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달: 근대 조선과 일본
- 책 밑줄긋기/책 2023-25
- 2023. 7. 17.
근대 조선과 일본 - 조경달 지음, 최덕수 옮김/열린책들 |
들어가며
음지와 양지
한반도와 일본은 과거 수천 년에 걸쳐 교류를 거듭해 왔다. 그리고 국가가 탄생한 이후의 역사에는 다양한 기복이 있었다. 평화로운 시기가 있었다면 전쟁의 시기도 있었고, 쌍방의 사람들 사이에는 동경이나 증오 등 복잡한 감정이 교차하였다. 최근 한류 현상은 괄목할 만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혐한류나 북한 비방 등의 분위기도 강하다. 한반도의 일본관도 이제는 증오만은 아니고, 동경은 물론이거니와 대등한 인식 등도 싹트고 있지만 북한이든 한국이든 여전히 복잡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호 간의 애증은 말할 것도 없이 근대에 들어서 이루어진 불행한 역사에 많은 것이 기인하고 있다. 일본은 조선을 침략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합리화, 정당화하기 위해 조선의 역사를 정체적, 타율적으로 보는 역사관을 유포시켰다. 조선은 자력으로 근대화할 수 없고, 방치해 두면 나라마저 빼앗길지도 모르므로 일본이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아전인수 격인 식민지 사관이다. 더욱이 고대 시기에 일본이 조선의 일부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역사 인식에 입각하여 〈일선동조론〉도 활발하게 선전하였다. 한국 병합은 침략이 아니고 이웃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같은 조상〉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 일체화라고 하는 것이다. 두 나라는 마주 보고 있는 거울처럼, 조선은 일본의 그늘이 되었고, 조선이 그렇게 될수록 일본은 양지로서 빛났다.
전후의 한국사학
전후의 한국 사학은 이러한 역사 인식 극복을 최대의 과제로 설정하였다. 그 결과 침략에 대한 한민족의 강인한 저항을 그려 내자는 역사관이 1950년대부터 60년대 중반까지 융성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식민지 사관을 극복하는 데 미치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그 후 조선은 내재적으로 근대의 방향으로 발전의 길을 걷고 있었지만, 일본에 의해 차단되고 방해를 받았다고 하는 이른바 내재적 발전론이 한 시대를 풍미하게 되었다.
그런데 1980년대 이후 그에 대한 회의가 생겨났다. 내재적 발전론은 이제까지의 지배-저항의 역사를 받아들이면서 근대적인 발전의 길을 그리려 하였는데, 그것은 너무 일국사적임과 동시에 근대 일본의 민족주의, 국가주의를 지탄하는 한편으로, 조선의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제시된 것이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이 논의는 일본 지배 아래에서 조선의 자본주의적 발전을 논하려 하는 점에 특징이 있다. 이것은 일본의 지배를 합리화하는 일면을 갖고 있기 때문에 현재까지 논쟁이 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오늘날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것은 식민지 근대성론이다. 이것은 식민지 근대화론처럼 근대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를 비판하는 입장에 선 논의이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통해 좋아지거나 그렇지 않거나에 상관없이 조선인은 나쁜 근대의 가치를 내면화하였다는 것이다. 국민 국가의 상대화를 부르짖는 현재 역사학의 시의에 걸맞는 근대 비판의 논의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논의는 근대를 비판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근대를 절대화해 버리고 있다. 사람들은 당찮은 침투력을 가진 근대에 대해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것으로서 파악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근대 비판은 근대 일본에 대한 비판으로도 통하는데, 양자를 동시에 실천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내재적 발전론은 첨예하게 근대 일본을 비판하였지만, 조선과 일본의 동질성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근대로 향하는 속도에는 그다지 차이가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한다면 논리적으로 근대 일반은 반드시 비판 받아야 할 것이 아닌데, 근대 일본을 비판해야 한다는 것은 조선의 내재적 근대화를 저해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한국 근대사 연구가 근대의 주술로부터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정치문화에 주목
