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클레망 마르탱: 이야기와 인포그래픽으로 보는 프랑스 혁명

 

이야기와 인포그래픽으로 보는 프랑스 혁명 - 10점
장 클레망 마르탱 지음, 주명철 옮김, 쥘리엥 펠티에 데이터 디자인/여문책

옮긴이 서문
지은이 서문

1부 혁명의 행진
세계의 혁명
국민국가의 탄생
바스티유 요새 정복
바렌, 왕의 도주
1792년 8월 10일, 제2의 혁명
왕과 왕비 그리고 혁명

2부 대혼란
1789년 10월, 여성의 돌발 출현
교회의 위기와 전국신분회
부동산 혁명
식민지와 노예제 폐지
군대의 혁명

3부 적대관계와 경쟁관계
공포정이라고 말씀하셨나요?
예외적인 방데, 공공의 적 1호
반란, 투사들과 도적떼
반혁명
총재정부, 혁명의 마지막 불꽃
우리의 유산

참고문헌
찾아보기

 


지은이 서문

1789년부터 1799년까지 프랑스는 혁명을 겪는다. 프랑스도 여느 나라처럼 대서양 세계를 휩쓴 개혁 ·폭동·반란의 큰 흐름에 휘청거렸다. 그러나 1789 년부터 오늘날까지 새로운 제도의 기초를 다지고, 여러 가지 면에서 놀라운 사건을 겪은 10년의 성격을 규정하는 표현으로 ‘프랑스 혁명’이라는 말을 쓸 만큼 프랑스는 혁명의 가장 활발한 증심지가 되었다. 이 기간에 일어난 다양하고 복잡한 성격의 중대 사건과 변호 H를 보고하기 위해 이 책에서는 이야기와 시각자료[모델화]를 결합했다. 시각자료는 역사 이야기를 그림으로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만화경을 들여다보듯이 다른 방식으로 읽을 수 있게 도와준다. ' 앵포그라피infographie'[인포그래픽]의 관심은 개념 · 감정 · 일반성 · 특수성을 연결할 수 있게 해주는 데 있다. 혁명의 증대 사건과 변화는 다양한 차원에서 차별화한 후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나 잘 안다. 바스티유 요새의 정복을 예로 들어보자. 그것은 파리뿐 아니라 전국에서 일어난 사건이었고, 수천 명을 동원했으며, 그중 몇몇은 직접 경험했다 그 사건은 단 며칠 만에 끝났지만 수십 년 동안 공명을 일으켰고, 마침내 프랑스인의 국민성을 결정하는 데 이바지했다. 이 책에서는 인포그래픽을 이용해서 이처럼 풍부하게 증식한 내용뿐 아니라 새로운 의미도 파악하고자 했다. 과거와 표상의 관계를 정당화하기 위해 매혹적이고도 혐오스러운 물건인 기요틴[단두대]을소환해서 혁명을 상기시키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인포그래픽은 혁명의 모든 면모를 함께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유연하다. 여기서 풀어놓는 엉킨 실타래는 내용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 이 책의 차례를 보면 한 가지 사실이나 주제를 여러 장에서 다른 식으로 인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3부로 구성했다. 모든 부분을 단순하게 시간순의 틀에 맞춰서 설명하지는 않았다 각각의 사건이 무수한 추억을 만들었을 때, 또 새로운 생활방식을 만들고 기념하도록 부추길 때, 어떻게 한 길만 추구할 수 있겠는가? 각각의 일화는 논리적으로 메아리를 불러일으켰고, 분야마다 깊은 탐구를 거쳤으며, 기억과 즉각적 이야기는 밀접히 연결되었다. 혁명기 10 년은 언제나 현실로 남아있고, 생생한 역사이며, [표준화한] 기억 또는 여러 사람의 서로 다른 기억은 우리가 종종 무의식적으로 하는 해석의 조건을 규정한다는 사실을 굳이 말할 필요는 없다. 

