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ε. Vindication of Tradition, Ch. 1

2024.09.01 ε. Vindication of Tradition, Ch. 1

• 야로슬라프 펠리칸Jaroslav Pelikan, ⟪전통을 옹호하다 - 전통의 의미와 재발견, 회복에 관하여⟫ (The Vindication of Tradition: The 1983 Jefferson Lecture in the Humanities, 1984)

 

• 텍스트: buymeacoffee.com/booklistalk/vindication-tradition-ch-1


야로슬라프 펠리칸의 《전통을 옹호하다Vindication of Tradition》, 오늘은 챕터 1 전통의 재발견을 설명한다. 전통의 재발견에 붙어 있는 소제목이 경과 보고이다. 경과 보고인 것처럼 이론적으로 따져 물어야 되고 굉장히 궁리를 많이 해야 되는 그런 내용은 없다. 말 그대로 보고이니까 전통을 재발견하는 과정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저런 일이 있었다를 말해주는 것이다. 챕터 2는 전통의 회복이다. 그런데 챕터 2의 처음을 보면 "전통의 회복이 아닌 전통의 재발견에 대해서만 말하려고 상당히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이 둘은 분명 다르기 때문이지요."라고 되어 있다. 전통의 재발견이라고 하는 것은 19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런 일들이 어떻게 일어났는가 그리고 어떤 전통을 발견하긴 했는데 이건 아닌 것 같아 하고 거부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건 회복해야 돼'하고 되살린 경우도 있을 테이고, 그렇게 되살린 경우가 회복에 해당하는 것일 테이고, 무엇을 기준으로 회복할 것인가 이런 것들을 따져 묻는 것이 챕터 2가 되겠다.  

챕터 1 의재발견은 그냥 일어난 사건들만 쭉 나열을 하는 것이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 재미있는 것이 많다. 고전 텍스트를 읽는 사람들은 당연히 고전 텍스트 중 어떤 것을 골라서 읽어야 할 것인가 하는 것들이 굉장히 관심사이다. 가령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가 있다면 이 책을 읽어야 되는가, 소포클래스는 꼭 읽어야 하는가 하는 것들. 예를 들면 서울대학교 고전 100선은 전통을 재발견해서 회복 해놓은 것들이다. 모든 텍스트들을 막무가내로 읽는 건 아니다. 그리고 요즘에는 각 대학마다 교양 대학들이 있다. 중앙대학교는 다빈치 교양대학, 동국대학교는 다르마칼리지 그다음에 경희대학교는 후마니타스칼리지, 서울대학교는 이유선 박사가 하는 기초교육원, 그런 것들이 있는데, 그런 데서 하는 것들을 보면 전통을 재발견해서 일단 재발견된 것들 중에서 어떤 것을 교육을 할 것인가 그 기준이 있다. 요즘에는 소포클레스의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를 충실하게 읽고 있는 중인데,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참주 오이디푸스》와는 조금 다른, 비극이라고 하는 작품이 무엇을 우리에게 주는가에 대해서는 비극으로부터 무엇을 얻어낼 것인가를 생각한 다음에 기준을 세우고 텍스트를 고르는 것이다. 그런데 기준을 세우기 전에 텍스트를 일단 읽어봐야된다. 재발견해놓고 그런 과정에서 자신의 기준을 추출해내고 그렇게 추출한 규준을 가지고 자신이 읽었던 텍스트들을 다시 재정리해서 첨삭을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은 덧붙이고 어떤 것은 삭제하고 또다시 필요한 것들을 골라내고 이런 과정들을 거쳐서 회복이 일어날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는 챕터 2를 읽으면서 다시 얘기하기로 하고, 챕터1의 경과 보고를 한번 보면, 전통이 무엇인가. 르네상스나 계몽주의 이후 서구 사상사가 전통이 해체되는 과정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 해체됐는가, 당연히 전통이 무엇인가를 말해줘야 된다. 여기서 예를 들어 말한 것이 브리테니커 백화사전 제11판인데, 1911년에 나왔다, 거기를 보면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이나 성서를 별다른 설명 없이 언급하거나 인용하고 있는데. 14판은 1929년에서 1973년 사이에 편집이 되었는데, 여기에는 델로스 동맹의 항목이 적다. 11판은 당연히 델로스 동맹에 관한 항목이 우라늄에 관한 항목의 4배였다. 브리테니커 백과 사전의 내용이 또는 분량이, 말하자면 사람들이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인가 또는 편집자들이 또는 기고자들이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가에 대해서 판단해온 결과물이 드러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전통이 무엇인가 또 어떤 전통을 상실했는가 그리고 우리가 공유하는 역사 속에는 어떤 것들이 전통으로서 들어 있는가. 즉 전통을 구성하는 이런저런 요소들이나 다양한 전통의 구체적인 내용,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전통이라고도 하는데 전승이라고도 한다. 전통傳統이라는 말보다는 전승傳承이라는 말은 이어졌다고 뜻이 있으니까 그렇다. 

