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니얼 B.클렌데닌: 동방 정교회 개론

 

동방 정교회 개론 | 대니얼 B.클렌데닌 동방 정교회 개론 | 대니얼 B.클렌데닌 - 10점
대니얼 B.클렌데닌 (지은이),김도년 (옮긴이)은성

서문
감사의 말씀

제1장 향기와 종소리 : 정교회를 위한 변호
제2장 잊혀진 가족
제3장 하나님의 신비성 : 아포파틱 비전
제4장 성령의 증언 : 성경과 전통
제5장 인간의 신화 : 테오시스
제6장 사랑의 해석학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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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4세기와 5세기도 여전히 에큐메니칼 공의회의 중요성을 경험한 시대였다. 381년에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제2차 에큐메니칼 공의회를 소집했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의 법령은 니케아 신앙을 강화했고 이단자들을 저주했다. 또한 콘스탄티노플의 권위를 로마의 권위 다음으로 확언했다. 니케아 신조 이외의 다른 신조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한 에베소 공의회(431) 이후에 모든 에큐메니칼 공의회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공의회인 칼케돈 공의회(451)가 개최되었다. 동방의 황제 마르시안에 의해 소집된 칼케돈 공의회에는 그리스도의 두 본성의 관계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백 명의 주교들이 참석했다. 칼케돈 정통은 그리스도의 두 본성을 하나의 본성으로 융합시킨 유티케주의 Eutychian Heresy와 그리스도의 두 본성을 두 개의 위격으로 나눈 네스토리우스주의Nestorius Heresy에 반대하여 그리스도는 하나의 위격이시고 두 개의 본성-신성과 인성을 가지시며 또한 각 본성이 완전하고 그 완전성을 유지하시고 나아가서 그 두 본성이 그와 같은 방식으로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제삼의 본성이 형성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451년의 공식은 고백하기를 그리스도가 혼동이나 "변화, 나눔, 혹은 분리 없이 두 본성으로 존재한다. 두 본성의 구별은 결코 연합에 의해서 취소되지 않았다. 오히려 각 본성의 특징은 보존된 채로 하나의 위격과 존재를 형성하게 되었다. 따라서 두 위격으로 나누어지거나 분리되지 않고 유일하고 동일한 성자, 그리고 유일하게 출생되신 말씀이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라고 했다. 

61 제5차 및 6차 에큐메니칼 공의회가 553년과 680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되었다. 제4장에서 상세히 토론하게 될 이콘 사용에 관한 논쟁은 787년의 에큐메니칼 공의회에서 최종적으로 타결되었는데, 이 공의회에서 이콘 숭배가 승인되었다. 7개의 공의회는 정교회에 있어 엄청난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이는 정교회가 자신을 일곱 공의회의 교회라고 흔히 칭하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132 동방에서는 이콘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매개하는 데 반하 서방에서는 책과 본문과 말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근본적인 도구이다. 성경의 본문을 읽음으로써 개종한 어거스틴의 실례에서 시작된 서구의 모델은 종교개혁과 뒤이은 개신교 전통에서 가장 완전하게 표현되었다. 서방의 기독교인들은 그때 이후로 계속 말씀을 읽어 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최초의 중세적 교황인 대 그레고리 Gregory the Great, 590-604는 “이콘이 미개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성경은 개화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세레누스에게 보내는 편지"). 이콘의 사용을 승인한 제2차 니케아 공의회(787)는 훨씬 더 나아가서 그 법령에서 선언하기를이콘을 이용한 표현들은 "복음을 이야기하는 것과 동일한 유익을 우리에게 가져다준다"라고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종교개혁자들과 개신교 전통은 그러한 개념을 명확하게 거부했다. 동방은 미학적 형상들에 초점을 둔 반면, 서방은 기록된 말씀에 우선권을 두었다.  

137 제2차 니케아 공의회(787)에 따르면 이콘은 기록된 복음과 동일한 가치를 지니며, 또 이콘과 말씀은 상호 계시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869-70년의 공의회는 선언하기를, 복음이 말로 우리들에게 선포하는 것을 이콘은 색깔로써 선포하며 은사를 수여한다. 나아가서 정교회에 있어서 이콘의 변호는 칼케돈 기독론의 선포이자 자신의 기독론이 칼케돈에 일치하는지를 시험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이다.  

