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로스키: 동방교회의 신비신학
- 책 밑줄긋기/책 2023-24
- 2024. 11. 11.
동방교회의 신비신학 - 블라디미르 로스키 지음, 박노양 옮김/정교회출판사 |
1장 서론 동방교회전통에 있어서 신학과 신비 007
2장 어둠 속의하느님 031
3장 삼위일체 하느님 065
4장 창조되지 않은 에너지들 103
5장 창조된 존재 139
6장 형상과 닮음 173
7장 성자의 경륜 205
8장 성령의 경륜 237
9장 교회의 두 가지 측면 265
10장 연합의 길 299
11장 신성한 빛 331
12장 결론 하느님나라의 잔치 361
역자 후기 381
교부 참고문헌 385
10 신학 없는 그리스도교 신비는 존재하지 않으며, 특별히 신비 없는 신학은 더더욱 존재하지 않는다. 동방교회 전통이 세 명의 거룩한 저자에게 '신학자'라는 이름을 특별히 제한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 첫째 저술가는 성 사도 요한인데, 그는 4복음서 저자들 중 가장 '신비적'이다. 둘째는 나지안조스의 성 그레고리오스로 수많은 신적 관상의 시를 저술했다. 셋째는 '신(新) 신학자'(Nouveau Theologien)라 불리는 성 시메온은 하느님과의 연합을 노래했다. 그러므로 여기서 신비는 모든 신학의 완성이요 절정이며, 그 무엇보다도 탁월한 신학으로 간주된다.
10 지식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영지주의의 영지와는반대로, 그리스도교 신학은 언제나 결국 하나의 수단이며, 모든 지식을 초월하는 어떤 최종적 목표에 이바지하는 예비적 지식 전체이다. 이 최종적 목적은 하느님과의 연합 혹은 신화(神化 deification)이며, 희랍 교부들에 의하면 그것은 '테오시스'이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상당히 역설적이고 모순적으로 보일 수 있는 하나의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리스도교 이론은 엄청난 실천적 의미를 가질 것이며, 그것은 이론이 신비적이면 신비적일수록 또한 하느님과의 연합이라는 목적을 보다 직접적으로 겨냥하면 할수록 더욱 그러하다. 만약 순전히 영적인 차원에서만 본다면, 수세기에 걸쳐 교회에 의해 지지된 교리적 투쟁의 모든 발전은 교회의 주된 관심이 하나의 진리를 옹호하고 지키고자 하는 것이었음을 보여주는데, 그 하나의 진리란 바로, 어떤 시대 상황속에서든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신비로운 연합의 충만함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이 가능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다.
21 동방교회들을 공통적으로 가리키는 '정교회'는 또한 스스로를 세계적인(에큐메니칼) 교회로 생각한다. 정교회가, 주어진 문화의 유형, 헬레니즘 혹은 다른 문명의 유산들, 특별히 동방의 문화 유형에 의해 제한되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다. 더욱이 '동방의'라는 말은 한꺼번에 수많은 것을 말한다. 동방은 문화적 관점에서 볼 때 서방보다 덜 균일하다. 러시아 그리스도교가 비잔틴에 그 기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헬레니즘과 러시아 문화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 정교회 신앙은 서로 다른 수많은 문화의 누룩이었다. 그래서 정교회 신앙은 동방 그리스도교 어느 하나의 문화적 형태로 간주될 수 없었다. 그 형태는 다양하지만, 신앙은 하나이다.
86 신학자 그레고리오스 성인의 위의 언급은 "성령이 '아들을 통해' 혹은 '아들과의 관련 속에서' 발출한다"는 ─ 교부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이 표현은 대다수의 경우 성령이 성자를 매개로 이 세상에 보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 표현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던, 삼위일체 하느님에 관한 여러 사변들이 결국은 이 두 위격의 기원과 관련하여 성자와 성령의 관계를 확립하려고 굳이 애썼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각각의 기원을 성부에 두고 있는 이 두 위격을 이러한 방식으로 관계 지으려는 경향은 성부와 성자 '둘로부터' 동시에 성령이 발생했다는 서방의 교리로 정착되었다.
87 삼위일체 교리의 전개에 있어서 서방의 사고는 대부분의 경우 하나의 본질에서 출발해서 이어서 세 위격을 고려하는데 반해서, 희랍적 사고는 그 반대의 길, 즉 세위격에서 출발해서 하나의 본질로 나아간다. 바실리오스 성인은, 성경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또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호명하는 세례의 형식에 부합하도록, 구체적인 것을 출발점으로 삼음으로써 후자의 길을 선호한다. 세 위격에 대한 숙고로부터 공통의 본질에 대한 숙고로 나아감으로써 희랍적 사고는 빗나갈 수 있는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103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느님의 계시는 모든 그리스도교 신학의 기초다. 교부들이 '신학'이라는 단어에 부여했던 의미에 따르자면, 그것은 신학 그 자체다. 교부들 대다수에게, 신학이란 교회에 계시된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학의 토대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 목표이기도 하다.
115 신적 에너지들은 창조의 필연성을 조금도 내포하지 않는다. 창조는 신적 에너지들을 통해 실현된, 그러나 성 삼위 하느님의 공통된 의지의 결정으로 확정된 지극히 자유로운 행동이다. 그것은 하느님 존재 밖에, 다시 말해 '무(無)로부터'(ex nihilo) 또 하나의 새로운 주체를 상정하시려는 하느님의 의지적 행동이다. 현시의 '무대'는 이렇게 자신의 시초를 가지게 되지만, 현시 그 자체로 말하자면 그것은 영원하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영광이다.
172 교회 안에서 이 에너지들은 은총으로 나타나고, 바로 이 은총 안에서 피조물은 하느님과의 연합에로 부름 받는다. 세상의 마지막 날에 하느님 나라로 변형되기 해서 우주 전체는 교회에 귀속되고 더 나아가 그 자신이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도록 부름 받았다. 무로부터 창조된 이 세상은 교회 안에서 자신의 완성을 발견한다. 그리고 바로 이 교회 안에서, 피조물은 자신의 소명을 완수함으로써 확고부동한 토대를 획득한다.
204 이레네오스 성인과 아타나시오스 성인의 말대로, 또 모든 시대의 교부들과 신학자들이 되풀이하여 말한 대로, "인간이 신이 되게 하시려고 하느님은 인간이 되실 것이다." 그러나 가장 직접적인 측면에서 볼 때, 육화(肉化)하신 말씀에 의해 성취된 이 업적은 무엇보다도 먼저 구원의 업적, 죄와 죽음의 포로가 된 세상의 구속으로서 타락한 인류에게 드러날 것이다.
236 우리가 하느님과 연합에 이르게 되는 곳은 정결하고도 썩지 않는 곳, 바로 교회다. 우리가 세례를 통해 통합하는 것은 교회와 한 몸으로 묶인,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로서의 우리의 본성이다.
365 삼위일체 하느님은 모든 관상과 모든 고양의 종국인 동시에 모든 신학의 원리이고 첫째가는 진리이며, 모든 사고와 존재의 시작을 가능케하는 시초다. 신학자 그레고리오스 성인, 폰투스의 에바그리오스, 막시모스 성인, 그 밖의 많은 교부들은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모든 피조물이 참여하도록 부름 받은 최종적 완전으로서의 하느님 나라와 동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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