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도미닉 크로산: 역사적 예수

 

역사적 예수 - 10점
존 도미닉 크로산 지음, 김준우 옮김/한국기독교연구소

<21세기 기독교 총서>를 발간하면서
『역사적 예수』의 한국어판 서문
전주: 예수의 복음
서문: 역사적 예수

제1부 브로커들의 제국
1장 당시와 현재
2장 전쟁과 평화
3장 노에와 후견인
4장 가난과 자유

제2부 브로커 체제와의 싸움
5장 귀족 출신의 역사가
6장 비전을 보는 이와 교사
7장 농민들의 저항
8장 주술사 및 예언자
9장 의적(義賊)과 메시아
10장 반란자와 혁명가

제3부 브로커 없는 나라
11장 세례 요한과 예수
12장 하느님의 나라와 지혜
13장 주술과 식사
14장 죽음과 매장
15장 부활과 권위

 


50 지난 200년 동안 복음서들에 대한 비교 연구를 통해 느리지만 확실한 결론을 얻게 되었다. 첫째, 복음서들은 신약성서 안에서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발견된다. 둘째, 네 개의 정경 복음서들은 당시 구할 수 있었던 복음서들의 전집도 아니며 임의적인 본보기가 아니라, 용의주도한 선별과정을 거쳐 선택된 것으로서, 다른 복음서들은 그 내용뿐 아니라 그 형식에 있어서도 제외되었다. 셋째, 예수에 관한 자료들 가운데 기억된 것, 발전시킨 것, 창작한 것들은 네 개의 정경 복음서들 안에서뿐만 아니라, 정경밖의 복음서들에서도 발견된다. 넷째, 예수에 관한 기사들 사이에 차이가 있고 불일치하는 이유는 기억이 희미했기 때문도 아니며, 강조를 달리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에 관한 매우 의도적인 신학적 해석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부활한 예수가 계속 임재하고 그 영(Spirit)이 함께 한다는 경험 때문에 예수전승의 전달자는 창작의 자유를 갖게 되었는데, 이것은 오늘날우리들로서는 증거가 확실하지 않고서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태오나 루가조차도 예수의 말씀과 행적, 혹은 다론 사람들이 예수에게 한 말과 행동들의 자료로 마르코를 이용하면서, 마태오나 루가는 자신들의 이야기 속에서 어떤 것은 빼고, 더하고, 바꾸고, 새로 만들고 하는 일을 마음대로 하였지만, 물론 자신들의 특수한 예수 해석에 따라 그렇게 하였다. 복음서들은 역사도 아니며 전기도 아니다. 이런 장르들에 대한 고대의 폭넓은 개념에 비추어볼 때도 아니다. 복음서들은 그 명칭이 굳어진대로 복음 혹은 "기쁜 소식"(good news) 이다. "기쁜"이란 항상 어떤 개인이나 공동체의 의견, 혹은 해석에 따라 기쁜 것이라는 뜻이다. "소식"이란 우리가 보통 또다시 복수형(newses)으로는 사용하지 않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전승은 세 개의 중요한 층을 지니고 있는데, 첫째는 기억된 것의 층으로서 말씀과 행적, 사건들의 적어도 그 핵심을 기록한 것이며, 둘째는 발전시킨 것의 층으로서 핵심 자료들을 새로운 상황, 문제, 예상치 못한 경우들에 적용시킨 것들이며, 셋째는 창작한 것의 층으로서의 새로운 말씀들과 이야기들을 작성한 것뿐 아니라, 보다 큰 이야기의 단락을 작성함으로써 이 과정에 의해 그 내용이 바뀌게 된 층이다.