12 르네상스나 계몽주의 이후 서구 사상사가 "전통이 해체되는 과정에 관한" 것이라면, 연구자들은 그 역사를 읽거나, 듣는 이들에게 "전통이 뭔지도 말해 줘야" 합니다. 

16 다양한 전통의 구체적인 내용뿐 아니라, 연구와 범주와 방법으로서의 전통(혹은 전승) 개념 자체도 재발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것들이 중요하게 여겨지기 시작한 것은 19세기부터인데 도대체 왜 이게 중요하게 부상이 되었는가. 물론 12세기에도 또는 갈릴레오의 시대에도 아리스토텔레스를 재발견하고 그런 일이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학문적인 탐구의 노력으로 이어지게 된 것은 인류학이다. 인류학에서는 일단 원시부족 같은 곳을 가서 탐구한다. 전통이라고 하는 게 씨족이나 종족을 결속시키는 접착제 역할을 한다. 그것이 끊어지게 되면 결속이 이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젊은이가 성인의 특권과 책임을 지니도록 통과 의례를 거래하는 방식"이다. 여기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방식, 이것은 글로 적혀 있기도 하지만 방식이라고 하는 것은 전례典禮이다. 종교학에서는 전례라는 말로 쓰는데, 통과 의례를 거행하는 방식, 말하자면 성당에서 이러 이러한 순서로 뭔가를 해야 한다라고 할 때 그것은 성서에 적혀 있지 않다. 그런 것은 전례이다. 그게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이런 것들이 바로 이제 전통의 내용을 구성하는 것 중에 하나이겠다. "삶의 마지막을 기리는 특유의 방식 등의 관습을 통해서, 이 관습을 통해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고 전달"된다. 

17 전통은 젊은이가 성인의 특권과 책임을 지니도록 통과 의례를 거래하는 방식, 삶의 마지막을 기리는 특유의 방식 등의 관습을 통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고 전달됩니다. 

관습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잡아낼 것인가. 이것을 잘 살펴보려고 했고 했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쉬무엘 아이젠슈타트이다. 다중근대성, 《다중적 근대성의 탐구》라고 하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읽어봤었는데 그냥 이런 걸 연구했구나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문헌학적 가치는 있을지는 몰라도 독서 카드 2-3장 정도를 써놓고 몇 년 지나서 버린 것 같다. 학문적으로 얼마나 훌륭한 분인지는 잘 모르겠고 하여튼 읽고 두 번 읽은 책은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다음에 밀먼 페리. 밀머 페리는 고전학 텍스트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는 사람이다. 밀머 페리로 인해서 호메로스 서사시의 구조에 대한 연구가 아주 바뀌었다.  이 사람의 생몰연대를 보면 1902년에서 1935년이다. 그러니까 19세기 말 20세기부터 전통이라고 하는 것이 연구되었다. 서양에서는 학문의 역사가 길다 라고 얘기를 해도 사실 그것을 학문적으로 연구한 것은 얼마되지 않았다는 것을 밀머 페리를 보면 알 수 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졌는가, 이게 '구전 공식 가설'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사람의 《The Making of Homeric Verse》이 유명하다. 이 책을 읽어봐야 되나, 제가 고전을 읽는 사람이기는 한데 고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연구를 하는 사람은 아니어서 내가 이것까지 읽어야 하나 생각했다. 이런 것을 어떻게 찾아냈는가, 인류학의 성과이다. 아테나이, 즉 헬라스 지역이라고 하면 발칸 반도, 오늘날의 유고슬라비아이다. 거기 가서 원시 부족 구성원들이 서사시를 어떻게 서로 암송하고 또 전하는가를 살펴본 것인데, 호메로스 시대와 가장 가깝다고 여겨지는, 그것과 유사하다고 여겨지는 방식을 찾아본 것이다. 

