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중국사학명저中國史學名著(20) ─ 新五代史, 新唐書

 

2025.12.06 δ. 중국사학명저中國史學名著(20) ─ 新五代史, 新唐書

첸무, ⟪중국사학명저강의⟫(錢穆, 中國史學名著)
텍스트: buymeacoffee.com/booklistalk/ChienMu-10

 

구양수歐陽脩, 신오대사新五代史
• 시대상황時代狀況과 학술學術, 특히 문학文學
당唐은 불학佛學이 융성하던 시대. 문학文學에 있어서는, 당시唐詩와 송시宋詩가 각각의 장점이 있으므로 어느 것이 더 뛰어나다 할 수 없으나, 고문古文은 송대宋代에 더 성행하였다. 
유학儒學도 송대宋代가 더 융성했다. 송대宋代가 쇠약衰弱한 시대이기는 하나 학술學術이 반드시 시대의 성쇠盛衰와 상응相應하는 것은 아니다. 

• 사학史學의 전개
1. 춘추春秋에서 사기史記에 이르는 시기. 중국사학中國史學의 황금시대黃金時代. 춘추전국春秋戰國이라는 쇠란衰亂의 시대가 배경 
2. 후한말後漢末부터 당초唐初 유지기劉知幾의 사통史通에 이르는 시기. 이때도 쇠란기衰亂期에 해당. "문제가 발생하면 머리를 돌려 지나온 길을 살펴보는 것처럼, 쇠란의 시기에 사학이 흥성" 
3. 송대宋代의 사학史學은 비교적 시대요구에 맞게 대응 
4. 명말청초明末淸初. 중국 역사상 가장 큰 변화의 시기. 사학은 새로운 싹이 보였을 뿐 흥성興盛하지는 못했다. 건가연간乾嘉年間 이후 시대가 번성하자 학술은 이상적이지 못한 방향으로 나아갔고 사학도 마찬가지. 
  건륭제乾隆帝(在. 1735-1796), 가경제嘉慶帝(在. 1796-1820)
5. 청말민초淸末民初. 고난의 시기, 고 전환하는 변화의 시기

• 신오대사新五代史는 관찬官撰이 아닌 사찬사서私撰史書.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도 사찬私撰
그가 죽은 후 조정에서 조서를 내려서 원고를 국자감에서 인쇄

• 춘추春秋를 본받고 있다.
"포폄은 춘추를 본받았기 때문에 그 의리가 매우 엄했고, 서술은 사기를 본받았기 때문에 그 문장이 매우 고상하고 간결했다" (포폄조춘추褒貶祖春秋 고의례근엄故義例謹嚴 서술조사기敍述祖史記 고문장고간故文章高簡) 
"사관이나 학자들은 그 문채가 뜻을 펴기에 부족하고, 도학은 서술과 저작을 계승하기에 부족했다. 오직 구양수가 분개하여 스스로 사마천과 반고의 역할을 자임했다." (사관병필지사史官秉筆之士 문채부족이요무궁文采不足以耀無窮 도학부족이계술작道學不足以繼述作 유구공개연자임천고惟歐公慨然自任遷固) 

• 이전에 설거정薛居正의 《오대사五代史》와 비교
"설거정의 구오대사는 좌전처럼 사실의 본말이 상세하게 잘 갖추어 있고, 구양수의 신오대사는 공양전과 곡량전처럼 춘추의 의리를 말하면서 포폄이 분명하지만 내용 가운데 틀린 부분이 많다." (설사여좌씨지기사薛史如左氏之紀事 본말해구이단제다류本末賅具而斷制多流 구사여공곡지발례歐史如公穀之發例 포폄분명이전문다류褒貶分明而傳聞多謬) 
 

• 조익趙翼, 왕명성王鳴盛 ─ 신오대사의 장점, 구오대사의 나은 점등을 평가

• 구오대사는 정사正史를 따른 것으로 자료를 망라해서 정리한 것. 신오대사는 역사를 서술하는 뜻과 원칙이 있었다. 그저 자료를 정리한 것을 역사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전목 선생의 중국사학명저, 오늘은 구양수의 신오대사新五代史와 신당서新唐書, 이 두 개의 텍스트를 다루고 있는 부분에서 신오대사新五代史에 관한 일반적인 이야기를 해보겠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중국의 문필가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라고 말을 하는데, 구양수歐陽脩는 여기에 속하는 사람이다. 당송팔대가에는 일단 당나라 사람들은 두 명있는데,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이고, 송나라 사람들이 나머지 여섯인데 또 그 중에 셋은 소씨 집안 사람들로 소순蘇洵, 소식蘇軾, 소철蘇轍, 소식蘇軾에 해당하는 사람이 소동파蘇東坡이다. 소순蘇洵이 아버지고, 소식蘇軾과 소철蘇轍이 아들들이다. 그 다음에 구양수歐陽脩, 증공曾鞏, 왕안석王安石이 있다. 그렇게 해서 8명인데, 왜 당나라 사람은 2명이고 송나라 사람이 6명인가. 이것에 대한 얘기는 전목 선생이 하고 있다.  

