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비어드: 로마 황제는 어떻게 살았는가
- 책 밑줄긋기/책 2023-25
- 2024. 11. 4.
로마 황제는 어떻게 살았는가 - 메리 비어드 지음, 이재황 옮김/책과함께 |
주요 등장인물
머리말
프롤로그: 엘라가발루스와의 식사
1. 1인 통치의 기초
2. 다음 차례는? 승계의 기술
3. 실력자들의 식사
4. 궁궐 안에 있는 것?
5. 궁궐 사람들: 궁정의 황제
6. 일하는 황제
7. 여가 시간에는?
8. 해외로 나간 황제
9. 얼굴과 얼굴
10. ‘나는 신이 되어가는 것 같아’
에필로그: 한 시대의 종말
이름에 담긴 것
더 읽을거리 그리고 방문할 곳
프롤로그
40 로마에서 1인 통치를 창설한 사람들(서기전 44년에 암살당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그의 누이의 손자이자 최초의 황제가 된 아우구스투스)로부터 이 책을 시작해 서기전 1세기 중반부터 서기 3세기 중반까지 300년이 채 안 되는 기간과, 서른 명이 채 안되는 황제들을 다룰 것이다.
그런 시간적인 제한은 어느 정도 자의적인 것이며, 때로 내가 정한 선을 넘을 것이다(사실 이미 넘은 사례가 있다. 잃어버린 암소와 아내 매춘은 3세기 말의 사건이다). 그러나 내가 정한 곳에서 멈춰야 하는 강력한 논거가 있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이후 상황은 극적으로 변했다. 그 세기의 나머지 기간에 잇따른 군사정변과 내전으로 인해 황제가 자주 바뀌었다.
47 오랫동안 로마제국을 연구하면서 나는 정치 체제로서 전제정을 갈수록 혐오하게 됐고, 그 희생자들뿐만 아니라 바닥부터 꼭대기까지 거기에 휩쓸린 모든 사람을 더욱 동정하게 됐다.
48 잊기 쉬운 것은 황제 역시 어떻게 전제군주가 되었는지에 대해, 그리고 로마 황제가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에 대해 틀림없이 고민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1. 1인 통치의 기초
51 엘라가발루스의 치세 1세기 전인 서기 100년 9월 1일,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세쿤두스는 원로원에서 트라야누스 황제에 대한 요란한 감사 결의를 하기 위해 일어섰다. 원로원은 로마의 가장 오래되고 저명한 정치 기구였다. 그곳은 이제 의회이자 재판소이자 잡담 장소로 진화해 있었다. 의원은 600명쯤 되었으며, 황제와 기타 주요 공적 인물들이 포함됐다. 그들은 아첨꾼에서부터 불만을 지닌 나이 든 귀족과 벼락부자까지 뒤섞인 로마의 부유한 상류층 무리였다.
52 이 자리는 여전히 매우 특별한 자리였지만 이제 대중의 투표가 아니라 사실상 황제에 의해 임명됐다. 이 때문에 새 집정관은 원로원 집회의 연설에서 황제에게 감사를 표하는 관례가 만들어 졌다.
53 이 연설문은 황제와 신민이 직접 대면한 특별한 순간과 그 자리에서 나눈 말에 관한 귀중한 기록이다. 뿐만 아니라 거의 로마황제의 역할에 대한 직무기술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54 우리는 이제 대체로 예전에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에 비해 칭송의 뉘앙스에 덜 민감하다. 그러나 플리니우스의 감사 결의의 경우 우리는 '경멸'을 부분적으로 유보해야 한다. 이 연설은 얼핏 보았을 때의 모습보다 더 복잡하다.
