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종교란 무엇인가(3)

 

2026.01.21 📖 종교란 무엇인가(3)


콰메 앤서니 아피아의 종교에 관한 얘기를 읽고 있다. 종교라고 하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 도대체 종교 따위를 우리가 신경을 쓸 필요가 있겠는가. 종교도 마찬가지고 철학도 마찬가지고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순간만을 살아가는 사람, 당장의 내 눈앞에 놓여 있는 것들을 내가 쟁취하고 그것을 통해서 만족을 얻으면 내 삶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것을 define하고 규정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사실 사람은 동물과는 다르게, 케임브리지 세계사 제1권 《세계사의 탄생》을 읽어보니까 인류학하고 역사학하고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인류학은 역사학에게 어떤 기여를 했는가 하는 부분을 읽어보니까, 역사학은 복합 사회를 다루고 인류학은 단순한 사회를 다룬다. 그러니까 인류학은 단순한 사회를 다룬다고 해서 의외로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단순한 사회라고 해서 단순하지 한다.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은 아주 복잡하다. 그러니까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내가 내 눈앞에 있는 것들을 쟁취하고 그다음에 그것으로부터 만족을 얻으면 그만이다. 그런 것을 가지고 따지고 궁리하고 규정하고 하는 것은 그렇게 의미가 없다. 이런 것들은 의미가 없다 라고 생각하는 것조차 이미 굉장히 사회화되어서 의미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사실은 자기의 삶의 기반을 무너뜨리는지 모르고 있는, 그러니까 자신이 의미 있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던 것이 사실은 굉장히 의미 없는 것일 수도 있고 큰 해악을 끼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라는 것들을 따져보는 것이다. 종교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아무 쓸모 없고 종교가 우리에게 끼치는 것은 해악뿐이야 라고 하는 것, 사실 요즘에는 워낙 기독교적 종교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그런 이단 종파들이 지나치게 사회의 해악을 많이 끼치다 보니까 종교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 다 쓸데없다 라는 얘기를 한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한테 종교는 어떤 의미가 있고 종교의 정의를 어떻게 해야 되고 이런 얘기하면 바로 무의미하다고 얘기를 할 것이다.  

종교는 본질적으로 이러이러한 것이다 라고 지난번에 종교의 정의에 대해서 논의한 것들을 보면, 존 스튜어트 밀은 이렇게 말하고, 허버트 스펜서는 이렇게 말하고, 그다음에 에드워드 타일러는 이렇게 얘기했고, 그다음에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는 이렇게 얘기했고, 에밀 뒤르켐은 뭐라고 얘기했고 하는 것들, 이런 것들 보면 종교의 정의이다. 그것에 속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무엇인가 하는 것을 따져 묻는 것, 그게 바로 이제 그 사람들에게는 종교를 정의하는 아주 중요한 그런 일이 되었을 것이다. 종교를 정의한다고 하는 건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이것이 바로 종교에 속하는 것이다, 정의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본질적으로 이런 것들이 종교에 속하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을 따져 물었다. 반드시 포함되는 것, 예를 들어서 이것을 본질주의적 정의라고 하는데, 본질에 근거해서 정의를 내리는 것,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어떤 존재인가, 인간은 요러요러한 DNA를 갖추고 있고 반드시 이것을 갖추고 있고 하는 것들, 또는 무엇을 은행나무라고 하는가, 은행나무란 무엇인가, 본질을 따져 묻는 것이다. 이것이 없으면 은행나무일 수 없는 것,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반드시 종교라고 하는 것은 이러이러한 것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라고 말하는 게 종교이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하다 보니까 생물학적인 유기체,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라면 반드시 이걸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 그런데 그것을 갖추고 있어도 우리는 저게 사람 되긴 글렀어 라는 말을 한다. 그럴 때는 무엇이 그의 본질을 규정하는가를 또 많이 생각을 해 봐야 한다. 그럴 때는 우리가 이렇게 얘기를 한다. 사람의 탈을 썼지만 사람은 아니야.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사람의 탈을 썼다라고 하는 것은 사실 탈을 쓴 게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생물 유기체는 갖춰졌다는 것이다. 저 사람이 생물학적으로는 인간이 맞으나 인간답지 못하다 라고 하는 건 사람 노릇을 안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면 마땅히 해야 할 짓을 안 한다는 것이다. 그가 하는 행동, 행동에 근거해서 보면 사람이라고 말하기는 좀 어렵더라 라는 것이다. 바로 그게 기능이다. 어떤 기능을 갖고 있지 않을 때 우리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뭔가를 define한다고 할 때는 두 가지 방식을 쓴다. 하나가 본질주의적 정의, 그것에 본질적으로 들어가 있는 것을 살펴보는 것아 하나가 있고 두 번째로는 기능주의적 정의이다.  

