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옥스퍼드 세계사 15-2 ─ 제4부 제8장. 경제적·생태적 조우(1)

 

2025.05.21 🎤 옥스퍼드 세계사 15-2

15강: 제4부 제8장. 경제적·생태적 조우(1)
일시: 2025. 5. 21. 오후 7시 30분 - 9시 30분
장소: 수원시평생학습관
강의 안내: https://learning.suwon.go.kr/lmth/01_lecture01_view.asp?idx=4158


357페이지를 보면 "1350년 이후 세계는 해상 교역로를 통해 집단 사이의 연계가 긴밀해지고 물동량이 늘어남에 따라 갈수록 작아졌다." 다음 페이지에 보면 "세계를 수렴시키는 힘들은 매우 억제되어 있다가 1350년 이후 흔해졌고, 1815년까지 좋든 나쁘든 멈출 수 없어 보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니까 1350년부터 1815년까지 세계를 수렴시키는 힘들이 멈출 수 없어 보이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 중요한 표현이다. 예측하지 못했던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다음에 제8장은 동양의 환경, 경제, 확장 얘기가 있고 그다음에 365페이지에 지역별 교역망이 있고, 그다음에 368페이지에 서양의 환경, 경제, 확장이 있다. 서양의 환경, 경제, 확장 부분은 전통적으로 대항해시대라고 불리던 것들이다. 그다음에 385페이지를 보면 대서양 세계의 인구와 식물, 플랜테이션이 있다. 그다음에 결론으로 가는데, 지금 얘기를 보면 동양의 환경, 경제, 확장과 지역별 교역망이 한 묶음이다. 지역별 교역망이라고 하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이다. 동양 사람들이 왜 서양으로까지 배를 타고 가지 않았는가. 배 타고 가서 할 게 없었다. 그것에 대해서 그동안 간과해왔던 것이다. 왜 동양 사람들은 항해를 안 했는가. 항해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 부분이 글로벌 히스토리라고 하는 역사 서술이 등장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바뀐 것 중에 하나이다. 지역별 교육망, 그러니까 동양은 동양끼리 그냥 하면 되지 굳이 서양으로 갈 필요도 없고 가봐야 가지고 올 것도 없었다라는 얘기이다. 374페이지를 보면 "전통적으로 역사가들은 아시아를 유럽과 아메리카 시장에 직접 연결하는 대양 횡단 교역을 개척한 유럽의 역할에 초점을 맞췄다." 유럽이 대항 횡단 교역을 개척했고, 그래서 거기다 대항해시대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교역의 양으로 보나 가치로 보나 아시아 내부의 거래가 대륙 간 거래를 크게 웃돌았다." 중요한 문장이다. 아시아 사람들이 왜 유럽과 아메리카 시장을 직접 연결하는 대양 횡단 교역 루트를 만들지 않았는가. 앞서 말한 것처럼 거기 가봐야 아무것도 가지고 올 게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시아 내부의 거래가 대륙 간 거래를 크게 웃돌았다는 것이 중요한 지점이다. 《옥스퍼드 세계사》를 읽으면서 우리가 전통적으로 역사가들에게 배웠던 것, 2000대 초반에만 해도 윌리엄 맥닐의 《세계의 역사》를 가지고 가르쳤는데 거기에도 이렇게 안 쓰여 있었다. 아쉬운 게 없으니까 아시아 내부에서만 거래해도, 그게 바로 지역별 교역망이다.  

