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종교란 무엇인가(4)
- 강의노트/책담화冊談話 2021-26
- 2026. 2. 22.

강유원의 책담화冊談話(https://booklistalk.podbean.com)에서 제공하는 「종교란 무엇인가」를 듣고 정리한다.
2026.01.23 📖 종교란 무엇인가(4)
콰메 앤서니 아피아의 종교 개념에 관한 글을 부분 부분 번역하면서 설명하고 읽고 있다. 지난 수요일에 말한 내용은 종교라는 개념으로서 지칭하고 있는 것들, 그런 것들이 무엇인가를 둘러싼 논의들은 결국 그 단어 안에 들어 있는, 그 개념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의 내용을 정확하게 확정적으로 규정할 수 없기 때문에 개념이 더 이상 쓸모없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그런 것으로까지 논의가 이어졌다. 그래서 지난 수요일에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가족 유사성family resemblance 개념을 가지고 보면, 비슷한 것을 안으로 모아 넣으면 family resemblance 개념으로 집어넣으면 서로 이것저것 친척들을 모으는 것이다. 비슷한 것들을 모으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것들도 그 안으로 포함시킬 수 있다. 그리고 콰메 앤서니 아피아가 지적하고 있듯이 그러한 유사성resemblance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모으는가에 따라서 모아지는 것이 달라질 수 있겠다. 다시 말해서 prototype을 무엇으로 선정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prototype이 무의식 중에 있다. 공부하는 사람, 공부하게 생긴 사람이라고 명칭을 붙일 때 이 명칭, 공부라고 하는 것의 prototype은 나만이 가지고 있는 어떤 고유한 그런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인과적 과정을 통해서 형성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름을 붙인다고 하는 것이 아주 뚜렷하게 자연과학적으로 식별해 낼 수 있는 인과적 필연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고 살다 보니 형성된 것이다. prototype이라고 하는 것은 학문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social historical context에서 형성된 것이다. 인과적 필연성causal necessity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여기고 있는 것들이 아주 많이 상당 부분은 social historical necessity, 그러니까 사회적 역사적 필연성을 갖고 있는 것인 경우가 많은데, 사실은 사회적 역사적 경과를 거쳐서 social historical process를 거쳐서 만들어진 귀결은 필연성을 갖고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필연성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 아주 높은 개연성을 갖고 있는 것인데, 사실 높은 개연성이라는 건 있을 수 없다. 그냥 내가 살다 보니 그러더라 이 정도이다.
종교라는 개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종교라는 단어를 가지고 뭔가를 할 때 종교라는 개념 자체가 자연과학적인 개념이 아니라 사회학적 개념이고 역사적으로 형성된 과정에 붙여진 이름에 불과하다. 그러다 보니 지난 시간에 말한 것처럼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는 종교 개념을 버리자 라고 얘기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는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가 말한 그것을 일단 받아들인다. 누적적 전통과 개인의 신앙, 이것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이것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우리가 특정한 사건들, 그러니까 religion이라는 개념 자체가 유럽에서 제국주의적인 침탈, 식민 지배를 하는 과정에서 자기네들은 문명이고 문명이 아닌 것들을 지칭하기 위해서 발명된 개념에 가깝기 때문에, 그렇게 만들어진 개념을 가지고, 가령 A.D 1세기에 로마에서 있었던 어떤 종교적인 제의, 우리가 일반적으로 종교적 제의라고 불리는 사태, 아우구스투스가 대제사장Pontifex Maximus으로 취임하기 위해서 거행했던 거창한 종교적인 ritual이 있다. 그것을 가리킬 때 종교적인 ritual을 행했다 라고 지칭을 한다면 우리도 모르게 오늘날의 가톨릭 교회에서 교황이 미사를 집전하는 것과 같은 그런 것을 생각하기가 쉽다는 말이다. 그러면 종교라는 단어가 사실은, 그 당시 로마 사람들은 우리가 종교라는 단어로서 지칭하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사용하였기 때문에, 사태에 대한 오해가 일어날 수 있다.