신오대사新五代史라고 하는 것은, 당나라가 멸망한 다음에 화북華北 지방에서는 5개의 왕조가 이어졌고 그 아래 화남河南 지방에서는 10개의 나라가 쭉 이어졌다. 그래서 오대십국시대五代十國時代이다. 한 70년 정도밖에 안 된다. 이 와중에 북쪽 지역에서는 5개 나라 아래쪽에서는 10개의 나라 이렇게 진행이 되었다. 그리고 북쪽을 송나라가 통일했다. 그래서 북송北宋이라고 한다. 이때 이름은 중국에서 흔히 쓰이는 것들이 또 쓰였는데, 북쪽은 양, 당, 진, 한 그다음에 주라고 했다. 이는 예전에 있던 이름들로 그러다 보니 후량後梁, 후당後唐, 후진後晉, 후한後漢, 후주後周라고 되었던 것이다. 이제 아래쪽에는 또 오나라, 월나라, 민나라, 한나라, 북한, 남한, 남당, 초, 그다음에 형남으로 이때까지만 해도 나라 이름을 그 지역 이름을 따서 지었다. 원元 나라 때부터 나라의 이름이 달라진다. 몽골 사람들이 중원으로 들어와서 나라 이름을 지을 때 몽蒙이라고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실 몽蒙이라는 단어는 무지몽매하다고 할 때 몽蒙 자이다. 중국에서 몽골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멸칭으로 사용하던 것이다. 사실 몽골이라는 것은 그런 뜻이 아닌데 음차를 해서 한자로 쓸 때 그렇게 썼다. 그러니 그때부터 추상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원나라를 몽골 사람들이 세운 나라라고 해서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 그 당시만 해도 그 세계를 호령하던 나라이고 군사적으로도 그렇고 안목도 있던 나라이다. 다양성을 용납한다 라는 측면에서 보면 훨씬 더 큰 나라이다. 그러니 제가 보기에는 나라 이름을 지은 것으로 봐서 중국 사람들보다도 공간에 있어서의 추상적 사유는 굉장히 탁월한 어떤 면모를 갖고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래서 나라 이름을 으뜸 원元을 써서 원 나라 라고 지은 것이다. 그다음이 명明 나라이다. 초대 황제인 주원장은 남경 사람으로 나라 이름을 남이라고 짓지 않았다. 한 번 나라 이름을 추상적인 것으로 나아가 버렸기 때문에 이제 되돌릴 수가 없다. 게다가 주원장은 반원 정책을,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그 사람이 내건 기치가 한족 민족주의이다. 원나라는 근원이라는 뜻이라고 한다면 밝을 명明은 하늘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다음에 나온 청淸 나라는 또 다시 만주족이 세운 나라, 원래는 여진족이다, 그 나라는 맑을 청淸 자를 썼다. 순수하다는 뜻도 있지만 진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하늘의 이치를 가리키는 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돌아와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에서 왜 당나라는 2명인데 송나라는 6명이나 되는가. 당나라는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 밖에 없는데, 이백은 어디다 두고, 당시로 유명한 두보는 왜 문장가로서 안 넣었을까. 당송팔대가에서 문장가라고 할 때 그 문장이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것에 차이가 나지 않겠나 라고 일단은 추정을 해 봐야겠다. 이런 추정을 놓고 전목 선생의 설명을 살펴보자면 당나라는 불학佛學이 융성하던 시대이다. 사실 한나라 때 훈고학이 있었지만 상당히 유학의 본래 정신이 흐려진 상태에 있었다. 그러다가 당나라는 불교학이 융성하던 시대이다. 당나라 불교가 융성했고 그게 한반도로 전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문학에 있어서는 당시唐詩도 있고 송시宋詩도 있는데 우리가 당시삼백수唐詩三百首는 얘기해도 송시삼백수는 잘 얘기하지 않는다. 당나라는 시가 탁월해다. 시는 산문이 아니고 운문이다. 운문이 탁월한데 산문은 약한 것이다. 그러니까 당송팔대가에서 당나라 사람 중에서 시도 쓰고 산문도 쓴 사람을 골라 보니까, 시는 썼는지 안 썼는지는 별로 관심이 없고 당나라에서 글 좀 썼다 하는 사람들 중에서 산문이 좋은 사람을 골라 보니까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이 나온 것이다. 그다음에 송나라에서는 산문이 좋다 라는 사람을 골라보니까 6명이 나온 것이고 당나라는 2명밖에 없더라 라는 얘기인 것이다. 그래서 당시唐詩가 사실은 좀 더 평가를 받는다.  

