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스티븐슨: 전쟁의 재발견

 

전쟁의 재발견 전쟁의 재발견 - 10점
마이클 스티븐슨 (지은이),조행복 (옮긴이)교양인

머리말 / 병사들은 전장에서 어떻게 죽어갔는가?
1장 최초의 유혈: 고대 전투의 죽음과 호메로스의 영웅들
2장 중세 기사도의 탄생: 명예롭게 죽는다는 것
3장 흑색 화약의 시대: 치솟는 치사율
4장 미국 남북전쟁: 영광과 지옥
5장 식민지전쟁: 야만과 문명의 대결?
6장 제1차 세계대전: 영웅적 전투의 몰락
7장 제2차 세계대전: 1600만 명의 죽음
8장 베트남전쟁과 이라크전쟁: 현대 전투의 죽음과 영웅시

감사의 말
부록1 전장 의학의 역사
부록2 전쟁과 전투
주석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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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기억이 우리를 망각에서 구원할 수 있다는 관념은 역사가의 교묘한 사탕발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억하고 기념하는 행위는 인류만큼이나 오래된 마법을 불러낸다. 기억은 영면에 들지 못한 망자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오래된 속죄 의식이 있다. 그것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의사이자 시인인 존 매크레이(John McCrae)가 강력하게 원용한 관념이기도 하다(1918년 매크레이는 플란데런에서 사망했다). "그대들이 죽은 우리와 한 맹세를 깨뜨린다면 / 우리는 잠들지 못할 것이다"라는 매크레이의 시구는 젊은이들을 깃발 아래로 끌어모으기 위한 것이었지만, 내게는 그것 못지않게 다른 강력한 호소력을 지닌다. 이 책은 병사들이 전투 중에 어떻게 죽었는가에 관한 이야기이다. 전투의 기본적인 진실에 관한 이러한 탐구에는 부채 의식과 의무를 존중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분명히 할 것이 있다. 망자들을 존경하는 것은 군국주의를 조장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 (전쟁 찬미자의 떠들썩한 소리와 매처럼 구는 닭들의 날카로운 울음소리는 언제나 크고 분명하게 들릴 것이다.) 그리고 죽임을 당한 모든 병사가 다 영웅이라는 이야기도 아니다. 영웅이라는 낱말은 비열한 정치꾼들과 이들을 선전해대는 매체들 때문에 가치가 크게 떨어졌다(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1944년에 전사한 시인 앨런 루이스는 이들을 이렇게 묘사했다. "시끄러운 유명 인사들/우리에게 학살을 권한다"). 사실상 나는 전투 중의 죽음을 최대한 정직하게 그리고 나의 '부족한 능력'이 허용하는 한에서, 그 복잡성을 최대한 감안하여 묘사하려 했다. 이로써 나는 죽임을 당한 병사들을 냉소적인 자들과 맹목적인 주전론자들에게서 구해 내 명예를 되찾아주고 싶었다. 

이미 지나간 전쟁은 역사라는 포름알데히드(방부제) 속에 보존되기전까지는 실제였다. 이 전쟁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잔인했고 소름 끼칠 만큼 눈앞에서 전개되었기에 언제나 말로는 그 실상을 전하기가 어려웠다. 전투와 죽음에 관한 글을 읽는 것과 그것을 직접 경험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조만간 피는 마르고 고통은 사라지며 전투는 유쾌한 형태를 띤다. 거친 바위가 끝없이 밀려드는 파도에 닳아 매끈해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멀리 떨어져서 보면 전투는 낭만적인 것이 된다. 죽임을 당한 자들은 우리가 과거에 관해 느끼는 그리움의 마법적인 힘에 의해 깨지고 찢기는 죽음의 폭력으로부터 구원된다. 그리고 '매우 위대한 세대'라는 식의 황금빛 후광에 젖는다. 악취와 비명은 감동적인 이미지들로 대체된다. 죽음의 고통은 용기를 북돋우는 전쟁박물관과 영화의 영웅적 몸짓으로 해소된다. 우리는 역사(History)에, 그 강조된 대문자의 온기와 확신에 정신을 빼앗긴다. 

기사예르는 독일 제3제국 국방군 보병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그는 동부 전선의 러시아에서 전투에 참여한 경험을 자신의 회고록 <잊혀진 병사》(1967)에서 이야기하며 이렇게 쓰고 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조금의 불편도 느끼지 않고 전쟁에 관해 배운다. 이들은 안락의자에 앉아 난롯불에 발을 쬐며 여느 때처럼 다음 날 할 일을 준비하면서 베르됭이나 스탈린그라드에 관한 글을 읽지만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러한 글은 강한 충동에 사로잡혀 불편한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 진흙구덩이 속에서 집으로 보낼 편지에 그러한 사건들을 묘사할 일이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읽어야 한다. 모든 것이 최악으로 돌아가는 전쟁에 관해 읽을 때는, 평시의 고통은 하찮고 털끝만큼의 가치도 없음을 기억하며 읽어야 한다. 평시의 평온함 속에는 진정으로 중대한 것이 전혀 없다. 전쟁에 관한 글을 읽으려면 내가 지금 새벽에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처럼 피곤함에 지친 채로 늦은 밤까지 깨어 읽어야 한다....... 