194 그 다음에, C.E. 14년부터 37년까지의 기간에 관한 유명한 진술이 나온다. 즉 "티베리우스(황제) 치하에서는 조용했다"는 진술이 그것이다. 얼마나 조용했기에 조용했다는 것인가? 그 본문들에서 타키투스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황제들을 한 사람씩 다루고 있는데, 그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단지 반란들, 즉 유프라테스의 세 개의 군단, 나중에는 네 개의 군단의 지원을 받아 시리아의 로마 특사가 직접 개입할 수밖에 없었던 반란들에만 관심을 갖고 있다. 팔레스타인의 로마 총독은 그 휘하에 단지 보조부대만 있었는데, 특정한 상황만 제외하고는 그들의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해서, 타키투스는 그 전쟁으로 치닫기까지의 작은 반란들만 기록하고 있다는 말이다. 

195 아우구스투스 황제로부터 칼리굴라 황제까지의 기간에 대해 타키투스가 "티베리우스(황제) 치하에서는 조용했다"고 말한 것은 티베리우스 치하에서는 시리아의 특사가 그의 군단 병력을 이끌고 개입할 필요가 있었던 반란은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즉 "조용했다"는 말은 팔레스타인 총독들이, 자신들이 초래한 문제들을 포함하여,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었다는 뜻이며, 그런 문제들은 로마의 역사, 혹은 타키투스에게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즉 "조용했다"고 해서 티베리우스 황제 치하에서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는 말은 아니며, C.E. 14년부터 37년까지의 기간 동안에 팔레스타인에서 사회적 불안이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197 묵시사상은 첫째로 문화 보전이 중대한 공격을 받을 때, 종교정치적 및 사회경제적 위협이 결합되어 나타날 때 생겨날 수 있는 하나의 가능한 대응이다. 둘째로, 그것이 현실적 위험일 수도 있고, 아니면 상상에 의한 위험일 수도 있는데, 중요한 것은 그에 대한 인식이다. 마지막으로, 또 다른 구별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즉 그것이 내적인 위험일 수도 있고, 외적인 위험일 수도 있는데, 한 떄 권력이나 지위를 가졌으나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이제는 주변화되고 그 특권을 박탈당한 집단의 반동일 수도 있으며, 아니면 제국주의 상황 속에서 식민지화한 사회 전체의 대응일 수도 있다. 

198 "천년왕국운동이란 구원에 대한 환상에 의해 영감을 받은 종교운동으로서, 그 구원이 (1) 신자들이 하나의 집단으로서 그 구원을 누리게 된다는 점에서 집단적이며, (2) 그 구원이 저 세상적인 하늘이 아니라, 이 땅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지상적이며, (3) 그 구원이 조만간, 그리고 갑자기 온다는 점에서 임박한 것이며, (4) 그 구원이 이 땅 위에서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음으로써, 새로운 시대가 단지 현재를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한다는 점에서, 전체적인 것이며, (5) 초자연적인 존재라고 간주되는 대리자들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377 즉 "요한 당시에 유대인들이 합법적으로 희생제사를 드릴 수 있었던 유일한 장소는 예루살렘이었으며, 그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새롭고, 값싸며, 누구나 받을 수 있고 하느님의 인정을 받는 제의를 도입한 것은 요한의 위대한 창안이었다. 임박한 심판에 대한 그의 경고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즉 예언자들은 지난 800년 동안 그런 심판을 경고해 왔었다. 새로운 점은 대격변을 일으키며 오는 심판(그 나라)에 대해 보통 사람들도 쉽게 준비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확신을 심어준 것이었다. 

384 요르단 강 동편의 광야지역에 위치해 있으며, 요르단 강에서, 정확히 그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베풀었다는 것은, 노골적이든 아니면 함축적이든, 정치적 전복이라는 뉘앙스를 지니고 있었다. 요한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안티파스는 비상조치를 취하기에 충분한 물증을 갖고 있었다. 즉 광야와 요르단 강, 예언자와 군중의 결합은 언제나 즉각적인 예방조치를 취해야만 할, 위험한 결합이었다. 

