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오버리: 피와 폐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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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오버리 (지은이),이재만 (옮긴이)책과함께

들어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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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서론 | ‘피와 폐허’: 제국주의 전쟁의 시대
제1장 | 국가-제국들과 전 지구적 위기, 1931-1940
제2장 | 제국의 환상, 제국의 현실, 1940-1943
제3장 | 국가-제국의 죽음, 1942-1945
제4장 | 총력전 동원하기


들어가며
8 우리의 현대적 감수성으로는 이 전쟁에서 어떻게 수십만 명이 잔혹행위와 테러, 범죄를 그토록 평범하게 자행할 수 있었는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들 대다수는 사디스트나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역사가 크리스토퍼 브라우닝이 기억하기 쉽게 표현한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지금의 내전과 반란에서도 매일 잔혹행위가 흔하게 자행되긴 하지만, 2차대전의 시대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제복을 입은 군인, 보안대와 경찰, 파르티잔, 민간인 비정규병 등이 수행하는 폭력적 강압, 투옥, 고문, 추방, 집단학살의 물결을 목격했다. 

한때는 2차대전을 평화를 사랑하던 국가들이 유럽에서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그리고 동아시아에서 일본 군부가 품었던 제국주의 야망에 군사적 대응을 한 것으로 설명하기만 해도 충분했다. 2차대전에 대한 서구의 표준적 서술과 소련의 공식 전쟁사는 연합국과 추축국의 무력 충돌이라는 서사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제 이 무력 충돌의 역사는 여러 탁월한 서술 덕에 철저히 이해되고 문서로 뒷받침되었으며, 그런 이유로 나는 전쟁의 전모를 다시 쓰지는 않을 것이다. 한편 군사적 결과에 초점을 맞출 경우, 비록 이런 서술도 중요하긴 하지만, 전쟁을 불러온 폭넓은 위기, 여러 전시 충돌의 상이한 성격, 전쟁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맥락, 나아가 1945년에 교전이 공식 종결된 이후에도 오래도록 이어진 불안정한 폭력에 대한 너무나 많은 질문을 회피하게 된다. 무엇보다 2차대전에 대한 종래의 견해는 히틀러와 무솔리니, 일본 군부를 위기의 결과가 아닌 원인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이들은 위기의 결과였다. 20세기 초 수십 년간 전 세계에 걸쳐 사회적·정치적· 국제적 불안정의 시절을 낳고 결국 추축국으로 하여금 제국주의적 영토 정복이라는 복고적 계획에 착수하도록 자극한 더 넓은 역사적 힘들을 이해하지 않고는 2차대전의 기원과 경과, 결과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9 이 새로운 2차대전 역사는 네 가지 주된 전제에 기반한다. 첫째, 종래의 전쟁 연대기는 더 이상 유용하지 않다. 전투는 1930년대 초 중국에서 시작되었으며, 중국과 동남아시아, 동유럽, 중동에서는 1945년 이후 10년 사이에 겨우 전투가 끝났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의 전쟁이 서사의 핵심을 이루긴 하지만, 이 분쟁의 역사는 적어도 일본이 만주를 점령한 1931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전쟁에 의해 촉발된, 그러나 1945년에 해결되지 않은 마지막 반란과 내전으로까지 이어진다. 더욱이 1차대전과 그 전후의 폭력이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세계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기에 두 차례의 거대한 충돌을 구별해서는 별로 얻을 것이 없다. 두 전쟁은 제국 위기의 마지막 국면에 세계 체제를 재편한, 두 번째 30년 전쟁의 각 단계로 여길 수 있다. 이 책의 구성은 이처럼 덜 관습적인 시간관을 반영한다. 1920년대와 1930년대를 대부분 배제하고는 전 지구적인 2차대전의 성격, 당대인들이 전쟁을 치르고 이해한 방식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둘째, 이 전쟁에 대해서는 태평양 전쟁을 하나의 부록처럼 여기면서 유럽 추축국의 패배로 국한된 사태로 이해해서는 안 되고 전 지구적 사태로 이해해야 한다. 

