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미학 강의 - 베를린 1820/21년
- 책 밑줄긋기/책 2023-25
- 2025.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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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강의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사상선집 | 게오르크 W.F. 헤겔 - ![]() 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지은이),서정혁 (옮긴이)지식을만드는지식 |
서론
[A.] 예술의 보편적 부분
아름다움의 개념
정신과 아름다움의 관계
자연미와 예술미의 구분
예술의 특수한 부분
I. 상징적 예술형식
II. 고전적 예술형식
III. 낭만적 예술
[B.] 특수한 부분
조형 예술들
I. 건축술
II. 조각
III. 회화
[IV.] 언어 예술
I. 서사시
II. 서정시
III. 극시
관련 문헌
찾아보기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15 예술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이미 다양한 관점들을 살펴보았다. 이 다양한 관점들은 예술 작품에 대한 반성이 찾아낸 것도 있고, 또 거기서 더 나아가 근본이념(Grundidee)의 계기들로 우리가 계속 더 재발견할 그러한 것들이다. 이 관점들을 짧게 반복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예술 작품은 인간이 산출한 것인 동시에 자연에서 취한 형태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형태화(Gestaltung, 꼴 짓기)가 단순히 자연의 모방만이어서는 안 되며 이렇게 모방하는 일이 예술의 유일한 목적도 아니고, 오히려 [28] 그러한 형태화로서 모방은 우연적이라는 사실을 이후에 살펴볼 것이다. 더욱이 사람들은 구상력(Einbildungskraft, 상상력)이 자연을 뛰어넘어 고양되어야 하며, 특히 신적인 본질성을 표현할 때에는 더 그러할 것을 요구한다. (9) 그래서 형태는 자연 형태(eine Naturgestalt)이기는 하지만 단지 사유를 위한 것만은 아니며, 외적 직관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요구된다. 둘째로 요구되는 것은, 그렇게 표상된 것도 우리의 내면을 표현할 수 있는 목적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 작품은 단순히 지나가 버리는 인상만을 주어서는 안 된다. 예술 작품은 우리의 심정에 질문을 던지고 말을 건네며 메아리(Echo)를 울린다. 셋째 계기는 그것을 통해 우리에게 이념이 계시되는 그러한 측면이다.
무엇이 예술의 참된 궁극목적이며, 예술은 이 궁극목적과 어떻게 관련을 맺는가, 예술은 궁극목적을 자기 자신 속에 지니고 있는가, 아니면 예술은 이 궁극목적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 첫째 질문과 관련해서 보면, 이 경우 '진리란 무엇인가? 하고 묻고 싶을 때와 사정은 비슷하다. 왜냐하면 목적이 진리 자체이기 때문이다. 우선은 아름다움이 진리와 내적으로 결합한다고 잠정적으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말은 단지 피상적인 표현일 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름다움이 바로 진리라는 사실을 앞으로 고찰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진리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고 해서 전 범위에서 대답을 모색할 수는 없다. '진리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관련이 있는 정확한 지식은 또 다른 철학적 학문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각의 철학적 학문은 또 다른 철학적 학문을 자신의 전제로 삼기 때문이다.
첫째, 우리의 표상에 있는 진리의 규정에 대해 살펴보자. 먼저 언급해야만 할 점은, 철학에서 진리는 구체물(Konkretes)이자, 구별되는 규정들의 절대적 통일로 간주된다는 사실이다. [이에 비해 우리가 일상적으로 진리라고 이해하는 것을 보면, 한편으로는 현존(Dasein)을, 다른 한편으로는 표상(Vorstellung)을 진리로 이해할 것이다. 진리를 이같이 규정하면, 내용이 내 표상과 일치만 한다면 그것이 어떤 성격을 띠는가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게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진리의 그런 형식적 개념을 철학에서는 지니고 있지 않다. [29] 비록 표상과 현존이 동종 개념은 아니더라도, 단 하나의 내용을 지닐 수 있다는 점은 우리가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현존이 표상과 동일한 하나의 내용을 지닌다면, 표상은 참이 된다.
