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중국사학명저中國史學名著(32) ─ 明儒學案

 

2026.03.14 δ. 중국사학명저中國史學名著(32) ─ 明儒學案

첸무, ⟪중국사학명저강의⟫(錢穆, 中國史學名著)
텍스트: buymeacoffee.com/booklistalk/ChienMu-12

 

황종희黃宗羲, 명유학안明儒學案
• 황종희黃宗羲(1610-1695), 명말청초明末淸初의 유학자儒學者
명유학안明儒學案는 청대淸代에 완성된 책(1676)
사상思想을 서술하는 학술學術 전문사專門史, 양명학陽明學의 문헌文獻

• 중국에서 학술전문사의 출발점은 불교사佛敎史에서 시작되었다. 중국의 정사正史는 불교佛敎 방면의 사정事情을 기재하지 않았기 때문. 고승전高僧傳이 등장. 당唐 이후 以後에는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하여 선학禪學의 역사를 서술. 이중 전등록傳燈錄이 가장 유명. 

• 송대宋代 이학가理學家들의 어록語錄은 선종禪宗 조사祖師들의 그것에서 빌려온 형식.
정이程頤(이천伊川), 정호程顥(명도明道)의 어록語錄, 주돈이周敦頤, 장재張載의 어록語錄 ─ 이것들은 모두 문인門人들이 쓴 것

• 학안學案이라는 형식形式 또한 선종禪宗에서 사용하는 것
주문해周海門의 성학종전聖學宗傳, 손기봉孫奇逢의 이학종전理學宗傳이 명유학안明儒學案 이전에 쓰인 것들

• 서술敍述의 특징特徵
① 각유가各儒家들의 종지宗旨를 제시
② 각문파各門派와 상반相反된 견해 제시

막진莫晉, 명유학안明儒學案, 서문序文, "정교한 것을 가려내고, 그 내용이 상세했다." (택정어상擇精語詳)
선택이 정교하면 상세하게 말할 수 있다. 
"널리 자료를 모아 그것을 다시 요약." (유박반약由博反約)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명유학안明儒學案의 구조構造
각학안各學案마다 맨 앞에 소서小序가 있다.
학안各學案의 많은 인물마다 각 한편의 소전小傳이 있다.
소전小傳 뒤에는 황종희의 견해를 덧붙인 평어評語가 있다.
소전小傳의 전반부前半部에는 학자學者의 생애生涯에 관련한 사실
후반부後半部에는 학술學術 사상思想 관련 사실
이는, 학인學人에 대한 전기傳記의 전통傳統을 이어받은 것.
일반적인 학인學人은 유림전儒林傳이나 문원전文苑傳에 묶어서 서술, 역사상의 지위地位가 높은 사람은 따로 서술, 예를 들어 사기史記의 동중서전董仲舒傳, 후한서後漢書의 정현전鄭玄傳, 주희朱熹가 쓴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은 이학가理學家의 전기傳記 

연보年譜
1610. (명明, 만력萬曆 38) ─ 1695 (청淸, 강희康熙 34)
장자오청, 왕리건 《강희제 평전》
강희제康熙帝, 1678(강희 17) 박학홍사과博學鴻詞科의 설치 令
"예로부터 일대의 흥기는 반드시 박학홍유博學鴻儒가 있어 문운文運을 일으키고 경사經史를 발전시키며 사장詞章을 윤색하여 저작을 선택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박학홍사는 모든 한족 석학을 포섭하지 못했다. 많은 한족 유학자들은 여전히 반청복명反淸復明을 견지하며 청나라 조정과는 같은 하늘에서 살지 않는다는 맹세를 간직하고 있었다. 명나라 말기 실학의 대사大師인 고염무顧炎武는 죽을 때까지 스스로 맹세하여 박학홍사의 청탁을 거절하였고, 황종희은 무오년에 박학홍사를 초빙하여 ··· 재촉하였으나 다시 사양했다." 

 


전목 선생의 중국사학명저 강의, 오늘은 황종희黃宗羲의 명유학안明儒學案이라고 하는 책에 대한 해설을 읽어보겠다. 일단 황종희黃宗羲라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1610년에서 1695년 때 사람이니까, 17세기를 꼬박 살아간 사람인데,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건국된 다음 이른바 명말청초明末淸初의 사람이다. 저는 황종희黃宗羲라든가 고염무顧炎武와 같은 명말청초明末淸初 시기의 지식인들에 대한 관심사가 있다. 그래서 《강남은 어디인가》와 같은 책들에서 이 사람들의 일생에 대해서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양휘웅 씨가 번역해서 돌베개 출판사에서 나온 《황종희 평전》이 나온 게 있다. 

