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만하임: 재건시대의 인간과 사회
- 책 밑줄긋기/책 2023-25
- 2024. 11. 18.
재건시대의 인간과 사회 - 칼 만하임 지음, 정환용 옮김/전남대학교출판부 |
서론 사회재건시대의 유의의 / 1
제1편 현대사회의 합리적 및 비합리적 요소
제2편 현대문화위기의 사회적 원인
제3편 위기, 독재정권, 전쟁
제4편 계획수준에서의 사고
제5편 자유를 위한 계획
제6편 계획 수준에서의 자유
참고문헌 / 459
색인 / 517
2 우리는 이러한 관점들 간의 차이를 축소하거나 은폐하려해서는 안된다. 서방제국에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붕괴 그리고 전체주의체제의 채택은 소수의 국가들에 국한된 지나가는 위기의 징후들로 보이는 한편, 위험지대 내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 변환을 현대사회의 바로 그 구조 속의 변화로서 경험한다는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이러한 격동을 모면한 그 사람들의 경우에, 세상은 아직도 전쟁의 영향에서 고통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위안이 되고 있다. 그들은, 독재정권들이 종종 역사의 노선에서 비상사태의 임시해결책들로서 확립되었다는 것을, 반성하면서 기꺼이 자위한다. 이와 반대로 위기에 관해 직접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그 사람들에게는, 비록 그들이 독재정권에 대한 신랄한 반대자들이라고 하더라도, 사회질서와 인간들의 심리상태 양자는 철저히 변화하고 있다는 신념으로 결합되어 있다. 게다가 만일 이 독재정권이 해악이라면 조만간 확산될 해악이다. 그 사람들은, 우리가 이러한 순간의 고요함에 우리 스스로가 기만당하지 않아야 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는 것을 불가능하지 않도록 하면서, 새로운 기법들을 획득하는데 그 지식을 사용해야한다고, 더욱더 확신한다. 경험의 차이는 서로 조화되지 않고; 그 차이는 고립된 사실들의 해석과 전체로서 입장의 진단이라는 양면에 영향을 미친다. 인간과 사회문제에 관한 한, 서로 다른 국가들과 집단들 간에 아이디어의 지속적인 교환이 있어야한다. 사실들 자체보다는 오히려 국가에 만연된 풍조에 의해 정당화된 준거의 틀에 부합되도록, 잘못된 가정들에 국가 스스로가 싫증나게 하거나 사상(事象)들의 의미를 왜곡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다. 여기서 과장된 비관주의는 과장된 낙관주의와 똑같이 위험할 수 있다. 여러 상이한 국가들에서 살고 있으면서 다양한 관점들을 스스로 확인할 기회를 운명적으로 제공받은 그러한 사람들의 과업은, 의견의 차이들이 새로운 통합을 위해 정반대가 되도록 하거나 혼합되도록 하는 형식으로 항상 이 태도들의 갈등을 고려하고 그 사람들 스스로 잘 해결하도록 했다.
본서에는 "모든 책은 저마다의 운명을 지니고 있다."라는 옛 격언을 확실히 적용할 수 있다. 본서의 여러 편들을 저술할 때, 저자는 자유민주사회의 붕괴하는 경향들에 의해서 길러진 경험들의 철저한 영향아래 있었다. 저자의 관심은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주로 자유민주장치의 실패를 주시했고; 저자는 현대 대중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그 공화국의 무력함을 입증했다. 저자는 어떻게 특정한 사회적 조건 하에서 자유질서의 무계획성이 무정부로 변하고, 어떻게 한때 사회적 과정의 균형을 유지했던 자유방임의 원리가 이 발전단계에서, 정치적 및 문화적 생활의 양면에서, 혼돈의 결과를 가져왔는가를 검토했다.
이 경험들 때문에, 저지는 낡은 관념의 자유방임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느꼈고; 산업사회의 현재단계가 아니라면 어떤 형태든 계획이 불가피했다는 것을 인식했다.
5 저자는 우리사회가 단기간의 불안이 아니라 구조의 근본적인 변화에 직면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이러한 인식이 예방적 조치들에 대한 유일한 보증이기 때문이다. 왜 위기지대 속의 서양사회가 붕괴의 단계를 통과하고 있는가를 우리가 알 수만 있다면, 아직도 상대적인 평화를 향유하고 있는 국가들이 민주적인 계획에 의해 사상(事象)들의 장래추세를 통제하는 것을 배우고, 그래서 그 과정의 부정적 측면들, 즉, 독재, 국교선봉, 그리고 야만을 회피하는데, 얼마간의 희망은 있는 것이 아닌가? 저자에게는,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연구하고 지난 십년의 변화들에 대한 상이한 해석들을 숙고한 후에, 우리의 당면시대에서는 계획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고 여겨졌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계획은 독재정권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매우 다른 형태를 취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8 아마도 정치사의 다음 국면에서, 사회적 장치들은, 한편으로는 계획되지 않은 사회적 과정에서 발생되는 혼돈을 피할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과 독재의 팽창을 기본적으로 목표로서 취급되지 않도록 보장하기 위해서, 자유와 계획의 원리들을 결합할 사회적 장치들이 발견될 수 있다. 이것은 오직 사고, 실험, 그리고 정치적 행동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정치적 문제를 권력의 문제로도 그리고 성공적이거나 또는 성공적이지 않은 사회 조직의 문제로도 사료하는 버릇이 들면 들수록, 그 사람이 전자의 측면은 물론 후자의 측면도 강조해야 되는 것처럼 보여서 이상주의자가 덜되지는 않는다. 이것이, 얼마나 개인적 자유들을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효율성 양자를 보전하기 위해 제약하지 않고 남겨둘 것인가를 결정하는, 사회적 통제들의 결합을 발견하는데 우리의 모든 지적에너지를 시용하는 것이 중요하도록 만든다.