기사예르는 모래밭에 자신만의 선을 긋는다. 오직 전투를 경험한 자들만이 그 선을 넘을 수 있다. 다른 모든 이들은 기껏해야 정직한 관찰자이거나 최악의 경우 관음증이 있는 자들일 뿐이다. 참전 시인 시그프리드 서순은 이들을 이렇게 비난했다. "진흙탕과 위험에 관한 이야기를 기쁘게 듣고 분별없이 감격한다." 이 책을 쓰면서 나는 군사적인 위험에 관한 한 운명이 내게 도움의 손길을 주었다는 것을 또렷하게 인식했다. 운명의 수레바퀴가 친절을 베푼 덕에 나는 전쟁과 무관한 때에 전쟁과 무관한 장소에서 태어나 나의 빈약한 몸뚱이를 지킬 수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자랑할 수도, 미안해할 수도 없다. 기사예르처럼 선 너머 다른 편에 살았던 사람들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는 있지만 그들과 함께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많은 병사가 영웅적으로 싸우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투 중의 죽음이 자동으로 거룩해지는 것은 아니다. 무서운 진실은 병사들 대부분이 목숨을 빼앗겼다는 것이다. 영웅시가 주는 위안과는 거리가 멀다. 총탄에 맞은 자들이 입에서 마지막으로 내뱉는 말은 '조국을 위하여'라는 감동적인 외침이 아니라 가슴이 미어지게 어머니를 찾는 소리였다. 그러나 결국 죽임을 당한 자들 사이에는 일종의 민주주의가 존재한다. 영웅적인 테미스토클레스도, 절망적인 두려움 속에 목숨을 빼앗긴 익명의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결국 죽었다. 이 책은 이 두 부류의 사람들에게 똑같이 관심을 보이며 둘 다 존중하려 한다. 

병사를 무덤으로 이끄는 길은 잔인할 정도로 짧고 곧을 수도 있고, 꼬불꼬불한 여러 개의 작은 샛길과 우회로로 복잡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복잡하더라도 운명적으로 교차하는 곳이 반드시 나타난다. 전사가 죽음에 이르려면 여러 요인이 결합해야 한다. 그를 죽음으로 내모는 무기, 그를 죽음의 장소와 방법으로 이끄는 전술, 학살 현장의 경계를 정하는 전략, 그가 자신을 위해 내리는 결정이나 다른 사람들이 그를 위해 내리는 결정, 생명을 구하는 의료진의 능력(의료 서비스는 거의 전 역사에서 죽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전사를 만들어내는 문화적 배경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다. 문화적 배경은 (이를 구성하는 몇 가지 성분을 예로 들자면) 영웅적 행위, 희생의 필요성, 대의의 정당성, 공격적 정신의 포용. 패자에게 느끼는 연민 따위에 관한 태도와 관념이 복잡하게 혼합된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을 거부하는 태도와 관념일 수도 있다. 역사의 각 시기는 매우 특유한 문화적 배경을 지니며, 내가 이 책을 연대순으로 구성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병사들은 시대의 방식대로 죽는다. 그러나 문화는 대체로 인간이 공통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수백 년을 뛰어넘는 거대한 연결고리를 추적하려했다. 

전쟁 안에는 많은 것이 있지만, 그 핵심은 남을 죽이거나 자신이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전쟁은 죽음에 '관한' 체스나 컴퓨터 게임, 영화, 책이 아니다. 전쟁은 전쟁일 뿐이다. 이 점에서는 타협이 불가능하다. 앙리 바르뷔스는 제1차 세계대전 때 그가 겪은 전투 경험을 회고한 <포화》(1916)라는 훌륭한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참호를 벗어나 정면으로 ··· 살아 움직이는 무시무시한 현재의 전선을 향해 전진한다." 우리 모두는 '가상' 문화, 즉 대용 문화 속에서 살며 가상과 현실을 너무 자주 혼동한다. 오늘날 대다수 사람들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행동하지 않고도 행동을 재연해 낼 수 있다. 우리가 선명한 스크린에 취해 가상의 세계에 살기로 선택할 수는 있지만, 우리가 직접 경험하기보다는 책이나 게임으로 접했을 그 혹독한 현실 속에서 살고 죽는 사람들은 비교적 극소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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