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탄허 스님의 선학 강설(8) ─ 不材之木

 

2026.05.30 📖 탄허 스님의 선학 강설(8) 

탄허呑虛, ⟪탄허 스님의 선학 강설⟫
텍스트: https://buymeacoffee.com/booklistalk/Tan-Heo-02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 부재지목不材之木
장석지제匠石之齊 지호곡원至乎曲轅 견역사수見櫟社樹 기대폐수천우其大蔽數千牛 계지백위絜之百圍 기고임산其高臨山 관자여시觀者如市  
장인, 석이 제나라에 갔는데, 곡원에 이르러 사당 나무인 상수리나무를 보았다. 그 크기는 수천 마리의 소를 덮을 수 있고, 둘레는 백 아름이며, 높이는 산을 압도할 정도였다.  구경하는 사람들이 마치 저잣거리 같았다. 

천정무원穿井無源

부재지목야不材之木也, 재목이 못 되는 나무이다.
이위주즉침以爲舟則沈, 저것으로 배를 만들면 침몰하고
이위주즉두以爲柱則蠹, 문지방을 만들면 좀이 슬고
이위관곽즉속부以爲棺槨則速腐, 관을 만들면 속히 썩고
무소가용無所可用, 쓸 곳이 없는 바다.
이위기즉속훼以為器則速毀, 그릇을 만들면 즉시 부서지고
이위문호즉액만以為門戶則液樠, 대문을 만들면 진액이 흐르고
고능약시지수故能若是之壽, [쓸모가 없으니] 이렇게 오래사는 것이다.

 


탄허 스님의 선학 강설, 오늘은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에 나와 있는 널리 알려진 구절 하나만을 읽어보겠다. 그전에 재미있는 부분이 하나 있다. 서역에서 중국으로 불교가 들어올 때, 우리가 외부에서 어떤 사상이 들어오면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상적 자원을 가지고 그것을 이해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 외부에서 만들어진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여건이 전혀 안 되는, 형편이 안 돼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사유 체계라든가 이런 것들이 전혀 다른 경우가 있다. 요즘 우리가 읽고 있는 케임브리지 세계사 《고대 도시들》을 보면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왜 그렇게 살았을까. 동네가 달라서 그렇다. 강의하면서도 늘 얘기하는데, 그 사람들이 사는 동네하고 우리가 사는 동네는 기본적으로 다르다. 무슨 정신력이 엄청나게 있어 가지고, 그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성숙하고 각각의 개인이 가지고 있는 역량이 뛰어나서 민주주의를 한다? 그렇지는 않다. 그런 삶의 방식을 채택할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여건들이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오늘날은 삶의 방식이 달라졌으니까 민주주의를 잘 못한다. 현대의 그리스도 우리나라 못지않게 굉장히 엄혹한 파시스트 체제를 겪었다.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서역 지방에서 이게 들어올 때 중국이 가지고 있는 사상 자원으로 이해할 수 있는 접점을 찾아야 되는데, 그 접점을 찾을 때 적당했던 것이 도가이다. 그래서 도가와 장자의 언어들이 서역에서 온 불교를 번역하는 데 사용되고, 그러다 보니까 도 닦는다는 말을 하는데, 이 도 닦는다는 말이 원래 부처님이 하던 얘기는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또 중국 불교를 통해서 불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우리도 자연스럽게 그런 말을 쓰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불교를 받아들일 때 중국 문화와 일정한 접점들이 꽤 많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탄허 스님의 이 강설을 보면 장자 얘기가 꽤 많다. 

오늘은 장자의 인간세人間世에 있는 널리 알려진 부재지목不材之木에 대해 설명을 해보려고 한다. 부재지목不材之木을 일단 읽어보면, 탄허 스님은 몇몇 구절만 빼서 그것에 덧붙여서 자유롭게, 자유롭게 라기보다는 본인의 의도에 맞게 이렇게 새기셨는데 원래 관련된 부분은 이렇다. 

