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인문고전 읽기의 실제 1-2

 

 

2023.05.31 🎤인문고전 읽기의 실제 1-2

커리큘럼

5.31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6.14   투퀴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6.28   플라톤, 국가·정체
7.12   셰익스피어, 리처드 2세 / 맥베스 / 오셀로
7.26   허먼 멜빌, 모비 딕

 

서지정보

호메로스 / 오뒷세이아 (알라딘 바로가기)

투퀴디데스 /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알라딘 바로가기)

플라톤 / 국가, 정체 (알라딘 바로가기)

셰익스피어 / 리처드 2세, 맥베스, 오셀로 (아침이슬 셰익스피어 전집 2, 4, 15)

허먼 멜벨 / 모비 딕 (페이퍼백)  (일러스트레이트 양장본)

 


제1강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일시: 2023. 5. 31. 오후 7시 30분-9시 30분
장소: 수원시글로벌평생학습관
강의 안내: https://learning.suwon.go.kr/lmth/01_lecture01_view.asp?idx=3172 

Robert Fagles, The Odyssey [Deckle Edge edition] 
Emily Wilson, The Odyssey

 

이제 서사시의 구조를 본다. 1~4, 5~12, 13~16, 17~23, 24장으로 나뉜다. 크게 나누면 다섯 부분이다. 어떤 텍스트가 classical한 텍스트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서 5막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 봐야한다. 기본적으로 5막 구조를 꼭 생각해야 한다. 그 구조를 벗어나면 roman이다. 이 서사시 구조에 익숙해지면 소설을 못 읽는다. 셰익스피어 드라마도 5막 구조가 있다. 그러면 항상 1과 5는 서로 연결된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것을 ring composition이라고 한다. 수미일관한 구조이다. 열린 결말은 그래서 힘든 것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만이 아니라 세익스피어 드라마도 그렇고 고대 그리스 드라마도 그렇고 classical한 텍스트는 다섯 덩어리를 생각해야 한다. 사건이 시작되고 기승전결, 결말이 있고 그 결말 이후에도 그 결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의 원형이 《오뒷세이아》이다. 《오뒷세이아》를 읽고 내용이 어떻다가 아니라 이것을 읽으면서 이 구조에 익숙해지려고 노력을 하는 것이 고전텍스트를 읽는 기술이다. 이것이 습관이 되면 modern roman은 못읽는다. 제임스 조이스의 텍스트는 epic이다. 허먼 멜빌도 epic이다. 서사시라는 것이 하나의 장르가 아니라 형식의 측면에서 얘기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하이든을 소나타 형식의 완성자라고 말하는데 포인트는 형식이다. 완성이 있다. 그런데 roman은 완성이 없다. 시작에서 끝까지가 계속해서 의미있는 사건의 연속이다 라고 하면 인생은 완성이 없다. 종합적으로 파악이 불가능하다. 끝이 열려있다. 인생을 roman으로 보느냐 epic이라고 보느냐가 인생관의 차이이다. 어떤 사태를 바라볼 때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파악할 것인가가 중요한데 epic은 다섯 개의 덩어리로 나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다음에 읽을 책이 투퀴디데스이다. 역사책이다. 투퀴디데스는 기본적으로 고대 그리스 비극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비극은 서사시를 말하자면 응축시켜 놓은, 결정화해놓은 것이다. 긴 서사시를 다섯개의 덩어리로 깔끔하게 중간만 떼서 만든 것이 비극이다. 투퀴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비극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말하면 epic 종류에 들어가는 것이다. 장르는 역사일지 몰라도 텍스트를 구별할 때는 epic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오뒷세이아》 제23권은 페넬로페가 오뒷세우스를 알아보다이다. 그러면 얘기가 끝나서 둘이 행복하게 살았다고 하면 심청전이다. 한국의 이야기는 그렇게 끝난다. 쓸쓸함이 없다. 이 동네에서 만들어진 이야기의 특성이다. 그런데 《오뒷세이아》는 페넬로페가 오뒷세우스를 알아본 이후 오뒷세우스가 또 떠난다. 얘기가 끝나지 않았다. 저승 속편_맹약까지 고려한다면 이 이야기의 주제는 쓸쓸함이다. 비극이라는 것이 주인공이 불행해지는 것 때문에 비극이 아니라 결국에는 이 모든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을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비극이다. 우리가 희극은 즐거운 이야기이고, 비극은 괴로운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것은 그냥 오늘날의 일반적인 얘기이고 희극은 Commedia이다. 떠들썩하게 떠들면서 나오는 얘기가 희극이다. 이 개념을 알아두어야 셰익스피어가 이해가 된다. 《리어 왕》이 대표적인 비극 작품 중 하나인데, 리어 왕과 코델리아만 슬프고 다른 사람들은 해피하다. 희극은 떠들썩한 이야기이다. 비극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사태들이 계속되고 인간의 힘으로 이해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는 것이다. 고대 지중해 세계라든가 팔레스타인 지역과 우리가 사는 동아시아 세계가 다른 점이 이것이다.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배우고 배운 것을 가끔 복습하면 기쁘지 아니한가. 그냥 기쁜 게 아니라 무지하게 기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溫 不亦君子乎,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열받지 않으면 군자라는 것이다. 동아시아 세계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텍스트가 논어인데 논어의 첫 구절이 열說이다. 열은 delight 같은 것이 뿜어져 나오는 것, 낙樂은 혼자서 속으로 히죽히죽 즐거워하는 것, 이 둘을 묵으면 내면적으나 겉으로나 즐겁고 좋은 것. 배우고 익히면 기쁘다는 것, 친구가 있어서 멀리서 찾아오는 것이 기쁘다는 것. 서양 사람들은 앎이 인간의 영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scriptus, 신성한 것이다. 글자라는 것을 인간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동아시아는 진리에 대한 낙관주의가 있는 것이다. 삶에 대한 낙관주의가 있고, 삶의 모든 국면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다는 태도가 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비극이 나올 수가 없다. 형식과 내용이 맞물리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어느 정도까지는 아는데 궁극적으로 인간의 앎은 완성될 수 없다고 생각하면 비극이다. 앎이라는 것은 원인과 결과에 대한 것이다. 뭔가 안다고 말할 때 원인과 결과를 아는 것이다. 그런데 비극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사태들의 연쇄이다. 결과적으로 비극 작품을 해결하고 싶으면 신이 등장한다. 그것이 고대 그리스의 비극이다. 신이 나오지 않으면 셰익스피어의 비극이다. 비참한 결말을 피하기 위한 행위가 바로 그 결말의 원인이 되는 것. 비극이라는 장르는 의심skepsis라는 것이 바닥에 깔려있다. 다시말해서 《오뒷세이아》라는 서사시도 비극과 어떤 지점에서 통하는가, 저승 속편 맹약이 있음으로서 오뒷세우스가 알 수 없는 길을 떠나는 것, 인간으로서는 해명할 수 없는 영역으로 가는 것이다. 기독교는 인간으로서 해명할 수 없는 영역에서는 절대적인 하느님을 데려온다. 그런데 고대 희랍 세계관에서는 그것은 아니다. 신들과 인간과 함께 끊임없이 고민한다. 끝이 나지 않아서 괴로운 것이다. 계속해서 결핍이 생긴다. 

