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유원의 책담화冊談話(https://booklistalk.podbean.com)에서 제공하는 「탄허 스님의 선학 강설」를 듣고 정리한다.
2026.04.25 📖 탄허 스님의 선학 강설(3)
탄허呑虛, ⟪탄허 스님의 선학 강설⟫
텍스트: https://buymeacoffee.com/booklistalk/Tan-Heo-01
유불선儒佛仙, 삼교三敎
유이치세儒而治世 도이치신道而治身 불이치심佛而治心
이불치심以佛治心 이도치신以道治身 이유치세以儒治世 ─ 남송南宋 효종孝宗, 원도변原道辨
도가논변모자이혹론道家論辨牟子理惑論에서
답왈전봉答曰轉蓬 표이飄而 거륜車輪 성成 (굴러가는 쑥대가 날리면서 거륜이 생겼다)
와목窊木 유이流而 주집설舟楫設 (오목한 나무가 흘러가는 것을 보고서 배와 노를 만들었다)
지주蜘蛛 포이布而 나망진羅網陳 (거미가 그물 치는 거를 보고서 그물을 만들었다)
조적鳥跡 현이문자見而文字 작作 (새 발자국이 나타나자 문자를 만들었다)
고故 유법성有法成 이易 (그러므로 법이 있이 이루어진 것은 쉽다)
오람불경지요吾覽佛經之要 유삼십칠품이有三十七品易 (내가 불경의 요체를 보았는데 37품이라)
남도경지문覽道經之文 역삼십칠편亦三十七篇 (도경도 37품을 보았다)
고故 법지의法之矣 (그러므로 본받아서 그렇게 하였다)
어시於是 문자問者 축연踧然 실색失色 (이에 묻는 사람이 할 말이 없어 낯빛을 잃고)
차수피석叉手避席 준순부복逡巡俯伏 왈曰 (차수하고 자리를 피해 기어엎드려 말한다)
불지도여시야佛之道如是也 불지도여시야佛之道如是也 (부처의 도가 이와 같다)
비인몽고鄙人矇瞽 생어유측生於幽側 (더러운 사람 못생긴 내가 어둡고 희미한 곳에서 나서)
감출우언敢出愚言 (감히 어리석은 말을 내서)
불려화복不慮禍福 (화복을 헤아리지 않고)
금야문명今也聞命 (이제야 내가 명령을 들으니)
확여탕설確如蕩雪 (확연하기가 눈 녹는 것과 같다)
갱청참회更請懺悔 원위제자願爲弟子 (다시 청하노니 참회하고 제자되기 원한다)
불상생不殺生 문제
조이불망釣而不網 익불석숙弋不射宿 (낚시는 하지만 그물질은 못한다. 새는 잡지만 조는 자는 쏘지 모한다) ─ 논어論語 술이述而
군자君子 원포주遠庖廚 (군자는 푸줏간을 멀리한다)
촉고불입오지數罟不入洿池 (빽빽한 그물을 웅덩이 못에 넣지 않는다)
어별魚鼈 불가승식야不可勝食也 (물고기와 자라의 고기를 다 먹을 수 없다) ─ 현정론顯正論
위인이미진기도야爲仁而未盡其道也 (인을 하면서도 그 도를 다하지 못한 것이다)
탄허 스님의 선학 강설을 읽는다. 처음에 나오는 게 유불선儒佛仙, 삼교三敎에 대하여이다. "유교는 정正으로써 교敎를 베풀고, 도교는 높은 것으로써 교敎를 베풀고, 불교는 큰 것으로써 교敎를 베푼다." 불교는 큰 것으로써 교를 베푼다. 단순히 물리적으로만 생각하면 안 된다. 큰 것으로써 가르침을 베푼다는 말은 무엇인가. 유불선儒佛仙, 삼교三敎 중에 스케일이 가장 큰 게 불교이다. 불교에서 큰 시간을 겁劫이라고 한다. 산스크리트어 kalpa를 음차로 해서 한자로 쓰면 겁劫이 되는데 일단 시간부터가 장난 아니게 크다. 광대무변한 우주와 그 우주 속의 시간을 아우르는 얘기를 하니까 큰 것으로써 교를 베푼다 라는 얘기를 하지 않겠나 한다. 도교는 높다 라고 하는 것, 가닿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큰 것과는 조금 다르다. 도교는 아주 이상적인 것을 설정해서 하는 얘기이겠다.
