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사통史通(29) ─ 史通, 內篇 - 探賾

 

2025.06.01 δ. 사통史通(29) ─ 史通, 內篇 - 探賾

유지기, ⟪사통⟫(劉知幾, 史通)

텍스트: buymeacoffee.com/booklistalk/shitong-8

 

탐색探賾

• "이렇게 여러 역사가의 이설을 살펴보고 지은이들의 본래 의도를 참작해보면, 더러는 자기 생각대로 원저자의 생각을 왜곡하여 설명하거나 자신의 호오를 함부로 덧붙여 늘 차이가 발생한다." (어시고중가지이설於是考衆家之異說 참작자지본의參作者之本意 혹출자흉회或出自胸懷 왕신탐색枉申探賾 혹망가향배或妄加向背 편유이동鞭有異同) 

• "그런데 세속의 썩은 선비들이나 후대의 공부하지 않는 학자들이 극단적인 태도에 젖어 거듭 오류를 반복하면서도, 스스로는 앞사람들이 미처 보지도 듣지도 못한 것을 보고 들었다면서 입이 닳도록 떠들 때 이러한 차이를 구실로 삼는다. 그러나 오직 지혜로운 사람만이 미혹되지 않으리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유속부유而流俗腐儒 후래말학後來末學 습기광견習其狂狷 성기괘오成其詿誤 자위견소미견自謂見所未見 문소미문聞所未聞 명제설단銘諸舌端 이위구실以爲口實 유지자불혹唯智者不惑 무소의언無所疑焉) 


오늘은 사통史通의 내편內篇의 27장 역사서의 배경 억측에 해당하는 탐색探賾을 마저 읽겠다. 분량이 꽤 많은데 역사책들에서 누군가가 취지를 잘못 이해서 이렇게 적어두었다라든가 그런 사례들을 쭉 늘어놓은 게 있다. 지난번에는 독학하다 보니까 고루해지고 과문해지고 해서 생겨난 문제, 그다음에 공자의 말이 있었다. 공자가 탄식해서 말하기를 "믿어야 하는 것은 눈이지만 눈을 오히려 믿지 못하고 의지해야 하는 것은 마음이지만 마음을 오히려 의미하지 못한다." 그래서 공자가 제자들에게 말했다. 제자기지弟子記之 지인고불역의知人固不易矣 고지비난야故知非難也 공자지소이지인난야孔子之所以知人難也. "제자들은 이를 기억해두어라. 사람을 아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다. 뭔가를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주 믿었던 제자인 안회를 둘러싼 일들을 말한다.  

역사가라고 하는 사람들을 우리가 믿어봐야 되는데 역사가를 믿기가 참 어려운 게 유지기가 얘기하는 것처럼 뭔가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고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겠는가. 틀린 소리를 하고 있는 사례가 굉장히 많다. 이 사례들 몇 가지를 눈에 들어오는 대로만 말해보면 "춘추좌씨전에서 오나라와 초나라를 간략하게 기록했고, 순열의 한기에서는 흉노를 간단하게 기록했는데, 아마 오랑캐를 천하게 보고 중화를 귀하게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어떤 역사가가 말을 했다. 그런데 지금 후대의 사람들이 보면 그렇기도 한데, 좌구명의 처지를 이렇게 생각해 보면 "춘추시대는 각국이 뒤엉켜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관문이나 교량이 서로 통하지 않았고, 사관의 기록도 구석구석 다 갖추기가 어려웠다." 사실 그렇게 될 것이다. 춘추좌씨전이 오나라와 초나라를 간략하게 기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때만 해도 "오나라와 초나라는 남쪽에 아주 궁벽한 구석에 있는 데다 강과 산으로 땅이 막혀 있어 노나라 지방에서 보면 한층 멀었으니", 그 사료를 얻기가 어렵지 않았을까 한다. 그런 것을 고려하지 않고 춘추좌씨전은 오나라와 초나라를 오랑캐라고 여겨서 기록하지 않았다 라고 말해버리면 이것은 억측이다. 좌구명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었던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역사가가 무언가를 기록할 때 그가 가지고 있던 무슨 편견이 있다든가 하는 것은 모르겠고, 그 사람이 어떤 생각으로 이걸 했는지를 추측해 보기에 앞서서, 그 사람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는가를 먼저 고려해 보는 게 후대의 역사 책을 읽는 우리들로서는 기본적인 태도이겠다.  

