시 한번 물어보고 싶은데 정치가가 철학자이기만 해서는 정치가가 될 수 없다고 보는 것 같은데, 철학자가 정치를 배워야지만 정치가 될 수 있다고 보는 건데 그 정치적인 지배가 없으면 그냥 어떤 자연의 질서나 이런 것만 따라서 살 수도 있는데 그게 불가능하다 라고 보는 건인지.

플라톤은 그렇게 본다.


사회가 커져서 불가능한 것인지.

플라톤의 《국가》에는 인간이 어떤 존재라는 얘기가 안 나온다. 그런데 플라톤의 다른 대화편인 《정치가》를 보면 인간은 놔두면 마모되고 욕정에 뒤덮이고 하니까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 내버려두면 잘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착각이라고 플라톤은 본다. 인간은 자연적 존재라고 하는 것은 악한 존재는 아니지만 선한 존재는 결코 될 수 없다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를 통해서 공동체 속에서 살면서 끊임없이 규칙을 만들고 그 규칙에 따라 스스로를 규율하고 그렇게 규율된 사람들끼리 모여서 다시 사회에 통용되는 규칙을 만들어서 살아가야 된다 라고 보는 게 플라톤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제도주의자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인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규칙과 규제를 통해서 서로 어울려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공동선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인간다움인 것이지 자연 속에서 어울려서 사는 거는 말 그대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벌어지는 자연 상태일 뿐이라는 것이다.


유교로 얘기하면 약간의 성악설과 약간의 법치주의 법가 사상이 좀 들어가 있는 것인지.

공자님의 그 후대 학자들 중에 맹자가 있고 순자가 있는데 순자 쪽에 가깝다.  그러니까 저는 그것을 공자 우파라고 부르는데 공자 좌파가 맹자고 공자 우파가 순자이다. 순자도 기본적으로 인간을 나쁘다고 보지는 않았다. 일단 공자님의 말을 바탕으로 까는 사람들은 인간은 기본적으로 착하다고 봤다. 그런데 내버려두면 악해진다가 하는 것이 순자 얘기이고 내버려둬도 착해진다가 맹자 얘기니까 공자 우파, 공좌 좌파 그러는 게 훨씬 더 낫다. 한비자로 가면 이제 패야 된다가 되는 거고 그러니까 그런데 사실 한비자보다는 상앙이나 이사 이런 사람들이 훨씬 더 패야 한다가 강한데 한비자는 책을 써가지고 이제 패야 된다 라는 혐의를 뒤집어 쓴 셈이다.


반드시 정치적인 지배가 있어야지만 오히려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다 라는 건데 그러면 그 인간다움을 유지하는 정치체제 혹은 규율과 함께 잘 돌아가는 정치를 말하기 위한 게 이데아인지.

그렇다. 궁극적인 기준. 인간다움이라는 게 니네들끼리 투표해서 정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그게 이제 '반민주정'이라고는 하는데, 그게 이제 반민주정이라고 흔히 플라톤을 독재를 옹호한 사람이다 이렇게 얘기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이 사람은 그냥 우리가 아무리 그가 신의 대변인이라 할지라도 이데아의 대변인이라 할지라도 그래도 이 사람은 기본적으로 민주적인 국가에서 하니까 설득을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을 한다. 바로 설득을 해야 된다 라고 하는 것에 대한 아주 적절한 비유가 동굴의 비유가 된다.


그러니까 절대적인 옮음이다 하더라도 강요하는 게 아니라 이것을 설득하고 납득시켜야 한다라는 것인지.

동굴의 비유 같은 경우는 이런 것이다. 앞에서 태양의 비유라는 것은 예를 들면 좋음을 태양에 비유하는 것이다. 그러면 태양은 우리 누구나 다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생물체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다. 지나치게 혜택을 주면 타 죽기도 하겠지만 그러니까 좋음은 그렇게 좋은 곳이다.  그 다음에 선분이라고 하는 것은 왼쪽하고 오른쪽 이렇게 두 부분으로 되어있는 선분이 있는데, 이쪽은 거짓에 관련된 영역이고 이건 참다운 진리에 관련된 영역이다.  그 다음에 이제 동굴의 비유가 이게 굉장히 널리 알려진 것인데 동굴 속에서 거짓만을 이렇게 바라보도록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고개를 돌려서 동굴 바깥으로 나가서 진짜로 환한 것을 보게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는가. 진짜로 환한 세상에 나와서 그것을 봤으면 다시 들어가서 알려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러한 심성을 가진 사람이 정치가이다.

