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옥스퍼드 세계사 19-2 ─ 제4부 제10장. 근대 초 세계의 군주, 상인, 용병, 이주민(1)

 

2025.06.18 🎤 옥스퍼드 세계사 19-2

19강: 제4부 제10장. 근대 초 세계의 군주, 상인, 용병, 이주민(1)
일시: 2025. 6. 18. 오후 7시 30분 - 9시 30분
장소: 수원시평생학습관
강의 안내: https://learning.suwon.go.kr/lmth/01_lecture01_view.asp?idx=4158


야콥 부르크하르트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는 제1부가 인공물로서의 국가이고, 제2부가 개인의 발전, 제3부가 고대의 부활이다. 그러니까 인문주의, 재생이라고 하는 것은 3부에 가서야 나온다. 이 책의 핵심은 제1부 인공물로서의 국가에 있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 이탈리아가 얼마나 잘게 쪼개진 군주국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나오는 그런 군주, 군주국들이 끊임없이 싸움을 했는가, 14세기, 15세기 이탈리아의 군주국에서 끊임없이 싸움을 했다. 이탈리아만 그런 게 아니라 유럽 전체가 그랬다. 사실 16세기말, 17세기쯤 되면 전 세계에서 가장 싸움을 많이 해보고 잘하는 놈들이 유럽에 드글드글했던 것이다. 우리는 1392년에 조선이 건국되었고, 1592년이 될 때까지 여진족과 싸운 거 말고는 싸움을 하지 않았다. 동아시아 세계에는 전쟁이 없다. 그 당시에 동아시아 세계에서 싸움질만 하던 놈들이 일본이다. 유럽과 가장 비슷한 사회 구성체를 갖고 있던 나라가 일본이다. 과장된 서사일 수도 있는데, 그래서 일본이 가장 아시아에서 서구화를 먼저 했다. 찰스 틸리의 《유럽 국민국가의 계보》라는 책이 있는데, 이 분야에서는 아주 고전적인 텍스트이다. 990-1992년까지를 다루는데, 이 책을 보면 유럽이 근대 국가가 될 수 있었던,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런 것이 될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전쟁을 많이 했기 때문이라고 얘기한다. 원제가 Coercion, Capital and European States, 그러니까 강제와 자본, 그러니까 아까 말한 것처럼 외부에서 돈을 들여서 자본주의를 발전시켜서 근대 국민국가가 되었는가 아니면 전쟁을 많이 해서 근대 국민과가 되었는가, 이 두 개가 결합되어서 되었다는 얘기이다. 이 책을 보면 1496년에서 1514년 사이에 유럽인들이 얼마나 전쟁을 많이 했는가가 나온다. 유럽은 이 시기 동안 계속 전쟁만 했고 전쟁을 하는 데 도가 텄다. 이 능력을 가지고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했다. 아메리카 대륙에 가서 자원을 챙기고 아시아에서 약탈을 하고 그렇게 해서 당연히 과학기술이 발전했다.  