그렇게 해서 tradition-history(전통사, 전승사)고 하는 분야를 드러내 보였고, 이렇게 해서 나온 연구 성과 중에 대표적인 갓이 프랜시스 콘퍼드의 《종교에서 철학으로》이다. 남경희 교수가 번역한 책으로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문화원에서 나왔다. 그러니까 서구적 사유의 기원에 관한 연구, 서구적 사유의 기원이 바로 종교에 있다는 것이다. 그다음에 여기 소개해 놓은 게 제인 해리슨이나 길버트 머레이인데, 길버트 머레이의 이런 책은 아주 오래되었다. 콘퍼드 책도 1957년에 나왔다고 하는데, 콘퍼드 책은 더러 소개도 했었고 투키디데스에 관한 연구가 아주 탁월한 사람이다. 

그다음에 성서학자들, 복음서 저자들은 어떤 방식으로 작업을 했는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독자로 생각하고 작업을 했다. 복음서 저자들을 기록한 사람들이다 라고 해서 기자記者라고 하는데, 이 기자들은 특정 공동체라고 하는 그런 전통 안에 들어 있고, 그들 공동체를 묶어주는 게 그들이 같은 지역에 살고 있다 라는 것도 있겠지만, 같은 종류의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고 전해받은 사람들의 묶음이겠다. 그리고 공관복음서들은 가장 먼저 쓰여졌다고 하는 마르코 복음이 있고 그다음에 마르코 복음을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이 참조하면서 작성이 되었고, 그런데 마르코 복음, 루카 복음, 마태오 복음 세 개를 놓고 그 세 개의 텍스트에 공통되는, 세 개의 성서 텍스트에 모두 포함되는 이야기를 묶어서 Q(Quelle)라고 하는, 그러니까 원천이라고 하는 텍스트를 가상으로 하나 구성을 했다. 그게 바로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다른 문헌이다. Q텍스트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져 있다. 대표적으로 이렇게 해서 공관복음 전통의 역사, 말 그대로 루돌프 불트만의 《공관복음서 전승사》라고 번역되어 나온 책이 있다. 성서를 읽는 사람들은 꼭 읽어봐야 한다.  그다음에 《신약 성서와 신화》라는 텍스트도 있고, 공관복음서 전승사는 Die Geschichte der Synoptischen Tradition, 같은 관점에서 쓰여졌다는 말이다.  

그다음에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가들, 이 사람들은 참 재미있는 사람들이다. 복음이 아닌 전승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고 주장했던 사람들, 오로지 성서, 복음과 전통을 구별하는 것을 주요 강령으로 삼았다. 자신들이 성서만을 뚫어지게 읽어서 참된 복음을 찾아냈다 라고 생각하고 그 이전 16세기까지, 종교개혁 이전까지 전개되었던 전통과 철저하게 구별된다는 얘기를 한다. 그런데 재밌게도 종교 개혁 자체가 하나의 전통이 된다.  그러니까 전통을 완전히 제거했다 라고 한 것도 하나의 전통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강한 충격을 주었기 때문에 당연히 전통의 토대가 된다. 좀 심하게 말하면 전통의 토대가 되지 못할 정도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종교개혁 자체가 하나의 전통이 되고 스코틀랜드 지역 같은 경우는 특히나 아주 중요하다. 루터파 교회가 국교인 덴마크라든가 또는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이런 데는 중요하다. 종교 개혁에 대한 이해가 굉장히 필요하다. 영국의 청교도 혁명 이런 것도, 청교도 혁명이 왜 그렇게 경천동지할 만한 개혁을 추구했는가, 그건 바로 그들이 전통을 업신여기는 그런 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통을 업신여기는 태도도 하나의 전통이다. 역설적이지만 그것이 꼭 필요하다.  