플라톤의 《국가》를 보면 철학자는 돌아가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돌아가야만 한다 라고 해서 돌아가는 순간 그는 이제 더 이상 철학자는 아니다. 정치가의 길을 걷는 것이다. 철학자니까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가는 순간 정치가가 되는 것이다. at the same time이 적절한 표현이 되겠다. 

그렇게 갔을 때 상상을 한번 해보자.  그 동굴 속으로 돌아갔다. 바깥에서 뭔가를 보고 왔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냐면 어둠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바깥에서 환한 빛을 쬐고 왔다. 그러면 우리가 운전을 하고 갈 때 바깥에 있다가 터널에 들어간 순간처럼 된다. 순간 안 보일 수 있다. 그럼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 이상한 사람이 바깥에서 더듬더듬거리고 들어온다.  그래서 그 사람이 '바깥에 가면 환한 게 있어.  진짜로 태양이 있어. 너희들은 지금 조명발이야' 이렇게 말하면 '이 자식이 어디서 이렇게 거짓말을 해'하고 그 사람을 혼낼 수 있다.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  그들만의 공동체가 있으니까, 그 얘기가 쓰여 있다. 


갑자기 오늘 서두에 얘기했던 정조가 떠올랐는데, 그때 그 사람들을 설득하는 게 어렵다고 본다면 그러면 모략을 써서라도 그 사람들을 밖으로 데려가야 되겠다라고 하는 것이 정조인 것 같다. 안에다 불을 지르던 괴물을 던져 놓든 뭘 하든 사람들이 뛰어나오게 만들어야 되겠다.  이게 정조인 것 같다.

그러니까 그 정도의 수모를 견딜 각오가 없다면 동굴 안으로 못 들어간다. 

누구나 다 끊임없이 이렇게 사회적인 personality를 갖추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그러려면 반드시 좋음의 이데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 좋음의 이데아라고 하는 것은 진짜로 좋은 것이다. 올바른 것이기도 하니까 동시에 유용한 것이기도 하다.  good & useful하다. 그것을 지금 태양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설명을 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선분의 비유는 이 지점에서 여기까지는 우리가 해도 되는데 여기는 거짓을 알고 있는 부분인데 이제 그 거짓을 넘어가면 진짜로 넘어가는 부분도 있다. 이건 이제 앎의 단계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서 플라톤이 여기다 내놓는다.  그 다음이 이제 동굴에 비유다.


동굴을 얘기하자면 바깥에 이데아가 있고, 동굴 안에는 거짓이 있다. 거짓을 바라보면서 거짓이 논리의 논리를 물고 하나의 세계를 완성해놓고 나면 그 거짓 자체가 좋아 보일 때도 있다. 

그것을 플라톤으로 말하면 우리가 판타지라는 말을 쓰는데 희랍어 phantasma에서 온 말이다. 하나 더 덧붙이면 그것이 phantasma인 걸 알았어도 그동안 그게 진실이라고 믿고 왔던 스스로를 용납할 수 없어서 계속 진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도 다 자기가 phantasma를 진리로 알았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인정한다는 것이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바로 이 현실 정치에서 벌어지는 이런 사태들을, 제가 정치사상을 읽어보니 플라톤만큼 많이 겪어본 사람이 없다. 1920년대에 유럽의 정치가가 이걸 알았겠는가 아니면 중세 샤르마뉴 대제가 알았겠는가. 플라톤이 알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정말 아주 생생한 21세기 민주정 교과서이다.


그러면 우리가 대단한 철학자가 아닌 이상 어떤 형태의 동굴 안에 살고 있을 가능성이 더 클텐데 그러면 내가 현재 어떤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들이 이게 동굴일 수도 있다고 계속 의심해야 되는 것인지.

