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A. 매킨토시: 신앙의 논리
- 책 밑줄긋기/책 2023-25
- 2025. 8. 24.
![]() |
신앙의 논리 - ![]() 마크 A. 매킨토시 (지은이),안에스더 (옮긴이)비아 |
들어가며
1. 신앙의 신비
2. 삼위일체의 신비 - 하느님과의 새로운 만남
3. 창조의 신비 - 하느님의 위대하심
4. 계시의 신비 - 하느님의 목소리
5. 성육신의 신비 - 하느님의 인간성
6. 구원의 신비 - 인간성의 승리
7. 친교의 신비 - 우주의 드라마
참고 자료
9 기도가 "무언가"를 "어렴풋이 이해하는 활동이라면 신학은 기도를 통해 이해한 바를 말로 표현해내려는 지난한 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학을 순전히 명제와 논증을 다루는 활동으로 본 것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비교적 최근의 일입니다. 물론 명제와 논증은 언제나 신학의 중요한 요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랜 기간 신학은 둘 만큼이나 순교자들의 직관적 통찰, 성인들의 체험적 이해, 예배와 기도에 헌신했던 이들의 관조적 지혜를 중시했습니다. 저는 신학이 하느님의 삶, 생명이라는 신비를 나누는 활동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이는 하느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신비로운 사건이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활동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교회는 예배와 기도의 삶을 통해 얻은 깊은 직관을 바탕으로 신학을 일구었습니다.
13 이 책은 신학에 관한 책입니다. 이 책을 통해 저는 여러분이 신학을 하게 되기를, 신학이라는 학문을 모른다고 할지라도 이미 신학적 활동을 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니 이 책은 전문적인 신학자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살펴본다는 의미에서 신학에 관한' 책은 아닙니다. 그보다 이 책은 이른바 '신학 함'doing theology, 즉 신학적 활동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러한 활동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무엇인지를 살피는 책입니다.
15 신학이란 바로 저 신비의 손길과 건네는 말에 반응하고 귀기울이는 것, 삶 표면 아래 자리한 깊이, 그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그것도 임의로 부여한 의미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의미로 말이지요. 장미 주변을 맴도는 잠자리의 움직임이나 돌아가신 할머니를 위해 시를 읽는 소녀의 행동이 하느님에게 어떠한 의미를 지닐까요? 매 순간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이란 무엇이고 그럴 때 어떤 의미가 일어나게 되는 걸까요?
40 신학의 세 번째 순간은 우리가 성령의 힘으로 인간이 된 말씀의 삶과 죽음, 부활로 이끌려 (인간이 된 말씀인) 예수가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당신의 아버지를 향해 아빠라고 불렀듯 우리 또한 사랑의 부르심을 듣고 응답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곳에서 신학은 가장 참되고 가장 깊은 의미에서의 '테오로기아', 즉 하느님을 말하는 것이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때 신학은 하느님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말하는 것.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는 것, 그리고 하느님과 사랑의 친교를 나누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미리 이야기하자면 신학의 두 번째, 세 번째 순간은 누군가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활동 안으로 이끌 수 없습니다. 그분의 마음으로 사랑하고 그분의 눈으로 이 세계를 보도록(신학의 두 번째 순간) 가르치지도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아버지와의 관계를 맺게 해 그들의 대화에 참여하도록(신학의 세 번째 순간) 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것들이 우리가 신학을 하는 근본적인 이유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신학을 하는 이유는 똑똑해지거나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삶, 그분께서 펼치시는 활동에 이끌리기 위해서입니다.
43 신학은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부름을 받아들일 때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성찰하는 법을 익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학과 영성은 필수불가결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이는 이 책의 가장 근본적인 전제라 할 수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모두 이러한 생각을 공유했습니다.
45 그리스도인의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느님과의 일치 아래 하느님을 아는 것이다.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주체가 대상인 하느님을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하느님 되심, 좀 더 대담하게 말한다면 하느님의 '경험'을 나누어 받는 것을 뜻한다. 십자가에 매달리는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그분을 닮아갈수록 우리는 그분을 알아간다.
91 피조물에게는 본질essence과 존재existence가 두 가지 별개의 것이지만 하느님의 본질은 어떤 무언가가 아니라 무언가를 존재하게 하는 순전한 사랑의 활동입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존재하십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존재는 피조물을 정의하는 부분이 아닙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께서 생명을 주시는 놀랍고도 경이로운 사건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을 창조주, 모든 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분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보통 이 진리를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라는 교리로 설명했습니다. 이 교리는 마치 문법의 원칙처럼 기능합니다.
