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티나 슈탕네트: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 | 베티나 슈탕네트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 | 베티나 슈탕네트 - 10점
베티나 슈탕네트 (지은이),이동기,이재규 (옮긴이)글항아리

한국어판 서문
주요 등장인물
서론

1장 “제 이름은 상징이 됐죠”
2장 막간극
3장 아르헨티나의 아이히만
4장 이른바 사선 인터뷰
5장 안전하다는 착각
6장 역할 변경
7장 막후극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005 이 책은 독일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별로 알고 싶어하지 않는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저는 독일 역사를 다루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독일 과거의 불명예스러운 부분을 다루었죠. 아직도 많은 독일인은 이 문제를 직시하길 꺼리며 다른 사람들까지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용쓰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렇지만 감춰진 사실을 들추려는 이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충격에 빠트리거나 불편하게 만들 뿐 아니라 일부 사람을 단죄하기도 하는 점을 잘 압니다. 그는 다른 이들이 애써 감춘 불편한 사실을 드러내며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한다는 것을 압니다. 또한 그는 그 작업이 제 기원이나 혈통, 또는 정체성의 규명 작업임을 잘 압니다. 

006 오늘날 독일은 과거사를 숨기지 않고 잘 처리했다고 인정받습니다. 하지만 정말 숨기지 않고 잘 처리했는지, 심지어 그럴 의지가 분명히 있었는지를 의심할 만한 이유는 넘쳐납니다.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대량학살을 조직했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이야기가 그중 하나입니다. 여기에는 거짓말과 범죄가 깊이 얽혀 있습니다. 그 결과 반세기 넘게 매우 독특한 위선 문화가 생겨났습니다. 지금도 독일은 거기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저는 전쟁이 끝난 지 21년 후인 1966년에 태어났습니다. 우리 세대도 집에서 가족과는 얘기할지언정 친구들과는 나눌 수 없는 주제들이 있었습니다. 멋모르고 말을 꺼내 가족을 당혹스럽게 만들 수 있다는 두려움이 거의 모든 가정에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여타 범죄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나치사회도 잔인한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모두가 한 명의 '총통' 아래 하나의 '민족'으로서 하나의 의지로 행동하는 하나의 몸, 즉 '민족의 몸'이라고 말하면서 서로를 옹호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007 아돌프 아이히만을 다룬 한나 아렌트의 책이 출간되었을 때 많은 독일인은 그 책의 주장, 특히 '악의 평범성'이란 용어가 책임을 은폐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는 사실을 즉각 알아차렸습니다. '평범하다'는 말은 공격적이거나 파괴적이거나 위험한 의도를 품은 것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달리 말해, 가족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는 신념에 찬 살인자가 아니라 그저 제대로 생각할 줄 몰랐던 인물이라는 사실이 훨씬 더 편하게 느껴질 수 있었습니다. 사실 아이들도 그렇게 합니다. 그들은 잘못이 발각되면 처음에는 '제가 안 그랬어요!'라고 잡아떼다가 곧 '저는 몰랐어요!'라며 터놓고 변명합니다. 의식적으로 범죄자가 되려 하지 않더라도 생각 없음만으로 공범이 될 수 있다는 아렌트의 주장은 많은 범죄자에게 가장 좋은 변명거리가 되었습니다. '악의 평범성' 테제는 크게 성공했습니다. 오용되기 쉬웠기 때문입니다. 신중하지 못했다거나 성찰적이지 못했다고 말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당연히 불쾌하고 곤혹스럽지만, 그 자체가 범죄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악의 평범성 이론은 희망의 이론입니다. 그게 바로 그 테제가 멋진 이유입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거의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인 생각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여전히 생각없음으로 인해 최악의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면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해결책은 아주 간단합니다. 즉, 모든 사람이 더 많이 생각하면 이 세상에 악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각이 항상 선하다는 한 가지 사실만 믿으면 됩니다. 나쁜 생각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죠. 다만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독일 사람들은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살인자가 너무 많았고, 방조범도 너무 많았고, 동조자와 신념형 지지자 역시 너무 많았습니다. 

009 결국 독일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들이 침묵과 가식의 망토로 우리 가운데 있는 살인자들을 보호했습니다. 죄 지은 이들은 그 일을 아는 사람들의 수치심에 의지합니다. 수치심과 죄책감은 자기 의심과 결합해 강력한 네트워크를 만들어냅니다. 그것은 놀라울 정도로 모든 사람을 점점 더 불가분의 관계로 결속시키며 서로에게 버팀목을 제공합니다. 그것을 다시 해체하는 것, 아니 심지어 그 시도조차 한때 사람들이 필요로 했던 그 버팀목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계 곳곳에서 그렇고,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036 1960년 홀로코스트 연구는 아직 시작 단계에 불과했다. 자료 상태는 형편없었고, 피고인에게서 새로운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바람이 너무 커서 주도면밀하지 못했다. 한나 아렌트는 그를 이해하고자 자신이 익힌 방식을 택했는데, 그것은 읽기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아렌트는 쓰고 말하는 사람은 이해받으려 한다는 가정 아래 텍스트에 적극 매달렸다. 아렌트는 수사 및 재판 기록을 가장 꼼꼼하게 읽었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아렌트는 계략에 빠졌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거의 가면을 쓴 존재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그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만 기대와는 달리 그 현상을 여전히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렌트는 분명 의식하고 있었다.

