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통해 살펴보는 개인과 사회 - 1

 

2023.05.26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통해 살펴보는 개인과 사회 - 1

강의 안내

수원시비정규직노동자복지센터(http://swbjk.kr/community/board_view.asp?idx=2442)


고전으로 알아보는 우리사회
우리에게 생각을 할 기회를 선사하는 '고전'

○교육일정: 2023.05.12.(금)~06.09.(금) 매주 금요일, 오전10시~12시
○신청방법: 북수원도서관 홈페이지 또는 수원시도서관 모바일 앱(통합예약신청-독서문화프로그램)
○교육방법: 대면교육
○교육장소: 북수원도서관 강당


강의 제목이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통해 살펴보는 개인과 사회」 이렇게 되어 있다.  오늘은 《소크라테스의 변론》에 들어있는 내용을 중심적으로 얘기를 하면서 동시에 개인과 사회에 대해서 얘기를 해보겠다. 

아까 얘기한 것처럼 오늘 강의를 듣고 가장 좋은 건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읽어보는 것이다. 읽어보고 과연 저 강사가 제대로 된 얘기를 했는가 아니면 헛소리를 했는가 그것을 확인을 해보는 것도 중요하고 그 다음에 스스로 또 읽어서 터득하는 것도 있는데 그런 것들도 해보기를 바란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에 들어있는 내용은 한 번쯤은 다 들어봤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 스토리를 한번 정리해서 간단하게 얘기해 보면 소크라테스가 아테나이의 아고라라고 하는 것이 있다. 아고라는 시장인데 여기에 이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기도 하니까 시장에 모여서 사람들이 민회도 하고 그런다. 사람들이 모여 있다고 할 때 에클레시아ekklesia라는 말을 쓴다. 에클레시아라고 하는 말에서 파생되어 나와서 교회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 아고라에 모여 있는 젊은이들과 다니면서 너희들 그렇게 살면 안 돼, 똑바로 살아야 해 자꾸 그렇게 얘기를 하니까 사람들이 화가 나서 소크라테스를 고발을 한다. 강의 자료를 잠깐보면 소크라테스의 변론 그래서 apologia, 고소, 고발, 변론으로 되어있다. 자기가 고발을 당해서 법정에 갔으니까 그것에 대해서 자기 입장을 변호해야 한다. 그러니까 변론한다고 말하는데 그래서 변명보다는 변론이 더 적당하지 않나 한다. 이 상황 자체가 변론을 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categoria에 대응해서 apologia를 한다.  거기서 지금 나온 말이 바로 《소크라테스의 변론》이다. 입니다. categoria라고 하는 말은 범주라는 말이다. 분류할 때 사용되는 기준. 특정한 집단에서 분류 기준을 사용할 때 카테고리라고 한다. 그런데 왜 이것을 고발이라는 말을 썼는가. 아테나이서는 누구를 고발한다고 할 때 어떤 죄를 지어서 고발한다 라고 죄목을 분류한다. 그래서 죄목을 분류했다 해서 카테고리라는 말을 사용한다. 카테고리라는 말은 이제 범주라는 말로 번역이 되었는데, 제가 정확하게 연대나 그 근거를 지금 기억하지 못하는데 일본에서 카테고리라고 하는 말을 갖다가 들여왔을 때 이것을 범주라는 말로 번역을 했다. 그러니까 여기 이제 한자어로 範疇라고 한다. 그런데 사실 이 카테고리라고 하는 이 단어를 범주로 옮길 때는, 이 범주라는 말 자체가 굉장히 무거운 말이다. 주나라 이전에 쓰였던 홍범구주라고 하는, 말하자면 세상 만사의 모든 것을 갖다가 규율하는 일종의 경국대전 같은 그런 원칙을 담은 책이 있다. 홍범구주라고 해서 굉장히 큰 범주와 아홉 개의 기준 그런데에서 사용되는 말을 여기다 가져다 쓴 것이다. 소크라테스를 몇 가지 죄목으로 기소를 했는데 소크라테스가 받은 카테고리의 내용이 뭐냐 하면 두 가지이다. 첫 번째가 시장을 다니면서 젊은이들을 탈락시켰다는 것이다. 두 번째가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려면, 이 categoria를 한 사람, 그러니까 고발한 사람들 생각에는 젊은이들이 이렇게 가야 올바른 건데 소크라테스 때문에 이렇게 갔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소크라테스가 뭘 믿고 이렇게 가게 했느냐 말이다. 그때 뭘 믿고 그랬는지를 따져 물어보니까 이 사람들이 소크라테스를 고발할 때 첫 번째로는 젊은이를 타락시켰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그런데 그 사람이 뭘 믿고 그렇게 타락을 시키나 하고 따져보니까 아테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믿고 있는 신을 믿지 않고 다른 종류의 신을 믿더라는 것이다. 그 두 개가 연결되어 있다.  

