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아도: 플로티누스, 또는 시선의 단순성
- 책 밑줄긋기/책 2023-26
- 2026.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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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티누스, 또는 시선의 단순성 | 피에르 아도 - ![]() 피에르 아도 (지은이),안수철 (옮긴이)탐구사 |
문헌의 인용 표시에 대하여
1. 인물상
2. 자아의 수준들
3. 현존
4. 사랑
5. 덕(德)
6. 부드러움
7. 홀로 있음
저자 후기
플로티누스 연보
분석적 참고문헌
플로티누스 색인
일반 색인
저자의 저작 목록
역자 후기
72 우리는 관조를 통해, 인간들이 멀리 우회하여 겨우 얻을 수 있는 것, 즉 아름다움에 대한 봄(見)을 즉시 소유하게 된다.
이 아름다움은 형상들 세계의 아름다움이다. 그 세계에서 관조는 직접적(immédiate)이며, 형상들이 그들 자신을 관조한다. 그들 안에서, 우리가 자연에서 발견하는 직접적 기술이 자연의 이상적 완성을 가져온다. 즉, 형상들은 자신을 관조하면서 자신들을 형성하고, 자신들을 상정하면서 자신을 관조한다. 그들은 단 한 번의 영적인 행위로, 그들 자신의 모델인 동시에 결과인 것이다. 단 하나의 생명, 단 하나의 사유가 그들 안에서 흐른다. 그들은 스스로를 관조하는 단 하나의 형상이다. 그들은 신적인 사유이고, 플라톤의 향연에서 디오티마가 말한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74 우리는 성찰과 지각의 수준을 넘어서 직관과 관조의 수준에 도달해 있다. 이때 우리는 생명이 자아의 직접적 관조임을 체험한다. 우리는 사물들이 이 전체적인 봄에서 태어나는 것을 보는데, 아름다움은 그 봄에 의해 그 자신에게 봄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신적인 정신 안에, 사유 안에, 곧 그 자신을 사유하는 지성 안에 있다.
87 아름다움에 덧붙여져 사랑을 유발하는 이 뭔지 알 수 없는 것, 이 운동, 이 생명은 곧 은총(선의 자비로움)이라는 것이다. 플로티누스의 체험은 생명을 하나의 관조로, 구체적인 단순성으로, 하나의 현존으로 느낀 것이다. 이제 그 체험은 그 토대를 안다. 즉, 생명은 은총이라는 것이다.
93 플라톤을 읽어본 사람들은 여기서, 영혼이 그가 사랑하는 어떤 존재의 감각적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에 몰두해 있을 때 영혼을 자기 안의 선 그 자체 쪽으로 이끄는 사랑의 감정에 대한 향연과 파이드로스의 묘사에서 따온 이미지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플로티누스가 플라톤의 용어들 자체를 다시 갖다 쓴다 할지라도, 그는 그 심리적 내용 전부를 그것들에 똑같이 부여하지는 않는다. 플라톤이 말하는 사랑하는 관계라는 것은 고전 그리스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에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플라톤적 사랑은 남성적 사랑이다. 사랑받는 자는 젊은 사람이고, 사랑하는 자는 철학자, 곧 원숙한 사람이다. 플라톤은 말한다. 사랑하는 자의 사랑받는 자에 대한 사랑은, 사랑하는 자가 사랑받는 자에게서 인식하는 절대적 아름다움의 반영(비친 모습)에 의해 촉발된다고. 이때 영혼은 형상들의 세계를 다시 회상하고, 더 이상 반영에서가 아니라 아름다움 그 자체의 순수한 형상을 직접 대면하여 관조하려고 애쓴다. 그래서 플라톤 사랑은 마음을 몹시 동요시키는 어떤 감각적 정서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지적이면서 동시에 도덕적인 어떤 규율에 의해 그것은 순수한 형상에 대한 봄(見)을 성취하려고 노력한다. 이 단계에서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의 사랑하는 관계는 파괴되지 않고 승화된다. 사랑하는 자는 사랑받는 자를 여전히 사랑하지만, 이제는 그를 지도하고 향상시켜 선에 대한 관조 쪽으로 향하게 하며, 그의 안에서 아름다운 덕과 아름다운 이상을 낳게 하기 위해 사랑한다. 따라서 제자에 대한 사랑이 영적으로 되고 나면, 만약 그것이 육체적 사랑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에게 부족했을 것, 곧 다산성을 얻는다. 진실로 철학자인 사랑하는 자에게 영적인 다산성은 아름다움에 대한 관조의 즐거움을 완성해 준다. 거기에는 말하자면 사랑하는 자인 철학자, 그의 안에서 회상을 촉발한 자인 사랑받는 자, 그리고 그를 끌어당겨 사랑받는 자의 매개를 통해 사랑하는 자에게 매력을 발산하는 초월적 아름다움이 하나로 된 하나의 삼각관계가 있다.
