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중국사학명저中國史學名著(31) ─ 文獻通考

 

2026.03.07 δ. 중국사학명저中國史學名著(31) ─ 文獻通考

첸무, ⟪중국사학명저강의⟫(錢穆, 中國史學名著)
텍스트: buymeacoffee.com/booklistalk/ChienMu-12

 

문文과 헌獻, 제도사制度史, 정치政治
• 청말淸末, 완원阮元,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읽어야 역사를 알 수 있고, 마단림馬端臨의 문헌통고文獻通考를 읽어야 제도制度를 알 수 있'다. → 이통二通 
• 중국번曾國藩, 경사백가잡초經史百家雜鈔, 《서발敍跋》에 문헌통고文獻通考 24편編의 서문序文을 모두 수록, 이로써 고금상하古今上下의 변화變化와 득실得失에 관한 개략槪略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전부田賦〉에서는 고금古今의 토지土地와 부세賦稅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 이 두 사람은 문文을 중시하면서도 그것을 깨우쳐준 사람이므로, 학문과 사람의 배합配合, 즉 문헌文獻의 본래적 의미를 일깨우고 있다.  

역대왕조歷代王朝의 정치政治, 문헌文獻의 구현
• 한漢
고조高祖는 물론 개국공신開國功臣들은 농민農民 출신.
동중서董仲舒 등이 유학을 제창
태학太學에 입학한 학생들은 2년 동안 학생으로 지내고 자신의 교향으로 돌아가 리吏가 되어 정치실무의 훈련을 쌓은 뒤, 다시 중앙으로 뽑혀 올라왔다.  
통경치용通經致用, 경전을 이해하고 실용에서 사용한다. 경전經典의 대의大義를 이해한다. 

• 당唐
귀족문벌貴族門閥, 즉 대문제大門第가 지배하던 남북조南北朝에 이어 등장한 왕조. 대문제大門第는 정치적 지위를 세습.
'왕씨청상王氏淸尙'. 수백년의 '정부공문서'(당안檔案)를 상자에 보관하며 자손에게 전해주는 것. 
당대唐代의 일반 지식인知識人들은 문학文學을 공부하여 응시應試. 불학佛學을 공부하여 퇴직退職 후를 대비. 이들은 문제門第와 교유交遊하면서 정치적政治的 식견識見을 습득. 사공事功에 관심. 

• 송宋
당말오대唐末五代 이후代以 대문제大門第의 쇠락衰落, 과거科擧를 통한 인재등용人材登用. 이는 정치政治의 문외한門外漢
송대사풍宋代士風, 학문學問으로서의 정치政治. 한대漢代 정치가政治家들과의 차이 
독서인讀書人들이 자신의 이상理想을 펼치는 시기 

왕안석王安石, 사마광司馬光, 서생書生으로서 정치가政治家가 된 경우. 
왕안석王安石: 경학經學을 중요重要하게 여기는 경학가經學家. 맹자孟子, "옛날 성인聖人으로서의 선왕을 본받는다." (법선왕法先王) 
사마광司馬光: 사학史學을 중시重視하는 사학가史學家. "현실적인 군주인 후왕을 본받는다." (법후왕法後王)

• 명明
명대明代 이학理學은 경학經學도 사학史學도 아닌 것.
공소空疎하고 학습學習하지 않는다고 하는 폐단弊端.
경학經學도 쇠衰하고 사학史學도 쇠衰했으며 정치적政治的으로도 성과成果가 나타나지 않는 시기이다. 
명말明末에 이르러서야 경세대유經世大儒가 나타났다. 이들은 제도制度, 역사歷史, 경학經學, 문화文化를 말했다. 
그러나 청대淸代가 되면서, 건륭乾隆, 가경嘉慶 시기時期가 되면서 '한 무더기의 자료 속에서 학문을 하는 훈고訓詁와 고거考據로 변질. 
이는 '헌은 부족하고 문은 남아도는'(헌부족이문유여獻不足以文有餘) 상황. 이것이 계속되면서 청말淸末에는 '학문이 끊어지고 도리가 없어지는'(학절도상學絶道喪) 상황이 되었다. 

 


전목 선생의 중국사학 명저, 지난번에 송나라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그래서 송학의 전통으로 집어넣을 수 있는 원나라 때의 텍스트인 마단림馬端臨의 문헌통고文獻通考가 어떤 내용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서 잠깐 읽었다. 마단림馬端臨의 문헌통고文獻通考라고 하는 이 텍스트는 중국 역사에서는 굉장히 중요하겠지만 그 내용을 상세하게 알 필요는 없다. 