"그게 그 장점, 그 교리에 대한 장처長處를 들어서 얘기하는 말이다." 장처長處라는 것은 길 장長자에다가 장소 처處, 그러니까 장점長點이라고 말하기보다 장처長處를 들어서 얘기한다. 장점하고 장처는 다르다. 점點이라고 하는 건 규정적이고 한정적인 것을 짚는 것이고, 처處는 근처 이쯤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유교의 큰 것 높은 것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불교에 바른 것 높은 것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니까 도교는 높은 것으로써 교를 베푼다고 하면 도교는 바른 것 없는가, 있다는 말이다. 유불선 삼교가 다 비슷비슷한 것들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이 부분을 강조하는 것이다.
세상을 다스리는 데는 유교, 유이치세儒而治世, 몸뚱이를 다스리는 도교, 도이치신道而治身, 탄허 스님은 수천 년 만 년 산다는 도교라고 했다. 그러니까 몸뚱이를 다스린다는 게 도교이다. 도교에서 신선은 도를 깨달아서 세상의 올바른 이치를 얻는게 아니라 그냥 오래 사는 것이다. 그냥이라는 말에 강조가 있다. 그다음에 불이치심佛而治心, 이 마음 자리, 우주만유의 핵심, 근본 자리를 밝히는 데는 불교가 장원이다. 마음에서 뭐든지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탄허 스님은 앞서 말씀하신 것처럼 "유교에 큰 것 높은 것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불교의 바른 것, 높은 곳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장처長處만 들어서 얘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불교로 정치를 못한다는 말도 아니고, 또 유교로써 마음을 못 다스린다는 말이 아니다." 장점만 가지고 얘기하면 된다. "어떤 것이 깊으냐, 어떤 것이 옅으냐, 어떤 것이 우하냐 어떤 열하냐 이걸 따지는 것이다." "남송南宋 효종孝宗 황제가 원도변原道辨이라는 논문을 지었는데, 그 원도原道에 대한 변辨을 지어서 하는 말이", 원도原道라는 게 근원이 되는 도라는 말이겠다. 이불치심以佛治心하고, 불로써 마음을 다스리고, 이도치신以道治身하며, 도로써 도교로써 몸을 다스리고, 이유치세以儒治世, 유교로써 세상을 다스린다. 어찌 하나라도 폐해서는 안 된다.
그다음에 사구를 여의고 백비를 끊는다인데, 유와 무의 존재론에 관한 것이다. 있음, 없음, 있다가 있고 없다가 있는데,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도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없는 것이 배경에 깔려야 있는 것이 드러나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있는 것이 배경에 깔려야 없는 것도 드러나 보인다. 그러니까 유有를 계속 이렇게 들여다보면 있음이 아니구나 하는 것이 보이고, 무無를 이렇게 계속 들여다보고 있다 보면 없음이 아니구나 라는 게 보인다. 그래서 비유비무非有非無, 비유도 아니요 무도 아니요 라는 그런 경지에 간다. 이렇게 계속 들여다보면, 우리가 살아 있다가 죽으면 있음이 없음으로 간다. 있음이 없음으로 가는 것이다. 그러니 있음하고 없음하고는 고정된 게 아니다. 있다는 것도 고정된 것이 아니고 그러다가 없음이 된다. 그런데 없는 것 같아 보이는 데에서도 뭔가가 생겨난다. 있음도 고정된 것이 아니고 없음도 고정된 것이 아니다. 유무가 있는데 유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비유비무非有非無이다. 계속 유는 무로, 무는 유로 오고 가고 있다. 그러면 이행, 움직임이다. 그러니까 헤겔의 논리학의 첫 문단에 Sein이 있음이고, Nicht가 없음이다. 그다음에 Werden이 생성이다. 그래서 한자로 쓰면 유무성有無成 변증법이라고 말을 한다. 사유 패턴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있음이 없음이요 없음이 있음이요 그러니 비유비무非有非無이다. 그런데 또 자세히 들여다보면 있는 건 있는 것이고 없는 건 없는 것 아니야 라고 하면 역시 있음이고 역시 없음이다 라고 해서 역유역무亦有亦無라고 쓰는 것이다. 그런 것들이 존재론, 형이상학은 아이디얼한 것에 대해서 따져 묻는데 이게 바로 이제 헤겔 존재론의 출발점이고 불교의 존재론도 바로 여기서 시작을 하는 것이다.
