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베일리, D. 오브리언: 흄의 <인간 오성에 관한 탐구> 입문
- 책 밑줄긋기/책 2023-25
- 2025.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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흄의 <인간 오성에 관한 탐구> 입문 - ![]() A. 베일리,D. 오브리언 (지은이),이준호,오용득 (옮긴이)서광사 |
옮긴이의 말 | 5
머리말 | 9
감사의 말 | 11
제1장 『탐구』와 그 배경 | 13
제2장 출전 | 25
제3장 주제들의 개관 | 35
제4장 본문 읽기| 49
제5장 흄의 영향 | 209
제6장 더 읽어야 할 책들 | 225
참고문헌 | 239
찾아보기 | 245
22 흄의 저서 중 어떤 것이 그의 철학적 견해를 가장 정확히 드러내는지에 대해서는 될 수 있는 대로 저자의 냉담하고 사려 깊은 판단에 맡겨야만 한다는 원칙에 따라, 우리는 「논고」와 「탐구 모두에서 망라된 주제에 관한 흄의 진정한 입장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해 몇 가지 중요한 결론에 이르게 될 것 같다. 우리는 불가피하게 「탐구」에 해석상의 우선권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고 추정할 수밖에 없다. 특히 「논고」를 흄 입장에 대한 지침으로 활용하며 탐구의 몇 문구를 근거로 삼는 통상적 관행은 아주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만일 탐구에서 홈이 말한 바와 부합되지 않는 내용이 「논고」에 있다면, 성숙한 흄이 「논고」의 해당 주장을 실수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 올바른 추정이다. 더욱이 흄이 논고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고 자기 입장을 더 쉽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 탐구를 저술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에 따르면, 해석상 애매한 사항에 직면하는 경우에 우리는 「탐구」에서 말한 것을 「논고」에서 말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에 대한 우리의 해석을 바로잡기 위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 두 책 각각의 장점에 대해 흄이 직접 판단해서 제시한 증거에 덧붙여, 「탐구」가 「논고」를 능가하는 철학적 진전을 보인다는 견해는 흄이 자신의 소재를 파악했던 방식에 대해서도 상당히 잘 들어맞는다는 것으로 보인다. 인과추론의 본성에 관한 흄의 해명은 오늘날 그의 전반적인 철학적 입장에서 아주 중요한 측면 중 하나로 인정되며, 또 존재와 사실 문제에 관한 신념의 합리적 위상을 두고 그가 생각했던 모든 것을 옹호하는 중요한 함의 중 하나로 인정된다. 논고에서 흄의 이 해명은 필연성 개념의 기원에 대한 논의 속에 감추어져 있으며, 흄은 인과추론의 본성에 대한 논의의 중요성을 독자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전혀 애쓰지 않는다. 그러나 탐구로 눈을 돌려 보면, 우리는 홈이 이 두 논의를 분리하여 「탐구」 전체의 핵심적 입장인 인과추론을 빈틈없이 해명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논고」의 인식론적 회의주의에 대한 흄의 명시적인 논의는 인격의 동일성이나 영혼의 비물질성처럼 외견상 무관한 주제에 대한 장황한 논의와 때때로 뒤섞여 있는 산만한 단편의 형식을 취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탐구에서 흄은 이 소재를 최대한 한 곳에 모아, 회의주의의 여러 형식을 세부적으로 분류한 다음 비로소 회의주의적 성찰이 사람에게 지적 재앙이 아니라 유익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사유의 변화를 유발하는 방식에 대해 새롭게 해명한다. 또 그는 인과추론에 관한 자신의 여러 논변을 회의주의를 옹호하는 주장과 분명히 연결하는 중대한 진전을 이룬다. 이처럼 자기 논변의 회의주의적 잠재력을 인정함으로써 흄은 「논고」의 비교적 설득력없는 논변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28 로크의 철학적 입장을 특징짓는 핵심적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그의 개념적 경험주의(conceptual empiricism)였다. 이 입장은 인간 사유의 모든 재료, 즉 로크의 용어로 '관념' 은 외부 대상에 대한 감각 경험에서 유래되거나 정신의 내부 작용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유래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로크는 우리가 본유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을 거부하는데, 이 본유관념은 경험하기 전에 우리에게 있는 관념이다. 이 개념적 경험주의는 실재론적 세계관 및 지각 표상설(a representative theory of perception)과 결합되었다. 로크는 미립자설을 인정하는데, 이 입장에 따르면 물리적 대상의 실제 본질은 그 대상을 구성하는 원자의 내부 구조에 있고, 이 내부 구조가 관찰할 수 있는 대상의 속성을 낳는다. 하지만 로크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 감관은 현미경과 같은 인위적 보조 수단을 통해 보완하더라도 이 구조를 밝힐 역량이 없다. 더욱이 로크의 입장에 따르면, 우리가 바위, 나무, 책상 등과 같은 사물의 거시 물리학적 속성에 관심을 갖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 정신의 관념을 아무런 매개 없이 직접 자각함으로써 간접적으로만 그 속성과 대상을 지각한다.