황종희黃宗羲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 간략하게 보면 명나라가 망했는데, 그리고 청나라가 중국을 들어와서 이렇게 저렇게 했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버티고서 그랬던 사람이다. 황종희黃宗羲는 만력제萬曆帝 38년에 태어났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조선의 명나라 군대가 파병이 되었는데 이때 파병한 사람이 만력제萬曆帝이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두고두고 은인이라고 생각하는데, 명나라에서는 만력제萬曆帝 다음에 숭정제崇禎帝, 명나라를 말아먹은 결정적인 사람이다. 황종희黃宗羲가 죽은게 1695년, 그러면 청나라 강희제康熙帝 34년이다. 강희제康熙帝가 황제가 된 지 34년이나 지난 다음에 죽었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황종희黃宗羲는 청나라에 심정적으로 복종을 안 했다. 중국사에서 특정한 국면이기 때문에 그런 것하고 관련이 되어서 생각해 볼 지점이 있다.  

명유학안明儒學案이라고 하는 책은 학자들에 대해서 써 놓은 것으로, 명나라 시대에 태어나서 청나라 때 죽은 황종희黃宗羲의 저작인데, 과연 이것을 언제적 저작이라고 봐야 할 것이가. 청대에 완성된 것이니까 청대의 작품이라고 봐야 되는데 황종희黃宗羲는 끝까지 청대에 대한 복속의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명대의 것인가, 그렇게 보기도 괜찮다. 기본적으로 이 책은 사상을 서술하는 학술 전문 역사책이다. 요즘의 용어로 말하자면 사상사라고 할 수 있겠다. 지성사intellectual history라는 말은 그다지 쓰고 싶은 용어는 아니다. 우리 말에서는 지성사라고 하면 굉장히 지적인 어떤 것을 생각하기 쉽은데, 저는 그 용어를 즐겨 사용하지는 않는다. 명유학안明儒學案은 양명학의 관점에서 학자들에 대해서 황종희黃宗羲가 적어 둔 것이다. 자기보다 선행하는 송명이학의 역사를 써 놓은 것이다. 

황종희黃宗羲는 기본적으로 양명학자이기 때문에 자기의 관점을 가지고 선행하는 사상가들을 썼다. 예를 들어서 《힐쉬베르거 철학사》와 같은 경우 기본적으로 헤겔적 역사사상의 관점이 있다. 철학의 역사는 그것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우주이고, 선행하는 철학자들의 사상을 끊임없이 문제 삼고, 그것을 자기 머릿속에서 생각하면서 자기의 사상을 전개해 나가는 것, 굉장히 아카데믹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게 바로 요한네스 힐쉬베르거라고 하는 사람의 관점이다. 그러면 그런 관점에서 hegelian perspective를 갖고 있다는 말이다. 헤겔주의적인 관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선행하는 사상가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기에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철학자라 할지라도 형이상학적인 업적이 있다든가 하면 높이 평가하고 그럴 수 있겠다. 그런 것처럼 황종희黃宗羲는 양명학자로서의 입각점을 가지고 자기보다 앞선 사상가들에 대해서 검토를 해서 명나라 유학자들의 학적인 업적을 검토하는 명유학안明儒學案이라고 하는 책을 썼다. 그러니까 통사는 아니고, 이를테면 학자들에 대한 사상사다.   