그다음에 도가논변모자이혹론道家論辨牟子理惑論을 보자. 답답하여 말하기를, 답왈전봉答曰轉蓬 표이飄而 거륜車輪 성成 (굴러가는 쑥대가 날리면서 거륜이 생겼다), 문명의 이론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는 일이라고 하는 게 자연을 본받아서 하는 것이다. 자연이 올바른 것이니까 본받는다가 아니라 자연을 본 뜬다, 모방한다는 말이다. 쑥대가 굴러가는 것을 보고 나서 저렇게 하면 되겠네 하고 그것을 모방해서 수레 바퀴를 만들었다. 그다음에 와목窊木 유이流而 주집설舟楫設 (오목한 나무가 흘러가는 것을 보고서 배와 노를 만들었다), 오목한 나무가 흘러가는 것을 보고 이렇게 가운데를 파서 오목하게 만들면 배를 만들 수 있겠네 하고 배와 노를 만들었다. 그다음에 지주蜘蛛 포이布而 나망진羅網陳 (거미가 그물 치는 거를 보고서 그물을 만들었다), 거미가 그물을 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보고서 그물을 만들어서 고기를 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다음에 조적鳥跡 현이문자見而文字 작作 (새 발자국이 나타나자 문자를 만들었다), 상형 문자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하는데, 새 발자국이 나타나서 글자를 만들었다.
이렇게 네 가지 사례를 들어서 말한 다음에, 고故 유법성有法成 이易 (그러므로 법이 있이 이루어진 것은 쉽다), 법이 있어서 이루는 것은 쉽다. 그다음에 오람불경지요吾覽佛經之要 유삼십칠품이有三十七品易 (내가 불경의 요체를 보았는데 37품이라), 내가 불경의 요체를 열람해서 37품을 이렇게 했다. 그다음에 남도경지문覽道經之文 역삼십칠편亦三十七篇 (도경도 37품을 보았다), 도경 37품을 열람해서 또다시 37편을 썼다. 고故 법지의法之矣 (그러므로 본받아서 그렇게 하였다), 이것 역시 내가 본받은 것이다. 불경과 도경을 보고서 내가 이렇게 37편을 썼다는 말이다. 누가 왜 37편으로 했냐고 물으니까 이렇게 설명을 한 끝에 본받아서 그랬다고 한 말이다. 어시於是 문자問者 축연踧然 실색失色 (이에 묻는 사람이 할 말이 없어 낯빛을 잃고), 답을 듣고 나서 물어본 사람이 할 말이 없어서 낯빛을 잃는 버렸다. 그다음에 차수피석叉手避席 준순부복逡巡俯伏 왈曰 (차수하고 자리를 피해 기어엎드려 말한다), 손을 끼고 자리를 피한다. 그런 다음에 엉금엉금 기어서 말한다. 불지도여시야佛之道如是也 불지도여시야佛之道如是也 (부처의 도가 이와 같다), 부처님의 도가 이와 같으며, 부처님의 도가 이렇다 라고 얘기했다. 그러니까 자연의 이치를 본받아서 그것을 본 떠서 하는 것이 부처님의 도라고 말하는 것이다. 비인몽고鄙人矇瞽 생어유측生於幽側 (더러운 사람 못생긴 내가 어둡고 희미한 곳에서 나서), 비인이라는 것이 더러운 사람이고 몽고라고 하는 것이 못생겼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자기를 낮춰 부를 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감출우언敢出愚言 (감히 어리석은 말을 내서), 감히 어리석은 말을 해서 했다는 말이다. 