장석지제匠石之齊 지호곡원至乎曲轅 견역사수見櫟社樹 기대폐수천우其大蔽數千牛 계지백위絜之百圍 기고임산其高臨山 관자여시觀者如市 
장인, 석이 제나라에 갔는데, 곡원에 이르러 사당 나무인 상수리나무를 보았다. 그 크기는 수천 마리의 소를 덮을 수 있고, 둘레는 백 아름이며, 높이는 산을 압도할 정도였다.  구경하는 사람들이 마치 저잣거리 같았다. 

장석지제匠石之齊, 석이라는 이름을 가진 장인이 제나라에 갔다는 얘기이다. 한자는 같은 얘기를 해도 물음으로 읽느냐 아니면 평서문으로 읽느냐에 따라서 다르다. 천정무원穿井無源, 우물을 파는데 원천이 없다고 하면 평서문이다. 그런데 이것을 의문문으로 읽으면 우물을 파나 근원이 없겠는가가 되는 것이다. 글자 네 개를 써놓고 이것을 어떤 맥락으로 읽어내느냐가 다른 것이다. 우물을 파도 근원이 없다는 절망으로 읽을 것인지 아니면 파다보면 나오겠지 없겠어 라고 읽을 것인지, 그 바탕에 근본이 되는 물이 있을 거야 라고 할 수도 있다. 나무가 엄청 크더라는 것이 굉장히 크고 둘레도 굵고 높기도 하고 그런데 이 사람이 이것을 보고 뭐라고 했는가. 

부재지목야不材之木也, 재목이 못 되는 나무이다.
크기는 한데 쓸모가 없는 것이다. 이게 그 유명한 무용지용無用之用이다.  쓸모없음이 쓸모 있다 라고 하는 이야기이다.  왜 쓸모가 없는가. 

이위주즉침以爲舟則沈, 저것으로 배를 만들면 침몰하고
배를 만들면 곧바로 가라앉는데 촘촘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퍼지는 것이다. 밀도가 굉장히 높은 나무여야 하는데 상수리 나무는 아니더라 라는 것이다.  

이위주즉두以爲柱則蠹, 문지방을 만들면 좀이 슬고
기둥을 만들면 곧바로 좀이 슬어버린다. 조밀하질 않으니까 밀도가 높지 않다는 것에서 그게 나오는 것이다. 

이위관곽즉속부以爲棺槨則速腐, 관을 만들면 속히 썩고 
무소가용無所可用, 쓸 곳이 없는 바다. 

이렇게 이제 설명을 한다. 기본적으로 밀도가 없어서 별로 쓸모가 없어 나무라는 한마디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빠져 있는 부분이 있다. 각주를 보면 원문이 빠져있다고 하는데 어떤 부분이 빠져 있는가. 

이위기즉속훼以為器則速毀, 그릇을 만들면 즉시 부서지고
이위문호즉액만以為門戶則液樠, 대문을 만들면 진액이 흐르고
고능약시지수故能若是之壽, [쓸모가 없으니] 이렇게 오래 사는 것이다.