그게 이제 바로 베이컨이 말한 동굴의 우상이다. 그러니까 다른 동굴도 가봐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일단 먹고 사는 것과 관계없어 보이는 또는 직접적으로 나와 이해관계가 없어 보이는 것들에 자기의 몸을 한번 던져봐야 한다. 지금 A라고 하는 동굴에 살고 있는 a라는 사람이 있는데 B라는 동굴도 있고 C라는 동굴도 있다는 것을 누군가가 알려줘야 한다. 그러면 그렇게 알려주는 사람이 이제 플라톤은 철학자라고 보는 것이다. 철학적 정치가는 이제 정말 형편없는 동굴에 가서 동굴에서 있는 사람들을 끄집어내는 사람들이지만. 그러니까 철학 연구자는 여러 종류의 동굴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람이다.


그럼 현대사회는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은 동굴 천지인 것 같다.

그렇다. 그러니까 이제 바로 거기에서 소통의 문제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생겨나는 것이고 따라서 공통 교육이라고 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게 된다. 지금 여기서 보면 철학적 정치가가 이루어야 될 목적이 궁극적으로는 좋음의 이데아인데 교육을 받아야 한다. 러면 이제 공통 과목이라고 하는 것이 있고 그리고 그 공통 과목에 더 나아가서 일종의 심화 학습이라는 게 있을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이제 플라톤이 동굴의 비유 다음에 어떤 것들을 공부해야 되는가 그런 것에 대해서 교과 과정을 짜놨는데 그게 기초 부분하고 심화 부분 이런 것이 있다. 의무 교육에 해당하는 내용들이, 이를 테면 기초 과정에 들어 있다. 수학이라든가 기학이라든가 또는 문학 이런 것들 그런 것들이 있고, 그 다음에 이제 심화 과정으로 들어가면 정치적인 자질을 기르는 데 필요한 그런 것들 아주 대표적인 것으로 변증술적 논변 그런 것을 익히는 과정 거기까지 가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 한국 사회에서 시행하고 있는 교육이라고 하는 것이 동굴을 좀 더 깊게 파는 데 많은 도움이 되는 교육이지 동굴 바깥에서 어떤 동굴이 있는지를 탐색해 보는 것은 아니다. 온전한 인간, 완성된 인격체를 위해서는 어떤 동굴들이 있는지를 알아야 해 라고 말을 하는 순간 수없이 많은 비난을 받게 되실 수도 있다.


플라톤은 여러 개의 동굴까지는 얘기 안 한 것 같은데 맞는지.

그렇다. 플라톤이 이제 동굴에 들어가서 대중들에게 핍박을 받아 죽은 스승이 너무 가슴에 사무친 나머지 동굴 하나만 얘기를 했는데 저는 이제 플라톤하고 제 선생님은 이제 제 명에 살다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런 걱정이 없어서 여러 개의 동굴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맨 마지막에는 이제 변중수를 익힌다.  서로 상반되는 것들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포괄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요약문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 synopsis라는 말이 있다. synopsis라는 말이 희랍어로 포괄적으로 본다는 뜻이다.  syn 함께, opsis 본다. 예를 들어서 고통과 슬픔을 함께 본다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다. 고통은 고통이고 슬플 때 슬픈 것이다. 그런데 세상의 쓴맛도 봐야 되고 이론의 한계도 알아야 되고 그 다음에 실천이라고 하는 것이 이론의 문제가 걸치고, 이론과 실천을 동시에 알아야 되고 하니까 바로 그런 능력을 갖추는 것이 포괄적인 봄 또는 변증술적 능력이다. 

언어라고 하는 것이 외부적으로 표현되면서 동시에 표현된 언어를 스스로 내가 한 말을 들으면서 나의 인격성을 내면의 인격을 감화시키고 훈련하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스피치를 진짜로 잘하려면 제가 잘 모르지만 말하면서 동시에 말하고 있는 나를 스스로 봐야 한다.


저는 이 경우 관조한다고 얘기한다.

바로 그 관조가 포괄적인 봄이다.  정확하게 그것이다. theōria라는 말이 이론이라는 뜻인데 그게 관조이다. 그게 바로 synopsis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나를 남 보듯이 해야 한다. 지금 말하고 있는 나를 말하면서 계속 자기 의식을 분열시켜서 스스로에 대해서 계속 지금 나를 왜 이렇게 하고 있는 거야 라고 말하면서 생각을 해야 된다는 거죠.  그게 바로 변증술적 논변의 훈련이다. 그러니까 스피치도 고급의 단계로 올라가면 변증술 논변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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