흄은 로크의 개념적 경험주의 그리고 로크가 세계에 대한 우리 신념의 원천인 감각 작용을 강조하는 데 동조한다. 흄은 정신이 지각하지 못하는 물리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실재론적 관점을 옹호한다고 설명하는 것도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흄의 인식론적 입장은 로크의 인식론적 입장과 근본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로크는 물리적 대상의 존재와 그 속성에 관한 우리 신념을 흔히 매우 합리적으로 정당한 신념이라고 추정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즉 그런 우리 신념은 부정하기 보다는 인정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대조적으로 흄은 그런 신념의 인식론적 위상을 매우 문제가 많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흄이 그런 신념은 심리적으로 불가피하지만 합리적으로 정당화될 자격은 없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은 「탐구의 논지 전개 과정에서 드러날 것이다.
35 흄은 경험이 사실 문제에 관한 신념에 대해 실증적 차원의 정당화를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욱이 흄은 이 신념을 정당화할 대안이 선험적 추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도 분명하다. 결과적으로 흄의 철학적 접근방식에서 처음부터 당혹스러운 측면들 중 하나는 정당화의 수단이 정말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자기 신념은 확실히 참이라고 할 확신이 없더라도 그 신념이 합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몰두하지만, 흄은 다른 사람의 신념이나 자기 신념을 정당화하는데 결함이 있음을 열정적으로 들춰내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줄 때가 흔하다. 동시에 흄은 대개 이 정당화의 결함에 대해 눈에 띄게 무관심한 것 같다. 자연히 우리가 흄이 정당화되지 않는 신념은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것으로 기대할 법한 곳에서, 흄은 오히려 이런 신념이 꼭 필요하며 심리적으로 외면할 수도 없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흄 경험주의의 또 다른 요소를 마주치게 되는데, 이 요소를 '독단의 경험주의 (doxastic empiricism)'라고 적절히 이름 붙일 수 있다.
37 신념에 대한 이 부정적 성찰에도 불구하고 흄은 신념이 현저히 안정성을 유지하는 것은 습관과 경험 때문이라고 한다. 지각은 자동으로 또 어쩔 수 없이 정신과 별개인 물리적 대상이 존재한다는 신념을 만들어 낸다(12.7/151). 그리고 우리가 아직 지각하지 않은 대상에 관한 신념을 만드는 인과추론을 흄은 '일종의 직감적 능력 또는 기계적 능력'(mechanical power)이라고 하는데, 이 능력은 우리도 모르게 우리 내면에서 작용한다(9.6/108). 이 능력은 한 종류의 대상에 다른 종류의 대상이 뒤따르거나 수반되는 것을 반복적으로 관찰함으로써 작용한다(5.20/54와 12.22/159 참조). 그러므로 인식론적 경험주의를 수용하는 사상가가 감각에 정당화 능력을 부여하는 것과 달리, 흄의 경우에 감각은 그런 능력이 없을 수도 있다.
132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이 자연의 능력을 더 이상 천착하며 원인과 결과 사이의 필연적 연관과 같은 것을 지각한다고 믿는 경향이 강하다.(8.21/92)
우리는 습관적으로 필연적 연관을 세계에 투사할 수밖에 없다. 인과관계에 대한 흄의 논의가 회의주의로 가득할지라도, 흄은 세계에 필연성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을 수 없다. 이 신념은 보증해주는 증거가 없다. 상상력이 그냥 이 신념을 우리에게 억지로 떠넘겼다. 그런데 인과관계가 무엇인가? 인과관계에 대해 우리가 가진 유일하게 명석한 관념은 그것이 항상적 결부라는 것이다.