453페이지를 보면 "1325년, 이븐바투타는 고향 탕헤르를 떠나 메카로 향하는 순례 길에 올랐다." 그 유명한 《이븐바투타 여행기》이다. 이 사람이 거쳐간 길들을 보면, "오늘날의 이라크와 이란을 거쳐 남쪽으로 동아프리카 스와힐리 해안의 킬와까지 내려갔다가", 366페이지를 보면 "킬와"에 네모를 쳐놓았을 것이다. 닐 맥그리거의 《100대 유물로 보는 세계사》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 보면 킬와에서 발굴된 도자기가 나온다. 다시 453페이지를 보면 "킬와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아라비아로 북상한 다음 육로로 인도까지 들어갔기 때문이다." 454페이지를 보면 "몰디브와 스리랑카에 도착했다. 그리고 뱅골만과 남중국해를 지나 북경에 이르렀다. 20년 하고도 1년 후, 그는 모로코로 귀항하는 여정을 시작했다. 급할 것은 없었다. 도중에 인도 남부, 페르시아만, 시리아, 이집트를 들렀다. 1349년, 마침내 고국의 도시 페스에 도착했다." 《이븐 바투타 여행기》의 원래 제목은 "여러 지방의 기사와 여러 여로의 이적을 목격한 자의 보록"이다. "근대 초에 아프리카-유라시아 세계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실례다." 아라비아 지역은 중간 지대로, 사실 오스만 제국이 멸망한 이후로, 오스만 제국은 느슨한 제국이었고 거기에는 다양한 종교가 가능했다. 오스만 제국이 멸망한 이후로 그 지역에 유럽이 난입해 들어오고 분할하고 하면서부터 그 지역은 우리가 갈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이븐바투타의 여행기에는 육지로 연결된 세 대륙을 사람과 상품이 가로지른 세계가 그려진다." 이븐바투타 여행기에는 지금 보면 진짜 가슴 아픈 기록인 것이다. 이분바투타 여행기가 그려놓은 세계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어야 된다. 그다음 문장에 "사람들은 여정을 이어가기 위해 배를 탔다." 배가 중요하다. 아라비아에서 배를 타면 아프리카 동해안도 가고 인도 서해안도 가고, 그다음에 "인도 동해안은 벵골만을 건너는 항해를 통해 버마 및 말레이반도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게 바로 앞 시간에 얘기했던 인도양의 열려 있는 오픈 마켓이다. "중국 동쪽과 남쪽 바다까지 가기도 했다." 동중국해의 가장 오른쪽 끄트머리가 제주도 앞바다이고, 남중국해의 끄트머리가 말라카 해협이다. "지중해 유럽, 아라비아, 아프리카 동해안, 인도 서해안과 동해안, 동남아시아, 중국의 항구 도시들", 이것들이 다 하나의 연결고리 안으로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거대한, 말하자면 유라시아 해안 오픈 마켓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앞으로 근대 초기를 생각한다고 하면 이것을 꼭 생각을 해야 한다. 인도양을 가운데다 놓고 동중국해 끄트머리까지, 그리고 우리는 대륙 쪽으로 연결이 되어 있는데 상대적으로 일본은 해양 문화가 발전한 곳이니까 여기하고 연결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바다는 거의 언제나 사람들을 연결하는 매개였다." 

그다음 페이지를 보면 "15세기 이래 이븐바투타의 세계는 엄청나게 확대되어 거의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변형되었다. 새로운 항로를 따라 대양을 누빈 항해자들은 세계를 둘러싼 전례 없는 연계를 만들어냈다." 그다음에 보면 "황금에 이끌려 대서양 항해를 시작한 유럽인", 유럽인들은 황금에 이끌려서 대서양 항해를 시작했다. "서아프리카와 카나리아 제도에 도착하고 결국 아시아까지 가는 해로를 찾고자 대서양을 횡단"했다. 이게 중요한 표현이다. 그래서 콜롬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갔을 때 아시아를 간다고 해서 간 것이다. "질병과 기술은 문화 교류의 기존 역학을 바꿔 놓았다." 진짜 잔인한 표현이다. 유럽인이 갖고 있는 게 질병과 기술이다. "상업은 으례 폭력을 수반하게 되었고, 그 결과는 으례 파괴적이었다." 이 문장 하나하나가 다 깊은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이 앞에 나오는 인도양을 중심으로 한 곳의 상업은 폭력이 필요 없다. 여기서 난 것을 갖다가 저쪽에 가서 바꾸면 되니까 그렇다. 근데 유럽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갈 때는 뭘 갖고 갔는가, 아무것도 갖고 간 게 없다. 그러니까 결과가 파괴적이다. 무조건 빼앗아 와야 되니까 그렇다. "서아프리카 사람들이 노예가 되어 유럽으로 실려가는 동안", 이 대서양 삼각 무역의 한 축이다, "유럽 침략자들은 아프리카 북서부 앞바다에 있는 카나리아 제도에서 토착민들의 문화와 정체성을 짓뭉개버렸다. 유럽인이 신세계로 세력을 넓혀감에 따라 바다는 죽음과 파괴를 멀리까지 투사하는 매개체가 되었다." 대서양이라고 하는 것은 시작부터 죽음과 파괴를 투사하는 매개체였다는 것이다. 대서양 삼각 무역은 이렇게 시작이 되었다. 유럽인들이 가지고 갈 게 없었기 때문에 그렇다. "카리브해의 아라와크족과 타이노족은 거의 궤멸되었다." 거기까지가 대서양 얘기이고, 그다음에 "1498년, 바스쿠 다가마가 뱃길로 인도에 도착했다. 선박들이 함포를 탑재하고 있었으므로 다가마는 교역 협상이 타결되지 않았을 때 토착민 항구와 선박을 포격할 수 있었다. 무장한 채 육로로 침공하는 위세는 남아시아에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다음 "당연하다는 듯이 폭력을 동반하는 해상 교역은 처음 겪는 사태였다." 이게 중요한 표현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1498년 유럽은 수출품이 없던 지역이다. "제1차 항해에서 인도 항구 켈리컷에 도착하고 몇 년 후 제2차 항해에 코친을 방문한 바스쿠 다가마는 아시아의 바다에 분주한 교역망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그제서야 안 것이다. 여기에 교역망이 있으니 통제해야겠구나 하는 생각, 이를 톨게이트 사업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목화, 비단, 자기, 귀금속, 향신료, 설탕, 곡물, 조류, 짐승, 정향, 육두구, 소두구, 계피, 후추를 거래했다. 그다음에 "유럽에서 온 교양 없는 야심가들", 중요한 표현이다. "부러운 천혜의 자원을 가진 이 지역에서 초라하게 간청하는 존재였다." 과장이 아니다. 456페이지를 보면 "16세기 포르투갈의 일화에 따르면, 바스쿠 다가마가 바닷길로 인도에 도착하는데 성공한 뒤 포르투갈로 돌아왔을 때 비미오주 백자이 그에게 인도에서 어떤 상품 가져왔고 그 대가로 인도 사람들이 포르투갈의 어떤 상품을 원했느냐고 물었다. 다가마는 인도에서 후추, 계피, 생각, 호박, 사향을 가져왔고 인도인이 금, 은, 벨벳, 진홍색 천을 원한다고 답했다." "대부분에서 서양인은 적어도 18세기 후반 전까지는 정복자인 경우보다 의뢰인인 경우가 더 많았다. 신세계의 대부분에서 서양인은 토착민의 협력자였으며, 토창민은 심지어 식민 통치에 종속된 후에도 줄곧 자기네 역사의 주인이었다." 이것은 논의를 해봐야 되는 문제이긴 한데, 유럽 사람들이 여기 왔을 때 어떻게 했는가는 충분히 이해가 되었을 것이다. 