본서에서 채택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방법은 통상적 방법과는 차이가 있다. 그 통상적 방법은, 문제를 단순히 이념적인 것으로 사료하지 않고, 어떤 종류의 자유, 민주주의, 그리고 문화가 개조된 사회체제하에서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구체적인 사회적 분석의 수단으로 설명하려한다. 자유, 민주주의, 그리고 문화에 대한 통상적인 옹호는, 자유가 본질적으로 연대화보다 양호하고, 자결은 독재보다 좋고, 자생문화가 개성표현에 대한 검열보다 좋다는 것을 제시함으로서 논의를 일반적으로 종료시키기 때문에, 이념적이라고도 기술할 수 있다. 어떠한 이성적인 사람도 문제가 추상적인 형태로 발생하는 한, 이 이념적 방법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에게는 이것이 너무나 시시한 승리로 보인다. 우리는 오늘날 어떠한 추상적 형태의 자유가 어떠한 추상적인 형태의 연대화보다 나은가 여부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는 서로 다른 국가들에서 어떠한 구조적 변화가 19세기에 널리 보급되었던 자유, 문화, 그리고 민주주의의 유형이 몰락에 이르게 됐는가를 발견하는 것이다.
11 19세기는 그 자체의 사회질서 속에서 가능했고 또한 관습적이었던 그러한 형식의 자유를 필연적으로 의미했다. 이 질서가 변화되었을 때는 새로운 상황들이 발생했고, 오래된 정의는 범위가 너무 제한된 보기들에 기초했으며, 이 근본적 용어들은 새로운 경험적 재료와 보다 광범한 문제의 측면들을 포용하기 위해 개정되어야 했던 것은 점차 분명해졌다. 이것이 모든 신시대가 그 시대의 전문어를 재정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논리일 것이다. 국가, 주권, 권위, 재산, 법률 등등은 역사의 노정에서 끊임없이 재정의 된다. 그러나 그것은 보다 광의를 구비할 책무가 있는 협의의 정치적 아이디어들만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기술되어야 하는 모든 아이디어들은, 본질적으로 그 시대의 문화적 환경 속에서 배태되기 때문에, 인성에 대한 변화하는 개념과 그 인성과 동행하는 윤리 및 심리상태와 함께 변한다.
15 이들 국가의 내부질서에 관한 것에서 조차도, 우리는 독재국가들 뿐 아니라 민주국가들에서도 활동 중인 적대적인 사회세력들을 발견한다. 후자, 즉, 민주국가들, 에서, 내부조직을 규제하는 경향들은, 대중들이 사실을 인지하거나 사실에 대한 어떠한 이론적 필요성도 고찰함도 없이, 서로 대립관계에 놓여있다. 정치가들과 이론가들은 아직까지도 자유주의에 관하여 생각하지만, 계획국가에 길을 열어주는 제도들과 법령들의 수는 날로 증가한다. 사람들의 원칙들과 그들의 실제 행 동 간의 간극을 고정시키는 의식의 단층 때문에, 이 법령들과 규제들은 지하에서 작용한다. 그러나 이것들 때문에 그것들의 유의의가 결코 작아 지지 않지만; 반대로 어느 누구도 결과를 고려하기 위해 멈추게 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더욱 더 피해를 당한다. 때문에 그 사람들은 언제나 보다 더 자유로운 체제와 충돌하고, 그 체제의 작용을 무력하게 만든다.
16 지금까지는 역사의 주요한 변화들을 개인들과 부분적 집단들 양자 모두에서 아주 종종 이해할 수 없었지만, 사회의 진보는 이제 행위자들 편에서 적절한 통찰이 없이는 이 변화의 과정들을 조정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했다. 더욱이 지금까지는 어떠한 특정집단도 사회통합을 조정할 책무가 없었는데 - 이는 발생한 것은 무엇이든 대립되는 경향들 간의 우연한 타협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 , 오늘날에는, 만일 정치에 관여하고 있는 집단들이 아직도 그들 자신의 직접적인 이익들을 넘어서 생각하려 하처 않는다면, 사회는 파멸할 것이라는 징조들이 있다. 사상들의 현재단계에서 우리는 새로운 종류의 선견, 그리고 과거에 획득했던 방법들과는 여러 측면에서 완전히 다른 심리상태, 도덕 그리고 행동계획과 함께, 새로운 갈등관리의 기법이 필요하다. 사회의 재건은 인간자체의 개조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인간의 목표들에 대한 재해석, 인간능력들의 변화, 그리고 우리의 도덕률에 대한 부흥은 교훈적인 설교나 환상적인 유토피아의 주제가 아니다. 그것들은 우리 모두에게 중요하지만, 유일한 문제는 이 방향에서 무엇이 합리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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