예를 들어서 에릭 홉스봄의 역사책을 읽는다 할 때 후대의 역사가들이 홉스봄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얘기한 것을 보고, 이 사람은 근본적으로 뭔가 자기가 서술하고자 하는 바가 있었고, 그것은 객관적으로 뭔가를 얘기를 하기에는 모자란다 라는 판단이 들어버렸기 때문에 이제 안 읽어도 되겠구나 했다. 그리고 근대 자본주의의 역사는 요즘 「20세기읽기 세미나」에서 읽고 있는 《하버드-C.H.베크 세계사》도 있고, 《대변혁》도 있고, 번역되지는 않았는데 크리스토퍼 베일린의 《The Birth of the Modern World, 1780 - 1914》도 있다. 크리스토퍼 베일리 책은 가장 기본적으로 다른 역사가들이 참조하고 있기 때문에 영어판을 사놓고 다른 사람이 언급을 하면 참조를 한다. 거대한 가속화Great Acceleration라는 말을 만들어 낸 사람이니까 그렇다. 그러면서 에릭 홉스봄의 책은 더이상 참조하지 않게 된다. 그러면서 홉스봄은 왜 그랬는가, 어떤 의향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들을 생각을 해보게 된다. 탐색探賾의 맨 마지막 문단을 보면 그런 것들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이렇게 여러 역사가의 이설을 살펴보고 지은이들의 본래 의도를 참작해보면, 더러는 자기 생각대로 원저자의 생각을 왜곡하여 설명하거나 자신의 호오를 함부로 덧붙여 늘 차이가 발생한다." 어시고중가지이설於是考衆家之異說, 이렇게 여러 역사가의 이설을 살펴보고, 방금 전에 말한 것처럼 크리스토퍼 베일리의 책, 위르겐 오스터함멜의 책, 에릭 홉스봄의 책 이런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살펴보고, 참작자지본의參作者之本意, 지은이들의 본래 의도를 참작해보면, 그 이설과 본래 의도가 연결이 되어, 그러니까 본래 의도로부터 서로 다른 의견이 나왔을테고 그것을 계속 대조해서 본다는 말이다. 에릭 홉스봄의 의도가 뭔 지 모르고 그 사람의 책을 읽었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에릭 홉스봄의 의도는 이것이라고, 그리고 그 사람이 아주 고정적으로 가지고 있던 생각이 있고 그것이 이것이라고 말을 해 주고 나서 그 상응관계를 그의 책에 나온 얘기들을 살펴보니까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그 얘기를 읽은 것이 배영수 교수가 쓴 《미국의 자본주의 문명》을 보면 자본주의 문명의 역사를 다룬 책들에 대한 간략한 코멘트가 있다. 배영수 교수는 자기가 《미국의 자본주의 문명》을 쓰기 위해서 자본주의 역사를 다룬 책들을 쭉 읽고 검토를 했을 것이다. 그런 연구 성과들에 대한 설명들,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규정하는 작업, 그런 것을 보면 역사책은 한 권만 열심히 읽는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다른 학자들이 쓴 얘기들도 이렇게 봐야 된다. 《미국의 자본주의 문명》의 서론을 보면 "역사가 자유주의에서 더 이상 발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도 잠시 주목을 끄는데 그쳤다. 탈근대나 근대 이후에 말하던 지식인들도 근대에 대한 비판을 넘어 새로운 시대에 대한 전망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렇게 해서 흐려진 역사적 방향 감각은 지도적인 역사학자들의 저술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라는 말이 있다. "사회주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에릭 홉스봄은 널리 주목을 끌었던 근대사 개설을 마무리하면서 자본주의 역사를 깊이 있게 파헤치는 데 실패했다." 그러니까 에릭 홉스봄의 본의는 사회주의에 대한 미련이다. 그것이 그가 자본주의 역사를 깊이 있게 파헤치는데 실패한 원인이 된 것이다. 지금 유지기의 책을 읽으면서 이 구절이 떠올랐다. 크리스토퍼 베일리에 대해서도 이런 얘기가 나온다. 본의가 무엇인가를 꼭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자유주의자 크리스토퍼 베일리는 자본주의 역사를 깊이 있게 파헤칠 수 없다고 토로한 바 있다. 널리 격찬을 받은 근대사 2부작에서 자본주의가 핵심적인 관심사라고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설명하는 깊은 인과관계를 파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크리스토퍼 베일리는 자유주의자"라고 규정을 했고, "이 점에서 베일리는 역사사회학자 마이클 맨이 제시한 해석 틀에 머물러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마이클 맨이 제시한 해석들은 《The Sources of Social Power》, 마이클 맨의 해석 틀을 가져다가 뭔가를 설명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헤어프리트 뮌클러의 《제국》에서 하드 파워와 소프트 파워를 가지고 제국을 분석하는데 그것이 가장 잘 규정적으로 나와 있는 게 마이클 맨의 그 저작이다. 역사학자들 책은 굉장히 조심스럽게 이 사람 저 사람들을 교차 참조하면서 읽는 것이 굉장히 필요하다. 지금 유지기의 사통史通에서 본의本意라고 하는 것과 이설異說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알아낼 수 있는가. 그 역사학자가 어떤 환경에서 작업을 했는가도 알고 있으면 좋고, 그가 본래 어떤 의도를 가지고, 아까 배영수 교수가 얘기한 것처럼 에릭 홉스봄은 사회주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마이클 맨과 크리스토퍼 베일리는 같은 맥락에 머물러 있다. 그러니까 역사학자들의 근본적인 한계, 본래의 의도를 알려주는 역사학자가 있으면 참 좋다. 그래서 야코프 부르크하르트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를 읽고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대해서 알려면 이 책만 읽으면 된다고 말하는 것은 굉장히 지적으로 게으른 것이다. 그러니까 첫째는 역사가의 본래 의도와 그가 내놓은 학설의 연관관계를 살펴봐야 한다. 그러다 보면 "자기 생각대로 원저자의 생각을 왜곡하여 설명하거나 자신의 호오를 함부로 덧붙여 늘 차이가 발생한다."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흉회胸懷이다. 혹출자흉회或出自胸懷 왕신탐색枉申探賾, 자기 생각대로 원저자의 생각을 왜곡하여 설명하거나, 왕신이라는 게 왜곡이라는 말의 동의어이다. 그다음에 "자신의 호오를 함부로 덧붙여"라고 했는데 호오라고 하는 게 무엇인가. 향혹망가향배或妄加向背, 향배는 향하는 바와 배경이니까 호오라고 번역을 한 것 같다. 이 구절의 핵심은 본의와 이설의 관계를 살펴보고 참작해라. 이것이 중요한 포인트라고 본다. 