459페이지를 보자. 군주와 용병의 제국들, "근대 초 서반구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상인과 자본, 교역 허브가 지중해에서 서양으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대서양 삼각 무역, 대서양 역사에 대해서 지금 얘기를 하려고 하는 중이다.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이동했다. 지중해에서 아라비아 반도를 중계로 해서 이쪽으로 넘어오는 것은 해양 무역을 통해서 바로 갈 수 있었으니까 그렇다. 그래서 "유럽인 침입자들은 혀를 내두를 만큼 다양한 방식으로 아메리카의 자원을 전유했다. 토착민이 분열되어 있거나 수가 적거나 대비가 부족해서 저항하지 못한 일부 지역에서는 폭력─학살, 테러, 대규모 추방─만으로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었고", 그다음 페이지를 보면 "에스파냐가 장악한 지역들"이라는 말이 있다. 아까 존 엘리엇의 《대서양의 두 제국》이라는 책을 얘기했다. 에스파냐가 장악한 지역들과 영국이 장악한 지역들, 그러니까 대서양의 두 제국이라고 하는 것은 남쪽은 에스파냐, 북쪽은 영국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하는 것이다. 그다음 문단을 보면 "침입자들이 가장 주목한 보상은 금과 은이었다." 금과 은을 챙겼고 그다음에 "목재와 모피와 가죽, 새로운 약재의 광대한 저장고이자 식용 식물, 특히 옥수수와 감자", 원주민들을 처단하고 금과 은을 챙기고 이런 거 가져가기만 하면 되니까, 아시아에서는 이게 안 되었다. "유럽, 아프리카 서해안, 아메리카", 대서양 삼각 무역이다, 유럽에서 아메리카로는 무기와 직물, 포도주가 갔다.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는 노예가 갔다. 그리고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는 정화와 원료, 정화라는 게 금과 은이다. 그러면 그 돈을 가지고 동양에 가서 물건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귀찮으니까 이제 항구 도시를 거점 도시로 만든다. 그러니까 유럽 사람들이 아시아에 와서는 내륙 깊숙이 들어가서 정착을 안 했던 것이다. 지중해에 있는 거점들, 아프리카에 있는 거점들은 있는데 아시아는 아시아는 뚫고 들어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문화라고 하는 것은 물처럼 문화 수준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이 시기에는 아시아의 문화 수준을 자기네들이 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461페이지를 보면 "에스파냐 제국에서 다수의 토착민 군장과 공동체는 에스파냐인이 가져온 새로운 경제적 기회를 활용했다." 에스파냐 사람들이 가지고 온 그런 기회를 그 지역에, 그러니까 divide and rule을 실행한 것이다. 그 지역의 공동체에 있는 사람들의 반목을 활용해서 누구를 편들어주고 하는 것, 아프리카에서도 그러했다. 그다음에 462페이지를 보면 "이른바 발견의 시대, 19세기 식민제국들, 그리고 20세기 대부분의 역사를 기록한 민족주의적 서술 방식은 탈식민 시대에 들어 완전히 바뀌었다." 이것은 식민지 역사 서술 방식에 관한 얘기이니까 그냥 지나가도 괜찮다. 그다음에 463페이지를 보면 "영국 총독 리처드 웰즐리가 1795년에서 1805년까지 남아시아에 도입한 '종속적 동맹 원칙'이 있다. 이것은 기억을 해야 한다. 유럽에서 아시아 식민지를 통치한 방식이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여러 번왕국과 일련의 조약을 체결해 배후지의 영토를 대폭 넓힐 수 있었다. '동맹'의 조건에 따라 인도 통치자들이 군대를 유지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번왕국들은 '보호'의 대가로 동인도 회사 '종속 병력'의 유지비를 지불했다." 그다음에 465페이지를 보면 "이 시대의 특징인 해상 제국들은 느림보 거인이었다." 그 해상제국들은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를 말하는 것인데, 지금 이때부터는 유럽 안에서 세력 판도가 바뀜에 따라서 유럽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나라가 해외를 진출하는 과정이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비틀거리거나 무너졌다. 1763년 프랑스는 신규 정착민이 부족해 북아메리카에서 지상 제국을 만들려던 시도를 포기했다." 1763년이면 1789년 프랑스 혁명 이전이다. 그러니까 부르봉 왕조 때 벌써 이런 짓들을 다 했다. 그다음에 "1802년 아메리카에서는 프랑스의 주요 식민지였던 카리브해 아이티에서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켜 프랑스 정착민을 몰아냈다." 이게 바로 아이티 혁명이다. 그다음에 "프랑스와 에스파냐를 동시에 상대하는 전쟁을 지속할 수 없었던 영국은 북아메리카 식민지들 대부분을 상실했다." 이런 식으로 북아메리카 그다음에 에스파냐 제국에서 계속 대리 전쟁, 유럽 열강들끼리 그런 대리 전쟁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다음 페이지는 오스만 제국에 관한 얘기이다. 이 부분은 읽어보면 된다. 그다음에 467페이지를 보면 "오스만 술탄들은 수니파 무슬림이었던 반면, 오늘날 이란에서 등장한 사파비 왕조는 시아파였다." 그다음에 468페이지를 보면 "사파비 제국 동쪽 남인도의 무굴 제국", 무굴 제국에서 유명한 사람이 악바르가 있다. 그다음에 470페이지에 포르투갈의 인도 통치에 대해서 나온다. 그런 것이 있다는 정도만 이해해 두면 된다. 대서양 지역은 그냥 일방적으로 착취를 당한 것이고, 명나라, 청나라 이런 쪽은 아직은 유럽 세력에 의해서 크게 침탈을 당하거나 그런 상태는 아니었다.  

