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커스 J. 보그: 성서 제대로 다시 읽기

 

성서 제대로 다시 읽기 | 마커스 J. 보그 성서 제대로 다시 읽기 | 마커스 J. 보그 - 10점
마커스 J. 보그 (지은이),염승철 (옮긴이)동연출판사

머리말
옮긴이의 글

제1부 기초
제2부 히브리 성서
제3부 신약성서

 


30 이 옛 방식의 그리스도교 이해는 한 세기 전까지만 해도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였다. 그것은 근본주의자들과 많은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 속에서 여전히 일반적인 이해이다. 나는 그것을 여섯 개의 형용사를 가지고 기술하고 그 각각을 간단하게 설명할 것이다. 

첫째, 이미 언급했듯이, 옛 방식의 그리스도교 이해는 (보다 완고한 형태이든 보다 유연한 형태이든 간에) 문자주의적(literalistic)이었다. 

둘째, 그것은 교리적(doctrinal)이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핵심 교리 내용을 믿는 것을 의미했다. 사도신경이나 혹은 니케아신경을 자주 사용하는 교회에서 만약 당신이 기도하지 않거나 혹은 그 구절의 어떤 부분에서 침묵하지 않고 신경을 말할 수 있다면, 당신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셋째, 상당히 도덕주의적(moralistic)이었다. 이것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 번째 측면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의미하고 선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으로 이해된(의에 대해 좁고 매우 구체적인 규칙으로 이해하든 혹은 더욱 넓게 황금률이나 혹은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과 같은 일반원리로 이해하든간에) 성서의 윤리적 가르침에 일치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스도교를 바라보는 옛 방식에서 이해되는 도덕주의의 두 번째 측면은 우리가 선을 잘 행하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나왔다. 이러한 옛 방식의 그리스도인 되기는 죄, 죄책감 그리고 용서의 동력을 중심으로 한다. 사실 죄와 죄에 대한 용서가 이 오래되고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의 형태에서 얼마나 핵심적인가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대다수 그리스도인의 예배는 죄의 고백을 포함하고 있고, 대부분의 성찬식(미사와 주의 만찬, 즉 성찬식으로 알려진)은 그 중심에 죄, 희생 그리고 용서를 두고 있다. 심지어 꽤 자유주의적인 교회들조차도 죄와 용서를 강조한다. 나는 최근에 자유주의적 그리스도교의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한 주간의 회의에서 이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매일 아침 예배는 죄의 고백으로 시작한다. '아침 9시인데, 우리는 벌써 나쁜 사람이 되어버렸네'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넷째, 이 옛 방식의 그리스도교 이해는 가부장적(patriarchal)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해 주로 남성 언어를 사용할 뿐만 아니라, 교회, 사회 그리고 가정에서 남성 지배적인 위계질서(hierarchies)를 정당화했다. 

다섯째, 배타주의적(exclusivistic)이었다. 완고한 형태로서 그리스도교 배타주의는 예수가 구원의 유일한 길이고, 그리스도교는 유일한 참 종교라는 주장이다. 또 이런 주장에 불편함을 느끼지만, 전통적인 입장을 놓아 버리면 비그리스도인이 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더 유연한 형태의 배타주의도 있다. 

여섯째이자 마지막으로 옛 방식의 그리스도교 이해는 내세 지향적(afterlife-oriented)이었다. 내가 어릴 때 배웠던 그리스도교에서 구원의 주된 의미는'천국에 가는 것'이었다. 실제로 천국은 너무도 중요해서. 만약 당신이 열두 살 때쯤의 나에게 내세가 없다는 것을 납득시킬 수 있었다면,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는 그 어떤 생각도 갖지 않았을 것이다. 천국이 그리스도인에게는 전부였던 것이다. 

요약해서 이러한 옛 이해 방식을 한 문장으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나중에 구원을 받기 위해 지금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약간 다른 말로 같은 개념을 표현하자면, "나중에 천국에 가려면 지금 그리스도교를 믿으세요." 그리고 그 강조점은 '믿음'에 있는데,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성서와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러한 방식의 이해는 서구 문화의 대다수 사람에게 느슨해졌다. 우리 선조 대부분이 가졌던 천부적 문자주의가 거의 사라졌던 것처럼, 나의 어린 시절의 천부적 문자주의도 오래 갈 수 없었다. 물론 의식적 문자주의는 남아있다. 그러나 우리 중 많은 사람에게 그것은 선택권이 아니다. 

이러한 옛 시각이 종종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들 모두와 (그것을 변호하는) 보수주의자들과 (그것을 거부하는) 자유주의자들 모두에 의해 전통적인 그리스도교로 간주된다는 점을 언급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성서와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러한 옛 방식의 이해는 '그리스도교 전통'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지난 수 세기의 상황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서 역사적으로 영향받은 (성서를 포함한) 전통에 대한 이해 방식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그리스도교 전통을 지키느냐 혹은 버리느냐에 있지 않고, 그것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으로부터 또 하나의 방식으로의 전환(transition)에 있다. 그 문제는 성서 전체와 그리스도교적 전통을 읽고 이해하는 렌즈와 관련되어 있다. 