10 넷째, 이 세 가지 요인─연대기, 지역, 정의─모두 여기서 개진하는 주장, 즉 장기 2차대전은 마지막 제국주의 전쟁이었다는 주장으로부터 도출된다. 일반적인 2차대전 역사는 대부분 '강대국 간 충돌과 이데올로기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지만, 영토제국이 1931년부터 1945년의 엉망진창 여파까지 장기간 전쟁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중요하다는 논점을 놓치거나 얼버무린다. 2차대전에 대한 제국적 접근법은 전쟁을 편협한 레닌주의적 렌즈를 통해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여러 지역과 여러 형태의 분쟁을 연결한 것이 세계적 제국 질서의 존재였음을 그저 인정하는 것이다. 주로 영국과 프랑스가 지배한 이 제국 질서는 이른바 '못 가진' 국가들, 즉 일본, 이탈리아, 독일이 그들 자신의 제국 영역을 추가로 정복함으로써 국가의 생존을 확보하고 정체성을 표현하겠다는 허황된 야망을 품도록 자극했다. 최근 들어서야 역사가들은 추축 제국들이 기존 제국들을 모방하여 그들 자신의 전 세계적 '연계'를 형성했다고 주장했다. 1차대전 이래로, 혹은 더 일찍부터 제국 구상과 제국 위기는 2차대전의 기원과 경과의 얼개를 이루었다. 2차대전의 최종 결과로 500년에 걸친 식민주의가 막을 내리고 민족국가가 공고해진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무자비한 유럽 팽창의 세월이 지나고 유럽 수축이 진행되었다. 전통적인 식민 통치의 잔재는 1945년 이후 두 초강대국 미국과 소련이 새로운 세계 질서의 형성을 좌우하는 가운데 급속히 무너져갔다. 

 

서론
43 2차대전의 역사를 다루는 본서의 제목을 따온 위 인용문의 출처는 정치 경제학자 레너드 울프가 근대 제국주의가 20세기 초 현대 문명을 규정하는 데 중요하다는 점을 입증하기 위해 쓴 <제국주의와 문명>이다. 울프의 주장에 따르면 서방 세계는 1920년대까지 100년에 걸쳐 산업, 대중정치, 귀족층 쇠락과 함께 사회가 변혁됨에 따라 이례적인 혁명을 겪었다. 그것은 근대적 개념의 민족국가를 낳은 변혁이었지만, 울프가 저술한 시기까지 이어진 뚜렷한 제국 정복의 물결을 동반하기도 했다. 새로운 문명을 울프는 "호전적이고, 성전을 벌이고, 정복하고, 착취하고, 개종시키는 문명"으로 여겼으며, 제국에 관한 근래의 역사 저술은 대개 이 판단을 강화해왔다. 한줌의 식민국가들이 전 세계를 지배한 것은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45 1870년대에 쿠릴열도, 류큐 제도, 오가사와라 제도를 정복한 것은 당시 명칭인 대일본제국을 건설하는 첫 단계였다. 그 이후 50년간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주요 제국을 창출하려 했으며 그 결과가 1940년대의 세계대전이었다 .

46 그냥 국가가 아닌 '국가제국 nation-empire'은 영토 쟁탈전에 뛰어든 이런 국가들을 정의하는 용어다. 이른바 '제국주의의 국유화'는 1930년대와 폭력적 영토 획득의 마지막 물결에 이르기까지 줄곧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제국은 시민과 신민, 문명과 원시, 신식과 구식-1940년대까지 이 양극성이 제국주의 국가들이 자국의 통제 아래 들어온 주민과 영토를 바라보는 방식을 규정했다-의 대비를 부각시킴으로써 세계주의적 권력을 더 분명하게 규정하는 역할을 했다. 모든 제국주의 열강이 공유한 이 세계관은 피점령 영토의 기존 문화와 가치를 거의 전부 무시했다. 새로운 소비자부터 개종자까지, 제국이 제공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기대는 대부분 과장된 것이었다. 비르테 쿤드루스가 말한 '제국 환상'은 국가 간 경쟁을 부추기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47 1897년 독일 지리학자 프리드리히 라첼은 악명 높은 새 용어 '생존공간Lebensraum'을 고안하면서 현대의 우월한 문화들은 영토를 확장해 증가하는 인구를 위한 식량과 원료를 확보할 필요가 있고 이 목표는 오로지 '열등한' 문화들을 희생시키는 방법으로만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아돌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에서 학교에 다니던 때에 라첼이 저술한 <정치지리학>의 결론부를 이 미래의 독재자는 훗날 1920년대에 심복 루돌프 헤스와 논의했다. 

48 1904년 독일령 서남아프리카에서 한 의사는 "토착민 문제의 최종 해결 Endlösung은 토착민의 권력을 완전히 영원토록 깨트리는 것일 수밖에 없다"고 쓸 수 있었다. 역사가들이 두 시대 사이의 인과관계를 아무리 의심할지라도, 최종해결은 생존공간과 마찬가지로 국가사회주의의 발명품이 아니었다. 1914년 이전 독일 특유의 언어도 나치의 산물이 아니기는 마찬가지다.  

49 이런 현대 국가와 그 영토제국의 관계를 나타내는 '심상지도'는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던 시절의 역사적 현실과 거의 일치하지 않았다. 오히려 1945년 이후 영토제국이 허물어진 시기까지 '상상된 공동체'로서의 제국과 국가제국을 통해 현대적 정체성을 찾을 것이라던 국민 공동체가 실제로 부담한 비용과 위험 사이에는 줄곧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이는 주요 제국주의 열강인 영국과 프랑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51 유럽에서 1차대전 이전이 아름다운 시대belle époque였다는 생각은 유럽중심적 구성물이다. 전전시대에 유럽에서 세계 전역으로 폭력이 수출되었다. 

