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하르트 코젤렉: 지나간 미래
- 책 밑줄긋기/책 2023-25
- 2024. 2. 5.
지나간 미래 - 라인하르트 코젤렉 지음, 한철 옮김/문학동네 |
I. 근대사에 있어서의 과거와 미래의 관계
- 근대 초기의 지나간 미래
- 역사는 삶의 스승인가
- 근대 혁명개념의 사적 기준
- 로렌츠 폰 슈타인의 역사예측
II. 사적 시간규정의 이론과 방법
- 개념사와 사회사
- 역사, 역사들, 시간의 형식구조
- 서술, 사건, 구조
- 우연
- 입장연관성과 시간성
III. 역사적 경험변화의 의미론
- 비대칭적 대응개념의 사적. 정치적 의미론
- 역사의 생산가능성
- 공포와 꿈
- '근대'
- 경험공간과 기대지평
해설: 개념의 흔적에 담긴 시간들
라인하르트 코젤렉 연보
경험공간과 기대지평
391 '경험과 기대'라는 개념쌍의 성격은 이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그것은 자체적으로 교차하며, 어떠한 대안도 설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가 없다면 다른 하나를 절대로 가질 수 없다. 경험 없는 기대는 없으며, 기대 없는 경험도 없다.
392 현실적 역사의 가능성의 조건은 동시에 그것의 인식의 조건이다. 희망과 기억, 혹은 더 보편적으로 말해서 기대와 경험은 ━ 왜냐하면 기대는 희망보다 더 많은 것을 포괄하고, 경험은 기억보다 더 깊은 것이기 때문이다 ─ 동시에 역사와 역사인식을 구성한다.
393 이제 나의 테제를 말해야겠다. 경험’과 ‘기대’는 과거와 미래를 교차시키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 시간을 다루기에 적합한 범주이다. 이 범주들은 경험적 연구의 영역에서 역사적 시간을 탐지하는데에도 적합하다. 왜냐하면 이로써 사회적 · 정치적 운동과정 속에서의 구체적 행동단위들이 내용적으로 풍부하게 도출되기 때문이다.
394 경험은 사건들이 체화되어 기억될 수 있는 현재적 과거이다. 지식 속에 현전하지 않는, 혹은 더이상 그렇지 않은 무의식적 행동방식들이나 합리적 세공이 경험 속에서 결합된다. 더욱이 세대나 제도들을 통해 전해지든 스스로의 경험 속에는 항상 낯선 경험들이 포함되거나 지양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는 옛부터 낯선 경험에 관한 학문으로 파악되었다.
394 기대도 비슷하게 말할 수 있다. 이 개념 역시 개인연관적이며 동시에 상호개인적이다. 기대도 오늘 속에서 이루어지며, 현재화된 미래로서 아직은 아닌 것, 경험되지 않은 것, 해명될 수 있을 뿐인 것을 지향한다. 기대도 오늘 속에서 이루어지며, 현재화된 미래로 아직은 아닌 것, 경험되지 않은 것, 해명될 수 있을 뿐인 것을 지향한다.
394 양면적 현재성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과거와 미래를 거울처럼 관계짓는 대칭적 보완개념이 아니다.
396 '기대공간'보다는 '기대지평'이라는 은유를 사용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지평은 아직은 보이지 않는 새로운 경험공간을 나중에 열어주는 선을 뜻한다. 예측이 가능하지만, 미래의 해명가능성은 절대적 한계에 부딪힌다. 미래를 경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397 기대를 전적으로 자신의 경험에서 도출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일이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게 진행되었다면, 더 좋은 것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기대를 경험으로 근거짓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잘못이다. 여기에 아포리가 있으며, 이것은 시간연쇄 속에서만 해결될 수 있다. 두 범주가 가리키는 차이는 우리에게 역사의 구조적 특징을 보여준다 역사 속에서는 항상 주어진 조건 속에 포함되어 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이 혹은 더 적은 것이 일어난다.
398 기대되지 않았던 것만이 놀라움을 준다. 이때 새로운 경험이 생긴다. 즉 기대지평이 무너지면서 새로운 경험이 발생한다. 그때의 경험획득을 통해, 그때까지의 경험을 통해 주어졌던 미래의 한계가 사라진다. 기대가 시간적으로 추월되면서 이 두 차원은 그때 그때 새로운 방식으로 관계한다. 간단히 말해서, 그때그때 상이하게 새로운 해결을 유발하고, 그러면서 역사적 시간을 추동시키는 것이 경험과 기대 사이의 긴장이다.
399 나의 테제는 근대에 경험과 기대 사이의 차이가 점점 커진다는 것이고, 더 정확히 말해서 기대들이 그때까지의 경험들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근대가 새로운 시대로 파악된다는 것이다.