불려화복不慮禍福 (화복을 헤아리지 않고), 화와 복을 헤아리지 않고 말을 했으니, 금야문명今也聞命 (이제야 내가 명령을 들으니), 이제 그 말씀을 들으니, 확여탕설確如蕩雪 (확연하기가 눈 녹는 것과 같다), 확연하기가 눈 녹는 것과 같도다. 갱청참회更請懺悔 원위제자願爲弟子 (다시 청하노니 참회하고 제자되기 원한다), 그래서 다시 청하건데 참회하고 제자 되기를 원합니다. 이 말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을 하는 순간이 사실 깨달음이 절반은 된다. 여기서 문명聞命이라고 하는 것에서 명命이라고 하는 단어를 잘 봐야 한다. 내가 나아가야 할 바를 들었다 라는 뜻도 되는 것이다. 운명運命할 때 명命 자이기도 하다. 내가 타고난 바를 알아차렸으니 확연하게 속이 탁 눈 녹는 것 같다는, 확여탕설確如蕩雪이다.
이제 불상생不殺生의 문제를 보자. 조이불망釣而不網 익불석숙弋不射宿 (낚시는 하지만 그물질은 못한다. 새는 잡지만 조는 자는 쏘지 모한다), 낚시는 하지만 그물질은 안 한다. 낚시로 하는 거는 괜찮은데 그물질은 하지 말자는 말이다. 낚시는 물고기가 와서 무는 것이다. 낚시와 그물질을 둘 다 고기잡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물질은 못 도망가게 전부 다 싸그리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낚시질은 하더라도 그물질은 하지 말라는 것으로, 그물질까지 가버리면 살생이고 낚시질은 그냥 봐주자는 것이다. 그다음에 익불석숙弋不射宿, 익弋은 죽인다, 석射은 쏜다 라는 것이다. 조는 사람은 차마 쏘지 못한다는 말로, 논어論語 술이述而편에 있는 말이다. 그리고 맹자에는 군자君子 원포주遠庖廚 (군자는 푸줏간을 멀리한다)라는 말이 있다. 왜 멀리 하는가. 고기를 먹기는 먹는데 고기 잡는 것을 보고는 차마 못 먹는다는 말이다. 불살생에 대한 유학의 미흡함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유학은 불살생에 대해서는 철저하지 못한 점이 있다. 기화 스님이 쓴 글에 이 얘기가 나온다고 한다. 조선 초에 정도전이 불씨잡변을 썼는데, 기화 스님이 불교라는 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얘기를 한 것이다. 그 다음에 촉고불입오지數罟不入洿池 (빽빽한 그물을 웅덩이 못에 넣지 않는다), 빽빽한 그물을 웅덩이 못에 넣지 말아라 라는 것도 같은 얘기이다. 유가에서는 불살생 문제가 좀 어설프지 않느냐 하는 말이다. 기화 스님이 현정론顯正論에서 어별魚鼈 불가승식야不可勝食也 (물고기와 자라의 고기를 다 먹을 수 없다), 물고기와 자라는 이루 다 먹을 수 없다. 그러니까 빽빽한 그물을 오지에 다 넣지 않으면 물고기와 자라의 고기를 다 먹을 수 없게 된다는 말이다. 위인이미진기도야爲仁而未盡其道也 (인을 하면서도 그 도를 다하지 못한 것이다), 어진 사람이 되자고 하면서도 그 도를 다 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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