논어 - 학이편(學而篇)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溫 不亦君子乎
자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 자원방래 불역낙호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구조를 다시 보면 고향이 있고 타향이 있다. 중요한 포인트이다.  경험의 영역이 두 군데이다. 고향에서의 경험이 있고 타향에서의 경험이 있는데 타향에서의 경험이라고 하는 것이 가중치가 좀 더 주어진다. 오뒷세우스는 고향을 떠나서 타향에서 고생을 하다가 다시 왔다. 타향에서 고생을 하고 돌아온 고향은 달리 보이게 된다. 고향에서 타향으로 가서의 pathos가 원래 고향을 떠날 때의 나의 pathos가 더해져서 고향을 오게 된다. 그러면 내가 물리적으로 타향이라는 공간에 갔다가 물리적으로 고향이라는 공간에 돌아온 것도 있지만, 텍스트적으로 자기가 지금까지 한번도 안 읽어본 텍스트를 읽고 거기서 뭔가를 겪어서 다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pathos가 더해지는 것이다. 타향에서 고향을 보면 낯선 것으로 보인다. 즉 대자적이다.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가 자기 안에서만 파묻혀 있다가 바깥으로 나와서 자기가 파묻혀 있던 공간을 보면 그것이 객관화해서 보이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실 굉장히 드물다. 그런데 자기가 자기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려면 물리적으로 익숙한 곳을 떠나거나 아니면 정신적으로 익숙한 곳에서 벗어나거나 해야 한다. 텔레마코스가 고향을 떠나 타향으로 가는데 오뒷세우스는 그것 못지 않게 굉장히 심하게 타향살이를 한다. 그것은 타향살이를 하는 과정에서 오뒷세우스가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자기객관화에 이를 것이라고 하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어떤 epic이든지 반드시 낯선 것과의 접촉이라는 것이 있다. 내용상뿐만 아니라 구조적으로도 반드시 필요하다. 낯선 것과의 접촉을 하는 대면하는 자아가 있다. 이렇게 두 개가 합해져서 뭔가가 제3의 자아가 만들어지는 것, 이 프로세스를 따라서 가는 것이 서사시가 하는 일이다. 그러면 반드시 서사시적 구조를 갖고 있지는 않은데 서사시적 주제를 가지고 있는 텍스트들이 있다. 그런 텍스트들은 불멸의 지위에 올라가게 된다. 프란츠 카프카의 《성》을 보면 K가 나온다. 독자들이 벌써 K라는 이름을 보고 낯설다. K는 성 안에 들어가고 싶어한다. K에게 성은 낯선 것이다. 성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K와 낯설다. K는 결국에는 그 사람들과 아무런 접점을 마련하지 못한 상태로 이야기가 끝난다. 이것은 서사시적 결말은 아니다. 그런데 접점을 마련하지 못하는 모습이 굉장히 충격적이다. 박완서의 소설과 카프카의 소설은 같은 맥락에 놓여있다. 그 접점은 있기는 있는데 제3의 자아가 형성되지 않은 상태로 이 지점에서 단절이 생겨난다. 이게 바로 서사시 구조의 파괴이다. 그러니까 낯선 것을 만나기는 했는데, 이것은 서사시적인 모티브이다, 서사시적으로 유화시키지 않고 제3의 자아를 형성하지 못한 상태로 끊어져 버린다. 서사시적 모티프를 가져다가 서사시적 결말을 안 내고 끝내 버린 것이다. 서사시에 대한 사망 선고이다. 그러니가 어떻게 보면 카프카가 디킨스보다 무서운 사람이다.  epic이라는 것 하나를 탐색해보면 epic이라는 것이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따라서, 동아시아 세계의 문학은 기본적으로 epic이 아니라 commedia인데 웃기는 얘기가 아니라 떠들썩한 사람이 모인 즐거운 이야기이다. 도스토예프스키도 epic이다. 토마스 만은 roman의 극단이다. 