이 시대에 크게 보면 아시아 내부 거래, 그리고 이때 세계 무역 거래의 기축 통화는 은이다. 서양에서 중국에 와가지고 차도 사고 도자기도 사가지고 가면서 은으로 돈을 낸다. 아메리카에서 은 광산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은을 제일 많이 생산하는 곳이 일본과 중국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아시아에 물건도 있고 돈도 있다. 이제 아프리카를 보면 아프리카에서는 뭔가 물건이 나오지는 않고 노예가 나온다. 그다음에 아메리카는 북아메리카에 있고 남아메리카가 있는데 남아메리카에서 은이 나온다. 그래서 유럽과 아메리카, 아프리카를 대서양 삼각무역이라고 한다. 유럽에서 아프리카를 가서 노예를 끌어다가 아메리카로 보내서 여기서 뭔가를 만들어서 유럽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사실 자본주의의 원초적 축적, 본원적 축적은 여기서 시작이 된다. 근대 자본주의의 본원적 축적은 여기서 시작되었고 그것의 출발점은 노예이다. 그러니까 여기 보면 서양의 환경, 경제, 확장이 368페이지에 있는데, 제8장부터가 이른바 초기 근대에 해당하는 것이니까, 이제 고대 세계가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어떻게든 맞닿아 있는 영역들이 있는데,385페이지를 보면 대서양 세계의 인구와 식물, 플랜테이션이 있다. 오늘날 우리가 세계를 이해할 때 유럽과 아메리카, 아프리카 부분인 대서양 세계 한 덩어리가 있고 아시아 세계가 하나 있고, 그다음에 유럽하고 아시아의 관계가 있다. 이 세 가지 영역으로 얘기하는 것이다. 지금 현재 21세기는 아시아 내부 거래가 있고 대서양 삼각 무역이 있고 하는게 아니라 그냥 전 지구적으로 달러를 중심으로 해서 돌아간다. 아시아 내부 거래가 1번, 그다음에 대서양 삼각무역이 2번, 그다음에 3번이 아시아와 유럽간의 무역, 이것이 말하자면 무역뿐만 아니라 전 지구적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나는 시기이다. 여기서 전쟁도 벌이고 대서양 삼각무역을 가지고 노예 무역도 하다가 1차 대전이 일어나고 2차 대전이 일어난 다음에 미국 중심의 일극 체제로 넘어온 것이다. 그래서 요즘에는 대서양 삼각무역 지역을 다루는 별도의 영역인 Atlantic History가 있다. 옛날에는 미국사, 유럽사, 아프리카사 이렇게 따로 다루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지역사 단위로 할 때의 중요한 원천들 중에 하나가 대서양의 역사Atlantic History라는 게 있다. Atlantic History의 출발점이 바로 1350년부터이다. 대서양 역사라고 하는 학문 영역이 있고, 버나드 베일린의 《대서양의 역사》도 있다.  

그러니까 지금 단계에서는 아시아 내부 거래가 가장 중요했다. 그리고 대서양 역사라고 불리는 이 영역이 아주 두드러지게 생겼다. 그다음에 대륙 간 교역은 가장 부차적인 것이다. 그래서 서양의 환경, 경제, 확장도 있지만 대서양 세계의 인구와 식물, 플래테이션도 있다는 것, 그러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Atlantic History의 영역 안에 들어가겠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얘기 나오면 그것은 Atlantic History에 들어가는 곳이고 그다음에 바스쿠 다 가마 애기가 나오면 대항의 시대라고 말하면 안 되고, 아시아 내부 거래 속으로 들어온 대륙 간 거래라고 얘기를 하면 되겠다. 용어를 바꾸면 사태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그러니까 사실 아시아 사람들에게 바스쿠 다 가마가 왔을 때 열광하지 않은 이유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손님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359페이지의 동양의 환경, 경제, 확장을 보면 "중국은 14세기 중엽 이후 서쪽으로 향한 두 차례의 대규모 이동의 근원지였다. 첫 번째 이동은 우연이었고 두번째 이동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첫 번째로 이동한 것은 서양에서 흑사병으로 알려진 가래톳 페스트였다." "1349년 흑사병은 유럽 도처에서 전례 없는 사망을 초래하고 있었다." 유럽사 책에서 굉장히 중요한 사건으로 나온다. "일부 장소는 피해를 면했지만 다른 장소들은 인구의 3분의 2까지 잃은 것으로 보인다." 서양 근대 자본주의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라고 설명하는 책들도 좀 있었다. 사람이 많이 죽어서 사람 값이 비싸지고 그러다 보니까 생산성이 향상되고 하는 얘기를 했는데 굉장히 단선적이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역사에 대해서도 업데이트해야 될 게 굉장히 많다. 1349년 흑사병이라고 하는 거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긴 하다. 