그렇다면 근대를 상대화하기 위해 어떠한 역사 인식이 필요한 것인가? 역사란 것은 실제로 다양하게 진행된다. 반드시 근대적 방향으로만 나아가지 않는 역사의 발전을 확인하는 것이 근대를 상대화함과 동시에 서구 근대 아류의 길을 걸었던 근대 일본을 비판하는 것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거기서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이 정치 문화이다. 정치 문화란 정치적 사건이나 항쟁이 일어난 시기에 그 내용이나 전개의 양상 등을 규정하는 이데올로기, 전통, 관념, 신앙, 미신, 원망, 관행, 행동 규범(규칙) 등 정치 과정에 관련된 일체의 문화이다. 정치 문화는 일반적으로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공유한다. 공유하지 않는 경우에 국가나 정부는 안정성을 잃게되어 위기 상황이 온다. 예를 들어 전근대 사회에서 왕정이 일반에게 지지받은 것은 국왕이라는 자가 단순히 징세하는 자가 아니라, 백성에게 자비와 행복을 베푸는 고귀한 존재이며, 또한 그래야 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국왕이 호화로운 궁궐에 거주할 수 있는 것도, 신하와 거느린 백성 사이에 그러한 합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세 차례 그와 같은 기대를 배신하고, 악정을 제멋대로 한다면 혁명의 위기에 직면한다. 그리고 백성 자신이 정치를 행하는 주체라고 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지 않던 전통 사회에서는 혁명 후에도 또한 새로운 구세주가 국왕으로 군림하게 된다. 그 정치 과정에서 국왕 환상온 물론이거니와 사회 변혁에 따라붙는 미신과 유언비어, 혹은 탄원이나 민중 봉기 등이 복잡하게 얽혀서 세상을 소란스럽게 만든다. 사회 변혁의 기운이 싹트는 가운데 의적이 탄생하기 쉬운 것도 정치 문화의 문제로 민중의 바람이 크게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 문화는 넓은 의미로는 정치사상이나 정치 이념을 포괄하지만 그것 자체와는 다르다. 정치 문화는 그 원리적으로는 정치사상과 정치 이념을 갖지만, 현실의 정치 세계에서는 그러한 것들이 반드시 충실하게 반영되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민주주의적이지 않은 국가는 얼마든지 존재한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유교,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에 기초한 정치사상을 원리로 삼은 국가가 많았지만, 그 정치 세계나 민중 세계의 양상은 지역이나 민족국가에 따라 다양하였다. 원리는 동일한 정치사상이더라도, 그 표현 방식은 다르다.
서구에서 발단한 근대는 확실히 절대적인 힘으로 세계를 거칠 것 없다는 얼굴로 석권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하나의 사회, 국가를 만들어 낸 것은 아니었다. 각 지역, 민족, 국가의 전통적 정치 문화의 규정을 받았고, 각기 독특한 정치 세계를 창출하였다. 근대의 얼굴은 하나가 아니다. 근대를 초월하지 못하더라도 근대와의 갈등이 상당 기간 이루어지고, 현재에도 이러한 문제가 계속 이어지고 있는 국가와 지역이 얼마든지 존재한다. 예를 들어 부탄 정부가 필요 이상의 GDP 발전을 추구하지 않고, 주민 총행복량의 증진에 정책의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은 부탄의 전통적 정치 문화 양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정치 문화사적 논의에는 발전 단계론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역사를 보는 지평을 제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 책의 목적
이 책은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근대 한일 관계사를 개관하는 것이 목적이다. 근대 조선의 역사는 일국사적으로 성립하지 않으며, 특히 일본과의 관계를 빼고 이야기할 수 없다. 근대 일본의 역사 또한 그와 같다. 양자는 각각 어떠한 사회를 전제로, 어떻게 근대 세계로 돌입하였으며, 그 결과 어떠한 국가를 만들어 내었는가? 이 책에서는 이러한 흐름을 정치 문화의 문제를 단서로 삼아 밝혀 보려 한다.
이 책의 범위는 19세기 중반부터 1910년 한국 병합까지의 시기이다. 다만 정치 문화를 문제로 삼기 위해서는 장기적 시각이 필요하기 때문에 조선 왕조 성립 무렵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과 일본을 비교하여 일본의 정치 문화도 언급할 것이다. 이 책은 조선에 중심축을 둔 일본과의 관계사이지만 비교사도 의도하고 있다.
문화라는 것은 머리 위에 〈정치〉라는 관이 씌워져 있지만, 반드시 선악으로만 논할 수 없다. 한쪽의 문화로 다른 쪽의 문화를 부정한다면 그것은 문화 침략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역사의 어느 단계에서 그것이 왕왕 행운이나 재앙을 초래한다. 그리고 행운을 얻은 자는 재앙을 얻은 자를 매도한다. 역사가 짊어져야 할 부채이다. 그럴수록 역사의 전개를 배후에서 규정하는 정치 문화에 관한 관심을 높일 필요가 있다. 근대의 조일 관계사는 확실히 일본의 조선 침략사라고 하는 측면을 갖고 있지만,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는지를 냉정하게 정치 문화사적 차원에서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한반도와 일본 사이에는 아직 여러 가지 문제가 가로놓여 있는데, 상호 이해의 포인트는 서로의 문화나 정치 문화를 잘 아는 데 있다. 양자는 이웃 나라이기 때문에 좋고 싫음에 관계없이 앞으로도 영원히 교류를 거듭해 나갈 수밖에 없다. 이 책은 문화 일반을 논하지는 않지만 상호 이해에도 기여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가지고 정치 문화사적 관점에서 서술한 근대 한일 관계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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