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큉: 왜 그리스도인인가?

 

왜 그리스도인인가? 왜 그리스도인인가? - 10점
한스 큉 (지은이)분도출판사

A. 식별
Ⅰ. 오늘의 지평
Ⅱ. 다른 차원
Ⅲ. 그리스도교의 특징

B.설계
Ⅰ. 사회적 맥락
Ⅱ. 하느님의 일
Ⅲ. 사람의 일
Ⅳ. 분쟁
Ⅴ. 새 삶

C.실천
Ⅱ. 사람과 그리스도인

 


50 신앙인은 무신론자와 경쟁 관계에서 누가 더 인간의 근본 경험을 설득력있게 해석할 수 있느냐를 겨루고 있다.
1) 삶의 불안정성, 앎의 불확실성, 갖가지 두려움과 방향상실이라는 ─ 여기서 굳이 구체적으로 설명할 필요도 없는 극히 구체적인 인간 경험에서 불가피하게 제기되는 물음: 이처럼 존재와 비존재, 의미와 무의미 사이에 떠 있고 버틸 데 없이 버티고 있으며 갈 데 없이 나아가고 있는, 근본적으로 불확실한 실재는 어디서 오는가?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최소한 동의할 수는 있는 (물론 신의 존재 여부를 결정짓는 것은 아닌) 가정: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끊임없이 불확실한 실재라는 수수께끼의 해답이 원칙적으로 주어져 있고 "어디서"라는 문제의 원칙적인 (물론 전개되고 해석될 필요는 있는) 대답이 발견되어 있는 셈이다. 
이 가정을 극히 간략한 형태로나마 바꾸어 표현하건대 : 
●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생성하는 실재는 이미 궁극저으로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리라 ─ 신이 모든 실재의 원근거Ur-Grund이기에.
●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존속하는 실재는 이미 궁극적으로 기초가 없는 것이 아니리라 ─ 신이 모든 실재의 원기초Ur-Halt이기에.
●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발전하는 실재는 이미 궁극적으로 목적이 없것이 아니리라 ─ 신이 모든 실재의 원목적Ur-Ziel이기에. 
●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 떠 있는 실재는 이미 궁극적으로 허무라는 의혹에서 벗어나 있으리라 ─ 신이 모든 실재의 존재Sein 자체이기에. 
이 가정을 긍정적. 부정적 양면으로 나누어 설명하건대:

① 긍정적인 면에서,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이해할 수 있으리라 : 
○ 왜 온갖 괴리성 속에도 궁극적으로 통일성이, 온갖 무의미 속에도 궁극적으로 의미가, 온갖 몰가치 속에도 궁극적으로 가치가 숨어 있다고 확신을 가지고 인정할 수 있는가? 
신이 존재하는 모든 것의 원유래Ursprung요. 원의미Ursinn이며 원가치Urwert이기 때문이다.
○ 왜 온갖 허무 속에도 궁극적으로 실재의 존재가 숨어 있다고 확신을 가지고 인정할 수 있는가?
신이 존재하는 모든 것의 존재 자체이기 때문이다. 

