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익진: 현대한국불교의 방향
- 책 밑줄긋기/책 2023-25
- 2025.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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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한국불교의 방향 | 고익진 - ![]() 고익진 (지은이)담마아카데미 |
책 머리에
1. 현대 한국불교의 방향
2. 한국불교 전통계승의 문제
3. 한국 불교사상 이해의 반성
4. 일불승의 보살도
5. 신라승의 국가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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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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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한역 불교근본경전 발간에 부침
20. 불교와 기독교
21. 전법의 자세
22. 종교간의 대립과 불교의 관용
23. 불교와 하느님 신앙
부록1: 불교 칼럼
부록2
183 연기를 고찰할 때 '나'의 실재성은 부정되지만, 그러나 그러한 '나'가 아주 없다는 것은 아니다. 연기설은 오히려 그러한 '나'의 발생 과정을 설명해 주는 교설이고, 이러한 성질의 연기설이 불교 안에 뚜렷하게 존재해 있다는 것은 그러한 '나'가 없지 않음을 뚜렷하게 표시해 주고 있다고 해야 한다.
여기에 곤란한 문제가 발생한다. '나'는 '없지만 있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어떻게 성립할 수 있을까. 있음과 없음은 모순 개념이므로 그 둘은 동시에 성립할 수가 없다.
아함의 이론적 중도설은 이러한 문제를 무난히 해결해 주고 있다. 그 내용은 '세간의 집을 여실히 정관할 때 세간이 없다는 견해가 일어나지 않고, 세간의 멸을 여실히 정관할 때 세간이 있다는 견해가 일어나지 않는다. 여래는 이 두 끝을 떠나 중도를 설하나니 그것은 곧 연기' <잡아함 10, 고려 18.799b>라는 것이다. 이것은 없음과 있음을 차라리 다같이 부정함에 의하여 그 둘을 한 개념 속에 통합하여 논리적인 성공을 거둔 것이다.
따라서 무아설의 무아도 '나'는 없지만 아주 없다는 뜻이 아니다. '나'는 없지만 그러나 아주 없지 않다는 그러한 뜻을 담은 중도적인 무아이다. 왜 그러냐면, 그것은 연기에 입각한 연기무아설이기 때문이다.
구사론은 이러한 '나'를 '거짓 나'라고 하고, 그러한 '나'는 실로는 없지만, 거짓으로는 있음이 허용되며, 이러한 거짓 '나'의 허용은 지혜의 일부에 속한 것으로 보고 있다. '나'는 본래 없지만 '나'를 여의는 줄기찬 실천이 요구됨은 불교의 무아설이 이와같이 중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무명이 완전히 다하여 '온'의 '나'가 없어질 때까지 무아의 실천은 행해지지 않으면 안된다. '나'가 본래 없음을 아는 것만으로는 해탈이 아니다. '지성'이 불교에서 인정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불교의 무아설이 이와같이 중도적인 것이라면, 업의 주체 문제가 제기될 필요가 없다. 업의 주체는 '아주 없지도 않은' 로 그 '온'의 '나'이기 때문이다. 관심은 차라리 그러한 '온'이 생사에 윤회할 때 어떠한 모양을 띠느냐에 집중되어야 한다.
이 물음에 대한 아함의 답을 우리는 서론에 인용한 경설 가운데서 '이 음이 멸하고 다른 음이 상속한다'는 곳에서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귀중한 시사는 얼른 보아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없지 않다. 그 경설에서 '음'은 '온'과 같은 말이므로, 무명에 연하여 행이 일어나고 행에 연하여 식. 명색·육처·촉·수·애·취·유·생·노사가 일어나 하나의 집합체를 이루고 있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것에는 무명에서 노사에 이르는 십이지가 다 갖추어 있다고 해야 한다. 이러한 '음'이 멸한다고 함은 무명을 비롯한 십이지가 다 멸한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무명은 죽음에 의해서 멸하는 것이 아니다. 무아의 실천이 완성될 때라야 비로소 멸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만일 무명이 멸한다면 다른 '음'을 상속시킬 근거는 어디에 남는다는 말인가. '이 음이 멸하고 다른 음이 상속한다'고 하지만 '음'의 완전한 멸은 생각할 수가 없다. 어떤 형태로든지 남아 있다고 보아야 한다.