360페이지를 보면 "투르네에서 흑사병 희생자들을 매장하는 모습"의 그림이 있다. "성 마르티누스 수도원 원장의 연대기인 질 리 뭐지의 연대기에 실린 세밀화"이다.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었던 것은 틀림없다. 361페이지를 보면 "보수적인 추정에 의하면 유럽 인구는 흑사병이 닥치기 전인 약 8000만 명에서 1400년 대략 6000만 명으로 줄었다." "북아프리카에서도 4분의 1이 감소했다." 2000만 명이 줄었다. 그런데 유럽 인구는 "1500년까지 종전 수준을 회복했고", 그러니까 100년 정도 지나서 6000만 명 정도로 다시 갔는데, "중국 인구는 1400년에 약 7500만에서 1500년에 1억 명으로 되레 증가했다." 이때만 해도 속된 말로 인구가 깡패이던 때이니까 유럽 전체가 덤벼도 중국 하나를 이길 수 없는, 그리고 중국은 물산이 풍부하고 유럽은 흑사병밖에 없고, 그다음에 유럽은 가톨릭 교회의 지배 아래 있어서 이자를 주고 받을 수 없어서 경제적으로 굉장히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그러니까 유럽과 중국의 인구 차이만 봐도 중국에서 뭐가 아쉽다고 유럽에 물건 사러 가겠는가. "유럽에서 흑사병으로 인한 인구 감소는 노동력 부족을 초래해 일부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일부라는 말이 중요하다. "농노제는 거의 사라졌는데, 시골에서 농노제에 매여 살던 노동자들이 쉽게 달아났기 때문이다. 시골의 숙련 노동자들은 임금을 올려달라고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14세기 말부터 농민 전쟁이 일어나게 되고, 그렇다고 해도 아주 전면적으로 사람 값이 비싸진 건 아니다. "흑사병의 영향이 덜 극심했던 동유럽 일부의 지주들은 전염병 위기를 자유 농민을 노예로 전락시킬 기회로 활용했다." 이게 바로 동유럽이 아주 오랫동안 봉건적인 흔적들을 유지하게 된 원인이다. 유럽은 유럽 전체로 보면 그렇게 넓지 않은데 각 지역마다 아주 관행이 다르다. 유럽을 뭉뚱그려서 하나의 어떤 진보적인 선진적인 지역으로 생각하는 것은 굉장히 큰 착각이다.

그다음에 362페이지를 보면 "중국에서 서쪽으로 두 번째로 이동한" "명나라 영락제가 남아시아와 인도, 동아프리카지까지 가는 일곱 차례 원정을 의뢰한 동기는 발견이 아니었"다. "원정의 주 목적은 중국의 부와 권세를 외부 세계에 각인시키는 것이었던 듯하다." "대선단을 지휘한 제독 정화", 이것이 정화의 남해 대원정이라고 알려진 것이다. 2만 7천 명 정도를 배에다 태워서 갔다. 청나라 때까지도 중국은 외부 세계와 교역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까 사실은 중국이 나중에 후회하게 되는 이유였겠다. 중국은 아쉬울 게 없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363페이지를 보면 "상업적 교환을 늘리는 것이 원정의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에, 조정 관료들은 중국에서 열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과의 교류가 늘어난 것으로 과연 선단에 들인 막대한 비용을 정당화할 수 있느냐는 의문을 제기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상징이 그려진 일본산 수출 도기" 그림이 위에 있다. 일본에서도 이 수준을 만들었는데 중국에서 어떠했겠는가. 그러니까 정화의 남해 대원정은 "1432~1433년 제7차 원정을 끝으로 중단되었다." "선단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지 않도록 막기 위함이었는지 원정 기록은 대부분 폐기되었다." 중요한 부분이다. 그다음에 "정화의 항해는 인도양의 전형적인 항해와 사뭇 달랐다." 인도양의 전형적인 항해는 굉장히 중요하다. 바스쿠 다 가마가 인도를 온 이유는 인도양의 전형적인 항해에 곁다리로 끼어 들어온 것이다. 인도양의 전형적인 항해가 메인이고 유럽에서 온 사람들은 들한 다리 걸치러 들어온 것이다. 그러니까 대항의 시대라고 하는 말을 쓰면 안 된다. 이 말은 일본에서 만들어진 말인데, 일본은 아시아 내부 거래에서 주도권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일본은 항상 깍두기였는데, 페리 제독이 일본에 와서 개항을 시키고 그다음부터 근대화가 되어서 아시아의 선두가 되었다. 그러니까 일본은 어쨌든 서양과 자기네가 연결된 것이 최초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까 어떻게든지 약간 부풀리는 경향이 다는 것을 생각해야 된다. 

