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모스: 천국을 다시 묻다

천국을 다시 묻다 천국을 다시 묻다 - 10점
크리스토퍼 모스 (지은이),윤상필 (옮긴이)비아

들어가며

1. 오늘날 천국은 무엇을 말하는가
익숙한 천국 / 낯선 천국 / 도래하는 천국 / 몇 가지 반향들

2. 천국의 신학
하늘 소식에 관한 유죄 판결 / 천국 소식에 대한 재검토 /

3. 천국의 현실성
끝까지 수수께끼이고 ... / 무화과나무 교훈 /
“예언의 상상력”과 “신실한 불신” – 바르트 / 세속성과의 기이한 단절을 엿듣기

4. 천국의 윤리
하늘의 방향성 / 역방향 - 바이스가 불러온 논쟁 /
현실 세계에 대한 책임 - 본회퍼 / 하늘에서와 같이

5. 천국의 희망
두려움 / 생명이 도착하고 죽음이 떠나가다 /
천국의 계보 / 영원한 영광을 위한 “이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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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라면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 이야기하는 하늘, 천국은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현재 상황을 겨냥한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실 세계'를 두고 하늘에 비추어 말하는 방식이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성서라는 맥락에서 펼쳐지는 천국, 하늘에 관한 소식은 우리가 마주한 현실, 피할 수 없는 현실, 높음과 깊음에 관계없이 우리 앞에 펼쳐진 현상황에 관한 선포다. 

오늘날 천국과 하늘에 관해 듣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살핀 이 장은 심도 있는 질문과 검토를 위한 일종의 밑거름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다룬 하늘의 네 가지 특징은 우리에게 천국이 드높은 물리적 하늘이나 사후 세계, 그리고 내적인 충만함이나 행복감으로 환원할 수 없음을 알려 준다. 천국, 하늘에 관한 소식은 의문을 불러일으키고 "설교단에서 흘러나오는 숱한 몸짓들"을 일으킨다. 복음의 전승들 자체가 이를 요구한다. 요한의 첫째 편지 저자는 말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 영이든지 다 믿지 말고, 그 영들이 하느님에게서 났는가를 시험하여 보십시오. (1요한 4:1)

84 지난 세기 비판적이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통찰력 있는 이들은 결국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던 셈이다. '오늘날 기준에서 볼 때, 천국과 하늘에 관한 복음의 이야기 중 믿을 수 있는 것, 그리고 믿을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이 질문을 뒤집어서 다시 물어봐야 한다. "천국과 하늘에 관한 복음이라는 기준에서 볼 때 근현대의 이야기 중에서 믿을 수 있는 것, 그리고 믿을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107 이렇게 결론 내릴 수 있다. 불트만과 틸리히는 서로 입장이 다르지만, 둘 다 천국, 하늘에 관한 복음의 참된 내용을 들으려면 이를 (설령 과도기 단계라 할지라도) 신화로 인식해야 한다고 보았다. 하늘의 도래, 피조물로서의 하늘, 공동체, 하느님이 통치하는 나라에 대한 성서의 내용은 종종 큰 우주론이라는 그림 아래 이 땅의 시공간을 활용한 화법으로 표현되기는 하나, 그들이 볼 때 하늘(나라)은 이 땅 위에서 이 땅의 삶에 다가온다. 그러므로 우주론처럼 표현된 부분들은 문자주의자들이 그랬듯 단 하나의 의미만을 지닌 것으로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며 우리 실존의 상황, 우리 존재 방식에 맞게 탈문자화되고 재기술되어야 한다. 

126 적어도 두 가지는 답변할 수 있다. 첫째, 과거 사람들이 하늘이 도래한다는 복음을 잘못 이해하고 이를 기대했다며 비판한 근현대인들의 '커다란 실수'는 하늘이 도래한다는 소식이 "현실세계의 시작이 아니라 끝을 가리킨다고 가정했다는 데 있다. 둘째, 천국, 하늘에 관한 복음 이야기를 달리 들으면 "현실 세계"가 무엇인지도 달리 판단할 수 있다.  

181 천국은 이 세계를 이야기하는 데 동원하는 기존 사고방식에 욱여넣을 수 없다. 그 사고방식이 우주론이든, 인간학이든, 역사학이든 말이다. 이는 천국이 현실성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천국이 지닌 현실성이 우리의 기존 틀로 담아낼 수 없을 만큼 크다는 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대변되는 오늘의 시대정신이나 성서나 하나같이 근대주의라는 귀마개를 빼고 "영들을 시험해 보라"(1요한 4:1~6)고, 성서의 증언들을 다시 들으라고 요구한다. 모든 실제성actuality이 사실성 factuality은 아니다. 천국, 하늘이라는 현실은 없는데 믿어서 만들어 내는 무언가가 아니다. 이 땅을 하늘이 '실제로' 감싸고 있다면, 우리 가까이에 왔음을 받아들인다면 이 땅은 넓기는 하나 텅 빈 물리적 하늘을 넋 놓고 바라보게 만드는 폐허일 수 없다. 이곳은 사랑과 자유의 권리가 만개하도록 하늘이 통치하는 영역이며, 그 통치를 따라 모든 장애물을 걷어내고 사랑과 자유와 정의를 꽃피우기 위해 싸워나가야만 하는 곳이다. 성서가 선포하는 우리 곁에 온 천국은 "현실 세계"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며, 현재에 대한 무관심과 무책임의 근원이 아니라 현재의 요구, 인간의 통제력이 도달할 수 없는 현실의 요구에 대응하는 능력, 그 책임감의 원천이다. 

203 천국, 하느님 나라를 상상하는 방향의 전환, 하느님 나라는 하늘에서 오고 실제로 임박해 하느님의 뜻을 따라 땅에서의 행동을 형성한다는 생각에서 하느님 나라는 "윤리 공동체"의 실현에 필요한 도덕적 행위의 규범이자 그 결과라는 생각으로의 전환은 크게 두 가지 결과를 낳았다. 첫째, 그리스도교 신학은 더는 천국, 하늘에 관한 복음서의 언급들이 "현실 세계"에서 열매를 맺음을 강조한다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게 되었다. 둘째, 바이스가 말한 대로 “철저히 성서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은" 윤리 이해가 신학에 들어왔다. 

262 천국은 현존하는 공동체 혹은 정치체의 모습으로 등장하며 하느님의 통치가 이뤄지는 나라로 제시된다. 즉 복음서가 말하는 천국은 바실레이아, 곧 그분의 나라로 성서의 여러 곳에서 묘사하는 천국에 관한 모든 소리를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맥락이자 틀이다. 이 소식에 따르면, 천국의 '가까이 있음'은 비유로 나타나고 묵시적으로 실현된다. 달리 말하면 우리 곁으로 온, 우리 가까이에 이미 둥지를 튼 천국은 비유의 형태로, 감춰진 채 자신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천국은 이미 자리해 있거나 사라질 기존 질서의 무언가로는 포착할 수 없는, 이미 일어나고 있고 새롭게 다가올 일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전혀 다른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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