지난번에 본질주의적 정의를 아무리 하려고 해보아도 그게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냈다. 결국에는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마지막에 게오르크 짐멜은 하나의 단어가 신비를 풀어줄 것이라는 ‘열려라 참깨(Open Sesame)’의 꿈을 일축했다. 그리고 윌리엄 제임스도 그렇고 심지어 제인 앨런 해리스는 종교라는 것을 아예 정의하기를 거부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종교라고 하는 것은 본질주의적으로 정의하기가 어렵다는 걸 알았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종교라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딱 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이것은 반드시 사회생활을 하는 인간들, 인간 집단 속에서 규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일종의 인간이 만드는 규약을 가지고 정의를 하는 수밖에 없는 그런 것이다. 그렇다면 이럴 때 나오는 것이 기능주의적 정의이다. 인간은 본래적으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종에 속한다. 그런데 그렇게 태어났어도 사람답지 못한, 사람이 해야 할 일을, 사람의 기능을 행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기능주의적 정의가 나오는 것이다. 기능주의적 정의의 대표적인 사람은 에밀 뒤르켐이다. 종교가 무엇을 하는지, 그러니까 종교의 기능은 무엇인지, 그렇다고 해서 종교가 무엇인지를 밝혀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요러요러한 것들을 하는 것을 우리는 종교라고 해보면 좋겠다 라는 얘기는 할 수 있다. 그런데 개인에게 위안을 주고, 뭔가 좀 사람이 바뀌었다는 것을 드러내 보여주고, 그다음에 권력을 정당화하고 이런 역할을 하면 종교 아닐까 하는 것, 이런 것에도 심각한 문제이 있다. 기능주의적인 정의라고 하면, 무엇을 그것이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서 극단적인 예인데, 기능주의의 한계라고 할 때 잘 드는 얘기가 있다. 물가에 가서 물고기를 잡는 낚싯대가 있다. 낚싯대란 무엇인가. 물고기를 잡는 데 사용하는 도구가 낚싯대이다. 마대자루를 가지고 고기를 잡는다고 해보자. 그러면 그것을 마대라고 부르지 않고 그물이라고 불러도 된다. 그것이 하고 있는 일을 따서 그것에 이름을 붙이면 된다. 하얀 고양이든 까만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고양이라고 말해버리면, 어떤 동물이든지 쥐를 잡으면 고양이라고 우리가 부를 수 있는가 하는 것도 있다. 낚시대 같은 것은 극단적인 기능주의적 정의의 사례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종교라는 것도 그러한가. 뒤르켐의 추종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기능을 전면에 내세워서 사회를 결속하고, 개인을 위로하고, 그다음에 뭔가 바뀌었다는 것을 드러내 보여주고, 권력을 정당화하는 메커니즘이 종교인가. 그러면 조폭 집단도 종교가 있을 수 있다. 기능은 여기 나온 것처럼 종교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다 보니까 종교에 대한 기능주의적인 정의는 결국에는 그렇게 쓸모 있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 이제 덧붙여서 클리퍼드 기어츠의 공식이 있다. 클리퍼드 기어츠는 종교를 상징들의 체계로 보았다. "강력하고, 광범위하며, 오래 지속되는 기분과 동기powerful, pervasive, and long-lasting moods and motivations"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면 강력하고, 광범위하며, 오래 지속되는 기분과 동기를 보고, 클리퍼드 기어츠의 종교 정의는 상징 체계인데, 이것을 보고 공부가 떠올랐다. 공부는 강력하다. 공부를 안 하면 스트레스 받는다. 어떤 때는 공부 그만하고 싶은데 살아있는 한은 공부를 안 할 수가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 공부를 그만하려면 죽는 수밖에 없어 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저에게는 오래 지속되는 기분과 동기는 공부이다. 여기 나온 것처럼 지나치게 범위가 크게 잡혀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까 정치 이데올로기들도 종교에 포함시킬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이것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기능을 생각을 해보면 이것도 꼭 그렇게 틀린 얘기는 아니라는 것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종교라고 하는 것은 본질주의적으로 정의하자면 온갖 것이 다 들어가는데, 확정할 수 있는 본질이 없기 때문이다. 그다음에 기능주의적으로 해버리면 너무 많은 것이 포함이 된다.  