지금 이 센터에서 저에게 준 제목이 개인과 사회이다. 벌써 이제 소크라테스라는 개인하고 사회라는 말을 인간이 살아가는 공동체라고 해보겠다.  그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믿음의 근거들이 있다. 젊은이들이 어떻게 살아야 된다라고 하는 것에 대한 그 사회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방식, 그런 방식이 소크라테스 개인이 가지고 있는 것과 충돌하는 경우가 있다. 당연히 저는 철학 전공자니까 특히나 서양철학 전공자니까 소크라테스가 옳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옳은지 안 옳은지 한번 따져봐야 한다. 따져봐야 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왜 이게 유독 그 당시 소크라테스가 살았을 당시 전 세계적으로 보면 이 동네에서만 이게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그게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2023년의 한국과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가. 생각을 한번 해보자.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떠들고 다녔는데 요즘의 말로 가스라이팅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힘이 있는 자와 힘 없는 자, 이 경우 지금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얘기한 것이 가스라이팅이라고 할 수도 있다. 가스라이팅은 우리말로 심리적 지배라고 옮긴다고 한다. 심리학 지배는 아무래도 힘 있는 사람이 힘 없는 사람을 지배하기가 쉽겠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힘 있는 사람인가, 젊은이들이 힘이 없는 사람인가라고 생각하면 이때 중요한 건 뭐냐면 힘의 내용을 따져봐야 한다. 아테나의 사람들은 아는 게 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힘이라고 하면 권력이다. 그러면 아는 게 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뭔가 좀 아는 사람이 얘기할 때 귀 기울여 듣기라도 듣는 척이라도 할 텐데 그렇지 않고 고발을 해버렸다.  

잔소리가 있다. 그 다음에 조언이 있다. 약간 구별을 해야 한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서 힘 있는 자, 힘 없는 자 이 당사자들의 행위자들을 놓고 얘기하는 것도 좋은데 약간 내용을 보면 가스라이팅인 심리적 지배와 잔소리와 조언과 어떻게 다른가, 소크라테스는 뭘 했을까를 한번 생각을 해봐야 한다. 다른 사람들은 소크라테스가 이게 가스라이팅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젊은이들을 탈락시킨다고 하니까.  