그다음에 474페이지를 보면 "유럽부터 명나라와 청나라까지, 하나의 공통된 가닥이 근대 초 제국들을 연결했다. 이 제국들은 모두 역사가들이 말하는 군사 혁명, 가볍고 다루기 쉬운 화기의 도입을 계기로 일어난 혁명을 겪었다. 이런 화기의 사용법을 남자들에게 훈련시켜야 했으므로 군대를 유지하는 제도가 발전했다. 이는 정복을 완료하고 나면 군대를 해산한 중세 튀르크 제국, 몽골 제국과의 주된 차이점이었다. 상비군은 군주들에게 더 많은 권력을 안겨주었다. 군대는 외부의 적을 격퇴하고 내부의 반란을 진압했다. 군대를 유지하려면 끊임없이 돈을 공급하고, 새로운 조직 체계를 마련하고, 행정 기구를 관료제화해야 했다. 문서 사용의 도움을 받아 팽창한 관료제 역시 근대 초 제국들의 공통점이었다." 지금 거론했던 여러 나라들이 어떤 사회 구성체 또는 정치 체제를 가졌는가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데, 이것은 다음 시간에 처음 시작할 때 자세하게 설명할 것이다. 이게 바로 근대 국가 체제의 바탕이 되고 있는 부분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직접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 중요한 부분으로 다음 주에 계속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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