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옥스퍼드 세계사 16-2 ─ 제4부 제8장. 경제적·생태적 조우(2)

 

2025.05.28 🎤 옥스퍼드 세계사 16-2

16강: 제4부 제8장. 경제적·생태적 조우(2)
일시: 2025. 5. 28. 오후 7시 30분 - 9시 30분
장소: 수원시평생학습관
강의 안내: https://learning.suwon.go.kr/lmth/01_lecture01_view.asp?idx=4158


378페이지를 보면 "비유럽인 지배자, 제조업자, 교역상, 정치인은 제각기 주목받을 자격이 있다." 그러니까 아시아 지역에 있는 유럽인들의 파트너에 해당하는 사람이겠다. 이 사람들이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었는지만 알아두면 된다. 구체적인 것은 각론의 역사들을 통해서 공부를 하면 되니까 그렇다. 그다음에 이들과 유럽인들과의 그런 관계는 협력을 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회피를 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렇겠다. 380페이지를 보면 "생물학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유럽인과 현지인에 둘 다 연결된 새로운 통혼 공동체"가 있었다. 말하자면 동서 문명이 교역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융합되는 계기가 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의외로 순종이고 순혈인 사람들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굉장히 오랜 세월 동안 동서 문명이 서로 융합되어 있는 것일 수 있다. 그다음에 "1600년경부터 마닐라와 바타비아뿐 아니라 일본 나가사키에서도 대규모 중국 상인 공동체가 출현했다." 일본 나가사키에 가면 데지마라고 하는 인공섬이 있다. 네덜란드 상인들이 거기서 교역을 했다. 일본은 적어도 1600년 이후부터는 교역 루트 안에 들어가 있던 나라이다.  

넘겨보면 382페이지를 보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큰 국가들은 세입의 대부분을 토지세로 얻었기 때문에 대체로 교역을 경시했다는, 예전부터 서양 역사가들 사이에 흔했던 가정은 완전히 옳은 것이 아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큰 국가들은 토지세를 얻었기 때문에 교역에 무관심했다는 말은 100% 틀린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100% 옳은 것도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교역의 문제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치 않다. 어떤 나라든지 100% 어떤 정책을 폈다 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특히나 이런 교역의 문제들은 그렇다. 그다음에 383페이지를 보면 "오스만이 패했지만 포르투갈의 권력도 네덜란드와 영국 동인도 회사의 도전에 부딪혀 곧 기울었다." 포르투갈 그다음에 네덜란드, 영국 이 순서대로 되어있는데, 그런 나라들의 패권이 계속 오고 가는 어떤 흐름, 그런 나라들을 agent state라고 한다. 주도적 행위자, 주도적 주도 국가라고 한다. 찰스 킨들버거의 《경제 강대국 흥망사 1500-1990》은 풍부한 배경 지식은 모자라지만 그래도 큰 흐름을 잡는 데 좋은 책이다. 꼭 읽어봐야 할 책이다. 

그다음에 384페이지를 보면 "1792년 영국 정부는 통상 조약을 협상하고자 조키 매카트니가 이끄는 사절단을 중국에 파견했다." 그때 청나라의 건륭제는 "나는 이상하고 신기한 물건을 중시하지 않으니 당신 나라의 상품은 쓸모가 없소"라는 말했는데 이는 거짓말이다. 황제는 자존심에서 그렇게 말을 했을지는 몰라도 "많은 중국인이 서양의 기술과 지식 상품을 원했다." 역사의 가정법을 쓸 때 이 장면을 가지고 얘기들을 많이 하는데, 이때 중국이 그래도 좀 힘이 있을 때이다. 건륭제 시기만 해도 중국 역사상 최대의 판도를 이룬 때로 오늘날 중국의 영토는 건륭제가 만들어 놓은 것이다. 건륭제가 위력이 있을 때 영국의 조지 메카트니가 왔는데 이때가 1792년이다. 이때 서로 교역을 해볼까 했으면 영국과 중국이 우호적인 관계가 되었을 것이고, 그런 대로 자기네가 위력이 있는 상태에서 교역을 하니까 이니셔티브를 완전히 빼앗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1792년이라고 하는 해에 조지 메카트니가 왔는데 아편전쟁이라고 불리는 제1차 중영전쟁이 일어나는 게 1840년이다. 그다음에 제2차 중영전쟁이 1856년이다.  