중국에서 학술 전문 역사책의 출발점은 사실 불교에서 시작이 되었다. 불교에서 시작이 되었다는 점이 굉장히 중요한 지점이다. 왜 그러한가. 중국의 정통 역사책을 표방하는 사람들은 당나라 때 이후로도 기본적으로 불교의 역사를 쓰지 않는다. 그러니까 불교가 들어온 다음에도 탁월한 업적을 남긴 선사들, 그래서 고승전高僧傳이 등장하고 당나라 이후에는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고 해서, 그러니까 말 그대로만 보면 가르침 바깥에 있는 별도의 이야기, 여기서 교敎라고 하는 것은 그냥 가르침이 아니 아니라, 불교는 크게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으로 나눈다. 교종이라고 하는 것은 불교 경전을 중심으로 불학을 열심히 하는 것이고, 선종이라고 하는 것은 좌선 명상을 중심으로 한다. 그러면 선종에서는 기본적으로 자기네가 무엇을 했다 하는 것들을 글로 써서 남기진 않는다. 도리를 깨우치면 되는 거니까 그렇다. 우리나라에서 불교라고 하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바로 조계종인데 선종이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불교의 가장 큰 종파라고 할 수 있는 조계종에서는 경전을 읽고 열심히 공부하고 하는 것의 전통이라고 하는 게 그렇게 중시되고 있지는 않는다. 결국 도력이라고 하는 것은 우주의 이치를 어떻게 깨우치는가의 문제이고 많이 배웠다고 해서 잘 사는 건 아니다. 가톨릭에서도 교부학, 아우구스티누스와 교부들을 연구한 사제들이 하느님의 진리를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신학 박사가 아니라 교부학 박사라는 학위가 따로 있다. 또는 성서 신학을 전공해서 히브리어라든가 이런 성서 텍스트에 달통한 사제가 있다고 해보겠다. 그러면 그 사제가 훨씬 더 하느님에게 헌신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니까 교학敎學이 되었건 선학禪學이 되었건 업적은 다를 수 있다. 그래서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고 하면 교학敎學이 아닌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즉 선학禪學의 역사를 서술한 게 있다. 그런 것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전등록傳燈錄, 등불을 전해준 이야기이다. 전등록傳燈錄은 선종의 유명한 조사祖師들의 생각을 어떻게 주고받았는가 또는 그 분파가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들을 쭉 적어놓은 어록이다. 이게 중국에서는 사상사의 출발점이다. 
 

물론 역사책에도 전傳이 있고 표表가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은 누구의 이론을 가져다가 이렇게 개발을 하고 이것은 반박을 하고 이렇게 사상만 중심으로 해서 역사를 쓴 건 아니다. 유명한 학자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이런 정도의 업적을 남겼다 라고 하는 것이 사상사 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까 당나라 이후에 송나라 때 이학가들도 선종의 선사들하고 교류가 있었다. 학문의 경계선을 넘어서 본다는 것이다. 송나라 때 이학가理學家를 도학자道學者라고 한다. 우리는 성리학이라고 하는데, 그 사람들은 도학이라고 했다. 주자가 했던 말들을 모아놓은 주자어류朱子語類와 같은 들이 기본적으로는 선종 조사들의 어록에서 빌려온 형식이다. 그다음에 정이程頤, 정호程顥, 정이程頤의 아호가 이천伊川이고, 정호程顥의 아호가 명도明道이다. 이 두 사람이 형제이다. 정이程頤를 이천 선생이라고 해서 더 먼저라고 본다. 어록들이 있는데 모두 다 구어체로 기록된 것이고 문인들이 쓴 것이다. 문인이라고 하는 건 제자들을 말한다. 그래서 명유학안明儒學案이라고 하는데, 이 명유학안明儒學案이라는 형식 또는 명칭 또한 선종에서 사용하던 것이다. 공안公案이라는 말이 있는데, 선종에서는 화두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공안을 붙들고'라고 하는 말이다. 내가 공부하려고 하는 어떤 안건, 학문의 아젠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학안學案이라는 말은 scientific agenda, 학문적인 의제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 시초는 주문해周海門의 성학종전聖學宗傳, 손기봉孫奇逢의 이학종전理學宗傳 이런 것들이 시초이고, 이것들은 명유학안明儒學案 이전에 있던 것들이다. 성학종전聖學宗傳에서 성학聖學은 성리학을 높여 부를 때 사용하는 말이다. 따라서 성학聖學이라든가 이학理學이라든가 이런 말들은 다 도학, 성리학 그런 말이다.  

