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제임스: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
- 책 밑줄긋기/책 2023-25
- 2024. 9. 19.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 - 윌리엄 제임스 지음, 김재영 옮김/한길사 |
1. 종교와 신경학
2. 주제의 범위
3. 보이지 않는 것의 실재성
4. 낙관주의적 성품의 종교
5. 고뇌하는 영혼
6. 분열된 자아. 그리고 그 통합과정
7. 회심
8. 회심 결론
9. 성인다움
10. 성인다움의 가치
11. 신비주의
12. 철학
13. 다른 특성들
14. 결론
15. 후기.
- 옮긴이의 말
- 윌리엄 제임스 연보
- 용어해설
- 찾아보기
후기
609 나는 이 강연의 결론을 작성할 때 단순화에 뚜렷한 목표를 두어야 했기 때문에, 나의 일반적인 철학적 견해가 몇몇 독자들에게는 지적이지 못한 빈약한 진술로 받아들여질까봐 두려웠다. 그래서 이 후기를 첨가한다. 물론 이것 역시 단지 그 작은 결점을 개선할 수 있을 정도로 짧아야 한다. 차후의 연구에서 나의 견해를 좀더 자세하게, 그리고 결과적으로 좀더 명확하게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독창성은 이와 같은 분야에서 기대될 수 없다. 이미 오래 전에 이런 분야에서 있을 수 있는 모든 태도와 기질이 문헌들을 통해 제시되어왔다. 이런 분야에서는 어떤 새로운 작가도 즉시 잘 알려진 계보에 속할 수 있다. 만약 누군가가 모든 사상가들을 자연주의자와 초자연주의자로 분류한다면, 나는 확실히 대부분의 철학자들과 함께 초자연주의자 쪽에 속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초자연주의에는 우둔한 초자연주의와 더욱 세련된 초자연주의가 있다. 현재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바로 그 세련된 부분에 속해 있다. 그들이 일반적인 선험적 관념론자들이 아니라면 적어도 그들은 칸트주의자들의 방향을 따라 관념적 실재가 현상적 사건들의 과정에 인과관계적으로 간섭하는 것을 막는다. 세련된 초자연주의는 보편주의적 초자연주의이다. 반면에 그 '우둔한' 종류를 위해서는 '단편적' 초자연주의라는 이름이 더 나을 듯하다. 단편적 초자연주의는 오늘날 단지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만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칸트가 바꾸어 놓았다고 생각되는 이원론을 지지하는 소수의 시대에 뒤떨어진 학자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오래된 신학과 조화를 이룬다. 그것은 기적과 신의 인도를 인정하고 관념적 영역으로부터 나오는 영향력을 실재세계의 세세한 것들을 인과관계적으로 결정하는 힘들 사이에 삽입시킴으로써 관념의 세계와 실재세계를 함께 섞는 데 지적 어려움을 발견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세련된 초자연주의자들은 단편적 초자연주의는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의 차원을 혼란시킨다고 생각한다. 세련된 초자연주의자들에게 관념의 세계는 어떠한 효과적 인과율을 가지지 않고, 특정한 시점에서 현상세계로 뛰어들지도 않는다. 그들에게 관념의 세계는 사실의 세계가 아니라, 단지 사실에 대한 의미의 세계이다. 관념의 세계는 사실을 판단하는 관점이다. 그것은 다른 ‘무슨 무슨 학문’과 관련되어 있고, 사실적 명제가 얻을 수 있는 존재의 다른 차원을 전적으로 방해한다. 예를 들면, 기도의 응답으로 나오는 신적 도움을 믿는 사람들이 반드시 그래야만 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세련된 초자연주의에서 관념의 세계는 경험의 평이한 수준으로 내려갈 수 없고 자연의 구별된 영역들 사이에 조금도 자신을 삽입시킬 수 없다.
대중적 그리스도교 또는 현학적 유신론을 내가 받아들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관념적 실재와 교통함으로써 새로운 힘이 세상 속으로 들어오고, 새로운 출발이 이 세상에서 만들어진다는 믿음은 나를 단편적 또는 우둔한 유형의 초자연주의자들에 속하게 한다.
내가 보기에 보편주의적 초자연주의는 너무나 쉽게 자연주의에 굴복한 것 같다. 보편주의적 초자연주의는 액면 그대로 자연과학의 사실들을 받아들이며, 삶의 법칙들이 나쁜 열매를 맺었을 때 치료의 희망을 가지지 않은 채 자연주의가 그런 것처럼 그 법칙들을 떠나버린다. 보편주의적 초자연주의는 대체로 삶에 대한 감정 즉 존경하고 흠모할 수 있는 감정에 그 자체를 제한한다. 그러나 조직적 염세주의의 존재가 입증하듯이 그 감정은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 될 필요가 없다. 관념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이러한 보편주의적 방식 안에서 실천적 종교의 본질들은 내가 보기에 사라지는 것 같다.