55 플리니우스는 모든 범위에 걸쳐 구체적인 요구를 항목별로 적었다. 황제는 너그러워야 하고, 신민들에게 공연이라는 형태로 즐거움을 주어야 하고, 음식과 돈이라는 형태로 실질적인 지원을 제공해야 한다. 자신의 안락이나 방종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익을 위한 공공기념물을 건설해야 한다. 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
57 서기 100년 9월 플리니우스가 새 집정관으로서 연설하기 위해 일어섰을 때 로마는 황제의 통치가 시작된 지 100년이 넘은 상태였다. 그러나 로마 시 자체는 800년이 넘었고, 신화적인 초기 일곱 왕(창건자 로물루스로 시작되고 서기전 500년 무렵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로 끝나는) 이후 그 기간의 대부분은 일종의 민주주의적 통치가 이루어졌다. 지금 통상 로마공화국으로 불리는 시기다.
'일종의'는 중요하다. 분명히 서열상 맨 꼭대기인 집정관을 포함해 국가의 주요 정치적 직위는 모든 남성 시민에 의해 민주적으로 선출됐고, 그 시민들이 법을 만들고 전쟁과 평화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일을 맡았다. 그러나 그 체제는 부자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선거에서 부자들의 표는 가난한자들의 표에 비해 분명히 많이 집계되었고, 그들만이 관직에 입후보하고 로마 군대를 지휘할 수 있었다.
57 이 정부는 완전히 민주적인 체제라고 하기보다는 권력 공유 체제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종신직인 원로원 의원을 제외하고 모든 관직은 단 1년의 임기로 끝났고 언제나 공동으로 맡았다.
58 어느 특정 시기에도 집정관은 언제나 두 명이었다. 그다음 선임자는 프라이토르(법무관)가 있었는데, 법과 관련된 행정에 관여했고, 그 수가 점점 늘어 결국 해마다 열여섯 명이 함께 자리를 차지했다. 그저 업무량이 늘어서 관원을 늘린 것은 아니었다. 바탕에 깔린 공화국의 원칙은 권력을 오래 갖지 않고 단독으로 갖지 않는 것이었다.
58 로마의 상층부가 군사적 영광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공격성과 군국주의가 매우 경쟁력 있는 그들의 기풍과 결합했고, 그들이 이탈리아 대부분의 통제권을 쥐게 되자 로마인이 이용할 수 있는 무한에 가까운 인적 자원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저 '행운' 덕분이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합쳐진 결과가 광대하고 급속하며 격렬한 영토의 팽창이었다. 그러나 정확하게 어떤 요소들의 조합이었는지, 그 중 어느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는지는 불확실하다.
분명한 점은 이 일련의 정복이 로마의 정치에 거의 혁명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물론 희생자들에게는 더 뚜렷한 영향을 미쳤다. 혼란의 일부는 나라가 얻은 막대한 이익으로 인해 생긴 것이었다. 그것이 이전에 권력을 공유하는 지배층 사이에 존재했고 그들의 경쟁으로 인한 대립을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했던 이론적인 평등성을 파괴했다.
60 전통적인 로마의 관직 임명 원칙에 위배되는 방식이었다 다시 말해서 큰 땅덩이는 점차 이 나라를 떠받치고 있던 정부 구조를 파괴해 1인 통치로 가는 길을 열어놓았다. 제국이 황제를 만들어 낸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었다.
64 더욱 중요한 것은 암살지들이 희생자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지만(그것은 흔히 쉬운 일이다), 그 다음에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아무런 계획이 없어 빛을 잃었다는 것이다.
67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세계의 유일한 지도자로 남았고, 곧 첫 번째 '로마 황제'가 됐다. 다시 말해서 암살자들은 적어도 간접적으로는 그들이 맞서 싸우고 있다고 주장했던 영구적인 1인 통치를 초래했다.
67 젊은 폭력배의 이미지를 책임감 있는 정치인으로 바꾸고 수백 년 동안 이어질 정부 체제(더 좋아졌든 나빠졌든)의 창시자가 될 수 있었는지는 로마 역사의 가장 큰 수수께끼 중 하나다.
69 로마인들은 여전히 수백 년 전 전설 속의 초기 왕들 가운데 마지막 왕을 몰아낸 데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독재자를 다시 맞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처음부터 대다수의 황제들은 자신의 지역 사람들에게 자신이 '왕'은 아니라고 강조하는 데 매우 신경을 썼다. 이는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창건자이자 첫 번째 왕이었던 '로물루스'라는 이름을 피했던 이유 중 하나였다.