400 이백 년 전에 유럽의 대다수 지역에서 인구의 80%는 농민이었고, 이러한 세계는 자연의 순환과 더불어 살았다. 사회제도, 판매량의 동요, 특히 농업생산물의 수출과 수입, 화폐의 동요를 도외시한다면, 일상은 자연이 제공하는 것에 의해 만들어졌다. 수확은 태양, 바람, 기후에 달려 있었고, 습득된 숙련성은 세대에서 세대로 대물림되었다. 기술적 혁신이 있긴 했지만 너무 느린 것이어서 생활을 변화시킬 수는 없었다. 그때까지의 경험을 유지하면서 사람들은 그것에 적응할 수 있었다.
400 농민적 · 수공업자적 세계에서 제기되었던 기대들은 전적으로 선조의 경험에 의지했고, 이 경험들이 다시 후손들의 경험이 되었다.
400 너무도 느리고 장기적인 것이어서 그때까지의 경험과 새로운 기대 사이의 간격이 전래된 생활세계를 파괴하지는 못했다.
401 잘못된 예언은 항상 재생산될 수 있었다. 게다가 바로 기대가 들어맞지 않았다는 사실이, 다움에는 세계종말에 관한 묵시론적 예언이 더 큰 개연성으로 적중하리라는 것을 증명했다. 묵시론적 기대의 반복적 구조는 이 지상에서 그것에 반대되는 경험들을 면역시켰다. 이후 그러한 경험들은 처음에 증명했던 것과 정반대인 것을 증명하는 수단이 되었다. 따라서 이 기대는 그와 반대되는 어떠한 경험에 의해서도 따라잡을 수 없는 기대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세계를 넘어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402 종말론은 이 세계의 경험공간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다면 계속 재생산될 수 있었다.
403 진보개념은 18세기말경에야 비로소 지나간 3세기의 충만한 새로운 경험들을 결집시키며 만들어졌다. 유일하고 보편적인 진보개념은 일상 속으로 점점 깊게 개입하는 수많은 개별적인 새로운 경험들과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분과적 진보에 의지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전환 기술의 등장, 신대륙과 상이한 발전단계에서 살고 있는 민족들의 발견, 산업과 자본을 통한 신분세계의 해체가 그 예이다. 이 모든 경험들은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을 가리킨다.
404 여태까지의 모든 경험이 미래의 상이성을 반박할 수 없다는 것이 원칙이 되었다. 미래는 과거와 다를 것이며, 더 나을 것이다. 역사철학자로서 칸트는 이것에 반하는 경험들을 정리하여, 그것들이 진보의 기대를 증명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애썼다. 그는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머물 것"이며 따라서 역사적으로 새로운 것을 예언할 수는 없다는 테제를 거부했다. 이 원칙은 그때까지의 모든 역사적 예언형식들을 뒤집는 것이다.
405 역사 전체가 일회적이라면 미래는 과거와 달라야만 한다. 계몽주의의 결과이자 프랑스혁명에 대한 반향인 이러한 역사철학적 원칙은 역사 일반과 진보개념을 기초짓는다. 양자 모두 개념형성과 더불어 역사철학적 충만함에 도달했던 개념이며, 더이상 어떠한 기대도 그때까지의 경험에서 도출될 수 없다는 실상을 가리킨다.
406 진보는 경험과 기대 사이의 시간적 차이를 하나의 개념으로 만든 특수하게 역사적인 첫번째 개념이다.
407 18세기말 이후에는 이러한 정치적 · 사회적 상황에 기술적·산업적 진보가 덧붙여졌다.
408 학문과 기술에서 먼저 진보가 이루어지면서, 도덕적 · 정치적 진보가 뒤처지기는 했지만, 가속화는 이 영역까지 장악한다. 미래가 점점 빨리 사회를 변화시키면서 개선한다는 것은 후기계몽주의의 기대지평의 특징이다.
411 신성로마제국이 끝날 무렵에야 만들어진 세 개의 연방개념, 즉 '국가연방', '연방국가', '연방공화국'이 담고 있는 시간적 긴장은 완전히 다르다.
413 '공화주의'는 '진보'가 전체 역사에서 이루기를 약속했던 것을 정치적 행동공간에서 수행하는 운동개념이었다.
414 두 개의 메타역사적 범주들을 역사에 적용해봄으로써 우리는 역사적 시간을 인식하고, 특히 근대의 탄생을 이전시대들과 구분할 수 있었다. 이때 경험과 기대의 비대칭성이라는 우리의 인류학적 전제 자체가 그 비대칭성을 진보적으로 해석했던 격변기의 특수한 인식론적 산물이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물론 이 범주들은 '새로운 시대'로 개념화되었던 진보하는 역사의 탄생에 대한 설명모델 이상의 것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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