황종희黃宗羲가 명유학안明儒學案을 쓸 때도 선행하는 것들이 있었는데 썩 마땅치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것을 작성하기 시작을 했다. 그렇다면 명유학안明儒學案의 서술 특징은 무엇인가. 사상사 저작은 일단 학파를 분류한다. 가령 플라톤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인데 하나의 학파로 묶이지는 않는다. 플라톤은 신플라톤 학파는 있지만 플라톤 학파는 없는, 세칭 독고다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소요학파라는 게 있다. 그러면 아리스토텔레스 학파는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했는가. 종지宗旨가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으뜸이 되는 방향이 있다. 기본 종지를 설명 제시를 하고 각 문파하고 상반된 견해도 제시를 한다. 예를 들어보면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 학파라고 하면 스토아 학파가 있고, 에피쿠로스 학파가 있고 회의주의 학파, (퀴니코스 학파)가 있다. 스토어 학파는 회랑(Stoa), 그 장소를 가리키는 말이고, 에피쿠로스 학파는 에피쿠로스라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고, 그다음에 퀴니코스 학파는 그들이 주로 내세운 종지, 근본적인 주장을 가리키는 말이다. 헬레니즘 시대의 3대 학파라고 하면 각각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는 가장 일반적인 명칭의 성격이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 학파는 소요학파라고 부르는데, 소요逍遙는 어슬렁 어슬렁 제자들하고 다니면서 얘기를 나눴다고 해서 그렇다. 이는 그런 학문 활동을 하는 활동방법에 대해서 가리키는 말이다. 그 사람들을 지칭할 때 대표적으로 사용하는 명칭을 자세히 보면 그들이 주장하는 바 또는 그들의 특징을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황종희黃宗羲가 쓴 명유학안明儒學案이라는 책에 대해서 나중에 후대에 목각본을 낸다. 그래야 보존이 되니까 그러한데, 가각본을 내고 정각본을 낸다. 가각본이라는 게 임시로 일단 파는 것이다. 그다음에 그것을 보고 확인을 한 다음에 정각, 제대로 목각을 판다. 그런데 그것을 낼 무렵에 막진莫晉이라는 사람이 서문을 썼는데 이렇게 평가를 했다고 한다. 택정어상擇精語詳, "정교한 것을 가려내고, 그 내용이 상세했다." 그러니까 정교한 것을 가려내고 라는 말은 선택이 정교하다라는 말이다. 사실은 선행하는 학자들, 예를 들어서 철학사를 쓴다고 하면 어떤 사람을 골라서 철학사에다가 이름을 올릴 것인가, 일단 선택을 해야 된다. 모든 철학자를 어떻게 다루겠는가. 정교하게 선택을 해야 한다. 선택이 정교해야만 상세하게 말할 수 있다. 모든 철학자들을 써야겠다 라고 말하면 상세하게 말할 수는 없다. 《경이로운 철학의 역사》를 보니 아주 많은 학자들이 모여서 하면 그게 가능할 수도 있겠다 싶다. 저는 정교하게 선택할 수는 있는데 그것을 하느니 그냥 남들이 쓴 것을 읽는 게 낫겠다 라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 생각해 본 게 정체 또는 레짐, 사회 체제 이런 것들에 관련된 책들을 몇 개 골라서 읽어서 써봐야겠다 라고 생각하는 게 "우리 시대, 사상사로 읽는 원전"인 《소크라테스, 민주주의를 캐묻다》와 《플라톤, 현실국가를 캐묻다》이다. 《소크라테스, 민주주의를 캐묻다》를 보면 소크라테스의 변론, 플라톤의 대화편, 그것만 있는 게 아니라 크세노폰이 쓴 것도 있고 그다음에 몇 개를 골라서 읽어 놓았다. 그리고 뒤에 주해에는 다른 참고할 만한 것들, 투퀴디데스도 읽었고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택정어상擇精語詳, 선택이 정교하면 상세하게 말할 수 있다. 두루두루 선택을 하게 되면 상세하게 말하기는 어렵지 않나 라고 생각을 할 수 있겠다. 그래서 그런 것을 하는 태도, 다시 말하면 널리 자료를 모아 그것을 다시 요약하는 힘이 있어야만 선택을 할 수 있겠다. 물론 정교하게 선택을 한다라고 할 때는 무엇을 선택할 건지는 알고 있어야 한다. 몇 개 안 되는 것 가지고 정교하게 선택할 수는 없다. 일단 정교하게 선택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모집단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겠다. 유박반약由博反約, "널리 자료를 모아 그것을 다시 요약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명유학안明儒學案은 사상사를 쓰는 기본적인 구조가 있다. 맨 앞에 일단 소서小序가 있다. 이 학자는 또는 이 학파는 대강에 이러이러한 종지를 가지고 있다를 설명하고 그다음에 그 학파에 속해 있는 인물들에 대한 간략한 전기인 소전小傳이 있다. 그리고 나서 황종희黃宗羲의 견해를 덧붙인 평어評語, 평가가 있다. 그래서 소서小序, 소전小傳, 평어評語 이렇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소전小傳을 보면 전반부는 그 학자의 생애에 관련된 사실을 적어두고 후반부에는 학술 사상과 관련된 사실을 적어둔다. 그냥 지나가는 말처럼 보이고 있는 것 같지만 곰곰이 보면 황종희黃宗羲가 명유학안明儒學案을 쓸 때 소전小傳안에 그 사람의 일생에서도 중요한 사건들, 정말 결정적 계기가 되는 사건들을 끄집어내는 것, 그것을 적을 때 어떤 얘기들을 가져다가 적을 것인가 하는 중요한 부분이 있다. 그러면 이미 그것 자체가, 선택 자체가 평가가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다음에 학술 사상을 후반부에 적었다 라는 것은 학자의 생애로부터 그 사람의 학술 사상을 설명해 나아가는 그런 방식을 택했다고 하겠는데, 그렇다면 context, 생애라고 하는 그 맥락을 바탕으로 사상을 서술한다고 하는 것이다. 