② 부정적인 면에서,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역시 이해할 수 있으리라 :
○ 왜 생성하는 실재가 그 자체로는 궁극적으로 근거가 없고 존속하는 실재가 그 자체로는 궁극적으로 기초가 없으며 발전하는 실재가 그 자체로는 궁극적으로 목적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가? 
○ 왜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 떠 있는 실재가 궁극적으로 비실재이며 허무라는 의혹을 받고 있는가? 
원칙적인 대답은 어느 경우에나 마찬가지: 불확실한 실재 자체가 신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를, 사회를, 세계를 이들의 원근거 · 원기초 · 원목적이요 원유래 · 원의미 · 원가치이며 존재 자체인 신과 혼동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206 예수는 복음선포와 관련하여 무슨 "직분"을 수행했던가? 예수 자신은 자기 "일"을 어떻게 생각했던가? 당분간 인간으로 변신한 천상 존재는 물론 아니고 온전히 인간적으로 상처받을 수 있고 역사상으로 파악될 수 있는 그런 인간 존재인 예수, 제자들을 거느린 인물로서 “랍비" · "스승”이라고 불린 것은 부당한 일일 것도 없으나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의 전도사로서는 오히려 혹은 “예언자" 나 혹은 기다리던 종말의 예언자라고까지 여겨지면서 그때 사람들 자신에게도 확실히 분분한 의견차이를 불러일으켰던 예수(마르 8,27-28병), 이 예수는 누구인가? 주목할 만하게도 정작 예수의 소명 체험에 관하여 복음서에서 보도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혹은 모세나 예언자들, 또 혹은 차라투스트라나 마호멧 같은 예언자적 체험도, 아니면 부다 같은 깨달음의 체험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다"라는 표현을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좀더 정확히 알아야 할 점: 예수 자신이 선포의 핵심으로 삼은 것은 하느님의 나라이지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직분이나 품위가 아니다. 부활 후 공동체가 나사렛 예수의 완전한 인간성을 변함없이 고수하는 한편 이 인간에게 "그리스도" · "메시아" · "다윗의 자손" ·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또 그들이 주위 (유대 · 헬라)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의미가 풍부한 칭호들을 골라 예수의 칭호로 삼고 그럼으로써 신앙을 위한 예수의 의미를 표현하고자 했다는 것도 ─ 나중에 설명하려니와 ─ 능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 자신도 이미 이런 칭호들을 자임했다는 것은 주어진 사료의 성격상 간단히 전제될 수 없다. 이것은 오히려 선입견 없이 검토되어야 할 문제점이다. 

253 예수 부활은 인간적 시공 안의 사건 문제가 아닌 그만큼 예수 죽음의 의의 문제만도 아니다. 물론 (사학의 연구 수단으로 확인될 수 있는) 역사상 사실 문제는 아니나 과연 (신앙을 위해서는) 실제 사건 문제다. 따라서 예수 부활의 중요한 관심사인즉 예수 자신은 살아 있지 않고 이미 죽어 없어졌지만 예수에 의하여 시작된 "일"만은 역사상 예수의 이름과 결부되어 계속된다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에펄씨는 이미 죽었으나 그분의 사업인 에펠탑 속에 그분은 계속 살아 있다 하듯이; 또는 괴테님은 비록 죽었으나 그분의 작품과 기억 속에서 그분은 오늘도 말하고 있다 하듯이. 중요한 것은 오히려 예수 자신이 살아 계시다는 것이고 그래서 예수의 일이 중요하다. 부활자 자신의 실재가 제외될 수 없다. 예수의 제자들은 실패를 시인하고 말았던 예수의 일을 예수의 부활과 관련하여 하느님 자신이 판정을 내리신다는 것, 예수 자신이 실패하여 죽음 속에 머물지 않고 하느님 자신에 의하여 완전히 의로운 분이 되어 살아계시기에 예수의 일은 의미가 있고 계속된다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부활은 제자들과 제자들의 신앙을 위해서만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예수는 제자들의 신앙에 의하여 살아 계신 것이 아니다. 부활 신앙은 제자들의 신앙의 발로가 아니다. 예수는 더러들 생각했듯이 너무나 위대했기에 죽고 말 수는 없었던 것이 아니다 ─ 예수는 죽었다. 부활은 먼저 예수 자신을 위한 사건이다: 예수는 하느님에 의하여 새로이 살아 계시다 ─ 제자들의 신앙을 위하여. 새 삶의 전제조건은 물론 시간적으로는 아니고 내용적으로 선행하는 하느님의 행동이다. 

258 부활은 하느님 안으로 죽어 들어감이다: 죽음과 부활은 지밀한 관계가 있다. 부활은 죽음과 더불어, 죽음 안에서, 죽음으로부터 이루어진다. 이 점이 가장 날카롭게 표현된 바울로 이전의 초기 찬가들에서는 예수의 현양이 이미 십자가와 직결되어 있다. 그리고 특히 요한복음서에서는 예수의 "현양"이 십자가에 달림과 "영광"을 동시에 뜻하며 (3,14: 8, 28: 12, 32, 34) 이 둘 다가 아버지께로 돌아감이라는 하나를 이룬다(17,45).  