56 매우 분명한 의미에서 1차대전은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1914~1915년에 참전한 국가들은 전통적인 왕조제국이든 해외 제국 영토를 가진 국가든 간에 모두 제국이었다. 이 전쟁은 오래도록 결판나지 않는 소모전이 되었고, 그에 따라 국가제국의 생존 자체가 달렸다고 할 정도로 싸움의 판돈이 커졌다. 

61 제국의 결속은 전시 선전에서 중심 모티프가 되었고, 두 제국 모두 민주주의에 안전한 세계를 만들기 위한 전쟁이 역설적으로 비민주적 제국의 생존까지도 보장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 역설은 1918년 이후 모든 제국이 당면한 딜레마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하거니와, 20년 후 두 번째 주요분쟁을 낳은 제국주의의 역할을 설명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전후 제국들의 생존에서 핵심 문제는 민족성 원칙과 제국 관념을 조화시켜야 하는 난제였다. 관례상 이 문제는 1918년 1월 18일 미국 의회 연설에서 새로운 국제주의적 세계 질서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14개조'를 제시한 민주당 대통령 우드로 윌슨과 연관된다. 이 연설은 하룻밤 사이에 세계 전역에서 유명해졌는데, 윌슨이 제14조에서 "강대국과 약소국을 막론하고 정치적 독립과 영토 보전"의 권리를 거론했기 때문이다. 연설 말미에 윌슨은 모든 국민과 민족에게 "서로 동등한 자유와 안전한 여건에서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견해를 거듭 피력했다. 

61 사실 윌슨의 성명에서 끄집어 낸 '자결' 관념은 본래 1917년 3월 러시아에서 차르 체제가 전복된 뒤 혁명가들이 고안한 표현이었다. 아직까지 전쟁을 이어가려던 혁명 임시정부는 1917년 4월 9일 전쟁의 주목적이 "제민족의 자결에 기반하는 영구평화의 확립"에 있다고 발표했다. 1917년 11월 러시아 사회주의 운동의 급진 공산주의파인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은 이후 새 정부의 의장 레닌은 "모든 식민지의 해방, 모든 종속 민족, 피억압 민족, 비주권 민족의 해방"을 요청했다. 

63 영국 대표단과 프랑스 대표단은 윌슨을 설득해 장차 국제 질서의 주요 행위자가 될 국제연맹의 규약 초안에서 '자결'이라는 용어를 빼고 대신 기존 국가들의 영토 보전과 정치적 독립에 대한 약속을 집어넣을 수 있었다.

69 이탈리아, 일본, 독일이 국내 민족주의 정서에 따른 영토 해결책, 즉 영토가 넓고 자원이 풍부한 영국 및 프랑스 제국, 그리고 미국에 대한 영원한 종속 상태를 끝낼 수 있는 해결책을 선호한 이유를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70 일본 민족주의자들의 핵심 질문─도대체 무엇을 위해 대중국 및 대러시아 전쟁에서 '피의 희생'을 치렀단 말인가?─은 이탈리아 측에도 핵심 질문이었다.  

74 독일어의 '라움Raum' 개념은 영어의 '스페이스space'보다 함의하는 바가 더 많았다. 이 개념은 독일 민족Volk (역시 영어로 온전히 옮기기가 어렵다)이 종속 민족이나 이민족, 특히 급진민족주의 파벌에 따르면 세계주의적 '반민족'의 원형인 유대인을 희생시켜 독일인의 특별한 문화적 자질과 생물학적 인종적 속성을 이식할 영역을 의미했다. 

78 순응 기간은 1928~1929년 전 세계적 경기후퇴가 시작되면서 갑자기 끝났다. 장차 10년간 파국적 결과를 가져올 불황이었다. 역사가들의 중론은 이 경제 위기가 1919년 이후 세계 질서를 재구축하고 국제주의에 유익한 약속을 지켜가려던 노력을 망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여러 면에서 세계 경제의 붕괴는 1940년대에 전 세계적 전쟁으로 귀결된 위기를 조성했다는 점에서 1914년이나 1919년보다도 더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이제 이 위기의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재앙의 규모는 다시 살펴볼 가치가 있다.  

81 전 세계적 경기후퇴에도 불구하고 국내 경제발전에 별 영향을 받지 않은 소련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자본주의의 위기를 관찰하면서 무역 전쟁, 통화 전쟁, "시장을 차지하려는 격렬한 투쟁, 극단적인 경제민족주의가 당대의 질서에서 전 세계와 세력권을 새롭게 재분할하는 수단으로서의 전쟁을 야기해왔다"고 판단했다. 스탈린의 판단은 역사가들에게 항상 좋은 평가를 받진 못하지만 이번만큼은 실제로 벌어진 사태에 의해 옳은 것으로 입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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