72 분명 이 글을 40여 년 동안 권력을 잡았던 황제의 개략적이고 회고적이며 이기적인 기록이다. 하지만 이를 대중에게 공개한 사실이 시사하듯이 이는 또한 미래의 청산 역할도 염두에 둔 것으로 황제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플리니우스의 감사 결의와 마찬가지로 이 기록 역시 '직무 기술서'였다.
72 플리니우스가 아우구스투스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였을 것이기 때문에 아마도 놀라운 일은 아니겠지만, 둘 사이에는 겹치는 부분이 많다. 〈업적〉에는 따분한 사실과 수치 나열 외에, 플리니우스의 〈찬양 연설〉과 마찬가지로 황제에 대한 세 가지 특별한 요구가 눈에 띈다. 황제는 정복해야 하고, 은혜를 베풀어야 하고, 새로운 건물을 짓도록 후원하거나 파손된 것을 복구해야 했다.
76 아우구스투스는 〈업적〉에서 자신의 성과를 상세하게 나열했지만, 그 자신의 통치의 바탕이 되고 3세기까지 이르는 그의 후계자들을 위한 모범을 만든 엄격한 정치적 논리에 대해서는 눈에 띄게 말수가 적다. 이것은 미리 상세하게 계획하지 않은 것이 거의 분명하지만, 그의 치세 중에 개발된 두가지 중요한 권력의 원리를 재구성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이것이 군사적 통치였다는 점이다.
77 핵심적인 사실은 아우구스투스 자신이 25만이 넘는 제국의 무장 병력을 통제했다는 것이다. 이는 그 뒤를 잇는 황제에게 본보기가 되었다.
78 열띤 전쟁이 계속되고 군대의 대부분이 주둔하고 있는 곳이었다. 그는 평화로운 속주의 총독 선임은 원로원에 맡겼지만, 나머지 속주의 총독은 자신이 골랐다. 명백하게 자신의 대리인으로 삼으려는 것이었고, 자신의 의지대로 임명하고 해임했다. 그의 목표는 병사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한 강력한 통제를 유지하고, 그들이 선을 넘지 못하게 보정하며, 군사 권력을 자신만이 독점하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군사적 영예의 독점도 주장했다.
79 군대를 국유화하는 데는 휘청거릴 정도로 돈이 많이 들었다. 정규 급료와 퇴역 병사들을 위한 연금 기금을 합치면 매년 로마국가 전체 수입의 절반을 넘는 액수였다.
80 아우구스투스의 두 번째 기본 원칙은 일종의 로마의 민주주의를 바꾸는 것이었다.
80 자신의 위치를 규정하고 포장하는 데 공화국 정치의 언어를 사용했다.
82 서기 14년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직후 그 후계자 티베리우스는 선거 의례를 시민 전체가 하는 것에서 원로원이 하는 것으로 '간소화'했다. 그 이후 선거는 의례에 지나지 않았다. 타키투스는 변화하는 시대의 징표로서 전체 시민 중 일부만 투덜거렸고, 상류층은 대중정치의 번거로움에서 해방됐다며 기뻐했다고 전했다.
82 매년 10여 명의 집정관을 임명하고 그들의 임기를 단축하는 것은 황제가 더 많은 의원들의 고위직에 대한 야망을 만족시키는 쉬운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관직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교묘한 방법이었다. 한때 권력의 자리가 이제는 명예직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변화는 보통선거의 폐지였다.
83 고대 로마 상류층은 가만히 누워서 이 모든 것을 받아들였을까? 한 가지 대답은 "아니요"이다. 원로원 의원들과 황제 사이의 불안한 관계(이 책이 다루는 거의 300년의 역사 내내 이어진 정치적 단층선이다)는 황제의 통치에 관한 기록에서 언제나 중요한 주제였다.