'혁명'이라는 말이 생기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사람들은 그것을 무엇보다도 별들의 회전으로 이해했고 여론에 부쳐야 했다. 그다음 '혁명'은 지상의 격변, 통치자의 타파 또는 반란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그러고 나서 대서양 세계와 유럽 전역에서 혁명을 실험하게 되었다. 어떤 경우, 통치자들이 위로부터 혁명을 실험하다가 재빨리 반혁명가로 바뀌었다. 끝으로 프랑스에서 귀족과 종교인의 특권층이 왕의 개혁에 반대했기 때문에 전국신분회를 소집했을 때 혁명이 일어났다. 온갖 불평불만으로 가득 찬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궁중과 왕이 개혁정책을 실시할 준비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군중이 바스티유 요새를 정복하면서 혁명을 시작했다. 그 뒤 역경과 재난이 잇따랐다. 왕은 도주하다가 바렌에서 붙잡히고, 샹드마르스 학살사건이 일어났으며, 1792년 8월에 대신들이 여론을 통제하지 못해서 군주정이 몰락했다. 곧이어 9월 학살이 일어나 나라가 조직적이고 경쟁하는 집단들에게 흔들리면서 진정한 혁명을 겪었다. 왕과 왕비의 처형은 혁명이 강요한 길로 들어선 사례였지만, 필연적으로 가야 할 길은 아니었다. 

애국파 · 자코뱅파 · 지롱드파 · 상퀼로트의 적극적 집단들은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면서 혁명을 예상치 못한 길로 몰아갔다. 이 책의 2부에서는 이처럼 프랑스 사회를 지속적으로 다시 빚어낸 대격변을 중심으로 다루려 한다. 여성의 운명은 1789년 10월부터 확정되었다. 혁명의 사건에서 그들이 왕을 파리에 정착시킨 중요한 역할을 했을 때, 남성은 그들을 모든 성향이 뒤섞인 위협적 존재로 생각했다. 남성은 공공생활에서 여성의 자리를 줄이려고 끊임없이 노력했으며, 그렇게 해서 그 후 2세기 동안 여성의 자리가 고정되었다. 권력을 재분배하는 데 복종해야 했던 종교인의 지위도 충격적일 만큼 나락으로 떨어졌다. 인구의 일부가 『성직자 시민헌법』을 거부하면서 앞으로 2세기 동안 평신도와 가톨릭교의 투쟁이 계속될 것을 예고했다. 모든 질서가 뒤집힌 데 더해 교회 재산을 국유화하고 매각한 뒤 모든 프랑스인이 지주가 된 것은 아니었으며 그들의 일상생활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이민자와 노예, 백인 · 흑인 · 혼혈인의 불평등한 관계로 취약한 식민지도 속속들이 모국의 영향을 받았다. 식민지가 모국에 맞서고 아이티가 독립하는 시대가 열렸다. 그보다 더 기대했으며, 그에 못지않게 혁명적인 일이 있었다. 무장시민이 공화력 2년의 병사가 되어 유럽을 점령하고 지도를 바꾸었던 것이다. 이처럼 근대 프랑스의 주요 특징은 혁명의 경험에서 나왔다. 

이러한 격변은 국내외의 투쟁 · 전쟁과 함께 일어났다. 이것이 3부에서 다룰 내용이다 1792~1794년의 예외적 상황이 가장 좋은 예를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로베스피에르와 측근들이 멋대로 혁명의 흐름을 바꿔놓았다고 비난하기 위해 '공포정'이라는 딱지를 붙인 시기였다. 1793년부터 방데에서 폭력행위가 봇물처럼 터졌고, 탄압의 극적 결과와 그에 대한 추억으로 그곳을 예외적인 지역으로 만든 복잡한 과정에서 명확해진 시기다. 이 예외적 상태는 정치가들과 경쟁하는 무장집단들의 위협에도 대응해야 했다. 이 집단들의 성격은 모호했지만 실용적인 이름으로 '도적떼'라 불렀다. 상퀼로트도 경쟁집단이었다. 기성의 권위를 위협하는 앙라제[과격파]와 바뵈프파는 굶주리거나 반혁명 성향으로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었으며 1799년까지 끊임없이 추적당했다 그때 반혁명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혁명 세력에는 훨씬 미치지 못했고, 혁명의 원리에 적대적인 세력을 동원하는 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었던 1799년의 대공세가 실패한 데서 반혁명의 가장 훌륭한 보기를 찾을 수 있다. 1795년에 새 체제인 총재정부가 탄생하고 1799년 보나파르트의 손에 폐지될 때까지의 기간은 프랑스인의 국민성을 빚고 그 기억을 키워준 변화무쌍한 여정의 마지막 단계다. 결론의 마지막 부분은 번잡한 10년의 다양한 교훈을 한데 엮어서 우리의 기억을 되살려줄 것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