"그런데 세속의 썩은 선비들이나 후대의 공부하지 않는 학자들이 극단적인 태도에 젖어 거듭 오류를 반복하면서도, 스스로는 앞사람들이 미처 보지도 듣지도 못한 것을 보고 들었다면서 입이 닳도록 떠들 때 이러한 차이를 구실로 삼는다. 그러나 오직 지혜로운 사람만이 미혹되지 않으리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세속의 썩은 선비들이나 후대의 공부하지 않는 학자들, 이유속부유而流俗腐儒 후래말학後來末學, 부유腐儒는 썩은 선비들, 말학末學은 공부하지 않는 학자이다. 스스로 경계를 삼을 때 쓸 만한 말이 아닌가 한다. 공부라는 건 자기가 자기를 다그쳐가면서 하는 게 공부이다. 습기광견習其狂狷, 광견狂狷은 미칠 광狂에 성급할 견狷, 미쳐서 성급한다. 광견狂狷이라는 단어는 공연히 이상만 높고 실행이 따르지 않으며 생각이 부족하여 고루하다 라는 뜻이다. 광견이라는 말은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해서 평가를 하고자 할 때 최악의 말을 쓰고 싶으면 광견이라는 말을 쓸 수 있겠다. 번역은 "극단적인 태도에 젖어"라고 했는데 굉장히 순화해서 번역을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광狂이 붙으면 어떤 특정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인데, 견광狷狂이라고 하면 과장이 심하거나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공연히 이상만 놓고 실행이 따르지 않으며 생각이 부족하여 고루하다 라고 할 때는 광견狂狷인데 광견狂狷하는 사람은 견광狷狂이겠다. 그다음에 성기괘오成其詿誤, 그 그릇 진 잘못을 이룬다는 말, 그러니까 거듭 오류를 반복한다는 말이 되겠다. 자위견소미견自謂見所未見 문소미문聞所未聞, 앞사람들이 미처 보지도 듣지도 못한 것을 보고 들었다고 하는 것, 명제설단銘諸舌端, 입이 닳도록 떠들 때, 이 모든 것을 혀 끝에 새긴다는 것이다. 이위구실以爲口實, 이러한 차이를 구실로 삼는다. 이런 것은 좋을 게 하나도 없는데 그렇기 때문에 경계하는 의미에서 기억을 해 둘 필요가 있다. 광견하는 사람은 견광이고, 그 사람들은 끊임없이 잘못을 되풀이하면서도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았다고 하고 듣지 못한 것을 들었다고 하면서 이 모든 것, 그러니까 자기가 말한 것, 봤다고 말하는 것, 들었다고 말하는 것, 이 모든 것을 혀 끝에다가 새겨가지고 입만 열면 나오는 것이다. 유지자불혹唯智者不惑, 오직 지혜로운 사람만이 미혹되지 않으리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여기서 너무 비약이 일어났다. 무소의언無所疑焉,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오늘 꼭 얘기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역사가의 이야기가 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의 본래 의도가 무엇인가를 알아보려면 다른 역사가가 뭐라고 얘기한 것들을 살펴봐야 한다. 그렇게 보면 유지기의 이 책은 다른 역사가는 뭐라고 얘기했고, 좌구명에 대해서는 누가 뭐라고 했는데, 사마천에 대해서는 뭐라고 얘기했는데, 또 다른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 간단히 말하면 크로스 체크가 필요하다. 크로스 체크야말로 모든 역사 공부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데, 크로스 체크를 하는 목적은 바로 본래 의도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떤 의도로부터 이설이 등장했는가를 알기 위해서이다. 오늘날에도 역사책 공부할 때는 마땅히 이런 크로스 체크가 이루어져야 하지 않겠나 싶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