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탄허 스님의 선학 강설(9) ─ 지止를 닦는 방법

 

2026.06.13 📖 탄허 스님의 선학 강설(9) 

탄허呑虛, ⟪탄허 스님의 선학 강설⟫
텍스트: https://buymeacoffee.com/booklistalk/Tan-Heo-02

 

마명조사馬鳴祖師, 지止를 닦는 방법,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약수지자若修止者 주어정처住於靜處 단좌정의端坐正意 

'멈춤'을 닦는 이는 고요한 곳에 머물러 단정히 앉아 뜻을 바로잡는다. 

불의기식不依氣息 불의형색不依形色 불의어공不依於空 불의지수화풍不依地水火風 내지불의견문각지乃至不依見聞覺知 

숨에 의지하지 말고 형색에 의지 말고 비어있음에 의지하지 말고 지수화풍에 의지하지 말고 또는 보는 것, 듣는 것, 깨닫는 것, 아는 것에 의지하지 말고  

일체제상一切諸想 수념개제隨念皆除 역견제상亦遣除想 
하나이자 모두인 모든 생각은, 생각을 따라가되 모두 없애고 또한 없앤다는 생각도 보내버려야 한다. 

역부득수심亦不得隨心 외념경계후外念境界後 이심제심以心除心 

또한 마음(생각)을 따라서 밖으로 경계를 생각한 다음 마음으로써 마음을 없애려하지 말고 [이것이 경계라고 생각하여, 그 생각에 근거하여 경계를 없애려 하지 말고] 

심약치산心若馳散 즉당섭래即當攝來 주어정념住於正念 
마음이 흩어져 달린다면 곧 거두어와서 바른 생각에 있어야만 한다. 

시정념자是正念者 당지유심當知唯心 무외경계無外境界
이 바른 생각이라는 것은 마땅히 알아야 하는 바 오로지 마음일 뿐이요 바깥 경계가 없다.

즉복차심即復此心 역무자상亦無自相 념념불가득念念不可得

곧 다시 이 마음도 또한 스스로의 늘 있는 정체성도 없는 것이어서 생각을 하고 해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 강의에서 누락된 부분

이일체법以一切法 본래무상本來無相 념념불생念念不生 념념불멸念念不滅 

하나이고 모두인 법이 본래 그러한 정체성이 없으니 생각하고 생각해도 생겨나지 않으며 생각하고 생각해도 소멸하지 않는다

형상形相, 상재相在(Sosein)

 

 


탄허 스님의 선학 강설을 읽어보겠다. 오늘은 치문緇門의 마지막에 있는 지止를 닦는 방법에서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 있는 얘기이다. 마명조사馬鳴祖師는 부처님 직견증명(直見證明)으로 내려오는 13세世 조사라고 한다. 13세라고 하면 1세가 0대가 되는 것이어서 12대 조사된다고 한다. 부처님의 말씀 가지고 얘기하는 것이 치문緇門인데, 치문緇門의 맨 마지막이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 있는 얘기이다.  

약수지자若修止者 주어정처住於靜處 단좌정의端坐正意 
'멈춤'을 닦는 이는 고요한 곳에 머물러 단정히 앉아 뜻을 바로잡는다.

약수지자若修止者는, 만약에 지止를 닦는 사람은, 지止는 멈춘다는 말이다. 지止는 불교에서 많이 쓰이는 말이기도 하지만 유가에서도 쓰인다. 유가에서 지어지선止於至善, 지극한 선함에 이르러 멈춘다. 가만히 있기만 하면, 내가 선에 이르렀으니 가만히 있으면 되는가, 그게 아니다. 공자님은 그것을 유지하려면 굉장히 노력을 해야 된다고 얘기를 하시는 분이고, 부처님은 무념무상의 단계로 들어가야 된다고 얘기하는 분이다. 조금 차이가 있는데 어쨌든 그런 경지에 이르렀을 때 멈춘다 라고 하는 것은 중국 불교이다. 중국 불교가 되었건 유가가 되었건 보통 사람은 이르기 어렵다. 멈춤이라는 것은 참선을 하는 것이다. "지止는 samatha(사마타奢摩他)의 의역으로서 그침·고요·집중을 닦는 수행을 말한다. 통찰을 닦는 관(觀, vipassan)과 함께 짝을 이루어 지관이문(止觀二門)이란 수행의 근본체계를 이룬다. 지(止)가 집중하여 탐욕과 번뇌 등의 작용을 그치게 하는 수행이라면, 관(觀)은 대상을 관찰하여 올바른 지혜를 터득하기 위한 수행이다. 이 둘은 상호보완적이며, 궁극적으로는 구분이 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멈춰서 통찰한다는 말이겠다. 관을 하다 보면 멈추게 되는 것이고, 멈춰야 또 관도 되고 그런 것이겠다. 일단은 멈춰서 가만히 봐야 한다. 그런데 멈추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사람이라고 하는 존재가 육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간단하지 않을 거라고 본다. 가만히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불의기식不依氣息 불의형색不依形色 불의어공不依於空 불의지수화풍不依地水火風 내지불의견문각지乃至不依見聞覺知 
숨에 의지하지 말고 형색에 의지 말고 비어있음에 의지하지 말고 지수화풍에 의지하지 말고 또는 보는 것, 듣는 것, 깨닫는 것, 아는 것에 의지하지 말고 

