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자: 기억의 집

 

기억의 집 | 문학과지성 시인선 78 | 최승자 기억의 집 | 문학과지성 시인선 78 | 최승자 - 10점
최승자 (지은이)문학과지성사

이제 가야만 한다
때로 낭만주의적 지진아의 고백은
눈물겹기도 하지만,
이제 가야만 한다.
몹쓸 고통은 버려야만 한다.

한때 한없는 고통의 가속도,
가속도의 취기에 실려
나 폭풍처럼
세상 끝을 헤매었지만
그러나 고통이라는 말을
이제 결코 발음하고 싶지 않다.

파악할 수 없는 이 세계 위에서
나는 너무 오래 뒤뚱거리고만 있었다.

목구멍과 숨을 위해서는
動詞만으로 충분하고,
내 몸보다 그림자가 먼저 허덕일지라도
오냐 온몸 온정신으로
이 세상을 관통해보자

내가 더 이상 나를 죽일 수 없을 때
내가 더 이상 나를 죽일 수 없는 곳에서
혹 내가 피어나리라.

 

아시는지
아시는지?
어느 날 갑자기 라면 먹고 싶은 것,
살고 싶음의 뿌리 그리하여
살아 있음의 뿌리 되찾고 싶은 것.

그래, 어느 날인가 몇 명의 문인이
라면이 한국 문학사에 끼친
공로에 대해 얘기한 적도 있다만,

오 들끓는 식욕으로 다가오는 라면,
고통과 쾌락의 두 약재로 빚어진
우리 시대의 당의정을
아시는지?

불현듯 식욕으로 다가오는 것은
무언가 골수에 사무친 것이다.
저 충청도 산간의 시래기 국을 못 잊듯,
저 도시 변두리의 라면을 못 잊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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