612 신의 존재로 인한 차이점들이 사실상 어디에서 오는지 묻는다면, 나는 특별히 잠재의식의 영역으로부터 나오는 어떤 종류의 침입이 '기도의 교제' 와 관계될 때 그 소통현상이 제시하는 것 이상의 가설은 없다고 말해야 한다. 이러한 현상에서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자신의 일부일 수 있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관념적인 어떤 것이 실제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개인적 에너지의 중심을 일으키고, 다른 방식으로는 얻을 수 없는 갱생시키는 효력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면 우리의 일상적 의식의 촌재보다 더 넓은 존재의 세계가 있다면 그 세계 안에 우리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간헐적 힘이 있다면 그 영향력들을 촉진시키는 조건이 '잠재의식'의 문을 여는 것이라면 우리는 종교적 삶의 현상을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는 이론적 요소를 갖게 된다.
613 우리 대부분이 자연적 '사실' 과 다를 수 있는 첫번째는 신의 존재가 야기시키는 '개인적 불멸성' 일 것이다. 사실상 종교란 우리와 같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불멸성을 의미하므로 그 외에 다른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신은 불멸성의 제작자이다. 불멸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더 이상의 재판 없이 무신론자로 기록된다. 나는 나의 강연에서 불멸성 또는 믿음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그것이 부차적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관념들이 단지 영원성에만 관심을 둔다면 왜 우리가 우리 것보다 다른 것에 대한 관심을 기꺼이 포기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현재의 우리 자신이 되려는 강렬한 충동에 공감한다. 충동들의 갈등 속에서 그것들 둘 다 너무 어렴풋하지만 고귀해서 나는 어떻게 결정할 지를 모른다. 그것은 검증되어야 할 사실들처럼 보인다. 마이어스, 허드슨, 히슬롭 같은 사람들의 부단한 수고를 매우 존중하며 그들의 결론에 깊은 영향을 받았지만 '영혼회귀'를 증명하는 데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결과적으로 영원불멸성이 이 책의 본문에서 언급되지 않는 것에 대한 당혹감으로부터 독자를 안정시키기 위해 이렇게 간략하게 해명함으로써 그 문제를 미해결 상태로 남겨둔다.
우리 자신이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는 그 관념적 힘, 즉 일반적인 사람들이 '신'이라고 부르는 실재는 철학자들에 의해 특정한 형이상학적 속성들이 부여되었다. 나는 철학에 대한 강연에서 그 속성들을 무례하게 다루었다. 당연히 신은 '유일하고' '무한한' 존재로 여겨진다. 많은 유한한 신들의 개념은 어떤 사람도 고려할 그리고 지지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적 명료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우리가 지금까지 연구해왔듯이, 종교적 경험이란 가장 무 한한 자에 대한 믿음을 반드시 지지할 수만은 없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 종교적 경험이 명확하게 입증하는 유일한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더 광대한 어떤 것과 합일됨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 합일 안에서 우리는 가장 큰 평화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합일의 열정을 지닌 철학과 유일적 관념론의 성향을 지닌 신비주의, 양자는 '극한까지 넘어가서'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세상의 영혼인 독특한 신을 그 어떤 것으로 동일시한다 대중은 그들의 권위에 존경심을 표하며 그들이 설정해놓은 예를 따른다.
615 상식은 철학과 신비주의가 해왔던 것보다는 그 요구가 덜 철저하다. 상식은 부분적으로 구원받고 부분적으로는 잃어버렸다는 이 세상에 대한 개념을 그대로 남겨둔다. 일반적 · 도덕적 마음의 상태는 세계의 구원은 각 개인이 자신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사실상 부분적이고 조건적인 구원은 이론적으로 받아들일 때 가장 친숙한 개념이지만 세세한 것들을 결정하는 데에는 가장 곤란한 문제이다. 심지어 몇몇 사람들이 구원 같은 것에는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이유가 우월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들과 함께 구원받지 못한 자로 기꺼이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의 활동자극이 충분히 고조되면 언제든지 우리 모두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
사실상 최후의 종교철학은 지금까지 다원론의 가설을 기꺼이 고려한 것 보다 더 진지하게 그것을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실천적 삶은 어쨌든 구원의 가능성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 가운데는 가능성을 갖고서 기꺼이 살아간다는 사실보다 더 특징적인 사실은 없다. 가능성의 존재는 에드먼드 거니가 말한 것처럼 삶의 바탕이 체념인 것과 삶의 바탕이 희망인 것 사이에 차별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주장들은 간결함 때문에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래서 나는 단지 다른 책에서 이와 같은 문제를 다시 다루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책 밑줄긋기 > 책 2023-25'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애덤 셰보르스키: 민주주의, 할 수 없는 것과 할 수 있는 것 (0) | 2024.09.26 |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2 (0) | 2024.09.26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1 (0) | 2024.09.26 |
톰 라이트: 바울 평전 (0) | 2024.09.19 |
카일 하퍼: 로마의 운명 : 기후, 질병, 그리고 제국의 종말 (0) | 2024.09.19 |
유스티누스: 첫째 호교론 외 (0) | 2024.09.13 |
장 클레망 마르탱: 이야기와 인포그래픽으로 보는 프랑스 혁명 (3) | 2024.09.13 |
마르틴 브로샤트: 히틀러국가 (0) | 2024.09.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