어떤 학자의 학술 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생애와 결코 유리되어서 이해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보면 황종희黃宗羲의 이 서술 방식이 굉장히 획기적이다. 중국에서 17세기에 이만한 학술이 나왔다 라는 것은 간단치 않다. 그런데 황종희黃宗羲가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아이디어가 생겨 가지고 이런 방식을 택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의 역사 속에서 학인學人에 대한 전기라고 하는 것, 오래된 전통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대체로 평이한 학인學人은 유림전儒林傳이나 문원전文苑傳에 묶어서 서술해 왔었다. 유림전儒林傳은 유학자들에 대한 집단 전기와 같은 것이고, 문원전文苑傳은 꼭 유학자만이 아니라 시인도 거기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상의 지위가 높은 탁월한 학자들에 대해서는 따로 전기를 마련해서 서술을 한다. 예를 들어서 사마천의 사기史記가 있고, 한나라 때 동중서전董仲舒傳이 따로 있고, 그다음에 후한서後漢書를 보면 정현전鄭玄傳이 있다. 그리고 송나라 때 주희朱熹가 쓴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이라는 게 있다. 이런 것들이 선행하는 업적으로 있다. 명나라 때 유학자들에 대해서 명유학안明儒學案을 쓰고 나서 송나라와 원나라 때 유학자들에 대해서 쓰려고 했던 게 송원학안宋元學案인데, 기초적인 것만 작업을 한 상태에서 아들한테 물려주고, 그것을 전조망全祖望이라는 학자가 이어받아서 했으니까 3대에 걸쳐서 한 셈이다. 그것은 다음 주에 얘기를 하겠다. 

