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1

 

정신현상학 1 - 10점
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지음, 김준수 옮김/아카넷

일러두기

서문
서론
(A) 의식
(B) 자기의식
(C) (AA) 이성

 


서론
73 철학에서 사태 자체에, 즉 진리 속에 있는 것에 대한 현실적인 인식에 들어서기에 앞서 먼저 절대적인 것을 장악할 도구로 간주되거나 또는 절대적인 것을 살펴보는 수단으로 간주되는 인식에 대해서 이해하는 일이 필수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표상이다. 한편으로 인식에는 여러 종류가 있어서 그 가운데 어느 하나는 다른 것보다 이런 최종 목표에 도달하는 데에 더 적합할 터이고, 따라서 그중에서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다는 걱정, 그리고 또 한편으로 인식이 일정한 양식과 범위를 가진 능력이기 때문에 그 본성과 한계를 좀 더 면밀하게 규정하지 않으면 진리의 천국 대신에 오류의 구름을 붙잡게 되리라는 걱정은 온당한 듯이 보인다. 이런 걱정은 필시 심지어 다음과 같은 확신으로 변하기 마련이다. 즉, 인식을 통해 의식이 즉자인 것을 획득하도록 만들려는 착수 전체가 그 개념상 부조리하며, 인식과 절대적인 것 사이에는 양자를 전적으로 갈라놓는 경계가 놓여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인식이 절대적 본질을 장악하기 위한 도구라면, 어떤 도구를 사물에다 사용하는 것이 그 사물을 그 홀로의 상태로 놓아두지 않고 오히려 사물에 어떤 변형과 변경을 가한다는 사실이 곧바로 명백해지기 때문이다. 또는 인식이 우리의 활동 도구가 아니라 말하자면 진리의 빛을 우리에게 도달하게끔 해주는 수동적 매체라면, 이때에도 역시 우리는 진리를 그 자체의 상태에서가 아니라 그 매체를 관통해서 그 속에 있는 상태로 얻게 된다. 두 경우 모두 우리는 자신의 목적과 직접 반대되는 것을 산출하는 수단을 사용하는 셈이다. 또는 우리가 무릇 어떤 수단을 이용한다는 것이 오히려 부조리한 일이다. 물론 도구의 작용 방식에 관한 지식이 우리를 이런 곤경에서 구제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이런 지식은 우리가 그 도구를 통해 획득한 절대적인 것에 관한 표상 중에서 도구에 귀속되는 부분을 결과에서 제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참된 것을 순수하게 획득할 수 있도록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수정은 실은 단지 우리를 원점으로 되돌려 보낼 뿐이다. 변형된 사물에서 도구가 가한 것을 다시 제거하면, 우리에게 그 사물 (여기서는 절대적인 것)은 이런 불필요한 수고를 들이기 이전 바로 그만큼의 상태로 있게 된다. 또한 이를테면 끈끈이 덫으로 새를 잡듯이, 절대적인 것이 도구에 의해 아무런 변경도 겪지 않고서 단지 우리에게 좀 더 근접하게끔 된다고 하면, 절대적인 것은 즉자 대자적으로 이미 우리 곁에 있으며, 또 그렇게 있으려고 하지 않는 한 절대적인 것은 분명 이런 간계를 비웃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 간계는 곧 인식이 될 터인데, 이때 인식은 갖은 노력을 들이면서 마치 한낱 직접적이고 따라서 아무런 수고도 필요 없는 관계를 산출해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기 때문이다. 또는 우리가 매체라고 표상하는 인식의 검증이 인식의 광선 굴절 법칙을 알려준다 하더라도, 이런 굴절을 결과에서 제하는 것은 그 또한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식은 빛의 굴절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접하도록 해주는 빛 자체이며, 이런 인식을 제거하고 나면 우리에게는 단지 순수한 방향이나 공허한 위치의 표시만이 남게 될 터이기 때문이다. 

