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사통史通(28) ─ 史通, 內篇 - 探賾

 

2025.05.24 δ. 사통史通(28) ─ 史通, 內篇 - 探賾

유지기, ⟪사통⟫(劉知幾, 史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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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색探賾
• "이런 이유로 『서경』에서 전典과 고誥를 편성할 때는 공자가 그 각 편의 시대와 특성을 판단했고, 『시경』에서 풍風과 아雅를 열거할 때는 자하子夏가 서문을 써서 그 의미를 이해하도록 했다. 이전의 성인이 지은 것을 후세 사람들이 볼 때 그 취지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전수받았다고 하기 어렵다. 혹시 함부로 천착하여 본원을 가볍게 파고들면, 이는 지은이의 깊은 뜻에 어긋나고 사람들의 이목을 잘못 이끌 것이니, 그 오류가 심하지 않겠는가." (변기류辨其流 통기의通其義 구실기지귀苟失其指歸 즉난이전수則難以傳授 이혹유망생천착而或有妄生穿鑿 경구본원輕究本源 시괴작자지심지是乖作者之深旨 오생인지이목誤生人之耳目 그위무야其爲繆也 북역심호不亦甚乎)

• "옛날에 공자가 노나라의 역사인 『춘추』를 정리한 것을 두고 학자들은 공자가 기린에 감격하여 편찬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는 "우리 할아버지가 진陳나라와 채蔡나라에서 곤란을 당한 뒤에 비로소 『춘추』를 편찬했다."라고 했다. 공자가 편찬하여 후손에게 전하려고 했으니, 사실 기록을 추구했을 것이고 오류가 있기는 어려울 것이다. 춘추는 은미하고 아름다운 대의를 포함하고 있는데, 무척 어려운 환경에서 시작된 저작이다. 공자는 애공이 서쪽으로 사냥을 갔을 무렵에 기린이 잡힌 것을 슬퍼하며 붓을 놓았다." (석부자지천로사昔夫子之刋魯史 학자이위감린이작學者以爲感麟而作 안자사유언案子思有言 오조액어진채吾祖厄於陳蔡 시작춘추始作春秋 ··· 인확매이창사因攫莓而剏詞 시봉서수時逢西狩 내읍린이절필乃泣麟而絕筆)
진채지액陳蔡之厄
진채지간陳蔡之間

• 안회습진顔回拾塵
여씨춘추呂氏春秋, 심분람審分覽, 임수任數
공자탄왈孔子歎曰 소신자목야所信者目也 이목유불가언而目猶不可信 소시자심야所恃者心也 이심유불족시而心猶不足恃
제자기지弟子記之 지인고불역의知人固不易矣 고지비난야故知非難也 공자지소이지인난야孔子之所以知人難也