황종희黃宗羲에 대해서 얘기를 덧붙여 보자면 돌베개 출판사에서 나온 《황종희 평전》이 있다. 《황종희 평전》과 같이 읽어볼 만한 게 《강희제 평전》이다. 사실 황종희黃宗羲에는 명말청초明末淸初의 사람인데 강희제康熙帝 시대를 오래 살았다. 그러니까 황종희黃宗羲가 죽은 게 강희제康熙帝 34년이니까 강희제康熙帝 치하에서도 생의 절반 정도를 살았던 사람이다. 강희제康熙帝가 즉위한 지 17년 되던 해에 박학홍사과博學鴻詞科라는 것을 설치해라, 박학헌 사람들, 그러니까 "예로부터 일대의 흥기는 반드시 박학홍유博學鴻儒가 있어", 박학하고 아주 거대한 업적을 남긴 유학자를 박학홍유博學鴻儒라고 한다, "문운文運을 일으키고 경사經史를 발전시키며", 경전과 역사를 발전시키며, "사장詞章을 윤색하여 저작을 선택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렇게 시작하는 교지를 내린 것이다. "짐은 틈이 나면 문장에 마음을 두고 박학홍사를 얻어 전학을 돕는 데 힘쓰고자 돕는 데 쓰고자 했다. 사회가 넓은데 어찌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학문이 깊고 통달하며 문체가 유려하여 이전의 철학자를 따를 수 있는 자가 없겠는가. 무릇 학행이 모두 우수하고 문사가 탁월한 자는 이미 입사를 했든 아직 입사를 하지 않았든 상관하지 말고 재경 삼품 이상 및 과도 관원, 재외의 독무, 포정사, 안찰사로 하여금 각기 아는 사람을 추천하면 짐이 친히 시험을 보고 등용할 것이다" 라고 얘기를 했다. 강희제康熙帝가 즉위한 지 17년이 되던 해에 이런 것을 왜 했는가. 즉위한 지 17년이 되도록 명나라에서 벼슬을 살았거나 또는 명나라 때 유학자들이 반청복명反淸復明, 그러니까 청나라에 반대하고 명나라를 다시 복원해야 된다 라는 그런 기치를 내걸고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박학홍사博學鴻詞라는 것을 한 이유는 명나라에 아직도 충성심을 가지고 있는 한족의 석학을 포섭을 해서 전향을 시켜야겠다 라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한족 석학을 포섭하지는 못했겠지만 아 이거 해볼 만한 것이구나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 《강희제 평전》에 보면 많은 한족 유학자들은 여전히 반청복명을 견지하며 청나라 조정과는 같은 하늘에서 살지 않는다는 맹세를 간직하고 있었다." 강희제康熙帝가가 초대 황제도 아니었는데 즉위한 지 17년이 되도록, 그리고 강희제康熙帝가 즉위한 지 34년이 되던 해에 황종희黃宗羲가 죽었다. 그러니까 30년이 넘도록 이 사람은 마음을 고쳐먹지 않았다. 물론 나중에 자기 아들을 보내기는 한다. 

그러니까 "명나라 말기 실학의 대사大師인 고염무顧炎武는 죽을 때까지 스스로 맹세하여 박학홍사의 청탁을 거절하였고, 황종희은 무오년에 박학홍사를 초빙하여 ··· 재촉하였으나 다시 사양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을 보고서 조선의 학자들이 정말 대단한 사람이구나 했으니까, 사실 고염무顧炎武나 황종희黃宗羲나 이런 사람들은 그들이 남긴 학문적인 업적이 탁월함도 있지만 이런 측면에서 과대평가된 측면도 있다. 그래서 황종희黃宗羲를 읽을 때 그런 점들을 감안해서 읽어야 된다 하는 것이 제가 생각하고 있는 첫째이고, 두 번째로 박학홍사관을 설치를 하고 널리 인재를 구하고자 한다는 강희제康熙帝의 이것에 주목한 이유는, 청나라는 만주족으로 명나라를 물리치고 들어왔다. 명나라는 처음에 남경을 도읍으로 했었고, 어쨌든 장강 이남 지역에 있는 학자들이 굉장히 강력한 전통을 갖고 있었다. 명나라가 망할 무렵에 이자성李自成이 말하자면 대순大順이라고 하는 나라를 세웠다. 그때 황종희黃宗羲 집안도 거기에 굉장히 깊이 개입을 했던 사람들이다. 그런 다음에 정성공鄭成功의 난도 있었고, 삼번의 난三藩之亂도 있었다. 그럼 전후의 사정을 보면 청나라가 중국으로 들어온 다음에 강희제康熙帝가 황제 노릇을 그렇게 오랫동안 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버티는 자들이 있었고. 황종희黃宗羲는 죽을 때까지 그 마음을 버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역사적인 사건들이 그냥 잊혀졌겠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우리가 현대 중국의 역사를 읽을 때도 이 사건들이 중국 공산당의 창건자들의 뇌리 속에 있었다. 《마오쩌둥 평전》을 보면 그 얘기가 나오고, 《현대 중국의 탄생》에서도 그것을 인용을 하고 있는데,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포하는 자리에서 마오쩌둥이 이자성처럼 쫓겨나게 되지 않도록 조심을 해야겠다 라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굉장한 강박 관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중원에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공산당이 연안에서 밀고 내려와서 들어왔을 때 그들을 어떻게 보았겠는가. 옛날에 청나라가 명나라를 밀고 들어온 것을 떠올릴 사람들이 꼭 마오쩌둥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황종희黃宗羲가 죽을 때까지 버티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만만치 않은 사건이라는 것도 한 번쯤은 생각해 볼 만하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