가스라이팅과 잔소리와 조언은, 잔소리가 우리가 이해하기가 금방 쉽다. 문제는 잔소리와 조언이 비슷한데 상대방의 상황에 대한 고려 없이, 내가 잔소리를 하려는 저 사람의 상황에 대한 앎이 없는 상태에서, 상대방에 대한 상황지가 없는 상태에서 그리고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도 상황인데, 상황에 대한 즉 상대방과 나, 당사자들 사이에 각각이 처해 있는 상황과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 것인가에 대한 그런 종합적인 상황지, 그것을 상황지라고 하는데, 이 파악이 되게 중요하다. 우리가 눈치 없다고 그러는데 눈치보다는 훨씬 더 수준 있는 게 상황지, 눈치는 그냥 요령이다. 상황지에 대한 고려 없이 일방적으로, 대개 잔소리는 똑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할 때 우리가 잔소리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경우도 있다. 잔소리가 잔소리가 되지 않으면 상대방이 저 말이 나의 상황이 굉장히 중요하다 라는 걸 자각해야 한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밥을 먹을 때 음식을 흘리고 먹는 건 좋지 않은 습관이다.  그런데 계속 누가 밥을 먹을 때 음식을 음식을 흘리고 먹다고 하면 밥 먹을 때 음식을 흘리는 건 좋지 않은 습관이야라고 말을 한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사람이 또 잔소리하네 라고 말을 했다. 그러면 무엇을 의미하느냐면 나는 밥 먹을 때 음식을 흘리고 먹는 것이 좋지 않은 습관이라고 생각하지 않아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때는 잔소리한다고 안 들으려고 한다가 아니라 아예 그 사람하고 나하고는 식탁에서 음식을 먹는 상황, 그 상황에 대처하는 말하자면 신념 체계가 다른 것이다. 옳고 그름에 대한 차이가 생긴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이게 상대방에게 잔소리다. 그런데 똑같은 얘기를 계속 되풀이한다. 그러면 조언은 무엇인가. 똑같다. 일방적으로 똑같은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상대방이 생각하기에 어떤 것이 적절한 것인가에 대한 솔루션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것을 되풀이하는 게 잔소리이다. 조언은 뭐냐하면 상황지에 대한 앎이 있어야 한다. 조언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상대방의 상황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조언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의 상황에 대한 지식이 있고, 상황지가 있고 그 다음에 가능한 선택지들을 제시해줘야 한요. 이런 걸 이제 우리가 available option들을 줘야 한다. 여러 개의 선택지를 주고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이게 조언이다. 그러니까 조언이 이루어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상대방의 상황, 그 다음에 조언을 하는 사람이 또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자신의 한계를 밝혀주는 게 되게 중요한다. 지금 이제 상대방의 상황을 들었다. 상대방의 상황을 들었을 때 내가 그 상황에 대해서 적절한 조언을 할 수 있는 처지인가도 생각을 해봐야 한다. 그게 이제 조언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가스라이팅은 무엇인가. 가스라이트은 힘 있는 자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힘이라는 게 아는 자가 아니라 지배욕이 있는 자가 하는 것이다. 힘 있는 자라고 하기보다는 지배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는 자, 지배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는 자가 상대방을 상황으로부터 차단시키는 게 1번이다. 상대방이 현재 놓여 있는, 그러니까 조언이라든가, 잔소리 적어도 상황이라는 게 있기라도 하다, 그런데 가스라이팅은 자기가 지배를 하고자 하는 자가 자기가 지배하려는 상대방을 그 주변의 그 모든 상황으로부터 차단을 시키는 게 먼저이다. 물리적으로 격리하거나 아니면 상대방이 어떤 상황에 대해서 얘기를 하면 자신이 의도하는 것으로 계속, 카테고라이징을 한다고 하는데 아까 얘기한 것처럼 범주화한다고 말하는데 그렇게 하는 게 가스라이팅이다. 그러니까 이건 목표가 괴롭히는 게 아니라 지배하는 게 목표이다. 즉 노예로써 부리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러면 소크라테스가 아테나이 젊은이들에게 했던 것은 가스라이팅은 아니다. 잔소리이거나 조언이다. 그런데 요즘에는 모든 조언, 모든 잔소리를 다 가스라이팅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것을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소크라테스는 과연 잔소리를 했는가, 조언을 했는가, 가스라이팅을 했는가. 일단 잔소리와 조언의 영역에서 뭔가 움직인 것 같은데 이 사람이 이걸 움직였는데 왜 이들은 소크라테스를 고발을 했는가. 왜 이 사람이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고 생각을 했는가. 과연 타락이라고 생각하는 게 무엇인가. 당시 아테네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제대로 된 길은 이것인데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건 제대로 된 길이 아니니까 타락이라고 생각했을 거 아닌가. 그것을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가령 지금 여기 오신 분들은 적어도 《소크라테스의 변론》 이런 거 좀 알아두면 좋지 않아 라고 생각해서 왔을 것이다.  2009년 그 무렵에 동대문구 정보화도서관에서, 제가 쓴 책 중 《인문 고전 강의》라고 있는데, 고전 10권을 한 달에 한 권 씩 강의를 하면서 고전 텍스트 강의를 했다. 그 무렵에만 해도 좋은 책 읽자 그러면 약간 소크라테스 같은 그런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라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다. 