이것을 읽으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그 나무의 성질을 살펴보니까 밀도가 높지 않구나, 그러면 저 나무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우리 생활에 사용되는 재목으로 만들어서 배를 만들거나 문지방을 만들거나 관을 만들거나 대문을 만들거나 그릇을 만들 수 없구나 라는 얘기이다. 표면적으로는 그러하다. 그런데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에서는 쓸모가 없으니까 오래 산다. 그런데 우리는 오래 살면 뭐 해 라고 생각을 한다. 오래 살면 뭐 해 쓸모가 있어야지. 우리가 일반적으로 세상사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쓸모가 있어야지 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 쓸모라는 것이 과연 내 몸에 또는 내 생명에, 자연에 얼마나 부합할 것인가. 오히려 그 쓸모라는 게 자연에 부합한 삶을 사는 데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참다운 생명을 깎아 먹는다 라고 하는 것을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해서 공자 학파의 세상에 나아가 도움이 되는 뭔가를 해야 된다 라고 하는 것에, 말하자면 반대 정립을 세워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쓸모없는 게 오래 산다를 곰곰이 생각을 해보면,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대립이라고 하는 것을, 그 대립 구도를 가지고 이 논변이 만들어져 있다. 아주 추상화해 보면 있음과 없음의 대립 구도를 가지고 논변을 만들다. 그래서 있음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없음이라고 하는 것이 전제될 때 있음이 의미가 있는 것이고, 있음이라고 하는 것이 전제될 때 없음이라고 하는 것이 유의미하게 우리에게 이해될 수 있다. 그 둘을 동시에 생각해야만 바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나무가 이래저래 해서 성기니까 대충 잘라다가 이렇게 써도 되겠네요 라고 하는 사람은 정말 실용적인 사람일 것이고, 우리는 보통 그렇게 생각을 한다.  제 기억으로는 장자의 무용지용이라고 하는 구절은 꽤 어렸을 때부터 봤던 것 같다. 그래서 이를테면 나라가 어수선하고 세상이 격동적일 때는 나대지 마라,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목숨을 부지하는 길이다 라고 할 때 무용지용이 거론되기도 했다. 그런데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면, 남들이 보기에는, 즉 세상사에는 쓸모가 없어 보이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또 그것도 나름 쓸모가 있는 것들이 더러 있다. 즉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것처럼 창문은 뻥 뚫려 있는데, 그 뚫림이 있어서 쓸모가 있는 것이다. 창문은 뚫려 있는 것이 쓸모이다. 지금 쓸모없는 것처럼 보여도, 제 인생의 제1원리인 충족이유율, 뭐가 존재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라고 하는 것, 그것에 근거해서 다 쓸모가 있으니까까지는 안 가더라도 존재하는 것들은 다 존재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raison d être, 존재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내치지 말고 그런대로 돌보면서 해두는 것도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닐 것이다 라고 하는 게 제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다.  

철학이라고 하는 건은 무엇인지를 물으면, 물리학이라고 하면 학이라는 글자 앞에 물리가 붙어있다. 사물의 이치, 사물이라는 게 물질matter의 이치가 물리학이다. 그러니까 어떤 학문의 명칭을 보면 그 학문이 탐구하는 대상을 앞에 갖고 있다. 생물학, 물리학, 고고학, 문헌학, 그런데 철학哲學은 Philosophy라는 말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번역되었는지는 그냥 두고, 우리가 통용되는 말로 해보면 밝을 철哲자의 학문이다. 밝은 학문이다. 그러니까 이게 방법인지 아니면 그것의 성격을 드러내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구체적인 탐구 대상이 그 안에 들어가 있지 않으니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방법론이다. 뭐가 있으면 밝게 비춰본다 라는 뜻도 되고, 밝아지는 것, 내가 뭔가를 아는 것, 그러니까 바깥에 내 눈앞에 놓여 있는 것들이 물리적인 사물이 되었건 무기체가 되었건 유기적 생물이 되었건 간에 그것들을 이렇게 들여다본다. 탐구를 통해 나의 머릿속을, 나의 생각을 밝게 한다. 빛을 비춰서 보아 가지고 또는 탐구를 해가지고 내가 밝아지면 그게 철학이다. 그러니까 연구할 수 있는, 탐구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것들이 무한정이다.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한, 우주가 없어지지 않는 한 계속해서 탐구를 할 수 있다. 그게 철학이니까 어찌 보면 아무짝에 쓸모없는 것 같은데 할 수 있는 게 무궁무진하다. 그렇게 생각을 해보면 무용이라고 하는, 쓸모가 없다 라고 하는 것이 가지고 있는 쓸모가 또 생겨날 수도 있지 않겠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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