믿어야 하는 것은 눈이지만 눈을 오히려 밎지 못하고 의지해야 하는 것은 마음이지만 마음을 오히려 의미하지 못한다.
제자들은 이를 기억해두어라. 사람을 아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다. 뭔가를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오늘은 사통史通의 탐색探賾을 읽어보겠다. 탐색探賾편은 "역사서의 배경 억측", 역사서의 배경을 잘못 추측한다는 말이겠다. 오항녕 교수가 해제를 써놓기를 "역사서의 편찬 의도와 배경에 대한 오해를 경계한 논의"이다. 역사서를 편찬할 때 그 편찬자들은 그것을 편찬하는 시기의 어떤 배경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시대하고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았던 사람들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세계를 반영한, 그런데 세계를 또 반영한다고 하는 것이 있는 그대로를 반영한, 과거의 역사서들이 있는 그대로 그걸 반영했는가 라고 말한다면 그것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과거의 어떤 서사들이 어떻게 보면 날조라고 말하면 좀 심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아니라 자기의 희망사항이 반영된 그런 것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니까 역사서를 읽을 때는 그런 저런 증거들을 굉장히 하염없이 찾아가면서 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간단히 말하면 그렇게 생각을 해야 되는 것이다. 첫째 역사서가 내 눈앞에 놓여 있다고 하면 과거 역사가가 뭔가를 썼을 때 이게 정말 틀림없는 것이라고 썼는가이다. 역사에 나와 있다고 해서 틀림없는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도대체 그 배경에 대해, 좋게 말하면 억측을 해야 한다. 배경을 잘못 이해하고 썼을 수도 있고 그다음에 역사서 저자에 뭔가 의도가 개입되어 있을 수도 있고 그런 것을 좀 이것저것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공자가 『서경』에서 전典과 고誥를 편성할 때는 공자가 그 각 편의 시대와 특성을 판단했고", 그러니까 공자는 그것을 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서경이 그냥 밋밋하게 전典과 고誥가 편성되어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무 생각 없이 저술한 게 아니다. 그러니까 변기류辨其流, 시대와 특성이라는 말을 류流라고 봤고, 변辨은 판단했고 분별해서 내놓았고, 그다음에 "『시경』에서 풍風과 아雅를 열거할 때는 자하子夏가 서문을 써서 그 의미를 이해하도록 했다." 그러면 공자나 자하나 이 사람들이 써놓은 것을 우리가 잘 읽어야 된다는 말이겠다. 그런데 앞서 말한 것처럼 다시 생각을 해보면 공자나 자하가 쓴 것은 그들이 어떤 의도로 서사를 구성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을 또 다시 한 번 봐야 된다는 것이다. 어쨌든 유지기는 "이전의 성인이 지은 것을 후세 사람들이 볼 때 그 취지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전수받았다고 하기 어렵다"라고 했다. 구실기지귀苟失其指歸, 그 취지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즉난이전수則難以傳授, 즉 전수받았다고 하기 어렵다. 어떤 역사적 역사 텍스트를 읽을 때는 그 텍스트의 취지와 그 텍스트가 시대와 특성을 어떻게 판단했는가를 읽을 때 생각해 봐야 되겠다. 그다음에 어떤 의미를 전달하려고 했는가, 그렇게 일단은 텍스트 안에서 그것을 꼼꼼하게 읽고 그다음에 그 텍스트 바깥으로 나와서 그 역사가가 그 텍스트를 어떤 식으로 구성했는가, 그 역사가가 텍스트의 서사를 어떻게 구성했는가를 또 봐야겠다. 그러면 역사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했는지가 드러나 보일 것이다. 그런데 "함부로 천착하여 본원을 가볍게 파고들면, 이는 지은이의 깊은 뜻에 어긋나고 사람들의 이목을 잘못 이끌 것이니, 그 오류가 심하지 않겠는가." 이혹유망생천착而或有妄生穿鑿 경구본원輕究本源, 함부로 천착하여 본원을 가볍게 파고들면, 뚫을 천穿과 뚫을 착鑿, 천착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도 많이 쓰는 말이다. 착鑿은 뚫을 착자도 있지만 멋대로 추측하다라는 뜻도 있다. 

여기서 본원本源이라는 말을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본원이라고 하는 게 본래의 원리, 본래의 원리를 가볍게 파고들어야 되는데, 그러니까 역사가의 텍스트를 읽을 때 역사가의 취지를 이해해야 된다 라고 유지기가 말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 취지를 일단 이해하고 그 취지가 제대로 된 것인가를 또 한번 생각해 봐야 된다고 말했다. 그러려면 뭘 파고들어야 되는가, 바로 본원을 파고들어야 한다. 본래의 원천을 파고들어야 한다. 그러니까 이 역사 텍스트가 등장하기 전에 어떤 컨텍스트에서 이게 등장했는가를 한번 다시 생각을 해봐야 된다는 얘기이다.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 역사 텍스트를 읽으면 결국 역사 텍스트한테 속게 되는 수가 생긴다. 아주 많은 경우에 그런 것들이 그렇다. 그렇게 되면 결국 엉망으로 읽게 되는 것이겠다. 우리하고는 아주 다른 시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과연 어떻게 살았는가를 우리가 잘 모르기 때문에 그 시대의 사람이 써놓은 역사책을 신뢰하기가 쉽다. 그런데 사실은 그 사람도 뭔가 강한 의도를 가지고 눈앞에 펼쳐진 현상들을 약간은 왜곡해서라도 뭔가를 써냈을 수가 있고, 그러니 우리는 본래 어떤 맥락에서 이게 쓰여졌는가를 알아내기 위해서 이 본원에 대한 탐색을 굉장히 심각하게, 그리고 제가 요즘에 그런 것들을 많이 생각하는데, 후대의 역사가들이 한 번 붙여놓은 용어를 사람들은 그냥 무심코 쓴다. 예를 들어서 로마 제국, 로마 공화정 이런 말을 쓰는데, 공화정 시기에서 2차 포에니 전쟁을 거치면서 군벌들의 시대를 거치고 그다음에 아우구스투스, 아우구스투스가 이제 최후의 군벌이니까, 아우구스투스 시대로 진행하는 그런 과정들을 얘기할 때 대게 공화정에서 제국으로 라고 얘기를 한다. 그런데 로마 사람들은 우리가 오늘날 공화정이라는 말을 이해하고 또 제국이라는 말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사용하지 않았다. 사실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는 의미에서의 제국이라는 말은 안 썼다. imperium이라는 말은 최고 명령권이라는 뜻이고, res publica라는 말을 썼지만 공공의 일이라는 뜻이고, 그것을 우리는 공화정이라고 번역을 해서 쓰는데 우리의 머릿속에 공화정 하면 들어오는 선 이해가 있다. 그런 것들을 가지고 설명을 하는 것, 그러니까 용어 자체를 그렇게 쓰면 안 되겠다 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게 조심스럽다. 그래서 본원에 대한 탐색이라고 하는 것을 가볍게 파고들지 말라고 유지기는 이야기를 했는데, 저는 그게 아니라 오히려 서경과 시경의 본원이 무엇이었는지 그러니까 '중구본원重究本源'이라고 말을 하고 싶다. 아주 무겁게 여겨서 본원을 파고들어야 한다. 원래 서경의 시대하고 시경의 시대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이 원칙을 다른 시대의 역사에 대해서 탐구할 때는 적용해야 한다고 본다.  