169 코미아코프에 의하면 정교회에서 교회는 "진리, 그리고 동시에 기독교인의 내적인 삶"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권위는 우리들 외부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가톨릭과 개신교가 상이한 결론을 이끌어 낸다 할지라도, 서방에서 이 양 진영은 모두 신학적 진리의 보증인로서 작용하는 외적 권위를 확보하기 위하여 애쓴다는 점에서 동일한 전제에서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가톨릭주의에서 이 외적 교리적 권위는 교황 수위권과 무오성으로 표현된 교회의 권위에서 나오는 반면 개신교에서는 교황의 지배권에 대한 반발로서 '오직 성경' sola scriptura의 외적 권위가 대두되었다.

174 정교회는 언제나 제도적으로 최고의 권능을 가졌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개인적인 의미에서 베드로에게 최고의 영예와 위엄을 부여해 왔다. 정교회는 베드로가 최고의 권능primus potestatis을 가졌다는 개념을 거부하는 한편 언제나 그를 동등한 자들 중에서 첫째"primus inter pares로 인정해 왔다. 베드로에 대한 정교회의 태도가 결정적으로 바뀌게 된 전환점은 십자군이 1204년에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한 이후였다. 왜냐하면 그 때부터 로마가 동방의 교회들에 자신의 주교를 임명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정교회의 관점에서 볼 때 가장 터무니없는 사건은 교황 이노센트 3세가 토머스 모로시니Thomas Morosini라는 이탈리아 주교를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에 임명한 것이었다. "갑자기 동방이 서방에서 일어난 교회 정치적 발전의 진상을 보다 명확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멈추게 하기에는 때가 너무 늦었다." 교황제에 대한 구체적인 논쟁이 곧 뒤따랐다. 베드로의 개인적 위엄을 인정하되 그의 제도적 권능을 거부한 정교회는 각 주교 뿐만 아니라 각 교회의 "존재론적 동등성"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사도적 교회는 로마의 주교를 통해서 단일하게 계승되는 것이 아니라 각 교회나 전 교회를 통해서, 그리고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모든 기독교인을 통해서 계승되는 것이다. 

177 특별히 첨가된 것은 에큐메니칼 공의회의 법령들이었다. 니케아 공의회의 법령 6조는 로마의 주교가 다른 주교들과 동등한 것으로 간주되며, 도시의 주교들은 자신의 관할지에 대해서 통제권을 행사함으로써 "그들의 특권을 보존"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즉 한 주교의 수위권은 보편적으로 인정된 것이 아니라 개인적이며 그 지방에 국한된 것으로 해석되었다는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칼케돈 공의회의 법령 28조인데, 이것은 오늘날 정교회 신학자들에 의해서 금언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법령은 수평적 사법권의 개념을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로마는 신학적 이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제국의 수도라는 독특한 지위 때문에 특권을 부여받았다. 새로운 로마로서의 콘스탄티노플은 그와 동일한 근거에서 "동등한 특권"과 "교회 정치적 문제에 있어서 동등한 지위를 부여받았다. 

181 비록 정교회의 공식 선언에서 종교개혁자들이 교부 시대에 집중하려는 움직임을 간혹 인정할 뿐만 아니라 성경의 독특한 권위를 확인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기독교 신앙과 경험은 결코 '오직 성경'이라는 개념" 및 성경을 제외한 모든 권위를 명백히 거부하는 태도와 양립될 수 없다는 것이 정교회의 공식 입장이다. 성경은 교회와 전통의 맥락에서 분리되거나 소외된 채 자체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교회의 관점에서 볼 때 종교개혁자들의 오류는 분리할 수 없는 유기체를 분리하고 구분하여 인위적인 적대감을 지어내거나, 혹은 조지 타바드George Tavard가 말한 대로 성경과 전통 사이에 "화해할 수 없는 분열을 만든 것이다. 정교회는 성경을 계시의 독특한 원천으로서 분리하고 그것을 전통보다 우위의 것으로 격상시키는 대신에 하나의 계시의 원천, 즉 거룩한 전통이 두 가지 형태 문서와 구전으로 다가온다고 확언하는 경향이 있다. 

190 하나님의 말씀은 다른 모든 신앙의 원천들, 특히 모든 형태의 전통 위에 있다. 심지어 성경과 전통이 "가치 면에서 동등하지 않다"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데, 이는 성경만이 "첫째의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전통은 결코 성경과 모순되지 않으며, 이 점에서 성경은 “교회에 있는 모든 것이 판단받는" "기록된 주요 권위"이다. 성경이 수위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것을 대신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아무 것도 성경에 첨가할 것이 없다. 레렝의 빈센트와 바실 등 고대의 교부들도 성경이 완전하고 자기 충족적이며 궁극적이고 최고의 교리적 기준임을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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