86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이러한 이야기들은 모두 원로원 의원들의 관점에서 나온 것들이다. 고귀한 희생자로서든 영웅으로서든 말이다. 우리는 칼리굴라가 자신의 말을 가지고 한 위협의 배후에 정말로 무엇이 있었는지, 그리고 티베리우스가 원로원에서 벌인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그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한쪽으로 치우치기는 했지만 이 이야기들은 상류층과 통치자 사이의 만만찮은 불신과 함께 만만찮은 상호 의존을 보여준다.
87 황제와 원로원 사이의 관계는 결코 겉으로 것과 같지 않았다. 양쪽 모두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외양과 실제 시이의 괴리가 불신을 부채질했다.
89 타키투스는 특유의 냉소로 원로원의 두 주요 집단을 가려냈다. 하나는 대체로 무능한 반대자들이다. 귀족 정서와 거창한 몸짓으로 가득 차 있지만 실천이나 정치적 양식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다. 또 하나는 겁쟁이, 아첨꾼, 그리고 자신들의 자유를 기꺼이 팔아 부와 정치적 성공을 사는 사람들이다.
89 플리니우스의 경우는 현대 역사가들에 의해 흔히 소심한 아첨꾼 가운데 하나로 묘사됐다(그리고 분명히 겁쟁이 의원들은 황제에게 아첨을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알고 있던 유일한 정치 체제에서 살아가고 이력을 쌓은 사람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90 좋건 나쁘건, 그리고 때때로 수반되는 이중적 사고가 어떤 것이든,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체제가 돌아가고 오래 지속된 것은 부분적으로 플리니우스 같은 사람들 덕분이었다.
5. 궁궐 사람들: 궁정의 황제
289 황제의 역할에 대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분석이 그다지 '놀랍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플리니우스나 다른 여러 상류층 로마 작가들에게서 발견할 수 없는 황제의 좋은 행동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우리 가운데 하나'가 되는 것의 중요성에서부터 아첨에 대한 혐오를 동반한 절제와 적절한(과도하지 않은) 관용의 발휘까지 말이다.
290 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백히 사적인 성찰조차도 실제로는 여전히 황제가 정말로 어떠했는가를 드러내는 것만큼이나 숨기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가 직접 쓴 책을 읽어도 그는 여전히 우리로부터 숨어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장에서는 노예와 하인에서 연인과 아내까지 황궁 사람들을 살펴봤지만, 황제에게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보아도(심지어 황제 주치의의 눈을 통해 보아도) 그는 여전히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다. 그가 정확히 누구인지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6. 일하는 황제
355 212년 카라칼라 황제는 노예가 아닌 로마제국의 모든 주민, 아마도 3천만 명 이상에게 단번에 완전한 로마 시민권과, 상속에서 계약까지 이르는 모든 적 권리와 지위를 함께 부여했다.
328 제국 주민 대다수는 여전히 소규모 생계농이었고, 대부분의 생산은 지역 또는 가내 생산이었다. 조금이라도 공업적 '진보'의 바탕이 되는 기술 혁신은 거의 없었고, 가끔씩 존재하는 물방앗간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은행 및 신용 업무를 위한 금융기관도 별로 없었고, 경제 이론도 거의 없었다.
329 궁궐 행정의 최우선 과제는 모든 국가 지출에 필요한 돈을 충분히 가지고 있느냐 혹은 주조할 수 있느냐였다. 돈은 무엇보다도 군대를 위한 것이었다. 군대가 연간 수입의 절반 정도를 사용했다.
10. ‘나는 신이 되어가는 것 같아’
496 죽은 황제를 원로원의 투표를 통해 죽지 않는 신으로 만드는 것은 지금보면 1인 통치 체제의 로마의 종교·정치에서 가장 황당하고 가장 어리석은 측면 중 하나로 보일 수 있다.