 

그 다음에 오뒷세우스가 환상세계에서 겪은 일들이 있고 겪음을 한 다음에 고향에 돌아왔고 페넬로페와 알아보는 것이 있다. 오뒷세우스가 객지에서 수없이 많은 고생을 했는데도 페넬로페와 서로 알아봤다는 것은 오뒷세우스의 제3의 자아라고 할 수 있다. 그 많은 겪음을 통해서 오뒷세우스가 성장했다. 기본적으로 성장 이야기이다. 그 다음에 참고를 보면 "여행하는 데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시며 먹을 것이나 자루도 가지지 말고 전대에 돈도 지니지 말며" 마르코 복음서 6.8이다. vita apostolica, 이는 순례자의 삶, 사도적 삶을 가리키는 성서의 구절이다. 이는 기독교적 삶의 전형적인 것이다. 《천로역정》이 바로 이 구절에 근거하고 있다. 빈 손으로 가도 신께서 다 채워주실 것이다 라는 신념인 것. 이때의 경험은 타향으로 가기는 가는데 타향이 아주 낯선 타향은 아니다. 신의 은총이 있는 타향이다. 순례자의 삶이라는 것이 굉장히 고난의 삶인 것 같지만 사실은 epic에 등장하는 타향으로 가는 삶보다도 덜 고통스러운 것이다. 순례자의 삶도 낯선 곳으로 가는 것이고, 서사시에서도 낯선 곳으로 간다. 낯선 곳으로 가는데 이것이 신에 의해서 보장된 낯선 곳인지 아니면 그냥 내가 부딪쳐서 해결해야 하는 낯선 곳인지에 대한 차이가 엄청나게 있다. 그래서 고대 서사시의 서사시가 인문주의적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인문주의적이다, 휴머니스트라는 말을 ‘인류애가 넘치는’이라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된다. 속된 말로 인간이 자신을 깨뜨려 가면서 직면해서 밀고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코 복음서 6.8 그리고 여행하는 데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시며 먹을 것이나 자루도 가지지 말고 전대에 돈도 지니지 말며

스토리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고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지 기술적으로 이해를 하고 있어야 한다. 이에 덧붙여서 이들의 밑바탕에 놓여있는 비극적 세계관, 비극적 세계관이 슬픈 것이 아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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