그다음에 보면 "옛날에 공자가 노나라의 역사인 『춘추』를 정리한 것을 두고 학자들은 공자가 기린에 감격하여 편찬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는 "우리 할아버지가 진陳나라와 채蔡나라에서 곤란을 당한 뒤에 비로소 『춘추』를 편찬했다."라고 했다." 이게 일단 한 부분이 있다. 여기서 학자들은 공자가 기린에 감격하여 편찬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 얘기는 각주를 보면 『사기』 「공자세가」에 나와 있다고 한다. 애공 14년 봄에 애공이 서쪽에서 사냥을 하다가 기린을 잡았다는 얘기가 있다. 좌구명의 좌씨전左氏傳에도 나와있다. 공자가 그것이 세상이 바뀔 조짐이라고 감격하여 춘추를 편찬했다고 학자들이 생각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자사子思는 그게 아니라고 얘기를 한 것이다. 그러니까 후대의 학자들은 기린은 상서로운 짐승이라고 여겨지니까, 그래서 사람 이름에도 기린 린麟을 쓰기도 하는데, 저는 짐승을 지칭하는 단어를 쓰는 것은 작명의 원칙에서 배제하고 있고, 가급적이면 안 써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후대의 역사가들은 가볍게 본원을 탐구한 것이다. 자기네들이 생각하기에 상서로운 것이니 공자의 춘추 편찬 동기에 대해서 말하자면 오판을 한 셈이다. 자기네들한테 통용되는 기린의 상징성을 가지고 과거에 공자가 춘추를 작성하기 시작한 것에다가 투사를 한 것인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라는 얘기가 되겠다. 그런데 자사子思가 아니라고 얘기했다는 것이다. 자사는 "우리 할아버지가 진陳나라와 채蔡나라에서 곤란을 당한 뒤에 비로소 『춘추』를 편찬했다." 여기서 곤란을 당했다 라고 한 것이 유명한 얘기로, 액어진채厄於陳蔡, 진나라와 친나라에서 액厄을 당했다는 것이다. 반야심경에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照⾒五蘊皆空 度⼀切苦厄, 고苦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액厄은 바깥에서 오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속의 괴로움과 바깥에서 느닷없이 닥치는 액厄이다. 그래서 진채지액陳蔡之厄이라고 그러기도 하고 진채지간陳蔡之間이라고 하는 말을 쓰기도 한다.  