497 그러나 이는 얼핏 생각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신이 창조된 방식, 신이 작동하는 방식 등 신에 대한 로마인의 관념에 비추어 보면 더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고유한 논리를 가진 일련의 정교한 의례의 일부였다. 종교는 황제가 되는 데서, 그리고 황제의 이미지에서 중요한 부분이었다. 죽음도 마찬가지였다. 꼼꼼하게 연출되고 때로는 터무니없이 사치스러운 장례식부터 아직도 로마시에 남아 있는 거대한 황제의 무덤까지 말이다.
498 불가피하게도 장례식의 형태는 죽음의 상황에 따라, 그리고 죽은 황제에게 인상적인 장례를 치러주는 것이 모든사람의 이익에 부합하는지의 여부에 따라 달라졌다.
507 신격화가 그저 황제의 선물만은 아니었다. 원로원의 정식 표결을 거쳐야만 죽은 사람을 새로운 신으로 공식 결정할 수 있었다.
512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인 황제가 하늘나라의 신이 되는 이 변화의 뒤에 있는 명백한 정치적 편익이다.
513 로마의 제위 승계의 많은 측면이 그렇지만 죽은 황제가 신이 되는 것은 그의 가치보다는 그의 신격화가 후임자에게 얼마나 유용한가에 달려 있었다.
514 우선 로마의 종교는 일반적으로 새로운 신들을 환영했다. 서로 다른 여러 가지 형태 모두에서 그것은 '다신교'였다. 그리고 로마세계 일대에서 단일한 정통신앙은 없었다. 단 하나의 신이 아니고 여러 신들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체의 수 또한 고정된 것이 아니었고 심지어 알 수도 없었다.
516 로마에는 '교회'와 '국가' 사이의 구분이 없었고, 종교는 개인의 헌신, 개별적인 믿음, '믿음'의 원리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신에 그것은 로마의 군사적·정치적 성공이 신들을 적절하게 숭배한 덕분이었다는 단순한 원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또는 뒤집어 말하자면 그들을 적절하게 숭배하지 않으면 국가는 위험해지리라는 것이었다. 개인의 신심은 거의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에필로그: 한 시대의 종말
533 알렉산데르의 죽음과 함께 직무 기술서가 바뀌기 시작했다. 그것이 내가 서기 235년을 이 책의 종료 지점으로 선택한 이유다. 그렇다고 후대의 황제들이 전통적인 표현으로 '좋은' 황제가 아니라 '나쁜 황제'였다는 뜻은 아니다. '로마 황제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기준이 극적으로 달라졌다는 것이다. 이후 50년 동안에 통치자들이 등장했다가 금세 사라졌다.
533 그들 상당수는 전통적인 상류층 바깥 출신이었고, 군대 계급을 통해 차근차근 올라갔으며, 군사정변을 일으켜 제위에 올랐다. 그것은 흔히 '1인 통치'가 아니었다.
535 변경 지역에 대한 압박, 군대-원로원-민중 사이의 세력 균형 변화, 그리고 황제를 정통성 있게 선출하는 방법에 관한 오래된 문제 같은 것들이었다.
536 상황은 세기 말로 가면서 다시 변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티누스의 치세(서기 284년에서 337년사이에 각기 20여 년, 30여 년 재위다)는 그 확실한 징표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옛날 방식의 황제로 돌아는 일은 없었다. 3세기 초 '위기'의 시기 동안에 이루어진 임시방편 일부는 이제 실제로 공식화됐다. 예를 들어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제국을 서부 속주와 동부 속주로 나누고 네 명의 황제가 통치하게 했다. 동-서 양쪽에 각기 상-하위 황제가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시기에 어떤 형태의 공동 통치가 표준이 됐다.
539 황제 자신의 모습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독교는 (기독교도) 로마 황제의 권력을 줄이지 않았다. 오히려 늘렸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종교적 조정을 통한 것이었다.
540 그것은 부분적으로 황제를 예수의 모습으로, 예수를 황제의 모습으로 보는 데 의존했다. 이것은 '유순한' 예수가 아니었다. 황제 권력은 새로운 신의 체제에 의해 정당화됐다. 이것은 아주 다른 '로마 황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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