이런 것에 대해서 진화론자나 인지론자들이 정의를 내놓았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로빈 던바Robin Dunbar로 《옥스퍼드 세계사》에서 던바의 수를 얘기한 적이 있다. 최근에 번역되어 나온 것으로《신을 찾는 뇌: 종교는 어떻게 진화했는가》라는 책이 있다. 굉장히 흥미롭게 읽어볼 만한 책이다. 영어 원서 제목은 How Religion Evolved, 종교는 어떻게 진화하였는가인데, 지금 여기서 레퍼런스를 적시를 하지는 않았는데 콰메 앤서니 아피아이 거론하는 게 이 책인 것 같다. 그러니까 How Religion Evolved: And Why It Endures, 종교는 어떻게 진화하였는가 그리고 왜 그것은 그렇게 오래도록 지속되고 있는가. 던바의 수 얘기도 나오고, 여기 보면 초월적 세계에 대한 믿음이 있고, 영적 존재들이나 힘들이 거주하며, 그리고 그 힘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물리적 세계에 관심을 갖고 영향을 미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인간은 그런 것을 찾을 수밖에 없다 라는 얘기를 《신을 찾는 뇌》에서 하고 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초월적 세계에 대한 믿음을 얘기해버리면 뭔가 개신교적이지 않는가. 왜냐하면 믿음 중심으로 얘기를 한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믿음 중심의 설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적인 확신을 특권화한다. 그러면 그런 것이 없는 사람들은 종교가 없는가. 그러면 지난번에 얘기했던 것처럼 로마 시대 사람들은 그런 초월적인 것에 대한 믿음보다는 주변 사람들하고 잘 어울려 살려면 경건한 태도를 갖춰야 되고 그런 것이 필요하다 라는 얘기를 했다.  