그러니까 감린이작感麟而作이라고 했는데 그게 아니라, 자사가 말을 하기를 오조액어진채吾祖厄於陳蔡, 나의 할아버지가 진나라와 제나라에서 곤란을 당한 뒤에, 시작춘추始作春秋, 춘추를 짓기 시작했다. 그러면 춘추는 무척 어려운 환경에서 시작된 저작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진나라와 채나라에서 있을 때, 인확매이창사因攫莓而剏詞, 춘추는 어려운 환경에서 시작되었다. 어려운 환경이 확매剏莓이다. 붙잡을 확剏자와 그을음 매莓, 그을음을 붙잡고 나서 시작되었다. 그다음에 시봉서수時逢西狩, 애공이 서쪽으로 사냥을 나갔을 무렵에, 내읍린이절필乃泣麟而絕筆, 기린을 잡힌 것을 슬퍼하며 붓을 놓았다. 그러니까 후대의 학자들은 기린이 잡힌 것을 감격해서 편찬했다고 했는데, 지금은 기린이 잡힌 것을 슬퍼하며 그만 썼다는 말이다. 공자가 애공이 서쪽에 사냥을 갔는데 기린을 잡았다는 소식을 듣고 기린은 원래 상서로운 짐승인데 상서로운 짐승이 있으려면 지금 우리 시대가 굉장히 태평성대여야 되는데, 태평성대도 아닌데 기린이 잡혀서 죽었다고 하면 굉장히 슬픈 일이니 감격해서가 아니라 슬퍼하며 붓을 놓은 것이다. 그러니까 기린이 잡혔다는 사건 하나를 놓고 후대의 학자들은 감격이라고 해석을 하는 것이고 지금 유지기가 보기에는 그것이 아니다, 감격이 아니라 슬퍼한 것이다 라고 얘기를 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다음에 확매창사攫莓剏詞, 그을음을 움켜쥐었을 때, 움켜진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상황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공자와 안회 사이에 전해지는 얘기가 있다. 여기 각주를 보면 "진나라와 채나라에서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궁핍하게 살 때, 제자 안회가 밥을 짓다가 배가 고파 미리 먹어놓고는 밥에 그을음이 들어가 먹었다고 변명한 데서 나온 고사이다. 『여씨춘추』 「심분람 임수」에 나온다." 이 얘기를 자세하게 얘기해보자면 안회습진顔回拾塵, 안회가 먼지를 움켜 쥐었다는 것으로 널리 알려진 이 고사이다. 노신[루쉰]의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 조화석습朝花夕拾이라고 할 때의 습拾자이다. 여씨춘추呂氏春秋 심분람審分覽의 임수任數편을 보면 공자가 궁핍하고 지내고 있을 때 7일 동안 쌀 한 톨도 먹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기운이 없어서 낮잠을 자는데, 안회가 쌀을 구해와서 밥을 지었는데 거의 다 될 무렵이었다. 공자가 이를 멀리서 보고 있었는데 안회가 솥에서 밥을 한 줌 떠서 먹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얼마 안 있어서 밥이 다 되어서 공자한테 밥을 올렸다. 공자가 못 본 척하고 말을 했는데, 방금 내가 낮잠을 자면서 꿈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뵈었으니 먼저 제사를 지내야겠다고 한 것이다. 그러니 안회가 자기가 이렇게 한 줌 퍼먹은 밥이니까 얼마나 놀랐겠는가. 그러니까 공자는 아이러니, 시치미 떼기를 한 것이다. 그런데 안회가 조금 전에 그을음이 솥에 들어가서 밥이 좋지 않게 되어 버렸기에 한 줌 걷어 먹었다고 말했다. 배가 고파서 몰래 먹은 게 아니라는 것이다. 공자는 그 말을 듣고 어떻했겠는가. 다른 버전을 보면 멀리서 본 게 공자가 아니라 자공이 보고 안회가 밥을 하면서 한 줌 몰래 먹었습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공자가 이런 괘씸한 놈 하고 얘기를 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래서 공자가 탄식해서 말을 하는 것이다. 공자가 공자 탄왈 소신자 눈야 믿을 것은 눈인데 믿을 것은 눈인데 눈으로 내가 본 것을 믿어야 되잖아요. 공자탄왈孔子歎曰 소신자목야所信者目也 이목유불가언而目猶不可信 소시자심야所恃者心也 이심유불족시而心猶不足恃, 믿어야 하는 것은 눈이지만 눈을 믿지 못하였고 믿어야 할 것은 마음인데 오히려 믿기에 부족하구나 라고 말을 한 것이다. 그런 다음에 제자기지弟子記之 지인고불역의知人固不易矣 고지비난야故知非難也 공자지소이지인난야孔子之所以知人難也, 너희들은 이것을 기억해 둬라, 사람을 아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다. 뭔가를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객관적인 대상으로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공자가 사람을 아는 것은 어렵다고 말한 까닭이겠다. 너희들은 이것을 기억해 두어라. 뭔가를 아는 것은 어렵지 않은데 사람을 아는 것은 어렵다고 한 까닭이다 라고 말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얘기를 쭉 하고 맨 마지막에 "친구도 없이 독학하다 보니 고루하고 과문해져서 생긴 결과"라고 말한다. 이것은 독학의 폐해를 얘기하는 것인데 약간 좀 뜬금없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든다.  

오늘 얘기는 두 가지, 역사책을 읽을 때는 어떤 맥락에서 그것이 쓰여졌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사실은 어떤 서사가 구성될 때는 그 서사 구성자의 의도가 지나치게 강하게 들어가서 본래의 원천이 훼손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유지기는 본래의 원천을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된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좀 엄격하게 판단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다음에 공자가 기린이 계기가 되어서 춘추를 썼다고 하는데 그 기린이 계기가 된 것이 감격이냐 아니면 슬퍼서냐 하는 것들은 원천을 따져 물어야 되겠다. 그리고 진나라와 채나라에 살 때 진채지액陳蔡之厄 또는 진채지간陳蔡之間, 이 세 가지 정도를 오늘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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