오늘은 전목 선생이 책 뒤에, 그러니까 마단림馬端臨의 문헌통고文獻通考 얘기를 쭉 하다가 뒤에 길게, 이게 강의이니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데 이런 것들이 텍스트를 읽을 때 중요한 부분이다. 문헌을 읽을 때, 전목 선생은 1차 문헌을 집중적으로 읽어온 분이니까,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자신의 감각, 우연히 마주쳤을 때 조우한다고 그러는데, 이렇게 마주쳤을 때 느껴지는 것을 감우라고 한다. 우연히 느끼는 것이 감우, 우연히 만나는 것이 조우이다. 우연히 만나서 우연히 느끼면 그게 지우가 된다. 조우, 감우, 지우 요 세 개의 단계를 거쳐 가는데, 그 단계를 거쳐서 알게 된 것을 전목 선생이 우리에게 책에다가 얘기를 해주었다. 그런데 자신이 규모 있고 체계적으로 써야겠다고 하면 최종적인 것, 감지한 것도 아니고 감우한 것도 아니고 지우한 것, 마지막으로 알게 된 것만을 우리에게 전해주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강의에 대해 녹취를 풀어서 내놓은 것들은 그 세 가지, 조우 그다음에 감우, 지우 이 세 가지가 겹쳐서 나와 있는 내용들이 있기 때문에 이런 지점들을 놓치면 안 되는구나 하는 게 있다. 전목 선생의 이 텍스트는 강의를 묶어놓은 것이기 때문에 최대한 조우와 감우와 지우, 이 세 가지가 겹쳐 있다.  

오늘 문헌통고文獻通考에 덧붙여서 하는 얘기, 문文이라는 게 무엇이고, 헌獻이라는 게 무엇인가. 문文은 정형화된 텍스트이다. 그다음에 헌獻는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이고, 그런 것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문文과 헌獻이 묶이면 정치가 된다 라는 요지를 얘기하고 있는데, 이런 것들을 읽어봐야 한다. 그래야 공부를 잘할 수 있다. 어떤 식으로 공부를 전개할 것인가 그리고 선생에게 배운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이런 것이다. 책만 읽어서는 잘 안 된다. 배우지 않고 혼자서 한다고 하면 그건 잘 안된다. 최소한 10년은 배운 다음에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을 배우는가. 학습의 내용이 있는 게 아니라 이렇게 문헌을 더듬어가면서 읽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눈썰미를 배우고 우연히 마주치는 것은 어떤 경우에 우연히 마주치는가. 아무한테나 그렇게 지식의 귀퉁이가 가서 부딪히지 않는다. 전목 선생의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것이 이것이구나 하는 것, 이 지점에서 이렇게 나가겠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도 평소에 정치사상과 제도와 문文과 헌獻에 대해서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겠다.  

문헌통고文獻通考에 덧붙여진 부수적인 얘기를 좀 해보겠다. 청나라 말기에 완원阮元이라고 하는 학자가 있었는데 자치통감資治通鑑과 문헌통고文獻通考 이 두 개를 읽어야 한다. 이건 성격이 좀 다르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은 역사책이고, 문헌통고文獻通考는 통通자가 들어갔다고 해도 제도사인데, 사실은 자치통감資治通鑑고 문헌통고文獻通考는 성격이 다르니까,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읽어야 역사를 알 수 있고, 그다음에 마단림馬端臨의 문헌통고文獻通考를 읽어야 역대의 제도를 알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이 둘을 묶어서 이통二通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원래는 통전通典, 통지通志, 문헌통고文獻通考를 삼통三通이라고 했는데 완원阮元는 그러지 말고 제도만 알았어야 되겠느냐, 당연히 자치통감資治通鑑과 문헌통고文獻通考를 읽어야 한다 라고 얘기를 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청나라 말기에 중국번曾國藩이 경사백가잡초經史百家雜鈔를 편찬했는데, 잡초라는 것은 여기저기서 뽑아 올린 글이라는 말로, 경학 서적, 역사 서적, 그다음에 제자백가, 온갖 종류의 책에서 다이제스트 판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예전 중국에는 이런 책들 많았다. 두 번째 편에다가 서발敍跋, 서술된 것들을 뽑아 올렸다 해서 서발敍跋인데, 문헌통고文獻通考 24편의 서문을 모두 수록했다고 한다. 이로써 고금상하古今上下의 변화變化와 득실得失에 관한 개략槪略을 알 수 있다 라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얘기를 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서 문헌통고文獻通考 첫 번째 고考가 전부田賦이다. 이 부賦 자라는 것은 적벽부赤壁賦 할 때도 이 부賦 자를 쓰는데, 고금의 토지와 부세賦稅, 세금을 부과한다고 할 때도 이 부賦 자를 쓴다. 그러니까 중국번曾國藩이나 완원阮元이나 이 두 사람은 문文을 중시하면서도 그것을 깨우쳐준 사람이니까, 학문과 사람의 배합配合, 즉 문헌文獻의 본래적 의미를 일깨워주고 있다.  