전목 선생은 당시唐詩와 송시宋詩가 각각의 장점이 있으므로 어느 것이 더 뛰어나다 할 수 없으나 어쨌든 고문古文은 송대宋代에 더 성행하였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병려문騈儷文이 아니라 고문古文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송대에도 성행했고, 그러니 당연히 송나라 때 고문으로 글을 쓴 사람들이 더 많았다는 얘기이겠고, 그에 따라 고문을 기준으로, 그러니까 당송팔대가를 고른 기준은 고문古文을 얼마나 탁월하게 썼는가를 가지고 기준을 삼게 된 것이다. 그다음에 경학은, 경전을 읽는 것은 송대宋代가 더 융성했다. 이것은 당나라 때에는 불학이 융성했다 라는 말과 대비가 된다. 불경을 열심히 했는데 불경은 아직 경전이라고 간주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여기서 주의해서 볼 만한 때가 있다. 중국의 역사에서 아주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데, 중국 역사 전체를 이렇게 볼 때 가장 국력이 쇠약한 시대가 송나라 때이다. 그런데 상업이 발전하고 문물이 풍요로웠던 시가 또 송 나라 때이다. 그러니까 과연 어떤 나라에서 사는 게 좋은가. 학술의 융성이라고 하는 것이 반드시 시대의 성쇠와 상응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불학이 융성했던 게 당나라 때이고 경학이 융성했던 게 송나라 때이다.  

역사학은 도대체 어떤 경로를 밟아왔는가. 춘추春秋에서 사기史記에 이르는 시기는 중국사학中國史學의 황금시대黃金時代이다. 그런데 의아하게도 이 시기가, 전목 선생은 약간의 일반화를 하는 것 같은데, 여기서 춘추전국이라는 쇠란의 시대가 배경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어지러우면 역사학이 발전한다. 문제가 발생하면 머리를 돌려 지나온 길을 살펴보는 것처럼, 쇠란의 시기에 사학이 흥성한다는 얘기를 한다. 약간 설득력이 있으나 역사학이라는 게 그렇게 발전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영국의 제국시대를 생각해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그다음에 후한말後漢末부터 당초唐初 유지기劉知幾의 사통史通에 이르는 시기 이때도 역사학이 발전했는데 이때도 쇠란기에 해당한다. 정작 한나라 때는 그다지 역사학이 발전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다음에 송대宋代의 사학史學은 비교적 시대의 요구에 맞게 대응했다. 송나라 때 사학은 그다지 발전하지 않았는데 여기에 신오대사新五代史와 신당서新唐書가 있다는 것이다. 그다음 명말청초明末淸初는 중국 역사상 가장 큰 변화의 시기이다. 정말 대규모의 변화의 시기이다. 중국 역사에서 이때가 쇠락의 시기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새로운 사학이 싹텄을 뿐 흥성興盛하지는 못했다. 특히나 청나라 전성기가 건륭제乾隆帝와 가경제嘉慶帝, 그들의 연호를 묶어서 건가연간乾嘉年間이라고 말한다. 이때는 중국이 굉장히 발전한 때이고, 지금 오늘날 현대 중국의 영토는 바로 건륭 황제 때 확장해 놓은 것이 전부이다. 그다음에 청말민초淸末民初는 고난의 시기이고 전환하는 변화의 시기이다.  

신오대사新五代史의 텍스트 자체를 살펴보면 관찬官撰이 아닌 사찬사서私撰史書라고 말한다. 과거에 나와 있는 사기史記,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 이런 것들 다 사찬사서私撰史書이다. 그래서 그가 죽은 다음에 조정에서 조서를 내려서 그 텍스트가 괜찮다고 하니 원고를 국자감에서 인쇄를 했다. 그래서 국자감에서 인쇄했으니까 관찬사서官撰史書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사실은 자기가 알아서 쓴 것이다.  