83 이제 우리가 지의 진리를 탐구할 경우에 지가 즉자적으로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러한 탐구에서 지는 우리의 대상이며, 그것은 우리에 대해(우리를 위해, fur uns) 존재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 도출되는 것의 즉자는 오히려 우리에 대한 그것의 존재일 것이다. 우리가 그것의 본질인 듯이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그것의 진리가 아니라 단지 그것에 관한 우리의 지에 불과할 것이다. 본질이나 척도는 우리에게 귀속하며, 본질이나 척도와 비교되고 또 이런 비교를 통해 (그것의 옳고 그름이) 결정되어야 하는 것이 그런 본질이나 척도를 필연적으로 인정해야만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탐구하는 대상의 본성은 이러한 분리에서 또는 분리와 전제라는 가상에서 벗어나 있다. 의식은 자신의 척도를 자기 자신에서 제공하며, 따라서 탐구는 의식이 스스로를 자기 자신과 비교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방금 전에 했던 (의식과 대상, 즉자 존재와 대타 존재, 진리와 지의) 구별은 의식 안으로 귀속되기 때문이다. 의식 속에서 그 하나가 다른 하나에 대해 존재한다. 또는 의식은 무릇 지라는 계기의 규정성을 자신에 지니고 있다. 이와 동시에 의식에게 이러한 타자는· 의식에 대해 존재하는 것만이 아니라 또한 이런 관련 밖에서도 또는 즉자적으로도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진리라는 계기이다. 그러므로 의식이 자기 자신 안에서 즉자 또는 참된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에서 우리는 바로 의식 자신이 설정하여 그것에 준해서 자신의 지를 평가하는 척도를 가지는 것이다. 우리가 지를 개념이라고 부르는 반면에 본질 또는 참된 것을 존재자 또는 대상이라고 부른다면, 검증은 개념이 대상과 일치하는지를 지켜보는 데에 있다. 이와 반대로 우리가 본질을 또는 대상의 즉자를 개념이라고 부르고 반면에 대상을 대상으로서의 대상, 즉 대타적으로 존재하는 바대로의 대상으로 이해한다면, 검증은 대상이 자신의 개념과 일치하는지를 지켜보는 데에 있다. 이 둘이(두 가지 검증 방식이) 실은 하나의 같은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게 간파된다. 그런데 여기서 본질적인 것은 다음과 같은 점을 탐구 전반에서 확고하게 견지하는 것이다. 즉, 개념과 대상, 대타적으로 존재함과 즉자적으로 존재함, 이 두 가지 계기가 모두 우리가 탐구하는 지자체에 귀속되며, 따라서 우리는 탐구할 때 우리가 척도를 들고 와서 우리의 착상과 사고를 적용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우리가 우리의 착상과 사고를 내버려둠으로써 우리는 사태를 그 자체 즉자 대자적으로 존재하는 바대로 고찰하는 데에 이르게 된다. 

88 이러한 필연성에 의해 학문을 향한 이 도정은 그 자체가 이미 학문이며, 이와 더불어 그 내용상 의식의 경험의 학문이다. 의식이 자신에 관해 얻는 경험은 그 개념상 의식의 체계 전체 또는 정신의 진리의 왕국 전체를 모조리 포괄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정신의 진리가 지닌 계기들이 이런 특유의 규정성 속에서, 즉 추상적이고 순수한 계기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에 대해 존재하는 바대로 또는 이 의식 자체가 자신과 이 계기들의 관련 속에서 등장하는 바대로 서술되는데. 이를 통해 전체의 계기들은 의식의 형태들이 된다. 자신의 참된 실존을 향해 전진해 나아감으로써 의식은 단지 의식에 대해서만 그리고 타자로서만 존재하는 이질적인 것과 결부되어 있다는 가상을 탈피하게 되는 지점에, 또는 현상이 본질과 동일하게 되고 따라서 의식의 서술이 바로 본래적인 정신의 학문이 서 있는 지점과 합치하게 되는 지점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의식 자체가 이런 자신의 본질을 파악함으로써 의식은 절대지 자체의 본성을 가리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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