385페이지의 대서양 세계의 인구와 식물, 플랜테이션을 보겠다. 여기는 상대적으로 수월하다. "세계사가들은 1800년 이후 서양이 경제적·사회적으로 진보한 원인이 유럽 내부에 있다는 유럽중심주의적 가정에 도전해왔다." 유럽 내부에 있다는 것이 전통적 해석으로 대표적인 게 과학혁명, 계몽주의로 이어지는 유럽의 우위, 지금은 아무도 인정 안 해 주는 가설이다. "포메란츠는 1800년 이후 유럽이 분기한 주된 원인은 국내가 아니라 해외에 있다고 주장한다." "포메란츠는 서양의 분기가 아메리카에서 얻은 보너스 효과의 결과였다고 주장한다." 케네스 포메란츠는 굉장히 중요한 역사학자이긴 한데 오늘날에는 케네스 포메란츠의 책도 그다지 열심히는 아닌 것 같다. 역사책은 계속해서 연구가 많이 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지식이 계속 업데이트돼야 될 필요가 있다. 최소한 6~7년 전에만 해도 케네스 포메란츠의 《대분기》라는 누구나 다 읽어야 되는 필독서였다. 오히려 오늘 가져온 버나드 베일린의 《대서양의 역사》는 중요하니까 손 닿는 곳에 있다. 얇아도 한 번쯤은 읽어봐야 되는 책이다. "대서양 경제가 아시아 교역보다 중요해졌다." 유럽 내부에서 뭔가가 이렇게 길어 올려져서 유럽을 발전시킨 게 아니라, 유럽은 기술이 있었고 문화적인 어떤 동기가 있다. 그렇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되고 기본적으로 자원이 있어야 되는데, 그 자원이 아시아에서 왔다기보다는 짧은 시간 안에 대서양 경제를 이루면서 북아메리카 대륙과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져온 자원들을 가지고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는 얘기이다. 그러니까 케네스 포메란츠 이후에 유럽의 발전을 설명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대서양 경제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서양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는 대개 사람들이 노예 무역만 얘기하는데, 노예 무역뿐 아니라 설탕, 이 두 개의 키워드를 꼭 기억해야 한다.  

386페이지를 보면 노예 무역과 설탕에 들어가기 전에 "세계적 논제를 탐구하기에 유용한 얼개를 제공한다." 그 그다음에 "첫째로 한랭기가 지속되고 악화되었고, 둘째로 아메리카에서 들여온 새로운 식용 작물들이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굶주림을 덜어주었으며, 셋째로 새로운 생산과 분배 체계 덕에 식량 공급이 대폭 늘어났다." 한랭기가 지속되고 악화되었고, 아메리카에서 들여온 새로운 식용 작물들은, 감자를 말한다, 그다음에 식량 공급이 대폭 늘어났다. 그러니까 일단 유럽에서는 한랭기가 지속되고 악화되었다고 했는데 옛날 같으면 전염병이 있고 추위가 있으면 다 굶어 죽었을텐데 이것을 해결한 게 감자이다. 그 감자가 들어오게 된 것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갔었기 때문이다. 역사가 우연이다. 그다음에 정치 조직이 발전한 것이다. 그게 세 번째인데 생산과 분배 체계가 조금 합리화되었다는 얘기이다. 그래서 식량 공급이 대폭 늘어났다. 우리도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기후 위기가 계속되고 있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새로운 식용 작물들을 개발해야 한다. 농업 개발, 농업에 투자를 해야 한다. 그다음에 생산과 분배 체계를 잘 갖춰야 한다. 정치 발전을 이루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 바로 밑에 보면 인구가 늘었다고 했는데, 사회적 재생산을 국가가 정리를 해야 한다. 그러니까 세계사 책을 읽고 한 번만 더 생각을 하면 정책 아젠다들의 기본 원리들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감자가 들어왔고, 이 감자를 어떻게 나눠 먹을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을 했는데, 이때가 바로 유럽에서 정치가 발전한 시기이다. 어려운 시기에 생산과 분배 체계를 어떻게 조정을 할 것인가 바로 정치의 문제이다. 유럽 근대 시기의 정치가 이때 펼쳐진 것이다. 유럽 역사 전체에서 가장 격동기가 이때이다.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자유, 평등 주권과 같은 개념들, 그다음에 해외 영토, 이런 개념들이 유럽에서 다 발명이 되었다. 다시 정리하면 아메리카, 아프리카, 유럽, 대서양을 가운데 둔 이 삼각 무역이 굉장히 중요한 시기가 되었다 라는 것을 꼭 기억 해두면 되겠다.  

그러면 아메리카는 어떠했는가. 389페이지를 보면 "유라시아 북부와 비교해 아메리카에서는 농업과 생태가 훨씬 더 혁명적으로 변형되었다." 혁명적으로 변한 것은 "노예에 기반하는 엄청난 규모의 플랜테이션", 이것을 노예 무역만 생각하면 안 되고 노예를 데려다가 플렌테이션, 노예와 플렌테이션은 같이 맞물려 들어간다. 넘겨보면 390페이지에는 사람들이 병 걸려서 죽었었다는 것, 콜롬버스 교환의 일부였다는 내용이 있고, "그렇지만 1800년 이전 설탕의 확산은 아메리카와 대서양 주변에서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설탕이 대서양 무역을 지탱한 중요한 상품이다. 이를테면 오늘날 반도체 같은 것이다. 설탕이라고 하는 상품이 그 가운데 끼어 있었다는 걸 기억해두고, 그다음에 392페이지부터는 지금 계속 인구의 이동과 노예에 관한 얘기니까 그냥 보면 된다. 노예 무역이라는 게 그렇게 이문이 남는 장사가 아니었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아주 많은 노예들을 실어갔기 때문에 아프리카 사람들이 씨가 말랐다라고 생각하기도 쉬운데 사실 그렇지도 않았다. 그런데 설탕은 엄청나게 중요했다는 것이다. 394페이지를 보면 "설탕 가격 상승이 노예 노동력의 고비용을 상쇄해 주었다." 이게 안 되면 노예 무역을 못 하는 것이다. 설탕이라고 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 설탕 중요하고 커피도 중요하다. 그래서 395페이지를 보면 "설탕 덕분에 카리브해는 브라질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노예 시장과 아메리카에서 가장 부유한 경제가 되었다. 설탕을 재배하면서 서인도 제도의 경제는 빠르게 탈바꿈했다." 그러면 영국 사람들이 아메리카에서 얻는 이익이 있었기 때문에 아시아 지역에서 손해를 본다 하더라도 상쇄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유럽 자체에서 생겨난 어떤 리소스들을 활용해서가 아니라 외부에서 리소스를 투여시켜서 계속해서 발전했다는 얘기이다.  