종교 개혁이 그러다 보니까 중세 연구자들은, 아씨씨의 프란체스코, 보나벤투라, 아퀴나스, 단테와 같은 13세기 사람들, 그다음에 종교개혁 연구자는 16세기를 연구 많이 하는데, 그 중간에 250년 정도가 비는데, 오캄 사람 윌리엄이나 쿠사의 니콜라스, 이것에 대한 연구도 또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도이치 철학에서도 이 지점, 니콜라우스 쿠자누스도 도이치 철학에서 중요한 연원이 된다. 그러면 도이치 철학의 전통은 어디서부터 시작하는가 할 때는 바로 루터로부터 시작을 해야 된다 라고도 할 수 있지만 루터 이전에 루터가 무엇을 비판하고 나섰는가를 생각해보면 14세기, 15세기도 무시할 수 없는 그런 것들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종교개혁과 전통이 어떻게 갈라서게 되었고, 종교 개혁이 전통을 그냥 무작정 배척한 것이 아닌, 자기네들도 모르게 전통을 이용한 사례들도 있을 것이고, 또 루터와 칼뱅이 서로 주고받은 영향도 생각해 보면 전통의 역사 속에서 살펴볼 만한 것들이다.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자신들은 과거의 전통을 완전히 부정한다, 종교개혁과 마찬가지로, 그런 태도를 보이지만 자기도 모르게 전통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인 사례도 충분히 있다. 건국의 아버지들 중에 한 사람인 토마스 제퍼슨 같은 경우에는 전통적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해서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창조나 평등이나 천부인권 이런 것들을 자명한 권리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그것을 어디서 얻었는가, 당연히 기독교 교리에서 가져온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도 그렇다. 기독교를 개독이다 라고 말하고 그러는데, 그런 사람들도 천부인권을 당연하다고 얘기한다. 만민평등이 어디서 왔는가, 한반도 고유의 사상은 아니다. 만민평등은 동학에서 온 것이 아니다. 동경대전東經大全을 읽어보면 그렇지 않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서학인 천주교와 유교의 한 분파인 동학이 있었는데, 이 둘을 놓고 더 엄격하게 탄압한 것은 동학이었다. 외부에서 오는 것들은 그나마 좀 관대하게 대하더라도 내부의 분열은 용서 못하는 것이다. 동학교도를 아주 끝장을 내기 위해서 청일전쟁 이후에 일본이 한반도에서 대학살을 저질렀다. 한반도 제노사이드의 출발점이 그것이다. 물론 임진왜란 때도 있었지만 그때보다는 더 심한, 일본은 그 지점부터 조금 생각을 해봐야 된다. 그다음에 마르크스주의의 역사 목적론. 이것은 뭐 말할 필요도 없이 역사 안에서, 역사 너머에서 하느님의 섭리가 작동하고 있다 라고 하는 것이다. 

그다음에 펠리칸은 미술사 얘기를 한다. 펠리칸은 자신이 대학에서 미술사 관련 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는데도 몇몇 연구 프로그램이나 학위 논문 심사, 학술 원고 검토했다. 회화나 조각이나 건축 이런 것들이 그리스도교 관념과 자료로부터 소재를 얻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특히 이제 구약과 신약의 예형론typology, 모자이크나 프레스코화, 두 폭 제단화 이런 것들이 있다. 왼쪽에 구약의 얘기가 있고, 오른쪽에 신학의 얘기가 있고, 삼강행실도라든가 이런 것들처럼 '약속과 성취'라는 주제, 교부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성인전에 영감을 받은 회화들 또는 제단화를 보면 예술과 신앙심 사이의 상호작용이라고 하는 것도 굉장히 무시할 수 없는 그런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예술과 신앙심과 사상의 전통을 활용하는 과정을 보면, 그런 과정들은 여러 르네상스들에서 볼 수 있다. 찰스 호머 해스킨스의 《12세기 르네상스》라는 책이 있다. 해안 출판사에서 나온 건데 12세기 사상사를 다룬 책이 의외로 별로 없다. 

그다음에 사상 체계의 이해에서 그 체계가 전통을 어떤 식으로 취사선택해서 해석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이런 것들은 갈릴레오에서도 필요하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난번에 Schumacher에서도 나왔듯이 하르낙의 태도와는 다른 방식으로 아우구스티누스라든가 이런 사람들을 이용한 것, 이런 것들이 전통의 재발견이라는 개념에서 고려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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