단적인 예를 하나 더 들어보면, 플라톤의 대화편 《국가·정체》라고 우리가 번역하고 있는 책이 있다. 박종현 교수님이 번역하신 책 앞부분에 보면 politeia라는 단어를 국가라고 번역하기는 어렵다. politeia라는 단어는 사실은 우리가 오늘날 국가라는 단어에서 떠올리는 것들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전혀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하면 틀린 말이고, politeia라는 단어로써 플라톤이 지칭하고자 했던 게 10가지라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국가라는 개념으로 지칭하는 것이 또 10가지가 있다면, 그게 겹치는 게 한 두 가지 이상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국가라는 단어로 번역해버리면 벌써 책에 대한 이해 자체가 제목부터 어깃장 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또 영역본은 The Republic으로 번역해서 나온다. republic이라는 단어는 서구에서는 공화정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로마에서 res publica라는 단어를 쓸 때는 오늘날 우리가 공화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쓰는 단어와는 전혀 다르고, 그다음에 마키아벨리가 공화정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쓰는 단어도 그것은 전혀 아니고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해가 오해를 낳을 수가 있다. 그런데 만약에 플라톤의 politeia를 republic이라고 번역을 해서, 플라톤의 대화편을 공화국이라고 번역을 한다고 하면 이제 한없이 멀어진 플라톤의 본뜻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라는 단어를 가지고 과거의 사태들을 지칭하면 안 되고 그 당시에 사용된 용어만을 가지고 지칭을 해야 된다 라고 저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 공화정이라는 말도 사실 Respublica Romana, Imperium Romanum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처음에 콰메 앤서니 아피아의 글을 읽을 때는 종교라는 단어에 대해서 이 사람이 신경을 많이 쓰나 보다 라고 생각을 했는데, 중간쯤 읽어가다 보니까 어떻게 보면 이게 언어철학이나 분석철학에서 얘기하는 지칭이론을 바탕에 깔고 있다. 이 사람이 뉴욕대학 교수여서 지칭이론 얘기가 나온다. 오늘은 그 얘기를 해봐야 될 필요가 있다. 지난번에는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가 종교 개념이라는 말을 더 이상 이 사용하지 말고 나누어서 쓰자 라고 얘기했다. 종교에 대해서는 저는 일단 그것을 받아들인다. 어떤 분이 저에게 이렇게 물었다. 프랜시스 콘퍼드가 《종교에서 철학으로From Religion to Philosophy》라는 책에서 “종교에서 철학으로”라는 말을 썼을 때, 그 종교라는 단어 또는 철학이라는 단어는 고대 헬라스 세계에서 철학이 생겨났던 무렵을 연구하는 책이다. 사실 고대 헬라스 세계에서는 종교라는 말도 없었고 철학이라는 말도 없었다.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진 것은 없었다. 그래서 그분이 제게 물어본 것은 이것이다. 종교라는 개념이 더 이상 이렇게 지칭하는 것이 모호하다면, 프랜시스 콘퍼드는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종교라고 하는 것이 굉장히 다양한 현실 세계의 어떤 것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는데 그것이 추상화되면서 철학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그렇다면 종교라고 하는 말이 지칭하는 것이 모호하다면 철학이라는 말도 지칭하는 것이 모호한 것이 아닌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일단 두 가지로 나눠서 설명을 할 수 있다. 첫째, 프랜시스 콘퍼드가 《종교에서 철학으로》에서 이야기한 바는 이것이다. 콘퍼드가 종교라는 것을 지칭했던 것은 고대 헬라스 세계에서, 이를테면 《철학 고전 강의》의 출발점은 형이상학과 존재론에 관한 논의인데,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에 대한 논의부터 시작을 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신화에서 시작을 해서 그 신화에 들어 있는 인격신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굉장히 추상화해서, 예를 들어서 바다의 신 포세이돈, 그러니까 사람들은 포세이돈을 거쳐야만 바다에 대해서 사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것을 바다라고 하는 명칭을 통해서, 굳이 포세이돈을 거치지 않아도, 다시 말해서 신화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바다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추상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고, 바다를 구성하고 있는 핵심적인 어떤 물질의 하나인 물이 있다 라고 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게 바로 종교에서 철학으로라고 하는 그 책의 핵심적인 논지이다. 종교라는 개념이 형해화되었다면 철학이라는 개념도 그러면 형해화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은 일단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다. 프랜시스 콘퍼드의 책의 본래 의미는 그것이고, 종교라고 하는 말로써 지칭하는 것이 이처럼 모호하고 불투명해졌다면 철학이라는 말로서 지칭하는 것도 모호하고 불투명해지지 않겠는가, 그렇다. 