그러면 한번 생각을 해보자. 소크라테스가 하고 있는 이 말이 여러분들과 저는 지금 현재 무엇이 좋은 것인가에 대해서 일정 부분 동의를 하기 때문에 여기에 지금 있다. 그런데 저기 밖에 나가서 오늘 이제 이 강의를 끝나고 집에 가거나 밖에 누구를 만나러 가면 뭐 하러 왔느냐 이렇게 하면 도서관에 가서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통해서 본 개인과 사회 강의를 듣고 왔다 라고 얘기를 할 수 있는 분이 있을까. 오늘 강의에서 사용되는 용어를 가지고 다시 규정을 해보면 부동산 이야기하는 사람은 좋음의 기준이 나와 다르다 라는 것이다. 카테고리가 다른 것이다. 그러니까 소크라테스가 하고 다니는 일은 소크라테스가 생각하기에 좋은 일인데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좋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까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일이다. 좋음에 궁극적으로 좋음에 대한 기준이 다르면, 소크라테스와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은 무엇을 좋음 아래에 포섭시킬 것인가가 다르면 그 나머지 것들까지도 다르다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좋음이 이거다 라고 하는 것이 다르면 합의에 이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 좋음이라고 하는 것, 당신이 생각하기에 좋음과 내가 생각하기에 좋음에 속하는 것이 다르면 합의에 이를 수 없다. 이런 것을 철학에서는 제일 원리라고 한다. 좋음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제일 원리가 안맞는 것이다. 플라톤 철학이라고 하면 이데아라는 것이 나온다. 사실 이데아라고 하는 것은 그냥 보통 명사이다. 영그러니까 무엇의 이데아냐고 할 때 좋음의 이데아가 플라톤이 말하는 제일원리이다.  결국 소크라테스가 이 사람들에게 고발을 당한 거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고 한다는 것인데 무엇이 좋은 것이냐에 대해서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가는 것이 젊은이들이 올바로 사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그 사람들은 그게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겠다. 

예를 들어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뒷세이아》가 있다.  《오뒷세이아》에 보면 오뒷세우스가 트로이야 전쟁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신들이 그 사람을 난파시킨다. 감추다의 뜻의 이름을 가진 칼륍소 요정이 사는 오귀기야 섬에 억류를 시켜놓는다. 그런데 오뒷세우스느 자기 집으로 가고 싶어한다. 그래서 바닷가에 서서 혼잣말을 하는데 그 좋은 곳, 집에 돌아가서 자기 아내하고 같은 마음으로 지내는 것, 그 좋은 것. 이렇게 얘기를 한다. 그러니까 오뒷세우스는 아내와 같은 마음으로 있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얘기를 한다. homophrosynē라고 하는데 homo가 같다라는 말이고, phrosynē는 마음이라는 얘기이다. 오뒷세우스는 homophrosynē가 가장 좋은 것이라고 얘기한다. 이거는 정말 거의 거의 불가능하다. 살아서는 이룰 수 없는 경지이다.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읽을 때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고 얘기를 했다. 그러면 아테나이 사람들은 어떤 젊은이가 훌륭한 젊은이라고 생각했을까를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이것이 이 책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포인트이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고 죽었네. 독배를 마시고 죽었는지 뭘 마시고 죽었는지 이건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그 사람이 무엇이 좋은 것이라고 말했는지도 별로 안 중요하다.  그러면 이 사람이 젊은이들에게 니들 그렇게 살면 안 돼 라고 말했을 때 그 젊은이들이 어떻게 살았는가. 그 당시에 아테네 사람들은 무엇을 훌륭한 것이라고 생각했는가를 알아봐야 된다. 그게 무엇인가. 돈이다. 아테나이는 돈 많았다. 소크라테스가 너희들 돈독 올라가지고 그 따위로 살면 안 된다고 얘기하다가 걸려든 것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재판에서는, 배심원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일단 배심원들이 유죄냐 무죄냐를 내리고 그 다음에 판사들이 형량을 정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유죄라고 한 사람들이 아슬아슬하게 많았다. 지금 어떤 상황인지 딱 짐작할 것이다. 일단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쉽게 돈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 당시 2500년 전 사람들이 뭘 그렇게 돈을 중요하게 여겼을까, 굉장히 심각하게 문제가 있었다. 두 번째로는 소크라테스를 사형을 시켜야 된다는, 어쨌든 죄가 있다 라고 말한 사람의 숫자가 오늘날로 치면 49 대 50일 정도 되는, 아슬아슬하게 한두 명이 많았다고 하는 정도. 그러니까 아예 돈이 중요해, 돈벌이가 중요해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고 100명 중에 97명이고 3명 정도가 그렇지 않다 라고 말했으면 갈등이 없다. 그 사회 집단에 소크라테스라고 하는 개인과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과 그 다음에 친하게 지내는 파이돈하고 몇몇 한 5명 정도, 그 사람 정도만 그게 중요하지 않다 그랬으면 이 사람들은 소크라테스를 사용시키지 않는다. 내버려 둔다. 이것을 사회세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갈등이 생기지 않는다. 그런데 이게 아슬아슬하게 많았다는 건 뭐냐하면 그런 소크라테스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적어도 한 35%는 됐다는 얘기이다. 그러니까 이건 얘네들이 더 까불기 전에 좀 밟아야겠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갈등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회가 굉장히 갈등이 심하다 라고 말할 때는 정반대되는 사람, 즉 타협하기 어려운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비슷비슷한 만큼 세력을 갖고 있을 때 갈등이 생긴다. 압도적으로 그렇지 않은 곳에서 갈등이 생기지 않는다. 얼핏 생각하면 한국 사회에 갈등이 많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그건 서로 대립되는 화해하고 양보하기 어려운 부동산주의자와 무관심주의자의 대립과 갈등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무관심주의자가 되게 진다. 왜냐하면 그만큼 악독하지 않기 때문에 무관심주의자가 지게 되어 있다. 