140 의지의 결정에 따라 이행하거나 이행하지 않는 능력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그냥 있기를 선택하면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고, 우리가 운동하기를 선택하면 우리는 또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죄수나 결박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이 가설적 자유가 있다는 것은 보편적으로 인정된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논란거리가 없다.(8.23/95)
자유는 필연성이 아니라 속박과 반대된다. 내가 신체적으로 속박되 있다면, 예컨대 내가 묶여 있거나 방에 감금되어 있다면, 나는 자유롭지 않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데 제약이 없다면 나는 자유롭다. 그러므로 자유로운 행동의 원인은 우리 동기나 욕망일 것이며, 이 동기나 욕망은 아마도 전반적으로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동기나 욕망은 신체적으로 속박되지 않았다면 자유롭다. 아이언은 맥주를 마시고 싶은 자기 욕망 때문에 금요일은 술집에 가며, 나는 그가 과거에 규칙적으로 그렇게 했기 때문에 거기에 갈 것 같다고 예측한다. 더욱이 아이언의 동기와 욕망 그리고 의지는 모두 궁극적으로 자연법칙에 의해 결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설령 그가 자기 선택을 통제할 수 없고, 다른 행동이 아니라 특정한 일련의 행동을 선택하게 된 원인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므로 그는 여전히 자유롭다. 이 양립가능론을 '약한 결정론'이라고도 한다. 인과적으로 결정된 행동이 자유로운 행동으로도 보일 수 있다는 주장 때문에 결정론의 위력이 완화되기 때문이다.
151 오성 때문에 인간은 지각할 수 있는 나머지 존재보다 우위를 차지하며, 그런 존재에 대해 모든 강점과 지배권을 갖는다. (Locke 1689 :I.II) [이성이라는] 직능 때문에 인간은 야수와 구별되며 야수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 명백다. (Locke 1689: IV. XVII. 1)
이러한 추론 능력 때문에 우리는 동물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자연적 질서에서 혹은 '거대한 존재의 사슬'(Lovejoy 1936)에서 신에 버금가는 지위를 차지한다. 또 이 능력은 우리가 신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는 통속적 계몽주의의 이념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흄의 철학은 이런 발상과 철저히 대립한다. 첫째, 우리는 세계의 핵심적 본성에 대한 합리적 통찰력이 없다. 우리는 인과관계의 측면에서 이런 점을 확인했다. 원인이 되는 능력에 대한 신념은 인식론적으로 전혀 정당화되지 않는다. 그 대신 이 신념은 규칙적인 경험에서 귀결된 역학적인 심리과정을 통해서 설명된다. 둘째, 우리는 신의 모습으로 창조되지 않았다. 우리 추론능력은 우리를 한낱 동물적 존재 이상으로 격상시킨 신과 닮지 않았다. 우리는 자연계의 또 하나의 요소 ─ 자연계에서 또 하나의 심리기제 ─ 일뿐이며, 동물과 인간의 사고력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고도로 발달된 종류의 동물일 수는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동물이다. 우리는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인간에 대해서도 과학적인 실험적 방법으로 연구할 수 있다. 신에 버금가는 (God-like) 합리적 통찰력은 기계적으로 작용하는 상상력의 지배를 받는 인지 과정으로 대체되는데, 이 사고 과정이 동물의 사고도 지배한다. 나아가 제10절과 11절에서 흄은 그리스도교 신에 대한 신념을 정당화하는 것이 전혀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신에 버금가는 추론능력 ─ 이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졌건 ─ 이 없으며,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이유도 전혀 없다.
162 증언이 확증하려고 애쓰는 사실보다 그 증언이 거짓이라는 것이 더 기적 같은 증언이 아니고서는 기적을 확증하기에 충분한 증언은 결코 없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죽은 사람이 부활하는 것을 자신이 보았다고 말할 때, 나는 곧 다음과 같은 것을 혼자 생각한다. 즉 이 사람은 속이는지 속고 있는지, 또는 이 사람이 말하는 사실이 실제로 일어났을지, 이 중 어떤 것이 더 개연성이 있을까. 나는 한 가지 기적을 다른 기적과 비교 검토하고, 내가 발견하는 우세함에 따라 나의 결정을 공표하며, 더 중대한 기적을 항상 거부한다. 그의 증언이 거짓이라는 점이 그가 말하는 사건보다 더 기적 같다면, 당시까지는 아니었지만 이제부터는 그는 나의 신념과 의견을 자기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10.13/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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