평가들이 몇 가지 있는데 우선 "포폄은 춘추를 본받았기 때문에 그 의리가 매우 엄했고, 서술은 사기를 본받았기 때문에 그 문장이 매우 고상하고 간결했다." 의리가 매우 엄했다는 것은 판단이 엄정했다는 얘기이겠다. 춘추를 본받았다고 하면 이제 춘추필법春秋筆法이란 얘기했으니까 그렇다. 그러니까 춘추와 사기를 본받았으니까 역사책으로는 이보다 더한 게 어디 있겠는가. 칭찬으로는 최고이다. 포폄조춘추褒貶祖春秋 고의례근엄故義例謹嚴 서술조사기敍述祖史記 고문장고간故文章高簡. 포폄은 춘추를 본받았다. 그런 까닭에 의리는 근엄하다. 서술은 사기를 본받아서 문장이 고상하고 간결했다. 

그다음에 관찬官撰이 아닌 사찬私撰이라고 했는데, 구양수가 왜 이것을 혼자 나서서 했는가. "사관이나 학자들은 그 문채가 뜻을 펴기에 부족하고, 도학은 서술과 저작을 계승하기에 부족했다. 오직 구양수가 분개하여 스스로 사마천과 반고의 역할을 자임했다." 공부 좀 잘하는 사람들이 사관이 아니었던 것이다. 유지기劉知幾의 사통史通을 보아도 나온다. 역사책을 쓰기 전에 역사책 쓰는 법부터 써봐야겠다라고 나온 게 사통史通이다. 그것은 역사책이 아닌 역사론이다. 그런데 또 전목 선생은 그 역사론이 별 거 아니라고 말한다. 유지기劉知幾는 역사론은 잘 썼을지는 몰라도 역사책을 쓴 게 아니기 때문에 자기가 말한 대로 써내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까 약간의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가 있는 것이다. 가령 탁월한 역사책을 쓴 사람한테 역사론을 하나 써보라고 하면 그다지 훌륭한 게 나올 것 같지도 않은 느낌이 있다. 그러니까 "사관이나 학자들은 문채가 뜻을 펴기에 부족하고", 사관이라고 하는 자들 중에는 유지기劉知幾도 포함이 되는 것이다. 사관병필지사史官秉筆之士 문채부족이요무궁文采不足以耀無窮 도학부족이계술작道學不足以繼述作 유구공개연자임천고惟歐公慨然自任遷固. 여기서 도학은 오늘날 성리학이다. 이 사람들은 문장을 잘 쓰고 하는 것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러니까 북송에서 도학을 하는 사람들은 당송팔대가 안에 못 들어간다. 소동파蘇東坡나 왕안석王安石 같은 사람은 도학자가 아니다. 도학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내면의 심성을 가다듬는 것이 유학의 진정한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천고遷固는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를 가리키는 것으로, 스스로를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의 자리에 올려놓았다는 말이다. 사람들의 평가가 이렇게 굉장히 좋다. 

그다음에 설거정薛居正이라는 사람이 쓴 오대사五代史가 이미 있었다. 오대사五代史가 2개이니 그것을 구오대사라고 하고 구양수의 것을 신오대사라고 말한다. "설거정의 구오대사는 좌전처럼 사실의 본말이 상세하게 잘 갖추어 있고, 구양수의 신오대사는 공양전과 곡량전처럼 춘추의 의리를 말하면서 포폄이 분명하지만 내용 가운데 틀린 부분이 많다." 설사여좌씨지기사薛史如左氏之紀事 본말해구이단제다류本末賅具而斷制多流 구사여공곡지발례歐史如公穀之發例 포폄분명이전문다류褒貶分明而傳聞多謬. 설거정薛居正의 대사五代史와 구양수歐陽脩의 신오대사新五代史의 차이를 말한 것이다.  

그 뒤로도 조익趙翼이라든가 왕명성王鳴盛이라든가 이런 사람들의 평가가 있었는데 전목 선생의 총평을 보면 구오대사는 정사正史를 따른 것으로 자료를 망라해서 정리한 것이다. 그리고 신오대사는 춘추를 따랐다 라고 하는 것에 초점을 두는데, 역사를 서술하는 뜻과 원칙이 있었다. 이건 다음 주에 설명을 할 얘기이다. 그러니까 구양수는 그저 자료를 정리한 것을 역사라고 여기지는 않았다고 보고 있다. 다음 주에 설명할 부분으로 의법을 따랐다는 것에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춘추를 따른다고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을 말하는가. 예를 들어서 《혁명의 봄》은 역사책인데, 오늘날 우리가 역사책을 평가하는 기준과 과거의 역사 책을 평가하는 기준이 다른데, 그것이 다르다 할지라도 과거의 기준으로부터 우리가 배울 만한 게 있을 것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하는 것도 한 번쯤은 생각해 볼 만한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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