[그러나 철학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내용 자체다. 철학은 '무엇이 즉자대자적으로 절대적으로 참인가?라고 묻지, '표상이 참인가?'라고 묻지 않는다. 진리는 개념과 실재의 통일(Einheit des Begriffs und der Realität)이다. 실재가 개념에 종속되면 실재는 개념의 표현(Darstellung)일 뿐이게 된다. 육체가 영혼과 관계를 맺듯이 그렇게 실재는 개념과 관계를 맺는다. 그런데] 비속한 의미로는 참이지만, 철학적인 의미로는 참이 아닌 많은 사물들이 존재할 수 있다. 예를들어, 비속한 의미로는 좋지 않은 집(ein schlechtes Haus)도 참이다. 다시 말해 좋지 않은 집도 존재한다. 여기서는 표상의 내용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10) 그러나 철학적 의미로 보자면 좋지 않은 집은 진실하지 않은 집이다. 왜냐하면 이 집은 집의 개념과 목적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념과 실재의 통일이라는 이 같은 의미에서조차 진리는 그 자체로 여전히 형식적(formell)이다. 왜냐하면 실재는 개념에 적실(適實)해야(ADAQUAT) 하기 때문이다. 또한 [개념이 실재와 일치한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개념의 내용에 대해 [그 내용이 무엇인가 하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여전히 개념 자체도 형식일 뿐이기 때문이다. 개념의 폭넓은 내용과 관련해서는 잠시 논의를 중단하고, 나는 최고의 내용은 최상의 영원한 신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표현은 무규정적이며, 우리는 신적인 것에 대한 의식에 호소하는 것처럼 신적인 것에 대한 감정에 호소하기도 한다. 따라서 여기서 더 나아가 이 점에 대해 좀 더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철학적 진리는 개념과 실재의 통일이다. 두 표상들의 합치로부터 발생할 수 있는 그 같은 통일들이 많이 있을 수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개념과 실재는 사유 가능한 모든 규정들이 환원될 수 있는 보편적 표상들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진리는 일체를 포괄하는 이념 또는 신적인 것의 정의(定義, Definition)를 포함한다. 아니, 진리는 신적인 것 [30] 자체다. 모든 비신성(神性, Ungöttlichkeit), 시간성(Zeitlichkeit), 세속성은 개념과 실재라는 양자가 합치하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 그래서 신적인 것 자체는 유한성의 원리를 포함하지만, 신적인 것은 구별을 정립함으로써 다시 이 유한성을 통일로 회복한다. 이렇게 신성으로부터 발생한 유한성은 신성 자체를 제한한다. 육체와 실재가 그렇게 충분히 전개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영혼이 [육체에 덮여 감추어져 있고 그만큼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과 완전히 합치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사유하는 자다. 왜냐하면 개념이나 주체적인 것은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삼고 자기 자신을 객관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실재는 사유이자 개념 자체다. 따라서 이 같은 것이 위대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미 말한 최고의 이념으로서, 근대의 철학적 노력이 재부흥시킨 이념이기도 하다. 이것은 최고의 자유 개념이기도 하다. 내가 어떤 타자에 관계하고 낯선 것과 관련을 맺는 곳에서는 부자유가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념은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고 스스로를 (11) 자신의 대상으로 정립하지, 낯선 것을 정립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럴 경우에는 최상의 자유가 존립하게 된다. 사유는 최고의 보편성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사유는 모든 것을 포괄하며, 모든 대상을 사유 자신이 정립한 것, 사유 자신의 특수성으로 현상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유는 자기 자신을 아는 최고의 향유(Genuß)이기도 하다. 사유는 자기 자신을 대상화한다. 사유가 어떤 대상을 사유할 때 이 대상은 사유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유는 자기 자신을 대상화하며 자기 곁에 (beisich) 머물지, 타자 곁에 머물지는 않는다. 사유가 자신을 대상화하려면 마찬가지로 사유가 대상이어야 하며, 통일 상태에 그냥 머물러서는 안 되고 자신의 구별들을 정립해야만 하고, 이렇게 함으로써 다시 통일로 복귀해야 한다. 이러한 구별들을 정립할 때 우리는 유한성의 입장에 있는 것이지 총체성의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다. 진리는 자기표현을 위해, 자신의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자신의 구별들을 정립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진리의 표현과 계시(Offenbarung)가 바로 [31] 아름다움이다. 진리를 단순히 느끼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관한 표상을 지니고 진리를 사유하는 것이 정신의 관심사다. 진리는 정신의 실체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정신의 실체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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