125 플로티누스적 큰 물음이란 이런 것이다. 만일 우리 자신의 일부가 항상 저 위에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이따금 그 높은 수준으로 들어 올려져 최상의 삶을 살고, 신 안에서 안식하고, 그 전체적 현존에 의해 침입당하고, 선에 대한 사랑을 체험하며, 그것이 비추는 빛 그 자체일 뿐인 하나의 봄이 된다면, 우리가 어떻게 도로 떨어질 수 있고, 어떻게 그 현존이 부존재로 될 수 있으며, 어떻게 그 사랑의 불길이 꺼질 수 있겠는가? 어떻게 우리가 별개의 대상들을 다시 볼 수 있으며, 어떻게 의식을 회복하고, 성찰하고, 추론하고, 자기 몸을 새로이 감각할 수 있겠는가? 한 마디로, 어떻게 우리가 다시 인간이 될 수 있겠는가?
참된 삶은 저 위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체험했을 때, 찰나적인 섬광 속에서 신적인 합일을 맛보았을 때, 어떻게 우리가 일상적인 삶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겠는가? 이런 삶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정상적으로 보이지만, 이제 황홀경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의 비정상적이고 폭력적인 상태로 보이는데 말이다.
만일 우리가 다시 떨어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저 위에서의 삶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더 이상 어느 쪽에도 있지 않은 것이다. 신의 선물을 지니기에는 너무 세간적이고, 그것을 잊어버리기에는 이제 너무 신적이다.
137 중요한 것은 신적인 삶이다. 왜냐하면 정화적 덕들은 영혼을 신 쪽으로 향하게 하면서, 신이 그 자신 안에서 안식하는 그런 운동을 모방하기 때문이다.
184 우리는 이러한 관조가 영혼을 몰입시켜 그것이 외적인 사물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게 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러나 플로티누스의 삶은, 내적인 순수성이 어느 정도 성취되었을 때, 곧 관조가 지속적인 것이 되고 봄이 정화되어 마치 빛나는 것처럼 되었을 때는, 정신에 대한 주의가 다른 사람, 세계 그리고 그 자신의 몸에 대한 주의를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가 같은 개방성, 같은 애정 어린 기다림에 의해 정신과 타인들에 대해 동시에 현존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의, 이것이 곧 부드러움이다. 변화된 그 시선은 모든 사물 위에 빛나면서, 신을 드러내는 은총을 인식한다. 선 안에 자리 잡고 있는 플로티누스의 시선은, 말하자면 선으로부터 태어나는 사물들을 본다. 이때는 더 이상 밖도 없고 안도 없고 오직 하나의 빛만 있으며, 영혼은 그것에 대해 부드러움만을 느낀다.
217 우리의 물질적, 심리적 혹은 사회학적 조건화(조건에 따른 인격 형성)를 무시하는 것은 분명히 우리 자신을 신비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비극적인 더 은미한 것이기는 하나─신비화가 있으니, 그것은 인간의 삶이 분석 가능하고, 수학화할 수 있고, 계량화할 수 있고, 표현 가능한 측면들로 환원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메를로-퐁티 철학의 큰 교훈 중 하나는, 그런 과학적 표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지각-다시 말해서, 그 말이 뜻하는 바 그대로 '살아온 경험'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존재(삶)가 표현 불가능한 것에서부터 그 의미를 취한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과학적 언어나 일상적 언어 속까지 있는 표현 불가능한 것의 이러한 부분을 비트겐슈타인이 통찰력 있게 이해했다. 즉, "언어로 표현되는 그것은 우리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표현 불가능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말을 할 수 없이) 드러나는 것이고 신비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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