간단히 말하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아테나의 사회가 그렇게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민주정 국가이기 때문이다. 왕정 국가에서는 왕이 가스라이팅을 한다. 왕정 국가에서는 왕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 그러면 다 해야 한다. 한국 사회도 독재 체제에서는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갈등이 생기지 않는다. 여기서 개인을 영어로 말하면 individual, 개인이라는 말을 쓴다. 그런데 개인이라고 하는 말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한번 생각을 해보면 개인이라는 말은 굉장히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말이다. 우리가 흔히 individual이라는 말을 쓰는데 이 앞에 철학에서는 원자적이라는 말이 생략돼서 쓰이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남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이 똑 떨어져서 혼자 낱개로 있는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이 개인이다. 요즘에 개인주의 풍조가 널리 만연해서 라고 하는 것은 그냥 이기주의이다. 그런데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 태어나면서부터 어떤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니까 사람은 나자마자 어떤 관계 속에 들어간다. 사실은 개인은 없다. 사실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누구의 자녀이거나 또는 누구의 조카이거나 누구의 손자이거나 손녀이거나 그렇게 되어있다. 즉 사람은 기본값으로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면 이 관계 속에 들어가 있는 인간, 사회라는 말보다 이제 공동체, 사람은 나자마자 가족 공동체로 들어간다. 가족 공동체 안에 들어가면 여기에는 집집마다 규칙이 조금씩 다르다.  공동체가 있는데 공동체는 이 공동체 안에서 통용되는 규칙이 있다. 규칙이 만들어진다.  그러면 이 규칙은 질서라고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뭔 가에 대해서 합의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규범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질서와 규범 이것을 희랍으로 노모스라고 부른다. 노모스는 법이라는 뜻도 되는데 나눈다는 말이다. 노모스를 영어로 번역하면 대개 법이라고 하는 law는 단어로 번역하는데 그보다 더 적당한 비슷한 측면은 order이다. order의 뜻이 3개 있는데 명령, 주문, 질서이다. 명령이 직접적이고 주문, 질서 이렇게 되어 있다. 생각해 보자. 여러분들은 여기 북수원 도서관에 들어왔다. 강의실에 들어오면 강의실에 들어온 순간부터 이 강의실에서 통용되는 질서를 여러분들이 습득을 한다.  제가 이 강의실의 주인은 아니지만 강의실 공간 안으로 들어올 때는 제가 설정한 설정한 질서를 따르도록 암묵적으로 합의가 되어 있다. 그게 뭐냐 하면 개인이라고 해도 각각의 개인이 나면서부터 가족 공동체, 그 다음에 여기는 도서관 공동체이다. 공동체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간이라고 하겠다.  그 공간으로 들어가면 현대사회에 살고 있는 개인들은 수없이 많은 그런 공간 질서들을 터득을 해야 한다. 그렇게 공간 질서를 터득하는 것을 사회화 과정을 거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individual이라고 하는 개인이 있다. 각각의 개인인 여러 사람이 모여 있는 공간이 있고 그다음에 그 사람이 점유하고 있는 공간이 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에서는 각각의 개인이 직업을 갖고 있고 그 다음에 그 직업 영역으로 남들이 이렇게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 일종의 질서라든가 이런 것들에 대해서 하는 것을 사회화라고 한다. 현대사회에서는 그런데 예전에는 직분이라는 것이 있고 신분이라는 것이 있었다. 근대사회 이전에는 어떤 사람이 태어난 순간 어느 신분에 속하는지가 정해진다. 그러니까 근대 사회 이전에는 개인이라는 것이 없고 각각의 개인이 익혀야 될, 사회화되기 위해서 익혀야 될, 낯선 사람을 만나서 뭘 해야 될 그런 규범과 질서가 전혀 없었다. 그냥 자기 신분에 맞는 질서 그것을 익히면 된다. 그 신분 질서를 다 깨뜨리고 직업 선택의 자유가 다 생겨났다. 옛날에는 직업도 정해져 있었다. 그러니까 직업과 신분, 직분이 나눠져 있고 그것에 따라서만 그대로 하는 것, 그것이 근대 사회 이전에 전근대사회이다. 그러면 이제 사람들은 어떤 신분을 자기가 얻을 것인지 어떤 직분을 얻을 것인지는 각자의 능력의 달린 일이 된다. 그것을 개인주의 사회라고 말한다.  그러면 신분이나 친분이 있는 이 상황에서는 사람들이 아무것도 없다. 이 개인이 가지고 있는 힘을 liberty라고 부른다. 이것을 자유라고 한다. 그리고 이 liberty가 제일 중요해 라고 말하는 주장을 liberalism이라고 한다. 미국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데 그게 liberty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liberty, liberalism에서 제일 중요한 건은 각자가 각자의 자유, liberty를 존중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령 우리가 식당에 가서 식당 사장님이 말하는 그 질서를 안 지키면 그 식당 사장님의 liberty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 된다. 예를 들어서 프랑스나 이탈리아나 이런 데는 liberalism 사회가 아니다.  아직도 옛날 동네라서 각각의 직업이 가지고 있는 어떤 규칙 그런 것들이 굉장히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다. 그러니까 식당 같은 데 가면 동양인 차별한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이 그 사람들이 정한 규칙을 우리는 잘 모르니까 그렇다. 