"상인들이 상업적 목적을 위해 독립적인 항구 도시들 사이의 항해를 후원하였다." 즉 상인들이 주체가 되었다하는 것이 1번이다. 그다음에 자체 "상인 연맹"이 있었다. 그다음에 "부유한 항구들은 지역 간 경계에 자리하고 있었다." "중국산 자기가 동아프리카로 대량 유입되었다." 동아프리카라고 하는 것은 아프리카 무역으로 넣으면 안 되고 인도양 무역이다. 그다음에 364페이지를 보면 "17세기 경 영국에 전해진 고급 자기 그릇은 그 이전에 페르시아와 인도에서 썼던 용어들을 그저 '차이나'라고 불렸다. 이런 유형의 사치품이 인도양 교역망의 대들보였지만, 1350년에서 1500년 사이에 (곡물 같은) 대량 상품의 수송도 중요해졌다." 일단 기본적으로는 고급 상품 그다음에 곡물 그다음에 향신료, 그러니까 인도양 무역의 짜투리들이 유럽으로 넘어갔던 것이다. 유럽에서 이제 맛을 보고 우리가 배를 만들어서 와보자 하고 시작된 것이 대항해시대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이전 것의 역사를 절대로 놓치면 안 된다. "인도양 교역은 아랍어로 계절을 뜻하는 예측 가능한 풍계인 계절풍monsoon의 덕을 보았다. 12월부터 3월까지 바람은 교역선이 인도에서 아라비아와 동아프리카를 향해 서쪽과 남쪽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뒤에서 밀어주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상인들은 4월부터 8월까지 북동쪽으로 보는 습한 계절풍을 타고 귀환할 수 있다." 그래서 아라비아의 전통적인 선박은 다우선이었고, 인도 동쪽에서 가장 흔한 배는 중국에서 만든 정크선이었다. 다우선과 정크선이라고 하는 것이 중요한 지점이다. 유럽에서 만들어서 타고 온 배만 얘기하는데, 사실 인도양에서는 몬순 무역이라고 하는 것이고, 그다음에 다우선과 정크선이 있다. 원래 이 지역에서 많이 하던 게 있는데 지역별 교역망이 몇 개 있다. 첫째 중동을 중심으로 돌아간 교역망이다. 아랍인과 페르시아 상인들, "페르시아 만 입구에 위치한 호르무즈를 비롯한 항구", 첫째 교역망에서 가장 중요한 요충지는 호르무즈이다. 그다음에 보면 "스와힐리 해안을 따라 늘어선 소도시들은 아프리카 요소, 아랍 요소, 페르시아 요소를 뒤엎었다." "교역망의 중심지는 남쪽의 섬에 정교하게 건설한 소도시 킬와였다." 킬와 유적지에서 발견된 발견된 것들을 보면 온갖 물건들이 다 있다. 그다음에 "중동에 서쪽 가장자리 카이로와 베이루트의 상인들은 기독교 상인들과의 연계를 유지했다." 그 연계를 기본적으로 유지한 나라가 베네치아, 리알토 시장이다. 그다음에 366페이지를 보면 "인도양 중부에서는 인도 아대륙의 상인 공동체들이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로 향하는 교역뿐 아니라 서쪽의 중동으로 향하는 교역까지 처리했다." "인도 중서부 구자라트"를 기억해 두어야 한다. 그러니까 아랍 지역에서 있는 사람들과 인도에는 구자라트, "중동과의 교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중동에서는 구자라트의 고급 가죽 제품, 면과 비단으로 만드는 아름다운 카펫을 귀하게 여겼다." 

그다음에 367페이지를 보면 "인도 남부는 동쪽과 서쪽의 장소들 사이에서 구자라트와 비슷한 역할을 수행한, 상업 활동의 두 번째 중심지였다." "남서부 말라바르 해안에 위치한 코친과 캘리컷", "느슨한 내륙 공급망과 다양한 상인 공동체들을 통제했다." 그다음에 "동인도양에서 남중국해로 가는 자연적 항로는 말레이 반도와 수마트라 섬 사이 말라카 해협", 말라카 해협은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말라카 해협에서 말레이반도에 위치한 새로운 항구가 두각을 나타냈다." 그래서 "안전과 낮은 세율을 제공한 그 항구는 곧 동남아시아와 중국, 인도의 상인들을 끌어들였으며, 그들의 존재 덕에 말라카 해협은 중국과 인도의 각종 상품뿐 아니라 말루쿠 제도의 향신료, 버마의 루비와 사향과 주석, 수마트라의 황금까지 교역하기 좋은 장소가 되었다. 1500년 직후에 방문한 사람에 따르면 말라카의 상인 공동체들은 84개의 언어를 구사했다고 한다. 왁자지껄한 언어의 소란 속에서 말라카 관리 네 명이 질서를 유지했다. 한 명은 수많은 구라자트 상인을 담당했고, 한 명은 나머지 인도와 버마 상인들을, 한 명은 동남 아시아 상인들을, 나머지 한 명은 중국과 일본 상인들을 담당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동양이라고 하는 지역에서 지역별 교역망이 엄청나게 컸는데, 그 지역으로 유럽이나 이런 데서 들어왔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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