371 아돌프 아이히만은 유복한 중산층 가정 출신이었고, 비록 민족사회주의 사상이 그 가정까지 장악하고 있긴 했지만, 그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이 비난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전통적인 부르주아 도덕과 일반적 도덕 개념에 대해서도 충분히 배운 사람이었다. 심지어 그는 도덕, 양심, 정의 등의 개념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들과 관련된 근본적인 질문들을 무시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세계관을 위한 당당한 포부들을 가지고 있었고, 민족사회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요소들은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다 줄 수 없을 것이었다. 법원이 임명한 심리학자 슐로모 쿨샤르는 아마도 아이히만은 성격 때문에 자신이 처한 어떤 체제에도 완전히 종속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훗날 말했다. 

373 전 세계 지도자들은 정말로 "적의 섬멸"이라는 단 하나의 명령만을 내렸다. 아이히만이 보기에는, 그 전쟁이 적의 제거를 목표로 하는 전면적이고 세계적인 전쟁이었다는 견해가 사실을 간단히 진술해주는 것이었다. 그의 급진적 생물학주의는 "최종 승리"가 긴급하다는 믿음으로 이어졌다. 종족 간의 그 피할 수 없는 전쟁으로 오직 한 종족만 남게 될 것이었다. 

374 "내 말은, 철학은 국제적인 것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그는 철학 없이 자신의 답을 찾고자 한다. 그 자신의 내면의 도덕도 좋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국가지도자들의 의지다. 단지 그들이 사람들에게 복종을 강요할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오직 민족을 대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인은 자기 내면의 도덕이 자신이 받은 명령과 충돌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개인은 이 명령이 민족의 이익을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하며, 신념을 가지고 명령을 따라야 한다. 아이히만은 이 문제를 극복하는 쉬운 방법을 찾았다. 

375 이스라엘에서 아이히만은 자신이 평생 이마누엘 칸트의 정언명령을 따라 살아왔다고 말해 방청객을 놀라게 했다. "칸트를 믿는다"라고 그는 진지하게 말했다. 다만 자신이 받은 명령이 때로 자기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방해했을 뿐이다. 추가 질문을 받자 그는 심지어 칸트의 정언명령에 대해 그럭저럭 무난한 정의를 제시하기까지 했다. 그는 그 지혜를 진심으로 칭찬하려 했다. 그가 자유인이었던 1956년에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 그는 "자기 보존의 충동은 그 어떤 소위 도덕적 요구보다 강하다"라고 썼다." 

376 아이히만은 전통적인 도덕관념을 완전히 거부하고, 자연이 요구하는 무제한적 생존 투쟁을 지지했다. 그는 피와 땅에 대한 명확한 언급이 없는 어떤 형태의 계획도 구식이며 무엇보다 위험하다고 말하는 사고방식에 전적으로 공감했다. 여기서 이성, 정의, 자유는 인간사회의 허용 가능한 중심 개념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의 공통된 이해라는 생각 자체가 아이히만과 그의 총통 모두의 생각에 대한 배신이었다. 첫째로는 독일인의 우월함이 민족성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세상에는 모든 사람을 수용할 자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인종 간의 투쟁은 본질적으로 자원을 둘러싼 투쟁이었다. 이런 기본 생각은 오늘날 석유와 식수를 둘러싼 미래 전쟁을 염려하는 많은 사람에게 낯설지 않은 것이다. 

610 아이히만이 예상치 못하게 자신의 대적에 의해 투옥되었을 때, 그는 유포되고 있는 자신의 이미지들 중 어떤 것이 자기변호에 가장 유용할지를 이미 정해놓은 상태였다. 그는 자신이 아르헨티나에서 생산해낸, 유죄를 뒷받침하는 글들 없이, 신중한 관료의 이미지를 내놓았다. 

611 그 유명한 "유대인 문제" 전문가이자 절멸 프로젝트의 부처 간 조정자, 상관들과 함께 난롯가에서 코냑을 마시며 그 일의 실행을 축하했던 남자가 스스로는 아무 힘도 없는 무력한 회의록 작성자로 변신했다. 그는 심지어 반제회의에서도 자신은 "보조 테이블에서 연필을 깎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아르헨티나에서 아이히만은 자기 이름이 전쟁 전부터 이미 상징이 된 이유를 자랑스럽게 거들먹거리며 정확히 설명했다. 그는 자신이 모아놓은 언론 기사들을 손바닥 보듯 훤히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1946년까지 나는 대중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사실 다가오는 재판은 그가 "15년 동안 전 세계로부터 비난, 비방, 추적을 받아왔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오해에 불과했다. 법정 최종 진술에서는 그는 나무라듯이 이렇게 말했다. "나 역시 일개 희생자입니다." 

이 가면극의 일환으로 아이히만은 이전에는 자신에게서 분노의 외침을 자아냈을 말들로 자신을 묘사했다. 그는 이제 도량이 좁은" 사람이었고, "펜대나 놀리는 사람" "탁상공론가" "자신의 책무를 넘어서지 않은" 사람이었다. 이 마지막 거짓말은 심지어 그를 약간 즐겁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전 외무부 동료들은 이의 제기도 못하고 이 모든 말을 들어야 했겠지만, 그들은 아이히만이 자신의 책무를 얼마나 넘어섰는지에 대해 매우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항상 자신의 책략을 매우 자랑스러워했고, 관찰력 있는 심문관은 이 피의자가 전략적 계책을 부릴 때 특히 활기를 띤다는 것을 알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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