예를 들어서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의 《종교의 의미와 목적》을 보면 존 힉 교수가 쓴 머리말이 있다. 존 힉 교수는 종교 철학 이론서를 예전에 쓴 사람인데, 예를 들어서 칼빈의 책 중에 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 《기독교 강요》라고 번역이 되는 책이 있다. 〈그리스도교 종교의 강요〉가 아니라 〈그리스도적 경건성의 기초》로 번역을 해야 된다 라고 존 힉 교수가 말한다. 왜냐하면 칼빈 시대까지만 해도 religion이라는 말이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책 중에 《De Vera Religione》라는 책이 있다. 〈참된 종교에 관하여〉, 그런데 이건 참된 종교에 관해가 아니라 사실은 400년대 사람이니까 〈참다운 경건에 대하여》라고 번역을 해야 되지 않나 라고 한다. 츠빙글리가 쓴 《De Vera et Falsa Religiones》도 참된 종교와 거짓된 종교가 아니라 〈참된 경건함과 거짓된 경건함〉이라고 번역을 해야 된다고 존 힉 교수가 얘기를 하고 있다. 그러니까 로마 사람들만 해도 어떤 내적인 확신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우리가 지금 오늘날 말하는 종교하고 같은 의미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로마 사람들은 지난번에 얘기한 evocatio, 다른 나라의 어떤 도시를 공격하러 가는데 아무리 노력을 해도 그 도시가 함락이 되질 않으면 로마 군인들은 이 도시에서 믿고 있는 신이 무엇인지 알아본다. 그러면 그 신에게 의례를 행한다. evocatio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도시를 함락하게 해주면 우리가 당신을 모시고 신전을 지어주겠다고 신을 달래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초월적인 것은 아니다. 여기 나온 것처럼 전통적인 종교들은 서구적 종교 관념 또는 내적인 확신 이런 것들을 얘기하기보다는 비인격적인 힘들이 있는 곳이고, 전통적 사유들은 인격적인 힘들이 있어서 그것을 달랠 수 있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카리스charis 종교, 호혜의 종교, 내가 뭘 할 테니까 저한테 이것을 해 주세요 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오히려 인격적 힘을 상정했다는 것만 차이가 있을 뿐이지 관찰된 규칙성에서 이론적 구성물로 나아가는 기본적인 어떤 경로를 따라가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건 과학과 같은 것이다. 플라톤의 대화편 《국가·정체》를 읽으면 처음에 폴레마르코스의 아버지 케팔로스가 있다. 케팔로스가 재물을 바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재물은, 케팔로스는 방패 장수이고 아테나의 시민이 아니다, 장사를 잘 되게 해달라고 비는 것이다. 지난 번에 장사가 잘 안되었다면, 장사가 잘 안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설명하고, 그다음에 지난번에 재물을 2개 바쳤는데 이번에는 3개로 한번 해보자 라는 예측, 그래서 장사가 잘 되면 재물을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나온다. 재물을 어떻게 조달할 것이고 어떻게 바칠 것이고 행동을 통제하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원시적인 의미에서의 과학이고 전통적인 종교라고 하는 것은 사실 그것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속 생물학, 민속 심리학 이런 것들이다. 인류학이 연구하고 있는 단순 사회에서는 이런 것들을 한다는 것이다. 복합사회에서는 상징을 만들어내고 한다고 하는 것인데, 상징을 만들어낸다고 하는 것이 과연 정말 복합사회만의 특징인가, 그리고 그것이 문화적으로도 더 고차적인 사람들만이 행하는 어떤 것인가, 또는 내적인 확신을 특권화하는 것이 과연 고도로 문명인의 특징인가,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강력하고, 광범위하며, 오래 지속되는 기분과 동기"로서의 공부, 공부를 열심히 하면 공부교 신자가 되는 것이고, 과연 그것을 통해서 나는 더 나은 사람으로서 살다 죽을 것이다 라고 하는 내적 확신을 갖고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전 우주를 지배하고 있는 위대한, 인격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위대한 힘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다고 여기면 이건 종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능주의적인 정의와 본질주의적인 정의와의 충돌이 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초월적인 것과 내적인 것과 과학과 이런 것의 구별, 그러니까 과학과 종교와 철학 이 세 가지를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의 문제와도 연결이 되어 있는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서 정의에 대한 희망이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By the late 20th century, hopes for a definition had faded. 그 와중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가족 유사성family resemblance 개념으로 간다. 일단 가족 유사성이라는 개념은 비슷한 것을 다 모아주자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무엇을 기준으로 비슷한 것을 찾아낼 것인가 이것은 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즉 언제나 어떤 원형prototype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prototype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 프로테스탄트에서 시작을 하면 그것과 비슷한 유사성을 찾는 것이고, 또는 불교에서 시작을 하면 불교하고 비슷한 것도 찾는 것이고, 그다음에 강력하고 광범위하며 오래 지속되는 기분과 동기으로서의 공부를 기준으로 하면 그렇게 유사성을 찾는 것이다. prototype을 무엇으로 하느냐에 따라서 가족 유사성으로 들어가는 것들도 또 달라질 것이다. 

그러다 보니까 인류학자 탈랄 아사드Talal Asad는 어떤 종교라는 용어 아래 묶는 현상들이 서구 근대에 의해 분류되고 명명되었다 하더라도 권력의 산물이고 식민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나온 개념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복합 사회의 필요에 따라서 발명된 개념에 불과한 것이다 라고 말한다. 그래서 《종교의 의미와 목적》에서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는 종교라는 말 쓰지 말자고 얘기를 하는 것이다. 종교라는 말을 쓰지 말고 축적된 전통 그리고 각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신념, 신앙 정도로 하자고 한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종교라는 말을 우리가 진지하게 논의할 수 있는 전통적인 방식은 다 무의미한 것으로 밝혀졌다고 말할 수 있겠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