이 모든 얘기를 정리한 것이 396페이지를 보면 "이 모든 아메리카산 수출품은 밖에서 들어오는 수입품과 균형을 이루었다. 인도양과 중국에서와 달리, 아메리카에서는 유럽산 제조품이 상당히 중요했다. 17세기에는 네덜란드 상품이 우세했지만, 1670년 이후 프랑스와 영국의 상품과 해상 운송이 빠르게 성장했고, 1750년 이후로는 영국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했다. 1815년 서인도 제도는 직물과 자기를 수출한 아시아 시장과 더불어 영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수출용 시장이었다. 당시 영국령 인도가 캐나다보다 조금 더 작은 시장이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아시아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인도양과 중국에서와 달리 아메리카에서는 유럽산 제조품이 중요했다. 인도양과 중국에서는 유럽산 제조품이 별로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게 앞에서 한 얘기와 연결이 되는 지점이다. 그다음에 해상 운송이 빠르게 성장했다는 것은 상품의 중요한 질도 있지만 항해 지식과 기술, 그래서 1750년에 영국이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했는데 서인도 제도는 직물과 자기를 수출한 아시아 시장과 더불어 영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수출용 시장이었다. 그러니까 영국에서 인도보다도 캐나다에서 수출을 많이 했다는 얘기이다. 오늘날에도 이런 것을 기억을 해놓아야 된다. 항상 역사적으로 이런 사태들은 계속 되풀이된다. 그다음 문장인 "대서양 경제에서 아프리카의 역할은 노예 노동의 공급처를 훌쩍 넘어섰다." 중요한 포인트이다. 아프리카는 그냥 노예 공급지였다고만 생각하기가 쉽은데 그게 아니라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인은 오래전부터 대서양과 인도양에서 교역해 온 이유와 거의 같은 이유로, 즉 매력적인 가격에 원하는 상품을 구하기 위해 유럽인과의 대서양 교역에 참여했다." 그러니까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에서는 대서양 교역에 가담을 했는데, 처음에는 노예 무역으로 들어갔겠지만 이제는 상품 교역도 했다는 것이다. 대서양 교역이 인도에서 하는 교역보다도 더 많은 물동량이 오고 갔다는 말이다. 그리고 희망봉을 돌아서 가는 것보다는 바로 가는 게 쉽다. 그렇게 생각을 해보면 유럽이 아시아보다도 우위에 설 수 있었던 어디에 있는가. 중국에서는 손해를 보더라도 대서양 경제를 통해서 남겼다는 얘기이고, 거기서 힘을 길러서 네메시스호를 타고 아편 전쟁을 하러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다음에 400페이지를 보면 "아프리카의 사회적 · 경제적 손실과 관련해 흔했던 다른 믿음들도 그릇된 것으로 밝혀졌다." 방금 전에 읽은 부분과 연결되어 있다. 아프리카에 대해서 항상 수동적으로만 생각하면 안 된다. 그리고 401페이지를 보면 "수입품이 아프리카의 생계 기반을 갉아먹었다는 주장도 과장"된 것이고, 직물 수입품이나 철 수입품이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다음에 "노예선으로 끌려간 사람들이 겪은 고통이야 전혀 과장이 아니지만, 노예 무역이 아프리카에서 초래한 피해는 한때 생각했던 것만큼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18세기 유럽의 대서양 교역은 그 규모와 가치 면에서 아시아 교역만큼이나 중요해졌다." 브라질의 노예 기반 경제 그다음에 설탕과 담배와 금, 서인도 제도는 설탕과 커피를, 북아메리카는 어류, 모피, 목재, 벼, 인디고, 그리고 노예뿐 아니라 유럽산 수출품과도 균형을 이루었고, 인도산 면포가 아메리카 시장에서도 중요했다. 그리고 미국에서 남북 전쟁이 일어났을 때 남부의 주들이 우리가 면화를 생산을 안 하면 영국에서 우리를 도와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그만큼 그때는 영국도 면화 수입처가 다변화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미국 남부의 농장주들은 원자재 수입처가 다변화되었다는 국제 정서의 변화를 몰랐던 것이다. 그다음에 "영국의 대서양 교역은 여섯 배 확대되었다." 대서양 삼각 무역이라고 하는 것이 세계사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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