당연히 모호하고 불투명해진다. 사실 제가 철학 선생이라고 스스로를 지칭할 수 있는 근거는 철학적 사유를 하기 때문이겠다. 그런데 철학적 사유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냥 이것저것 많이 하면 철학적 사유인가, 아니면 남들은 안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 철학적 사유인가, 아니면 저를 철학 선생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필연적인 근거는 무엇일까. 그러면 대학에서 철학과 하고 다른 과를 구별해 주는 필연적인 어떤 속성들은 무엇인가, 이건 결국 사회적인 규약이다. 규약의 문제가 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숄 크립키Saul Kripke라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쓴 책 중에 1980년에 쓴 책이 있는데, 《이름과 필연Naming and Necessity》라는 책이다. 거기에 보면 지칭이론이라고 하는 게 있다. 그러니까 철학이라는 말로써 지칭한다 또는 종교라는 말로써 무엇을 지칭하는가, 이것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을 해봐야 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일단 우리가 이름을 붙인다고 할 때 자연 현상에 대해서 이름을 붙이는 것하고 그다음에 사회적 · 역사적 현상에 대해서 이름을 붙이는 것을 먼저 구별할 필요가 있다. 철학, 종교 이런 것들은 사회적 · 역사적 현상에 대해서 이름을 붙이는 것이고, 그다음에 호랑이, 산소 그다음에 콰메 앤서니 아피아가 얘기하고 있는 플로지스톤phlogiston, 사실 따져보면 그렇게 다르지도 않다. 먼저 여기서부터 얘기를 하겠다.
종교에 대해서 안정적인 definition을 마련할 수 없다는 상황에 왔다. 그러면 종교라고 하는 말이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용되어 왔다. 그래서 콰메 앤서니 아피아는 이렇게 얘기한다. 안정적인 정의가 없는 상태에서 개념이자 범주로서의 종교가 어떻게 계속해서 유지될 수 있었는가를 물어본다는 것이다. So how has ‘religion’, as a concept and category, endured in the absence of a stable definition? 콰메 앤서니 아피아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To answer that question, it may help to think about how referring expressions do their referring. 지시 표현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사용되는가 이런 것들을 살펴보자고 하는 것이다. 갑자기 복잡한 철학 이론이 등장하는 것 같은데, 철학 이론에서 아주 기본적인 내용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서 자연종natural kind에 대한 우리의 이름을 생각해 보자라고 거론한다. 자연종은 호랑이, 자연의 사물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자연종을 가리킬 때, 호랑이라는 이름을 붙일 때, 호랑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붙었을까. tiger라는 이름을 분석을 해보면 호랑이의 속성이 나오는가, 아니다. 그런데 그런 것처럼 여기고 있다. 그러니까 Think about our names for ‘natural kinds’, 자연종에 대한 이름을 생각을 해보면 우리는 착각하기가 쉽다. 그 안에 causal powers, explanatory roles, underlying properties가 있다, 근저에 놓여 있는 속성을 우리가 찾을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아니다. 호랑이를 아무리 분석을 해봐도 나오지 않는다. 아주 극단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면 한탄강에서 발생된 한탄 바이러스라는 게 있다. 한탄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을 치료할 때는 한타박스라고 하는 약을 먹는다. 한탄강에서 나온 것이다. 한탄 바이러스라고 하는 것은 그 바이러스의 속성을 있는 그대로, causal powers를 보여주는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유심히 분석을 해보면 explanatory roles 우리가 알 수 있는가, 아니면 그 바이러스의 기반에 깔려 있는 underlying properties를 우리가 알 수 있는가, 그건 아니다. 그냥 붙인 것이다. 한탄강에서 발견되어서 그렇게 붙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름을 다른 걸로 바꿀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어떤 명칭term을 사용해서, 한탄 바이러스라는 명칭을 사용해서 그 바이러스라고 하는 것을 지칭한다 라고 할 때 사실은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있는 그대로의 속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보여주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서 조지프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라는 사람이 쓴 탈플로지스톤 공기dephlogisticated air라는 그런 기체가 있다. 유명한 사례인데, 조지프 프리스틀리는 연소할 때 방출되는 물질을 플론지스톤 공기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사실 오늘날 보니까 그게 산소였던 것이다. 산소. 그래서 라부아지에는 플론지스톤이라고 하면 안 된다고 얘기했다. 그러니까 misdescribed라고 말을 했던 것이다. 그러면 이런 것들은 이름을 어떻게 붙었는가. 