모든 사람이 원칙적으로는 평등해졌다. 신분에 속해지도 않고 그 다음에 어떤 직분에 속해 있지도 않다. 아버지가 하던 직업을 물려받아야 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가 남들보다 잘났다라는 것을 증명해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property이다. 재산. 그러니까 근대사회에서는 liberty와 property는 굉장히 밀접한 관계에 있다. 아테네는 꽤 오랜 기간에 걸쳐서 사회혁명과 정치혁명을 일으켜서 신분질서를 타파하고 노예가 아닌 사람들이 평등한, 물론 여성과 노예를 제외한 남성들이, 평등한 개인의 사회를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까 이 사람들이 이제 남들에게. 자기 오늘날로 치면 liberalism이 통용되는 사회를 만든 것이다. 그러다 보니까 이 사람들이 남들에게 과시를 하고 싶다 그러면 재산을 모아야 한다. 재산을 모으는 데 방해가 되는 사람들은 다 미워할 것이다. 그러니까 아테네 사람들은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서 신분질서와 이런 것들을 깨뜨리고 각각의 개인이 평등한 힘을 가진 사회를 만들어 냈다. 그런데 그런 사회를 만들어 냈는데 그럼 그 사람들이 앞으로 자기네들이 살아갈 사회를 어떤 식으로 하는 것이 좋을지를 결정하는 의사결정 방식이 민주정이다. 평등하게 모두 다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그래서 이게 바로 오늘날로 치면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만든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각각의 개인이 모두 다 훌륭하다고 생각하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경쟁을 할 때 결국 돈이 가장 중요하다 라고 하는 property 중심의 사회로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바로 아테네 민주주의의 절정기라고 할 수 있는 페리클레스 시대였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도 바로 그런 시대의 분위기 속에서 살았던 사람이다.

요즘에 무인 점포가 많이 늘어났다. 기본적으로 무인 점포에서 뭔가 사고가 나면 무인 점포 주인들이 싹 모아서 경찰서에 신고를 한다고 한다. 미국에선 그렇게 안한다. 무인점포라는 공간은 나의 재산이다. 그러니까 네가 할 수 있는 한은 네 재산을 지켜야 해. 그래서 가령 경찰서에 신고를 일정 정도 이상을 하면 시에서 그 점포를 폐쇄시킨다. 공공 영역에 네가 민폐를 끼치고 있다. 네 재산도 네가 제대로 못 지키는 놈이라면 공공 서비스를 받을 만한 그러니까 굉장히 리버럴한 사회다. 그것을 원래적인 의미에서의 리버럴한 사회라고 한다. 우리는 그렇지 않다. 무임 승차는 무임 승차대로 하고 자신의 liberty는 liberty대로 누리려고 하니까 문제가 생긴다. 이제 그 상황이 아테네에서도 벌어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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