여기서 전목 선생은 갑자기 툭 튀어나가서 역대 왕조의 정치와 헌獻이 어떻게 구현되었는가를 말하는데, 헌獻이라는 말을 이렇게까지도 확대해서 쓸 수 있는 그런 말이구나 싶은 게, 굉장히 유용하고도 역시 대가들이 이렇게 한마디 딱 해주면 아하 하고 갈 수 있는 지점들이 생긴다. 헌獻이라고 하는 말 아래에 이런 것을 하는구나 라는 것이다. 이런 게 뭐냐하면 한나라 때는 앞서도 그런 얘기 있었지만 한漢 나라 고조高祖는 평민 출신이고 당연히 고조의 부하들도 평민이 많았다. 그러니까 개국공신開國功臣들이 다 농촌의 평민 출신이다. 그러다가 조금 지나서 동중서董仲舒라든가 이런 사람들이 서서히 유학을 재창해서 학교를 만들었는데, 그게 태학太學이다. 태학太學의 오경박사五經博士와 같은 것들, 오경五經 담당자들이다. 여기서 박사라는 것은 담당 교수를 말한다. 그러면 거기에 입학한 학생들은 18살에 입학을 하는데 2년 동안 학생으로 지내고 나서, 그것은 문文을 익히는 것이다. 문文을 익힌 사람이 되어 가지고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관리官吏할 때의 리吏가 된다. 그러면 거기서는 실제적인 정치실무의 훈련을 쌓고 그다음에 그런 사람들 중에서 유능한 사람을 중앙에서 뽑아다가 중앙정부 일을 또 맡기고 그렇게 된다. 그러면 중앙정부 일을 하는 사람은 처음에는 18살에 경經을 배운다. 그러니까 문文을 배운 다음에 군현에 가서 관리 노릇을 한다. 지방 정부에서 행정 실무를 맡아서 하고, 그러면 문文을 아는 사람이 된다. 중요한 포인트이다. 그러다가 다시 와서 중앙정부 일을 한다. 가만히 보면 한 나라의 이런 제도들이 오늘날 중공中共에서도 이게 일정한 부분은 시행이 된다.  

한나라 때는 통경치용通經致用이라는 용어로써 그 시스템을 표방했다. 통경通經이라는 게 경전經典의 대의大義를 이해한다. 경전에 통달한다 라는 뜻도 되지만 그때 통달한다 하고 통은 조금 다른 뜻이겠다. 치용致用은 쓸모에 이른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경전經典의 대의大義를 이해하고 실용해서 사용하는 그런 태도가 국가 공무원들, 그게 국가 공무원이면서 동시에 정치가가 되는 것이겠다. 그런데 당나라가 되면 당나라는 북방에서 온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한 나라 이래로 중원에서 통용되던 방식을 사용하기가 어렵다. 그 대신에 그 사람들은 귀족문벌貴族門閥 집안들이다. 즉 대문제大門第가 지배하던 남북조南北朝 시대를 이어받아서 등장한 왕조이다. 한 나라와의 연속성보다는 남북조와의 연속성이 강한데, 남북조는 중국식으로 말하자면 오랑캐의 왕조들이다. 그런데 대문제大門第는 정치적 지위를 세습하는데 이게 꼭 나쁜 거냐 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것이 왕씨청상王氏淸尙이라는 게 있다. 왕 씨 집안의 푸른 상자, 이 안에는 수백 년의 정부 공문서를 상자에 보관하여 자손에게 전해준다. 당안檔案, 중국에서는 현재도 당안檔案이라는 말을 쓴다. 정부의 공식 기록을 당안檔案이라고 하고 우리고 치면 등록부이다. 