595 내가 주장했던 점들은 우선 첫째로, 예수의 가까운 추종자들은 그가 십자가에 처형되었다는 사실만을 알았을 뿐이지 그 이상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는 점, 그들이 모두 도망쳤기 때문에 나중에 그 세부사항에 관해서 증언해 줄사람들이 없었다는 점, 그리고 어쨌던 간에, 그들은 훨씬 더 심각한 문제들, 즉 그의 죽음이 그가 가르쳤고 행동했던 모든 것, 그들이 받아들였고 믿었던 모든 것들을 부정하는 것인지 아닌지 하는 문제처럼, 훨씬 더 심각한 문제들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616 이것은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에게만이 아니라 그의 박해받은 추종자들에게도 사실이었다. 구원은 죽음으로부터 (from death)가 아니라 죽음을 통해서 (through death) 였으며, 여기 이 세상에서(here below) 가 아니라 임박한 내세(here-after)에서 였다. 중요한 것은 구원의 기적(salvific miracle)이 아니라 모범적 죽음(exemplary death)이었다. 

620 보통의 경우는 그 처형을 집행한 군인들이 처형된 사람이 죽기까지 십자가를 지키다가, 그가 죽은 것을 확인하면 시체를 묻어버렸다. 십자가를 지킬 필요가 있었던 것은 아무도 그 처형된 사람을 구출하기 위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고, 서서히 참혹하게 죽어가는 것에 대한 대중 효과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예를 들어, 요세푸스는 예루살렘 함락 뒤에 가까스로 자기 친구 세 명을 십자가에서 끌어내렸는데, "그 중 두 명은 의사 손에서 죽고, 한 명만 살아났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보통 가족들이, 심지어 그 처형된 사람이 죽은 후에도, 그 시체에 가까이 가기를 너무 무서워했거나, 아니면 너무 무기력함을 느꼈을 것이다. 이 모든 현실은 초기 기독교에게 거의 견딜 수 없는 문제를 불러일으켰는데, 그것이 단락 70 예수의 매장[1/2] 본문들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622 매장 전승의 궤적은 처음에는 다소 부정적인 시각에서 출발하여, 그 원수들에 의한 매장으로부터 그의 친구들에 의한 매장으로 바뀌었으며, 서둘러 엉터리로 매장한 것으로부터 완전한 매장, 심지어 왕처럼 시체에 대한 향료 처리까지 한 매장으로 바뀌었다. 여기서 문제는 예수가 친구들에 의해 매장되었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즉 만일 그들이 권력을 가졌다면, 그들은 그의 친구가 아니었으며, 만일 그들이 그의 친구들이었다면, 그들은 권력을 갖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마르코는 또다시 중요한 예비적 발걸음을 내디뎠다. 마르코는 15:43에서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 즉 "명망 있는 의회 의원이었고 하느님 나라를 열심히 대망하고 있는 사람"을 만들어 (예수의 시체를 내어 달라고 요청하도록) 그를 빌라도에게 보냈다. 그는 양편 사이에 꼭 들어맞는 인물로서, 유대 지도층의 "명망 있는" 인물이며 동시에 "(하느님 나라를) 열심히 대망하고 있는" 인물로서 예수와도 연결되었다. 

666 예수 자신이 단순히 새로운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브로커로 해석되지 않도록 그는 항상 옮겨 다녔으며, 나자렛이나 가버나움에 정착하지 않았다. 그는 브로커도 아니었고 중보자도 아니었으며, 역설적으로,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 혹은 인간들 사이에 아무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선포한 사람이었다. 기적과 비유, 치유와 식사는 개인들로 하여금 하느님과 아무런 중개자 없이 육체적으로 또한 영적으로 접촉하도록 만들며, 사람들 서로 간에도 아무런 중개자 없이 육체적으로 또한 영적으로 접촉하도록 만들기 위해 계산된 전략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브로커 없는 하느님 나라를 선언하였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