 

35 우리는 근대인이다. 이 말을 통해 나는 단순히 '근대성'으로 알려진 서구 문화적 역사의 시대 속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근대성은 17세기 계몽주의에서 시작해서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문화적 사고방식(mindset)이다. 물론 근대성은 인상적인 성취와 중요한 한계를 지닌 하나의 복잡한 현상이다. 우리의 목적을 위해 나는 그것의 핵심적인 특징 두 가지를 언급할 것인데 이 둘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첫째, 근대성은 과학적인 앎의 방식으로 특징지어진다. 실제로 근대 과학의 시작은 근대성의 출현이다. 근대 과학과 함께 새로운 인식론(혹은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에 관한 이론)이 등장했다. 근대 이전의 사람들과 달리, 우리는 오늘날 실험과 검증을 통해 어떤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둘째, 근대성은 때때로 '근대적 세계관' 혹은 '뉴턴적 세계관이라고 불리는 것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세계관은 실재에 대한 이미지인데, 그것은 무엇이 실재하는 것이고 무엇이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이해이다. 근대적 세계관은 과학적인 앎의 방식을 토대로 하고 있다. 실재하는 것은 과학의 방법들을 통해 알려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인식론(우리는 어떻게 아는가)은 존재론(무엇이 실재하는가)이 되었다. 근대적 세계관은 실재에 대한 물질적 이해를 낳는다. 실재는 물질과 에너지의 시공간적 세계이다. 실재는 작은 부분관이 이론물리학에서는 폐기되었지만,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계속해서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 

근대성은 엄청난 가치가 있는 많은 것들을 만들었다. 근대성의 가장 분명한 성취는 과학, 기술 그리고 의학에 있다. 그러나 그 성취는 그러한 영역을 넘어 정부체제, 인권, 과거에 대한 연구, 타문화에 대한 공감적 인식 그리고 기타 등등으로 확장되고 있다. 나는 근대성에 대해 매우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데, 심지어 그것이 일반적으로 종교에 그리고 특별히 그리스도교와 성서에 미친 매우 파괴적인 영향 두 가지를 언급할 때도 그렇다. 

이런 영향의 첫째는 근대성이 우리로 하여금 영적 실재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갖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실재에 대한 근대의 물질적 이해는 하나님의 실재를 우리 중 많은 사람에게 문제가 되게 만들었다. '하나님의 죽음'(death of God)의 신학이 근대기에 출현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근대적 세계관을 절대화한 논리적 결과이다. 

둘째, 근대성은 우리로 하여 사실성과학적으로 증명되고 역사적으로 신뢰할 만한 사실들에 몰두하도록 이끌었다. 실제로 근대의 서구 문화는 인류 역사상 진리를 사실성과 동일시했던 유일한 문화이다. 우리는 '사실적 근본주의자들'(fact fundamentalists)이다. 만약 하나의 진술이 과학적으로 혹은 역사적으로 사실이 아니라면,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교회 내에서 성서 근본주의자들과 그리스도교 자유주의자들은 모두 종종 사실적 근본주의자들이다. 전자에게 있어서 성서는 어쨌든 사실이 되기 위해서 사실적으로 정확해야만 한다(따라서 그들은 성서 본문의 문자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성을 강조한다). 후자는 다른 전략을 따르는 경향이 있는데, 즉 불길 속에서 몇 개의 사실을 알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근본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둘 다 의견이 일치했다. 그 일치된 의견은 '중요한 것은 사실이라는 것이다. 

사실성에 대한 근대의 집착은 성서와 그리스도교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대해 편만하고 왜곡된 영향을 미쳐왔다. 19세기와 20세기 대부분 기간에서 많은 그리스도인과 대부분의 그리스도교 신학은 문자주의(보다 완고한 혹은 더욱 유연한 형태로)와 환원주의(reductionism)라는 두 개의 무익한 선택들 사이에 끼어있었다. 첫째, 성서와 그리스도교의 사실적 정확성과 독특성을 옹호하려고 했다. 둘째, 성서와 그리스도교를 근대적 세계관 내에서 의미가 통하는 것으로 축소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둘 다 철저하게 근대적 입장이다. 

그것의 추가 결과로 근대기의 그리스도교는 믿음 혹은 불신의 역학에 몰두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에게 '불확실한' 주장을 사실이라고 믿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적인 의미가 되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원하는 것은 매우 문제가 되는 진술을 사실적으로 옳다고 믿는 것이라는 말처럼 이상한 개념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것들을 믿을 수 없다면, 그는 신앙이 없고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 개념의 철저한 근대적 특성은 중세 그리스도교 시대에 신앙이 의미했던 것과의 비교를 통해 볼 수 있다. 중세기 동안 기본적으로 그리스도교 문화의 모든 사람은 성서가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달리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창조로부터 세계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성서의 이야기는 당시의 일반적 통념의 일부분이었다.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은'신앙'(faith)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신앙은 우리가 성서를 사실이라고 생각하는지 아닌지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와 연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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