불의기식不依氣息, 숨에 의지하지 말고, 여기서 숨이라고 하는 게 숨 쉬지 말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불의형색不依形色, 형색에 의지하지 말고, 사물의 외부에 있는 유형의 어떤 것에 휘둘리지 말라는 말이고, 불의어공不依於空, 그렇다고 해서 비어 있음에 의지하지 말고, 이것은 헛된 비어 있음일 수도 있다. 텅 비어 있다 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무것도 아닌 것일 수도 있으니까 그러지 말고, 불의지수화풍不依地水火風, 지수화풍에 의지하지 말고, 지수화풍이라는 말은 four elements, 자연물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예로부터 내려오는 근본적인 것이라고 알려진 것에 의지하지 말고, 내지불의견문각지乃至不依見聞覺知, 보는 것, 듣는 것, 깨닫는 것, 아는 것에 의지하지 말고, 이런 것이 무서운 말이다.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것, 그것은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이니까 자꾸 매달리지 말아라 라는 얘기이겠다. 특별하게 이게 중요한 것 같아 라고 하는 것에 자꾸 들어가지 말라는 말이다. 

일체제상一切諸想 수념개제隨念皆除 역견제상亦遣除想 
하나이자 모두인 모든 생각은, 생각을 따라가되 모두 없애고 또한 없앤다는 생각도 보내버려야 한다.

그다음에 일체제상一切諸想. 하나이자 모두인 생각은, 수념개제隨念皆除, 생각을 따라가되 모두 없애고, 가보기는 가는데 없애야 된다는 말이다. 역견제상亦遣除想, 생각을 없앤다는 것 또한 없애라 라는 말이다. 견遣이라는 게 보내버려라 라는 것이다. 각주를 보면 구절이 빠진 게 하나 있다고 한다.

이일체법以一切法 본래무상本來無相 념념불생念念不生 념념불멸念念不滅 
하나이고 모두인 법이 본래 그러한 정체성이 없으니 생각하고 생각해도 생겨나지 않으며 생각하고 생각해도 소멸하지 않는다

이일체법以一切法, 법法이라고 하는 게 법칙이라는 뜻도 있겠지만 이치라는 뜻이다. 모든 법이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정체성이 없는 것이다. 본래무상本來無相, 상相이라는 단어를 유심히 봐야 한다. 상相이라고 하는 단어가 형상形相의 상相 자이다. 플라톤에 보면 이데이라는 단어가 형상形相이라고 번역이 된다. 또는 다르게 말하면 상재相在라는 말을 쓴다. 도이치어로 Sosein을 상재相在라고 번역을 하는데 형상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본래무상本來無相, 본래는 상이 없다는 말이다. 고정된 정체성 또는 불변의 정체성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념념불생念念不生 념념불멸念念不滅, 생각하고 생각해도 생겨나지 않으며 생각하고 생각해도 소멸하지 않는다 생겨나지 않으니까 소멸하지도 않는다. 아무 생각 없이 아무 생각을 하지 않고 無念無想이다. 

역부득수심亦不得隨心 외념경계후外念境界後 이심제심以心除心 
또한 마음(생각)을 따라서 밖으로 경계를 생각한 다음 마음으로써 마음을 없애려하지 말고 [이것이 경계라고 생각하여, 그 생각에 근거하여 경계를 없애려 하지 말고] 

심약치산心若馳散 즉당섭래即當攝來 주어정념住於正念 
마음이 흩어져 달린다면 곧 거두어와서 바른 생각에 있어야만 한다.

주어정념住於正念, 바른 생각에 있어야만 한다. 바른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은 아니다. 생각을 바르게 해야 한다 라는 것도 아니고 생각을 안 하는 게 바른 생각이다. 지금까지 읽어본 바에 따르면 그렇다. 

시정념자是正念者 당지유심當知唯心 무외경계無外境界
이 바른 생각이라는 것은 마땅히 알아야 하는 바 오로지 마음일 뿐이요 바깥 경계가 없다.

바른 생각이라는 것은 사실은 마땅히 알아야 되는 것이다. 바른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생각이 아니라 마음이다 라는 말이다. 마음에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니까 마땅히 알아야 된다. 바른 생각이라는 것은 오로지 마음일 뿐이다. 마음이니까 마음에는 바깥에 경계가 없다. 경계가 없다라는 말이니까 무한정자無限定者, apeiron이겠다. 마음이라는 것은 바깥에 경계가 없다. 바깥에 경계가 없으니까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즉복차심即復此心 역무자상亦無自相 념념불가득念念不可得
곧 다시 이 마음도 또한 스스로의 늘 있는 정체성도 없는 것이어서 생각을 하고 해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復는 다시 부復, 되돌아오기를 원하는 거니까 복復이라고 읽어도 되겠다. 그런데 가만히 이 마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다시 생각을 해보니까, 무한정자이니까 역무자상亦無自相, 스스로 늘 그러한 것, 스스로의 늘 있는 정체성도 없는 것이고, 생각하고 생각해 봐도 얻어낼 수가 없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없는 것인데, 무외경계無外境界이니 그렇다. 오로지 마음인 것이고,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경계가 없는 것이어서,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생각하고 생각해도 그게 없는 것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