259 "하느님 안으로의 죽음"이란 자명한 일, 자연적 과정, 인간 본성 욕구외 무조건 충족이 아니다: 죽음과 부활은 반드시 시간적으로는 아니라도 내용적으로 구별해서 보아야 한다. 이 점도 오래된, 사학적이라기보다는 신학적인 표현으로 강조되어 있다: "사흗날에 부활하셨다”고. 여기서 "사흗날"이란 달력의 날짜가 아니라 구원의 날을 가리킨다. 죽음은 사람의 일, 부활은 하느님께만 가능한 일: 하느님에 의하여 사람은 불가사의한 포괄적 궁극 실재로서의 하느님 안으로 현양 · 소환되어 최종적으로 포용 · 구원된다 ─ 죽음 안에서, 아니 오히려 죽음으로부터, 죽음 자체의 사건으로서, 하느님의 능력과 신의에 의하여, 부활은 없음에서 있음에로 부르시는(로마 4, 17) 창조자의 은밀하고 불가사의한 새 창조다. 또 그래서 ─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초자연적 개입"은 아닌 진정한 은사, 참 기적이다. 

260 부활 신앙은 그러므로 단순히 실존적 내면화나 사회적 개혁으로서가 아니라 창조자 하느님을 믿는 신앙의 철저화로서 해석되어야 한다. 부활은 창조신에 의하여 죽음이 참으로 정복됨을 뜻한다 ─ 이 하느님께 신앙인은 모든 것을, 마지막도 죽음의 정복도 믿고 의지한다: 마지막은 또 새로운 시작이라고! 신뢰하며 "전능하신 창조주 하느님"을 믿는다고 신경(신앙고백)을 시작하는 사람은 또 안심하고 “영원한 삶"을 믿는다고 그 신경을 끝낼 수 있다. 하느님은 "알파"이시기에 또 "오메가"이시다. 없음에서 있음에로 부르시는 전능한 하느님은 또 죽음에서 삶에로 부르실 수 있다(로마 4,17). 
죽음 앞에서야말로 세상에서는 숨어 있던 하느님의 전능이 계시된다. 죽음에서의 부활을 사람이 예측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야말로 산 이들의 하느님이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은 아니라고 정의될 수 있는(마르 12,26-27 참조: 2고린 1.9)이 하느님께 사람은 감히 어떤 경우에나 의지할 수 있다. 불가피한 죽음 앞에서도 하느님의 드높은 창조력을 무조건 신뢰할 수 있으며 안심하고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만유와 인간의 창조·보존자이신 하느님이기에 죽음과 임종 때에도 여지껏 경험한 모든 한계를 넘어 아직도 하느님이 하실 말씀은 한 마디 더 있으리라고 믿고 의지할 수 있다: 첫 말씀을 하셨듯이 마지막 말씀도 하시리라고. 하느님 앞에서는 미쁨 · 믿음만이 실재에 부합하는 유일한 이성적 자세다. 죽음에서 하느님께로 들어간다는 것은 경험적 또는 유리적으로 실증되는 것이 아니다. 예상 또는 증명될 수는 없는 것, 그러나 가히 믿고 바랄 수는 있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하느님에 의해서만 가능해진다. 진심으로 살아 계신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또 죽은 이들의 삶에로의 부활을, 죽음에서 드러날 하느님의 능력을 믿는다. 의심하는 사두가이들에 대한 예수의 응수: "당신들은 성경도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는구려" (마르 12,24).  
부활자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교 신앙은 생명의 창조·보존자이신 하느님을 믿는 신앙으로서만 뜻이 있다. 거꾸로 창조자 하느님을 믿는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 하느님이 예수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다는 것에 의하여 결정적으로 특징지어진다 (로마 4,24). “죽은 이들 가운데서 예수를 일으키신 분"이야말로 그리스도교 하느님의 별명이다(참조: 로마 8, 11; 2고린 4, 14; 갈라 1,1; 에페 1,20; 골로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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