부파불교 시대에 항속적인 심의 존재를 상정한 것, 예를 들면 독자부의 비즉비리온, 화지부의 궁생사온, 경량부의 일미온 등은 그러한 생각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연기를 다시 고찰해 볼 때, 그러한 항속적인 심식의 존재는 상정할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된다. 제2절에서 무명은 실재하는 것에 대한 무지로 말미암아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알고 있음이고, 행은 그렇게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하게끔 하는 형성 작용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추상적인 말이다. 실재하는 것과 실재하지 않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이며, 그 둘은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아함에는 물론 이에 대한 설명이 없지만, 간접적으로 어느 정도 그것을 밝힐 수가 있다. 십이연기설에서 온의 속성을 규정짓고 있는 근본 요인은 무명이고, 온은 그 결과이다. 따라서 '온'의 속성을 알 때 이로부터 무명의 성질을 알아낼 수가 있다.
아함에서 '온'의 '나'는 불변의 주체로서 나타난다. 비담가의 술어에 의하면 '상일·주재'의 속성을 띤다. 그렇다면 무명은 가변의 객체를 불변의 주체로 보는 착각이다. 그리고 행은 그러한 가변의 객체를 불변의 주체로 형성하려는 의욕이요, 작용이다. '나'는 이런 행에 의하여 형성·유지되고 있는 '온'이다.
무명과 행을 구체적으로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이 음이 멸하고 다른 음이 상속한다'는 경설이 쉽게 이해된다. 행은 언젠가는 무상하지 않을 수 없다. 왜 그러냐면 그것은 가변의 객체를 불변의 주체로 형성하려는 작용이므로 힘이 들고, 이 힘의 한계를 넘으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럴 때 '온'은 파괴되는데, 이것이 십이연기 최후 지분인 '죽음'이며, 경설의 '이음이 멸하고'의 뜻이다.
이러한 온의 파괴는 행에 의하여 억제되고 있던 법의 가변성이 변화를 수행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렇게 변화를 수행하는 순간, 달라진 법 위에 새로운 무명이 놓인다. 왜 새로운 무명이 놓이는가 하면 이전에 무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이전의 무명과 새로운 무명이 동일하다는 뜻이 아니고, 십이연기설의 이해에 있어서, 앞의 무명의 발생을 시인했다면 달라진 법 위에서도 그것을 시인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무명이 놓이면 이것을 연하여 행·식 등이 일어나 온을 형성하는데, 이 '온'은 이전의 '온'과 다른 것이고 또 이전의 온이 멸하는 순간 형성된다. 그러므로 '다른 음이 상속한다'는 경설은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다. 무아 실천에 의하여 나를 없애지 않는 한, 온의 상속은 계속하여, 아함의 표현을 빌리면 '상도 아니고 단도 아니다.' 이것이 생사윤회의 모습이다.
이상과 같이 생각해 볼 때 아함의 무아윤회설은 이론 적정연함이 시종일관한다. 거기에 비즉비리온·궁생사온·일미온과 같은 항속적 심식을 상정할 필요가 없다. 아니, 상정해서는 안된다. 그런 것의 상정은 오히려 무아윤회의 정연한 이론체계를 손상시키기 때문이다.
불교의 무아설은 단순한 무아설이 아니라 연기에 입각한 연기무아설이다. 그것이 부정하고 있는 '나'는 무명에서 연기한 '온'의 '나'로서, 참다운 아트만의 부정이 아니다. 참다운 아트만은 '나'의 부정을 통해서만 나타나고, 추호라도 '나'의 긍정이 있으면 나타나지 못한다. 불교가 무아설에 시종일관함은 이 때문이다.
연기무아설에서 '나'는 부정되지만, 그러나 절대적으로 없다는 말은 아니다. 절대적으로 없지는 않은 이 '나'가 업보·윤회의 주체이다. 따라서 연기무아설은 있음과 없음의 두 끝을 떠난 중도로서, 이것을 윤회설과 모순된다고 봄은 잘못이다. 업설을 '불교 안에 채택된 하나의 통속적인 종교 관념' 이라고 함은 삼가해야 한다.
문제성이 있는 것은 무아윤회설이 아니라 오히려 우파니샤드 등의 유아윤회설이다. 아트만을 범아일여의 경지에까지 심화해 놓고 아직도 그것을 윤회의 주체라고 한다면, 이론적으로 해탈은 있을 수 없다. 그러한 해탈이란 그러한 아트만에 계합함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아트만이 윤회하고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불교의 무아윤회설은 유아윤회설의 이러한 이론적 결함을 멀리 뛰어 넘었다. 그의 윤회와 해탈의 이론체계는 참으로 정연하다. 그것은 유아윤회설의 결함을 지양하여 발생한 듯한 느낌마저 준다. 어떻든 불교의 무아설이 나타난 뒤에는 인도의 정통적인 사상계에서도 아트만을 윤회의 주체로는 보지 않게 된 것 같다. 이것은 불교가 인도사상에 끼친 중요한 공헌의 하나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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