바로 앞서 말한 것처럼 숄 크립키라는 사람이 《이름과 필연Naming and Necessity》라는 책에서 설명을 했던 것이다. 인과적 지시 이론Causal theories of reference이라고 하는 게 있다. 앞서 예를 들었던 것들이 다 그런 것들인데, 다시 말해서 어떤 표현이 있다는 것인데, 한탄 바이러스가 있다고 해보겠다. 일단 한탄 바이러스라고 이름이 붙여졌다. 그런데 한탄 바이러스라고 하는 이름을 가지고 그 바이러스를 더 이상 가리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고 해보겠다. 알고 보니 그 바이러스는 바이러스가 아니더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그것을 사용할 수 있더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우연히 그것을 지칭하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하더라도, 그 개념을 사용하게 되는 의미 연관들이 다 사라졌다 하더라도 그 개념은 여전히 사용할 수 있게 되더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한 번 명명이 된 다음에는 언어 공동체에 전달이 되고, 그 언어 공동체가 계속 사용을 하다 보면 인과적이고 역사적인 어떤 지칭 사슬을 형성하게 되어서 그것이 계속 사용되더라 라는 얘기가 있다. 그래서 지시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을 지시하고 있는 말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정확하게 서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것을 지시하려는 사물들 사이에서 사물들이 있고 그다음에 그것을 지시하는 우리의 말이 있다. 그 말 사이에 인과적 연결고리가 있으면 된다. 인과적이라고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그것을 계속 사용해 왔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여기서 얘기한 것처럼 명왕성은 더 이상 행성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안 쓰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라는 얘기이다. 그 얘기는 지금 인과적 지시 이론이라고 하는 것을 따로 설명을 해야 되는데, 그렇게까지 갈 필요는 없고, 마지막에 보면 그런 얘기가 있다. 자연과학 안의 대상에서조차 불확실한 것이 있다. 그렇다면 역사적 사회적 영역에서는 그 불확실함이 얼마나 더 많겠는가. 그러니까 자연과학에서 지칭 이론은 얘기할 필요가 없고, 우리가 여기서 이름을 붙이는 것,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혁명, 민족, 종교 이런 것들은 어떻게 보면 자연종 이름도 아니고, 사회적인 현상에 대한 이름이고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이름이다. 그러면 이것들은 어떤 것인가. 간단히 말해서 집단적 활동의 산물이고 우리가 그것을 역사적으로 어떤 특정한 인간 공동체에서 이름을 붙여온 것들이다. 그러니까 결국에는 그것을 사회적 종social kind이라고 불리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런 social kind들에게 이름을 붙일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가 굉장히 복잡해진다. 자연과학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라는 말이다. 여기서는 지식사회학적인 문제 또는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이라든가 이런 사람들이 계속해서 논의를 했던 개념사적인 문제가 여기에 결부가 된다. 그래서 개념사가 굉장히 중요하다라고 늘 얘기를 하는 것이다. 그 개념이 역사적 맥락 속에서 어떻게 사용되어 왔는가 하는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살짝 논의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개념사에 대한 논의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 개념사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필요한 것이다. 그러니까 혁명, 민족, 돈, 결혼, 종교와 같은 개념들은, 셸리 헤슬랭어Sally Haslanger가 말한 것은 socially founded, 사회적으로 정초된 그런 것들이다. 셸리 헤슬랭어도 탁월한 사람이긴 한데 개념사에 대해서는 그다지 탁월한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추천하거나 그러지는 않겠다. 어쨌든 자연과학에서 사용하고 있는 자연종들도 결국 사회적인 규약에 따라서 이름이 붙여졌다. 그래서 인과적 지식 이론, 숄 크립키의 논의가 있다.
다음번에는 이언 해킹Ian Hacking의 역동적 명명론dynamic nominalism에 대해서 얘기를 하려고 한다. 오늘 한 얘기를 정리를 해보면 이름을 붙인다는 것, 종교라고 하는 것, 그다음에 오늘 예를 든 혁명, 민족, 돈, 종교와 같은 것, 이름을 붙인다고 하는 것은 사회적인 규약에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종을 이름을 붙이는 것도 역사적 인과적 사슬이 형성되어서 언어 공동체에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한에 있어서만 통용된다면, 사회적 종social kind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할 것인가 그리고 그런 것들을 따져 물으려면 개념사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어떤 것이 필요한가는 다음 주에 이어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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