그런데 당나라 때는 일반 지식인들도 있다. 한유韓愈나 유종원柳宗元 같은 사람들은 문학을 공부해서 응시를 했다. 그러니까 당시唐詩를 잘 쓰는 것이다. 유자儒者들은 불자佛子들하고도 서로 커뮤니케이션을 한다. 유자儒者라고 할 때는 선비 유儒자에다가 놈 자者자를 쓰고, 불자佛子라고 할 때는 부처님 불佛자에다가 아들 자子를 쓴다. 당나라 때 사람들은 유자儒者라 할지라도 퇴직한 다음에 내가 뭘 해야지 라고 생각하면서 불학을 공부했다. 그러니까 교류가 있었다. 당나라 때는 유자와 불자 사이의 교류가 있었다. 한유韓愈라는 유자儒者와 그다음에 가도賈島라고 하는 전직 승려가 있다. 그 두 사람이 길에서 만나서 문을 밀어야 되느냐 문을 두드려야 되느냐, 그러니까 밀 퇴推자하고 두드릴 고敲자를 써서 미는 게 좋은가 그다음에 아니면 두드리는 게 좋은가, 이것을 가지고 글쓰기에 대해서 얘기를 했다 하여 퇴고推敲라는 말이 있다. 문장을 다듬을 때 어떤 단어를 쓰는 것이 좋은가 이런 것을 가지고 고민하는 것을 퇴고推敲라고 한다. 당연히 당나라 때 유자들이라 해도 현실적인 일에서 공적을 쌓는 일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당나라 말기 대문제大門第, 즉 문벌귀족이 쇠락하고 송나라에 들어오니까 고시를 통해서 인재를 등용하게 된다. 그들은 정치에는 문외한이다.  

송나라 때는 더욱이나 학문을 한 사람들이, 선비들이 정치를 하니까 말이 많고 심하다. 한나라 때의 정치가들과는 다르게 이론을 가지고 죽일 듯이 싸운다. 독서인이 자신의 이상을 펼치는 시기가 되어서, 특히나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 그다음에 사마광司馬光의 구법舊法 이런 것들, 왕안석王安石은 경학經學을 중요하게 여기는 경학가이고, 사마광司馬光은 사학史學을 중시하는 사학가이다. 그래서 이 사람은 "현실적인 군주인 후왕을 본받는다"하여 법후왕法後王이고, 맹자가 옛날 성인으로서의 선왕을 본받아라 해서 법선왕法先王이라는 말을 썼는데, 송나라 때 신법당과 구법당의 싸움이 있었다. 이게 바로 송나라 때 당파 싸움이라고 하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송나라의 정치가들하고 당나라의 정치가들은 아주 성격이 다르다. 특히 한 나라의 정치가들은 실무가 굉장히 강한 사람들이고, 그러니까 한나라의 정치가가 이상적인 정치가들이 있는 것이고, 송나라는 그게 없었다. 그래도 송나라 때는 공부라도 좀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것을 자기네들의 현실에다가 펼쳐 보일 수 있는 기회라도 있었지만, 명나라에 오면 경학도 사학도 아닌, 명태조 홍무제부터 시작을 해서 실질적으로는 군부 통치였다. 공소空疎하고 학습하지 않는다고 하는 폐단이 생겨나고, 경학도 쇠하고 사학도 쇠했으며 정치적으로도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 시기이다. 사실 명나라가 굉장히 지리멸렬한 시기이고 명나라 말기에 이르러서야 경세대유經世大儒가 나타났다고 전목 선생이 얘기한다.  

명말에 이르러서야 경세대유經世大儒가 나타났고 제도, 역사, 경학 그리고 문화를 말했다. 중요한 포인트이다. 공부를 하는 사람은 정치가가 아니라 해도 제도, 역사, 경학, 문화, 이 네 가지를 다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일단 경학을 하고 그다음에 역사 공부를 하고 그다음에 제도사와 문화사를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청대가 되면서는 강희제, 옹정제를 때는 괜찮았는데 건륭제라든가 가경제라든가 이런 황제의 시기가 되면 한무더기의 자료 속에서 학문을 하는 훈고訓詁와 고거考據로 변질되었다. 현실적인 어떤 얘기는 전혀 하지 못하는 그냥 백면서생만 되었다는 얘기이겠다. 그러니까 이때는 헌獻는 부족하고 문文은 남아도는 상황이다. 공부를 해가지고 그것을 현실 세계에다 접목을 해 가지고 뭔가를 해보는 사람이 헌獻인데, 사람은 부족하고 문文은 남아도는, 헌부족이문유여獻不足以文有餘, 남아도는 상황이 계속되면서 청나라 말기에는 학문이 끊어지고 도리가 없어지는 상황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전목 선생의 상황 판단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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