118 우리를 둘러싼 현실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드러낸다는 믿음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요소 중 하나입니다. 이를 깨달을 때 우리는 '계시'Revelation에 관해서도 좀 더 적절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근래 들어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 그리고 이 말씀을 '알고' 이해한다는 것을 너무나도 좁게 이해해 오랜 기간 그리스도교가 갖고 있던 생각을 치명적으로 축소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세계를 일정한 법을 따르는 질서 잡힌 세계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법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자연에서 발견되는 모든 조화로움은 매 순간 하느님께서 당신을 표현하시는 것(로고스), 혹은 하느님의 말씀을 반영한다고, 이 하느님의 말씀이 때가 차 베들레헴의 우는 아이로 태어나 갈보리에서 울부짖으며 죽음을 맞이한 인간으로 드러났다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167 부활한 예수는 자신을 피하고 버린 이들의 망가진 삶을 용서하고 치유함으로써 거대한 전환을 일구었습니다. 부활한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거짓, 즉 우리의 갈망은 타인을 희생함으로써만 실현될 수 있다는 거짓을 들추어냈으며 이를 뒤집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뿌리내리고 있는 것은 예수의 말과 행동이 아니라 예수 자체, 예수의 정체입니다. 예수는 하느님께서 하셨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용서하는 사랑을 삶으로, 죽음과 부활로 구현했습니다.
180 본래 삼위일체에서 위격이 된다는 것은 '서로를 향해 마주함', '마주해 봄'을 뜻합니다. 세 '마주함', 삼위일체를 이루는 세 위격'은 서로를 향해 마주함으로써, 관계를 맺을 때 드러나는 특정한 형태를 뜻합니다. 이게 삼위일체가 지닌 본래 뜻입니다. 성부의 '아버지 됨'fatherhood에는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은 채 계속 내어주는 인격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성자의 '아들 됨'sonship에는 계속 받으며 그 사랑을 영원히 '말하는' 인격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성령의 '성령 됨'spirithood에는 성부가 성자를 향해, 성자가 성부를 향해 끊임없이 향하게 하는 사랑의 인격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이러한 특징 중 두 번째, 우리가 말씀 혹은 성자라고 부르는 사랑의 인격적인 특징이야말로 예수의 핵심 정체성이라고 믿습니다.
263 교회에서 거행하는 성사들의 핵심에는 이 두 가지 특징이 흐르고 있습니다. 세례의 순간baptismal moment, 피조물인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과거의 우리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격체로 태어납니다. 성찬의 순간cucharistic moment, 교회는 하느님의 창조 활동을 '인격화'해 만물을 그리스도의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의 활동으로 끌어안아 세계와 만물을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는 상태로 회복시킵니다. 세례에서 성찬례에 이르는 순례의 여정을 끊임없이 이어감으로써 교회는 성령이 소유에서 선물로, 무언가를 조정하고 비축해두려는 욕망에서 자유롭게 사랑을 흐르게 하려는 갈망으로 우리의 삶. 우리가 만든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장이 됩니다 .
273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하면 우리는 하느님과 같이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하느님의 삶이 온전히 우리의 삶을 이끌 것입니다. 그때에는 모든 피조물이 사랑을 나누어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나누시는 사랑, 성령에 온전히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성사들은 중단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친교가 모든 피조물을 통해서 끊임없이 그리고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계는 그 자체로 아버지가 사랑을 담아 아들에게 주는 선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은 이를 기뻐하며 성령을 통해 그 선물을 다시금 아버지께 바칠 것입니다.
'책 밑줄긋기 > 책 2023-25'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조구치 유조, 마루야마 마쓰유키, 이케다 도모히사: 중국사상문화사전 (0) | 2025.08.24 |
---|---|
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엔치클로페디 ─ 제1부 논리의 학 (0) | 2025.08.24 |
마크 마조워: 암흑의 대륙 (1) | 2025.08.17 |
폴 가이어: 칸트의 『도덕형이상학 정초』 입문 (1) | 2025.08.17 |
임마누엘 칸트: 윤리형이상학 정초 (1) | 2025.08.17 |
스티븐 그린블랫: 세계를 향한 의지 (3) | 2025.08.11 |
사이토 아키라 외: 공과 중관 ─ 시리즈 대승불교 6 (1) | 2025.08.11 |
한스 큉: 신은 존재하는가 1 (1) | 2025.08.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